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수의 미술 접근법 438 - 이발소 그림, 삼각지 그림 그리고 전시장 그림
새봄이다. 이때 즈음이면 대단지 아파트 상가 어느 곳에는 미술품 전시장이 열린다. 인테리어나 집안 장식을 위해 미술품 구매하란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 교과서 크기의 5천원부터 신문 펼친 크기는 30만 원 선이다. 사가는 이 잘 없다. 그 옆에는 온갖 상들이 즐비하다. 찻상에서 제사상 밥상에 이른다. 이런 미술품이 소위 말하는 이발소 그림이다. 간혹 삼각지 그림이라고도 했는데, 그 말을 쓰면 삼각지에서 화랑을 하거나 액자가게를 하는 분들이 화낸다. 그래서 삼각지 그림이라는 말은 잘 안 쓴다. 엄마돼지 젖 먹는 아기돼지 12마리 그 옆에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한자가 적혀있는 그림. 초가집 옆에 물레방아 돌아가고 마당에는 할머니가 고추 말리는 그림. 이런 그림들을 이발소 그림이라고 했다. 당시에 삼각지에서 많이 그려졌다.
그러면, 이발소 그림과 미술가들의 그림을 무엇이 다른가. 가볍고 예술미 없다고들 한다. 싸구려 그림이라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자. 밥로스가 그리던 그림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발견되는 그림들과 인사동 청담동 사간동 삼청동 등의 화랑에서 발견되는 그림과 차이는 무엇일까. 전공자와 비전공자? 아니면 미술협회 회원과 비회원? 그것도 아니면 물감 가격? 지금부터 알아보자.
시각예술의 가장 근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화 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하면 가장먼저 정신을 이야기한다. 그림에서 정신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인의 눈에는 입체감도 없다. 이발소 그림과 화랑그림에 대해 좋고 싫음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이발소 그림은 잘 구매하지 않는다. 화장실에 장식하는 정도다. 이런 류의 미술품은 시각의 재현을 주 목적으로 한다. ‘참 잘 베낀다’는 경외심이 1번이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이념, 생각들을 그리지 않는다. 간혹 시각을 재현하는 미술가들이 화랑에서 전시하기도 한다. 이발소 그림과 차이점이라면 전공했다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최근 미술시장에는 꽃이나 풍경을 생각 없이 재현한 미술품이 거의 사라졌다. 식민시대와 해방 후 이념논쟁 등에 의해 정신을 그리면 반동이었던 시대를 살아온 결과이다. 70년대 우리나라 추상미술이 발달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조금은 있다. 80년대 민중미술을 기점으로 정신의 표현이 자유로워 졌다.
이발소 그림이라고 폄훼할 이유는 없다. 그것 역시 미술품이다. 시각예술의 임무를 위한 기술습득의 가정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꼭 있어야 한다. 정신을 그린다는 것은 시각예술 발생때 부터 시작이다. 옛날 중국의 고개지(346~407)라는 이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이라는 말을 했다. ‘형상으로 정신을 그린다’는 말이다. 이를 전신(傳神)이라했다. 그러다 지금부터 1000년전 쯤의 소식(1036~1101)이라는 사람은 ‘중신사론(重神寫論)’이라 하여 ‘모양을 버려야 의미를 얻는다.’고 했다. 어쩌면 이때부터 형이 없는 추상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빈약한 감정의 미술가는 잡다한 문양을 많이 그려 넣는다. 그것을 감상적으로 바라보면 곧 싫증이 난다. 인생은 연극이다. 연극은 예술이다. 고로 인생은 예술이다는 삼단논법을 버려야 한다. 인생은 예술의 무늬일 뿐이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은 삶의 무늬다. 비오는 풍경이나 밤바다, 기도하는 소녀, 황혼녁의 바닷가, 바다위의 돛단배, 산과 호수가 있는 풍경 등 대다수 사람들이 상상 가능한 이미지는 이미 무늬다. 무늬를 그리는 것과 생각을 시각화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연식만 오래된 미술가님들은 사물의 형을 일그러 뜨린다. 생소한 형식은 최소한 무늬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소한 형식 또한 숙련되면 생소한 정신이 담길 수 있다. 창작의 세계이 입문하는 첫걸음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낯설게 한다고 다 되는 일은 아니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추상의 세계는 없다.
정수화랑(현대미술경영연구소)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4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