-A Thief's Diary : 대재앙 -
#23.밀착(密着)
달.
그것은 영롱하리만치 붉은 달이었다. 적어도 시은의 눈에는 영롱하리만치 붉은 달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서글픈 붉은 빛깔의 향수. 그 정점에 서 있는 이라. 왜 하필 그 애가 생각난 걸까?
타닥 차칵
반대쪽 건물에서 줄을 타고 건물 창문으로 뛰어든 유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두 정의 베레타 M2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경계했다. 고요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류뭉치들, 벽을 한 가득 메우고 있는 가지각색의 선반, 그 주변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짐들. 창고였다. 예상했던 경비라든가 감시카메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곧 그가 권총을 벨트 홀더에 매고 바깥을 향해 손짓하자 곧 창문을 통해 엘이 등장했다. 그와 동시에 엠이 입을 열었다.
“클래스는 A-. 여기 잘못 건드려서 이름이라도 났다간 국가 급 현상수배범이 될지도 몰라. 전 층 경비병을 다 합치면 40명 정도. 비번인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100명을 넘고, 건물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경보장치도 최신식이야. 나도 아직 건드려 보지 못한 시스템을 쓰고 있을 정도니까.”
“아직 건드려 보지 못한 시스템이라고요?” “말해도 모르겠지만 HK1.0이란 해킹 방지 툴이 배포되었는데, 이 툴은 IP접속부터 시작해서 프로토콜 검색, 외부 액세스 등등 거의 모든 접속에 대한 강제 감시를 시행해. 그리고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면 중앙 컴퓨터나 사용자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상대 컴퓨터의 액세스를 모두 중지하지. 소스를 보니까 그런 원리로 되어 있는 것 같아.” “음……. 역시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소스까지 본 걸 보면 그것도 곧 깨지겠는데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기본 소스 데이터를 읽었다니 이제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한 차례 낮게 웃어주던 엠은 곧 유에게 대답했다.
“후훗, 하지만 완전히 제어권이 넘어온 게 아니니까 조심해. 대강의 조절은 해 줄 수 있지만 저번과 같은 감시 카메라 조작은 불가능하거든.”
“알았어요. 자, 가자.” 유가 대화를 끊자 여태껏 외계어의 홍수에 잠겨 있던 엘이 재깍 유의 뒤를 따라왔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제부터라도 프로그래밍 공부를 해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화주 그 자식을 박살낸 다음에.
달칵 끼이익
조용한 복도 너머로 창고 문 하나가 조심스레 열렸다. 곧 그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주변을 살핀 유는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재빨리 복도를 뛰어갔다. 그 뒤를 이어 엘도 따라왔으나 유가 복도 끝에 멈춰 서서 넌지시 옆을 바라보자 엘도 그의 옆에 서서 숨을 죽였다. 복도엔 한 경비원이 구식 라이플을 든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내 전자탄으로 처리할까, 아님 네가 가서 묵사발을 만들고 올래?” “맘대로 해.” “그래? 그럼 네가 가서 한 대 때리고 와.” “뭐? 왜애~.” “내 맘대로 하라며. 게다가 넌 몇 백번이고 검을 휘두를 수 있지만 내 전자탄은 개수가 제한되어 있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자 엘은 툴툴거리며 자신의 단도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경비원에게 달려갔다. 경비원은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시란의 단도가 그의 머리에 적중한 뒤였다.
경비가 쓰러지자 라이플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엔 이마 중앙인 건가? 저길 맞아도 사람이 기절할 수 있구나.” 자신이 쓰러뜨렸으니 얼른 오라고 손짓하는 엘을 따르며 유는 저 혼자 중얼거렸다. 뒤통수를 후려갈겼다면 모를까, 이마를 쳐서 기절시킨다? 뭐 어떤 기술 같은 게 있는 거겠지만.
경비를 끌어 아무도 없는 구석에 그를 던져 놓은 뒤 유엘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구를 조심스레 열어 살폈다. 아무도 없고 인기척도 없었지만 천장을 쳐다본 유는 재빨리 몸을 숨겨야 했다. 학교에서도 많이 봐 왔던 것이다. 적외선 감지기. 그것도 유난히 감지 범위가 넓은 모델. 문을 열자마자 깜박이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엠, 여기 적외선 감지기가 있다고 왜 말 안했어요?” “응? 거기 적외선 감지기가 있었니? 아직 시스템을 장악하는 게 덜 끝나서 미처 몰랐어.”
“그럼 다른 길이 있는지 알고 있나요?”
적외선 감지기라는 것은 전방 8m 이내의 모든 온혈 동물을 감지하기 때문에 유난히 까다로운 존재였다. 더군다나 그것에 좁은 비상계단 꼭대기에 있으니, 그 앞에 이중 삼중 테이프를 붙이든가 직접 총으로 파괴하지 않는 한 피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엠의 대답도 그리 밝진 않았다.
“글쎄, 하드 디스크가 있는 3층으로 내려가기 위해선 그 계단을 타는 것 외엔 별 도리가 없는 것 같은데?” “예? 지금 지도를 뒤지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날 못 믿겠다는 거냐? 앙? 이봐, 잘 들어. 비상계단은 너희가 있는 곳과 그 반대쪽, 두 개가 있지만 두 군대 다 적외선 감지기가 달려 있을 게 뻔해. 게다가 엘리베이터 역시 감시카메라가 달려 있을 테고. 물론 경비지도는 없지만 건물의 전기 배선도와 건물 설계도를 봤을 때 이건 거의 기정사실이다 이거야. 알겠냐?” 아하하, 갑자기 말투를 싹 바꾼 엠의 앞에서 유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엘은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변을 살폈다. 어두운 복도, 수많은 문, 그리고 군데군데 있는 저 환풍구는…….
“오빠, 저 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엘이 복도 구석의 조그만 환풍구를 가리키자 유는 그 곳을 바라보았다. 환풍구. 사람 하나가 엉금엉금 기어가기에 딱 좋은 크기였지만, 글쎄. 저게 3층으로 이어져 있으려나?
“밑져야 본전이지. 영차.” 그는 엘의 의견에 따라 야간 식별 장치를 가동시키고 환풍구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꽤 긴 통로였지만 곧 환풍구 끝에 밑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보였고, 유와 엘은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밑으로 향하는 그들의 뒤를 따르는 또 다른 2인조가 있었다.
“제 생각이 맞았죠? 저들은 적외선 감지기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할 거라고요.” 문틈으로 유와 엘의 행동을 지켜보던 산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신참 형사가 입을 열었다.
“정말 환풍구로 향하는군. 그런데 유엘이 들어왔으니 주의하라는 것을 빌딩 경비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을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쫓아서 그들의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같이 사로잡는 게……. 읍, 읍!” “됐어요. 조용히 저만 따라와요.” 수다가 계속될 것 같은 조짐에 미리 형사의 입을 틀어막은 산영은 문을 열고 환풍구로 다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의 목표인 유엘 남매는 어느새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영은 싱긋 웃으며 환풍구를 향해 움직였다. 유엘을 잡을 생각은 아니었다. 화주가 알려준 그들의 정체, 그것을 확인하기 전까진 이대로 이 상황을 지켜볼 심산이었다. 물론 경비들에겐 미리 인공지능 경비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를 바꿔 놓도록 알린 뒤였다. 그 외장 하드디스크 안에는 아마도 고전 게임들만 잔뜩 깔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엘이 그것을 훔치고 나면…….
‘……과연 나타나 줄까?’
산영은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가며 생각했다. 올지 안 올지 미지수지만, 처리반은 희망사항이니까.
곧 환풍구의 끝에 도착한 산영은 가만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 쪽 창문을 열어둘 테니 그 곳으로 와라’라고 지시한 위치는 센트럴 빌딩의 6층 창고. 거의 3층 높이에 가까운 사다리가 있었지만 산영은 유엘이 사라진 사다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뒤를 이어 신참 형사도 엉거주춤 사다리를 밟았다.
3층 환풍구에 내려선 유와 엘은 곧 커다란 방 하나를 만났다. 위아래로 거의 일반 주택 하나 크기의 펜이 돌아가고 있었으며, 각 환풍구와 입구는 구름다리로 이어져 통행은 가능했으나 자칫하다간 팬 아래로 굴러 떨어질 듯한 곳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오빠가 먼저 가.” “응? 아아, 고소공포증이 재발한 건가?” “아, 아니야! 환풍구는 내가 찾았으니 여긴 오빠가 해 보란 뜻이라고!” 아주 가끔 고소공포증 증세를 보이는 엘이 재빨리 둘러대었지만 유는 실실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다 그는 곧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주변을 살폈다. 펜과 펜 사이에 난 환풍구 통로는 가운데에서 네 방향으로 갈라져 있어 잠시 그들을 주저하게 했지만, 이어진 엠의 지시에 그들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곧 그들이 오른쪽 환풍구로 사라지자 산영과 신참 형사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중간에 신참 형사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무시무시한 팬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지만.
“……있어?” “없어.” 환풍구 틈새로 좌우를 둘러보던 유는 조용히 대답하며 천천히 환풍구 뚜껑을 열었다. 재차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경비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유와 엘이 들어온 곳과는 다르게 복도 곳곳에는 불빛과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3층은 이른바 ‘관리층’이어서 오늘 당번 경비들이 3층 여기저기를 점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의 목표인 인공지능 경비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도 이 3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입구가 정 반대쪽이라는 것이 영 맘에 안 들지만.
그들은 좌우를 살피고 곧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자 바로 몸을 움직여 벽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 누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기도 했다. 그 뒤를 이은 산영의 발걸음도 조심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자세는 오히려 당당했다. 이미 이 건물의 주인들에게 말해 놓은 뒤이니 겁낼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상 경비들은 지금 유엘이 들어와 있다는 걸 알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잠깐 기다려. 으음……. 내가 신호하면 뛰는 거야. 하나, 둘, 셋!” 인공지능 컴퓨터가 있는 중앙 관리실 앞으로 유와 엘이 재빨리 뛰어갔다. 두 대의 감시카메라를 무사히 지나치자 그들은 한숨을 내쉬며 중앙 관리실 문을 열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산영과 신참 형사도 문 앞으로 다가가 아주 조용히 문을 열어 조그만 틈새로 안을 살폈다.
중앙 관리실은 제어 컴퓨터가 있는 제어실과 보안 장치가 있는 긴 복도, 그 끝에 인공지능 컴퓨터의 본체가 존재하는 식이었다. 얼핏 봐서는 그냥 이동해도 괜찮을 듯 했지만 본체가 있는 곳의 문을 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제어 컴퓨터를 작동시켜야 했으므로 그들은 컴퓨터에 먼저 다가갔다.
유는 엠이 알려준 대로 제어 컴퓨터의 본체에 랜 카드와 휴대용 통신 모뎀을 연결한 뒤 컴퓨터를 켰다. 켜자마자 보이는 6자리의 암호가 그들을 주저하게 했지만 컴퓨터와 연결된 렌 카드와 모뎀이 작동하기 시작하자 6자리의 암호는 금방 풀렸다. 모뎀을 통해 제어 컴퓨터에 접속한 엠의 솜씨였다. 곧 컴퓨터는 빠르게 중앙 컴퓨터로의 길을 열어놓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오가는 화면, 그리고 엠의 손놀림.
“음……. 오, 됐다. 이제 들어가도 돼.” 엠의 말에 유와 엘은 천천히 복도에 들어섰다. 복도의 길이는 대략 15m.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거리를 향해 그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걸 지켜보던 산영도 슬쩍 문을 밀고 복도 입구 옆에 몸을 기대어 그들을 살폈다. 저 멀리 있는 하드 디스크를 훔치러 가는 그들을 잡을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며 산영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발신기를 꺼냈다. 그리고 방에 몸을 숨기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제 이걸 붙이면 된다. 이걸 붙이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산영이 복도에 발을 들여놓을 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