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 미정 6
송애숙의 집을 조사한 내용과 김석준과 그가 그 후 조사한 내용을 종합하여 얻은 결론은 그조차 부인하고 싶은 것이었다. 송애숙은 사채업자와 그녀의 딸이 꾸민 연극에 속아 자살했을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모든 정황이 그런 결론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그가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 것은 박지선을 만난 후였다. 박지선은 그녀의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가능성 자체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박지선이 그를 상대로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녀의 정신력이 무상진기의 기세를 이길 정도라는 전제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지선이 송애숙의 죽음과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박지선이 김인문과 김강우 두 형제에게 이용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주차장에서 그가 김강우에게 확인한 것이 그 부분이었다.
박지선이 김강우를 만난 것은 김인문에게 사채를 빌려 쓰기 이 개월 전이었다. 온몸을 고가의 물건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그녀를 강남의 물 좋다는 나이트클럽에서 본 김강우의 작업에 박지선이 넘어간 것이다.
박지선의 집안 사정을 알기 전까지 김강우는 박지선에게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그의 본업은 형인 김인문을 도와 사채를 하는 것이었지만 부업은 외로운 아녀자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제비질이었기 때문이다.
제비의 본질은 공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갈과 형법상의 공갈은 조금 의미가 다르다.
일반인들이 공갈친다고 할 때는 어떤 것을 과장해 협박한다는 뜻이지만 법적으로는 협박을 통해 금품을 뜯어내는 것을 말한다.
제비는 부녀자의 약점을 쥘 때까지는 상대에게 공을 들인다. 제비에게 넘어간 여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과 마음이 녹을 정도로 잘해주는 사내들이 제비다. 하지만 상대 여자가 꼼짝 못할 만한 약점을 쥐게 되면 태도가 돌변한다.
원하는 돈을 얻어내기 위해 여자 집안의 기둥뿌리가 뽑힐 때까지 협박을 하는 것이다.
김강우가 공을 들인 것은 박지선의 집안이 부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본 박지선은 돈을 쓰는 것이나 입고 다니는 것이 평범한 집안의 자식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김강우도 전문가는 못되었다. 그는 박지선의 속을 꿰뚫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박지선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되기까지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도 산전수전 다 겪은 자였는데 두달도 오래 속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박지선의 집안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된 김강우는 분노했다.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는 평범한 여자에게 두 달이나 공을 들인 자신의 노력이 너무 아까웠던것이다.
그는 잔인한 보복을 꿈꾸었다. 본 때를 보여줄 생각이었고, 자신이 공들이느라 들어간 돈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어야했다. 손해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그의 인생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박지선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송애숙이었다.
김강우는 계획을 세우고 김인문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김인문은 그의 계획에 혼쾌히 동의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돈은 모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기 때문이다. 그 신조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다른 사람의 인생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그였다.
그는 신용카드 빚으로 고민하는 박지선에게 사채를 빌려쓰는 것이 어떻느냐고 권유했다. 박지선이 자신의 신용으로는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이 너무 작아 빚을 처리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김강우가 자신이 잘 아는 사채업자에게 좋은 조건으로 돈을 빌릴 수 있다고 하는 말에 금방 넘어갔다. 사채이자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였고, 김강우가 자신이 소개하는 사채업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김강우를 사랑한 것은 진심이었다.
사채를 빌려 카드빚을 갚자 그녀는 해방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한 달이 채 가지 못했다. 김강우가 그렇게 믿을 수 있다고 말했던 김인문이라는 사채업자의 태도는 시간이 지나자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김인문에게 그녀가 빌린 사채의 이자가 너무 높다며 항의하던 김강우가 김인문의 부하들에게 폭행당하는 것도 보아야했다. 그 때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김강우의 제지로 신고하지 못했다. 김강우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워서 그자들의 보복은 경찰의 처벌보다 더 무섭다는 말로 그녀를 겁먹게 했다.
어느 정도 쌀이 익었다는 생각이 든 김인문은 회사에서 퇴근해 김강우와 만나는 그녀를 김강우와 함께 납치했다.
그는 인적이 드문 외딴 집의 지하실에서 그 둘에게 심한 폭행을 가했다. 그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경찰은 소용이 없다는 말로 그녀의 절망을 부추긴 것은 그녀보다 더 절망한
표정으로 옆에 주저앉아 있던 김강우였다.
집에 돌아온 송애숙이 넋을 잃고 앉아있는 박지선을 본 것이 그 날이었다.
김인문과 김강우가 처음부터 송애숙이 자살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몰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하고자 했던 것은 송애숙과 박지선을 알거지로 만들고 둘을 윤락가에 팔아넘기는 것이었다.
그들도 송애숙이 죽었을 때 당황했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경찰의 초동수사도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까지 뜨끔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황이 더 좋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송애숙이 사망하고 난 며칠 후 그녀의 죽음은 사고사로 결론이 났다. 자살할 정황이 나오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채부분에 대해 어떤 정보라도 경찰에 들어갔다면 다른 결론이 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도 경찰에 박지선이 쓴 사채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송애숙도 주변에 딸이 쓴 사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사채를 이야기하면 박지선의 사치스런 습벽과 카드빚 문제까지 말해야하는데 그것은 딸의 앞길을 막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녀가 남에게 말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박지선도 입을 다물었다. 송애숙이 자살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뿐더러 김강우의 적극적인 만류가 그녀의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김강우는 송애숙의 사망으로 사채문제가 불거졌을 때 보험금 지급이 지연될 우려가 있고 공룡과 같은 보험회사와 싸운다면 아주 오랫동안 힘들 거라는 말로 박지선을 설득했던 것이다.
한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김인문과의 통화를 끝낸 김강우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가끔 곁눈질로 한을 보고 있었다. 그 눈길에서 통화 이전보다는 강해진 시선을 느낀 한은 속으로 웃었다. 김강우의 자신감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인문과 유리한 협상을 하려면 기운을 좀 써야 되겠군.'
한은 팔짱을 꼈다. 김인문은 혼자 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일부러 김강우가
사무실에 끌려올 때까지의 상황을 김인문에게 미주알고주알 고하는 것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이 계통에서 김인문정도의 규모로 사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조폭과의 연계는 거의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사채는 카드도 은행대출도 불가능한 사람들이 마지막 방법으로 택하는 것이다.
무일푼에 빚만 잔뜩 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회수할 자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채를 빌리는 사람들은 거의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이라 제 때 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에겐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금회수가 곤란할 때가 많다.
사채를 갚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에게서 채권을 회수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폭력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조폭에게 일을 의뢰하기도 하고 조폭은 아니지만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청부해결사를 쓰기도 한다.
악질적인 사채업자들은 사채를 얻어 쓰려는 사람들에게서 신체 장기의 일부를 팔아서라도 빚을 갚겠다는 신체포기각서를 받기도 한다. 그들 대부분은 재산 압류나 급여압류와 같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채권을 회수하려고 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김인문이 신도철과 관련이 있다면 북악파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설사 그들과 관련이 없다해도 김강우와 사무실에서 대기하던 두 사내를 일방적으로 때려뉘었다는 말을 들은 김인문이 홀몸으로 올 가능성은 없었다.
김인문이 홀몸으로 사무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으로서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김인문의 기세를 꺾어놓아야했기 때문이다. 이 계통에 있는 자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는 셋 중의 한 가지는 반드시 구비하고 있어야 했다. 돈, 권력, 주먹이 그것이었다.
한은 돈도 권력도 가진 것이 없는 사내였다. 그가 가진 것은 주먹뿐이었고 이런 경우에는 그것이 효과 만점인 경우가 더 많았다.
김인문의 기세를 꺾어야 그가 원하는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나갈 수 있었다. 그는 박지선의 아파트를 나서면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김인문과 김강우를 완전히 박지선에게서 떨어뜨리고 입을 다무는 것, 다른 하나는 이 일에 개입하지 않고 송애숙의 편지를 그녀의 죽음을 담당했던 군포경찰서 주정택 형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송애숙이 원한 것은 첫 번째였고, 형사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은 두 번째였다.
그러나 첫 번째는 그가 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송애숙의 부탁은 애절했지만 그것은 한이 살아 온 신념과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송애숙의 죽음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 일이었다. 보험금은 보험금대로 회수될 것이고 박지선에 대해서는 나몰라라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한은 세 번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김인문과의 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자와 대화를 할때 그가 유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상황을 만들어 놓아야했다.
그가 이처럼 복잡하게 일을 하는 이유는 김인문과 김강우에게 법적인 처벌을 묻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자라면 도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형사처벌을 가할 수는 없다.
그들을 처벌한다면 송애숙의 자살에 대해서가 아니라 박지선을 폭행, 협박한 부분에 대해서야 했다. 그러나 김인문과 김강우 형제를 처벌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든 일은 김인문의 부하들이 했기 때문이다. 그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부하들에게 그가 지시했다는 것을 밝혀내야하는 것이다. 그가 오리발을 내밀고 부하들이 맞장구치면 김인문을 처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한이 이 일을 법대로 처리한다면 그의 예상이 십중팔구 맞게 될 것이다.
이런 계통에서 부하 몇 명 들여보내고 후일을 보장해주는 것은 흔한 일이다.
설사 발생 가능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한 후 그들을 형사처벌한다 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가 있었다. 형사처벌과 민사상의 채권채무관계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그들을 형사처벌해도 박지선이 그들에게 빌린 사채의 원금과 이자, 빚은 그대로 남는다는 뜻이다. 지급된 보험금이 회수된다면 그녀는 무슨 방법으로 사채를 갚을 것인가.
'그녀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주길 바랬던 것일까? 경찰에게 이런 부탁을 하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정말 철없는 부녀지간이다.'
한은 죽은 송애숙과 그녀의 딸을 생각하며 나직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박지선이 아무리 어리석고 철이 없어도 지켜주어야 했다. 죽음으로 그녀를 지키고자 했던 송애숙의 부탁인 것이다.
그는 김강우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가져와라."
"예?"
뜬금없는 한의 말에 김강우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심하지만 차갑게 빛나는 한의 시선이 김강우의 멍한 눈과 부딪쳤다.
"여기서 보관한다던 박지선의 통장과 도장."
"........"
김강우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빨리 오지 않는 김인문을 원망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한 구석에 놓여져 있는 대형금고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이성은 저 무식한 사내의 말을 거부하라고 끊임없이 지시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머리를 쥐었던 사내의 큰손을 생각만해도 등줄기엔 식은땀이 가득 차는 것이다.
그는 금고문을 열고 통장과 도장을 꺼내들었다. 금고 안에는 수북히 쌓인 서류와 여러 개의 통장들이 있었다. 돈은 보이지 않았다. 김인문이 퇴근할 때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한은 김강우가 가져온 통장과 도장을 살펴보았다. 통장안에 들어있는 돈은 4억에서 몇십만원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사채를 변제한 나머지 금액은 그들이 아직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한두 달 시간이 더 경과했다면 박지선에게 남은 것은 맨 몸뚱아리뿐이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통장과 도장을 호주머니에 챙겨넣던 한의 시선이 출입문을 향했다. 건물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그의 귀에 천둥소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일곱 명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에 긴장이 스며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 한의 눈썹이 짧게 꿈틀거렸다. 자신감이 넘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 앉아있는 사내가 그들이 자신 있어 하는 주먹에 관해서라면 이 세상 누구에게라도 자신감을 양보하지 않을 사내라는 것을. 그리고 그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내라는 것을.
한은 등을 쇼파에 기댔다. 느긋한 자세였다. 그리고 출입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