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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조광조와 양팽손
이장희 추천 0 조회 53 14.05.16 20: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광조와  양팽손 (1)

         -화순 죽수서원 , 학포당, 서원터


             김세곤 (노동부 법무행정팀장, 前 목포지방노동사무소장)



능주 적려유허지에서 죽수서원을 가다


  실패한 개혁주의자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인 능주 적려유허지를 뒤로하고  이제는 죽수서원으로 간다. 죽수서원은 조광조선생과 그의 시신을 수습했던 친구 학포 양팽손 선생의 신위가 모셔진 곳이다. 차로  10분 정도 가니 죽수서원이라는 도로 표시판이 보인다.  죽수서원 앞에는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라’는 뜻을 지닌 석비이다. 나는 차를 서원 입구에 세운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죽수서원이란 표시가 돌로 만들어져 있다. 홍살문은 능이나 사당, 서원 등의 입구에 세운 것으로 두개의 둥근 기둥을 올리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쭉 박고 가운데에는 태극문양을 새긴 문이다. 이 문에 붉은 칠을 한 것은 잡귀를 쫒는다는 의미이고  홍살문 안에는  숭앙의 대상이 모셔져  있으니 이곳부터는  누구든지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나는 서원 입구부터 바닥에 돌이 깔려진 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간다. 조금 걸어가니 서원이 나온다. 서원 앞에는  안내판이 있다.



  죽수서원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130호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15-3


서원은 중종때 부터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이면서

유명한 인물을 배향하고 제사를 모시는 기능도 겸하였다.

죽수서원은 선조3년(1570)에 사액서원으로 건립되어 문정공 정암 조광조

(1482-1519)를 모셨다. 조광조는 중종14년(1519) 기묘사화로 능성현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다.

인조 8년(1630)에는 혜강공 학포 양팽손(1488-1545)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양팽손은 능성현 출신으로 조광조와 함께

등용되어 강론하였고 그가 세상을 뜨자 제사를 지냈다.

죽수는 능주의 별칭이다. 이 서원은 고종5년(1868)훼철되어 제단만 남았던 것을 1971년 도곡면 월곡리 학포 부조묘 옆에 지었다가 1983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복원하였다.



 죽수서원이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의 신위를 함께 모신 서원이라는 안내문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하여 생각한다. 정암과 학포는 지란지교 사이이다. 학포 양팽손. 그는 조광조 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이다. 이곳 능주 출신으로서 그는 19살에 용인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광조를 처음 만난다. 그리고 스무살에 그는 생원시에 장원을 하고 조광조는 진사시에서 장원급제를 한다. 그 뒤에 둘은 같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고 학포는 29세 때 문과에 급제한다. 현량과에 발탁되어 공조 좌랑, 형조 좌랑, 사관원 정원,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다 홍문관 교리에 재직하던 중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그 때 그는  조광조, 김정 등을 위해 분연히 소두(疏頭·연명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처음 이름을 적은 사람)한 뒤 삭직된다. 이후 양팽손은 고향인 능주로 낙향하여  능주에 유배 온 조광조와 매일 만나 경론을 논하다가 그가 사약을 받고 죽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신을 손수 염해 쌍봉사 부근의 깊은 산골에 가매장한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조광조의 체백을 용인 심곡으로 보낸다. 이후  그는 고향인 쌍봉마을에 학포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여생을 보낸다.


조광조도 생전에 그를 일컬어 “내가 양팽손과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芝草·영지)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고, 그의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직후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한다. 진실로 양팽손은  조광조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지인이다. 학포가 없었다면  조광조의  묘는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신은 아마 들판에 버려졌으리라. 


한편 능성현의 원래 이름은 이릉부리. 백제의 옛 이름으로는 죽수부리(竹樹夫里) 혹은 인부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죽수서원은  ‘능주서원’이라는 뜻으로  남도에서는 순천 옥천서원 다음 두 번째의 사액서원으로서 정암 조광조 선생이 제향된  용인의  심곡서원 보다 80년 먼저 세워졌다. ( 그런데 용인 심곡서원에는  학포의 신위가  1958년에야 모셔졌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이윽고 나는  고경루(高景樓) 라는  글씨가 써진 외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왼편 뜰에  죽수서원 묘정비가 있고, 그 옆에 죽수서원 현판이 붙은  강당이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도 건물이 하나 있다. 

   죽수서원 묘정비는 1989년에 세워진 비이다. 이 비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자세한 내용을 금방 해독하기가 어렵다. 한글세대를 위하여 번역문 안내판이라도 세워 놓았으면 좋겠다. 이윽고 나는 죽수서원의 강당 문을 열어본다. 강당이 꽤 넓다.  강당을 보고나서 돌계단을 오른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다. 내삼문의 현판은 조단문(照丹門)이다. 이 현판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정암 조광조 선생의 절명시를 생각한다.



‘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愛君如愛夫

  憂國如優家

  天日臨下土

  昭昭照丹衷 ‘



 절명시의 마지막 구절인 ‘충심을 밝게 비춘다.’ 는 뜻의 ‘조단(照丹)’. 그 조단문을 지나니 거기에는 천일사(天日祠)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이곳이 바로 문정공과 혜강공을 모시는 사우이다. 그런데 천일사는 문이 잠겨 있다. 창호지 틈으로 사우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신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다시 조단문을 나오면서  죽수서원 맞은 편  뜰을 살펴본다. 뜰 한쪽에 오래된 듯한 비 두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정암조선생학포양선생 죽수서원유지비’ 라는 글씨가 두 줄로 써진 비이고, 또 하나는 ‘죽수서원유지추모비기’라고 시작하는 상당히 많은 글씨가 써진 비이다. 이 두개의 비는 죽수서원의 건립과 훼철의 역사를 말하여 주는 것 같다. 비석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얼른 알아보기가 힘들다. 화순군에서 이 비의 문안을 한글로  번역하면 좋은 사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외삼문을 나와서  보니 거기에는  처음 들어갈 때 보았던 죽수서원복원비가 있다. 아래는 거북이가 받침을 하고 있고 비석의 맨 위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비는 1991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 비 바로 옆에  사당이 또 하나 있다. 호기심이 생겨서 그 곳으로 갔다. 

그곳은 바로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장으로서 왜군을 수 없이 물리치다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숨진 최경회 장군(1532-1593)을 모신 사당인 포충사였다. 이 분이 바로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과 함께 투신한 기생 논개가 사랑한 사람이다. ( 최씨 문중은 최근에  논개를 최경회 후처로   족보에 올리었다 한다.) 포충사도 역시 문이 잠겨 있어 안은 볼 수가 없다.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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