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제는 왕과 왕비를 한 봉분에 안장한 일봉이실(一封二室)의 합장릉 형태이다. 당초 영릉은 부왕 태종의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선 최초의 합장릉으로 조성하였으나, 풍수상의 문제가 제기되어 예종1년(1469년)에 여주로 옮겼다. •원래 영릉에는 소헌왕후(昭憲王后)를 먼저 안장하였다. 소헌왕후가 세종28년(1446년) 승하하자, 세종은 산릉을 헌릉 옆에 조성하게 했다. 세종은 산릉 대상지가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부모 곁에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소헌왕후를 동실(東室)에 안장하고, 서실(西室)은 자신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 영릉 축조는 4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세종이 1450년, 54세로 승하하자, 문종은 묘호를 세종(世宗)이라 하고, 부왕의 유지에 따라 소헌왕후가 안장된 영릉 서실에 합장하였다. •이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치장조(治葬條)]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묘제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때 영릉의 자리에 대한 풍수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서거정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였다. 그리나 예종이 즉위한 1468년에 천정할 땅을 정하고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장을 위해 봉분을 걷어내자 석실 내부에는 물기가 전혀없었고 왕과 왕비의 시산과 수의도 썩지 않고 그대로였다. •영릉은 현재의 위치하면서 광중을 석실 대신 회격(灰隔)으로 하고, 봉분 주위를 둘러싼 병풍석은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두른 단릉 형태의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이는 세조의 유교(遺敎)에 의한 것이다. •舊 영릉에 있던 석실과 잡상, 문무석인, 비석 등의 석물은 그자리에 묻었다. 이 석물들은 1973년 발굴되어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천릉한 이후 영릉의 석물들은 단릉 형식으로 배설되었다.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 두개가 배설되어 합장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봉분을 둘러싼 석수는 석양과 각각 4기씩이다. 망주석은 상계의 혼유석 좌우에 배설하였고, 장명등은 두 개의 혼유석 중앙 앞쪽으로 중계에 설치하였다. 문석인은 중계에, 무석인은 하계에 각각 2기씩 배치하였다. •천릉한 영릉에는 신도비는 없고, 영조21년(1745년)에 표석을 건립하였다. 영릉의 전체적인 배치는 조선 왕조의 기본적인 능체듣 잘 반영하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신륵사를 대대적으로 확장 중수하여 이름을 보은사로 바꾸고 세종과 왕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