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7년 전쟁 끝 무렵
죽음의 바다였던.,노량 해협.
정유재란 최후의 격전장이었다.
1592년(임진년, 선조 25) 조선을 침략.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임진왜란.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임진왜란.
1597년 제2차 침략을.,'정유재란'으로 정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8월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이듬해인 1598년 연말까지 지속된 전쟁이.,정유재란.
일본은 고요제이 천황 연호를 따서.,경장의 역.
왜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명과 화의에 나섰다.
명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화의 교섭.
조선은 화의를 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능률이 많이 나게 개편하고
의병을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 강화.
왜군은 남해안으로 철군하여 축조한 왜성에 주둔.
명(明)과 왜는 서로 자국이 유리한 화의 조건을 주장.
일본군은 명 황녀를 일본 후비(後妃)로 삼을 것,
한반도 남부 4도를 내주고 감합 무역을 부활할 것,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을 명에 요구.
일본군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볼모가 된 조선의 두 왕자.
일본군 측이 조선 왕실에 돌려주었으나
임해군의 두 자녀는 돌려주지 않았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들을 전멸시켰고
일본 육군은 보급로를 탄탄하려고 전라도 점령 후 한양공격.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칠천량 해전 대패.
남해안 재해권을 장악, 일본 육군은 1597년 음 8월 15일.
음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또한, 왜군은 전공을 증명하고자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일본에 보냈고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마구 잡아 포르투칼 노예상에게 매각.
조선인 목을 잘라 가져가려니
부피가 너무 커서 코를 자른 것.
아직도 그때 조선인의 코를 잘라 가져간 일본 도쿄
도요쿠니 신사 앞에는 '조선인 귀무덤' 이총이 있다.
조선인을 죽인 증거로 코를 한되 이상 잘라오면 포상.
조선땅의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죽여야
왜인들이 건너와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왜군은 조선인 10만명을 포로로 끌고 가서.
도자기 굽는 재주나 쓸만한 기술을 가진자는
특기를 살려 일을 시켰고 그 나머지 포로들은
악명 높은 포르투칼 노예 상인들에게 팔았던 것.
'일본군 종군 승려' 케이넨.,'조선일기'기록.
조선인 포로로 잡으려 광분하는 일본군을 묘사.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사람은 새끼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 끌고 간다.
'어버이들은 자식들의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
들도 산도 불지르는데.,혈안이 된 무사들.
마치 아수라장을 방불케하는 비참한 광경.’
'또,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들은
쳐죽여 갈라 놓으니,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된다.
남은 부모자식의 공포와 탄식은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오는 때와 같이 공포와 서러움 속에서 몸을 떤다.
애처롭다. 네 마리 새 어미와 이별하며 둥지를 날아갈 때.
그 심정이 이와 같은 것일까? 떨어지는 모자의 탄식을.,(중략)
포로 조선인들의 공포와 두려움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일본에서의 포로들의 생활 또한 비참.
남원과 전주를 함락한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
후에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
조선 이순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
보급선이 끊겨 일본 육군은 충청도 직산에서 머물렀다.
이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과 일본 육군의 공수가 바뀐다.
'1597년 12월 말~1598년 1월 초'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공격.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일본 육군은 군량이 부족하여 고군분투하였다.
'1598년 9월 말~10월 초'
조명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하여 수군이 이를 받치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여 총공격.
이는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였으나., 왜교성 전투,
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에서 패하였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결국 이를 극비에 부치고
왜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쫓아
함대를 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
왜군은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본국 철수에는 성공.
고니시 유키나가를 위시한 주요 지휘관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하였다는 의미이고
일반 병졸은 철수에 실패한 인원도 많았다.
민간인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
약 18만~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또한, 경작지 중에서 66%가 파괴.
............................................
충무공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최후의 결전.
그 유혼이 깃든 그 거룩한 바다는 여명의 빛에도
물들지 않은채 쟂빛 침묵으로 그날을 대변하는듯.
"한놈도 살려서는 돌려보내지 마라."
태양이 바다에서 치솟아 하늘로 떠오르고나서야
노량만은 붉은 햇살 아래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의 영광도 그러 하였으리라.
마치, 그의 비문 앞에
뒤늦게나마 놓여야 했던
이미 때가 늦었던.,월계관.
영화.,명랑
충무공과 그를 따르던 수군과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었던.,삼천리 금수강산.
그 선조들이 일군 영광이 박동하는.,최후의 바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장군은 불사조가 되어
우리들 영혼 속에 살아있기에
결코, 적에게 알리지 않을 것입니다."
............노량해전...............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격전지였던.,노량.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1차 침입에 이어
1597년 2차 침략 2차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
그해 9월 명량해전 패배 후, 지상전에서도 고전.
그 다음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순천 등지로 집결하며 점차 후퇴.
이 사실을 알게 된.,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사제독 진린이 이끈 연합군과 함께
고금도 수군진영을 떠나 노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어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수행.
왜교(倭橋)에 진을 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공격.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후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간청.
진린은 이를 받아들여 고니시 통신선 1척을 방조.
이순신은 적을 너무 쉽게 놓아주었음을 알고 분노.
이순신은 고니시가 이 통신선을 이용하여
사천(泗川) 등지에 나가 있는 시마쓰와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소오[宗調信]에게 연락하여
조·명 연합군을 협동 공격하며 퇴각할 계획을 간파.
이순신은 조·명 연합함대의 진영을.,재정비
왜군이 쳐들어올 것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과연, 11월 18일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 집결하여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200여 척 조·명 연합수군 밖에 보유 못하였던 이순신은
배 넘는 왜 함대 앞에 굴하지 않고, 전투 진영을 갖추었다.
이순신은 곧 적선 50여 척을 격파후 왜군 200여 명을 사살.
왜군 함대는 이순신 대장선을 포위하여 집중 공격.
이때 진린의 명군 함대가 와서 왜군 함대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왜군 함대가 격파되고나자
왜군은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마지막 도주하는 왜군의 퇴로를 차단.
왜적을 격파하느라 포위된 진린을 구해내기도 했다.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흉탄에 맞고 자신의 죽음이 전쟁과정에 미칠 영향을 염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당부.
노량해전 승리 후에야 그 사실이 알려졌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이외에도 명나라 장수 등자룡.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홍양현감 고득장(高得藏) 등 많은 명장들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퇴로를 봉쇄 당하였던
고니시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거쳐 퇴각하여
시마쓰 군사들과 함께 부산에 집결 후 철수하였다.
노량해전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끝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다하였다.
.................................
남해도.
.
서기 8년에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된.,석탈해.
서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서기 43년부터는 손윗처남 유리 이사금의 대리청정을 맡았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남해왕이 된.,석탈해(BC 19~86).
신라 제4대 국왕(재위: 57년~80년)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뤼는 탈해(脫解)이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후,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왜 동북쪽 1000리에 위치한 티파니국 출생.,석탈해.
그나라 용성국왕과 여왕국 왕녀 사이에서
7개월만에 알로 태어나 버려졌다는.,석탈해.
다파나국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에서는 인도 타밀인 촐라 왕국 출신 설.
그가 캄차카 반도 민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신라 4대 왕으로 듣극할 만큼
신라에 선진 철기문명을 전수한듯.
아울러, 강력한 동아시아 해상무역 세력.
김수로왕이 이끈 가야연맹체.,6국
200여척 함단과의 해전에서는 패전.
그후, 신라 6촌장 구 세력과 연합한듯.
철이 금보다 귀하고 비싸던.,시절.
신라에서는 '마이더스의 손' 석탈해.
하여, 그의 세력을 신라에서 영입한듯.
신라 왕조에 큰 영향을 끼친.,탈해왕.
'탈해왕 양자'.,'신라김씨 시조' 김알지.
김알지의 7대손으로부터 신라왕이 된다.
신라 김씨왕조 출범과 관련이 깊은.,남해도.
..............................남해도..........................................
통일신라 때인 690년(신문왕 10)에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 때 현령을 두었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무인도가 되었다.
조선 태종 때 하동과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세종 때 남해현으로 개칭하고, 고종 때 남해군이 되어.,현재.
동경 127°53′, 북위 34°49′에 위치,
동쪽 창선도까지를 남해도에 통합.
남북 간의 길이는 약 30㎞이고,
동서 간의 길이는 약 26㎞이다.
표주박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남해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355.12㎢, 해안선 길이는 302㎞.
창선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13개 부속도서.,남해군
북쪽은 '노량수도'를 건너 하동군과 사천시에.,인접,
동쪽은 남해해협을 끼고 통영시,
서쪽 여수해만 넘어 전남 여수시.
남쪽은 대한해협에 면하고 있다.
남해도는 소백산 최남단에 위치하며, 산세가 매우 험준.
금산(錦山, 701m)·원산(猿山, 627m)·망운산(望雲山, 785m)
평야가 협소하여 농경 발달이 어렵고, 해안선의 출입이 심하다.
표주박형의 양쪽에 각각 만이 하나씩이 있다.
주변 해역은 연근해 어업의 전진기지로서 역할.
연평균기온은 14.5℃, 1월 평균기온은 2.6℃,
8월 평균기온 25.6℃, 연강수량은 약 1,730㎜.
...............................
................................
2009년 인구.,5만 557명, 세대수 2만 2234 세대.
남해군에는 남해읍을 비롯하여 9개의 면이 있다.
창선도는 창선면이고, 나머지 1읍 8개면이 남해도.
토지 현황은 논 47.72㎢, 밭 31.30㎢, 임야 240.55㎢.
주요 농산물은 쌀·콩·마늘·고구마 등이고, 연안 일대에
김· 굴· 도다리· 광어· 바지락 등의 양식업이 발달하였다.
해안선 출입이 심하여 어항이 많고,
반농반어. 밀감 및 밤나무 밭이 조성.
바다가 얕아서 좋은 산란장을 이루는 까닭에
산란기인 봄과 여름에는 난류성 어족이 많다.
멸치·갈치·고등어·감성돔 등 80%, 나머지 패류.
1973년 6월에 남해대교의 개통으로 하동군과 연결
1980년 6월 창선교로 남해도와 창선도가 이어졌다.
2003년 4월 남해 3.4㎞의 '창선~삼천포대교'가 개통.
남해도는 북쪽과 동쪽이 모두 육지와 연결됨으로써
더는 섬이라 할 수 없는 정도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이로 인해 3, 19, 77 해안일주 국도가 남해도를 연결.
한려해상국립공원 일부로서
남해도 금산 38경은 유명 경승지
충렬사(忠烈祠)·용문사(龍門寺) 등 명승.
남해읍은 남해군의 행정·산업·교통의 중심지.
노량은 해상교통의 중추적 구실을 담당하는 곳,
이순신 장군의 최후 싸움터로서 그가 전사한 노량.
...................................................................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왜군들이 축성한 왜성.
서쪽 순천왜성으로 부터 동쪽 울산왜성까지 축성.
그중 전라도에는 순천왜성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경남,부산,울산에 분포되어 있다.
이순신장군에 밀려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에 축성.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았던 것.
거제,웅천,김해,부산에 축성한 왜성들이 대부분.
............................
.............................
부산 지역에 있는 부산포왜성,자성대왜성,
동래왜성,구포왜성,동삼동왜성,기장왜성 등.
부산포왜성과 자성대왜성을 제외하면
왜성과 왜성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다.
정유재란 당시 축성한 마산왜성,고성왜성,
선진리왜성(사천왜성), 남해왜성, 순천왜성,
양산왜성,울산왜성 등은 간격이 떨어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성한 왜성을 보면
부산에 축성한 왜성들은 직선거리로 멀다.
또 낙동강을 끼고 축성한 구포왜성,호포왜성,
죽도왜성,신답왜성,마사왜성은 거리가 더 멀다.
.............................
.............................
그런데 웅천땅과 거제 북부에 축성한 왜성들은
거리가 가까우며 총 9개의 왜성들이 몰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순신함대가 오는 길목에
왜성을 축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제 땅에 3개의 왜성을 축성하였고
웅천 땅에 6개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웅천은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들이 먼저 오는 지역.
조선의 입장에서는 가장 최전방인 곳이 웅천.
임진왜란 왜군들이 웅천 땅을 점령하고 나서는
이순신함대를 방어하는 가장 최전방이 바로 웅천.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나 왜군의
가장 최전방이 웅천이었던 것이다.
웅천현 좌측 웅천읍성을 중심으로
웅천왜성,자마왜성,명동왜성을 축성.
이곳 왜성 거리가 반경 3km내에 있다.
왜군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곳.,웅천.
그 웅천지역 중 가장 최전방인 곳이 명동왜성.
명동왜성은 소 요시토시에 의해 1593년에 축성.
진해 명동왜성.,삼포마을.
웅포해전이 있었던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음력)
당시 이순신 함대가 하루밤 숙영을 한 곳이 명동왜성 선소.
만약 명동왜성이 축성되었다면 이순신 함대 숙영이 어려웠을 것.
하여, 명동왜성 축성은 1593년 여름 이후로 추정된다.
즉, 왜군은 웅포해전 이후 명동왜성을 축성한듯 하다.
일단 조선군이 공격을 한다면
육지에서는 창원에서 출발하여 웅천.
웅천을 들어서면, 명동왜성이 공격 루트.
이 경우 낮은 산이 가로 막혀 공격이 어렵다.
산중턱 명동왜성은 공격이 쉽지 않을 것이고
인근 '웅천,자마,안골' 왜성 주둔 왜군들이 협공.
울산왜성은 5만 조명연합군 공격에도 난공불락.
왜성 4곳이 뭉쳐있는 웅천지역은 공격이 힘든 여건.
그러나, 수군을 통한 웅천 공격은 육로 공격보다 용이.
육군보다는 수군이 점령하기가 쉬운.,구조.
왜군 함정들을 파괴하는 것은 가능한.,웅천.
그러나, 수군이 명동왜성 진입은 어려운 여건.
그 옆 지성은 선소를 관리하고, 조선수군 방어 용도.
이렇게 본성에서 떨어져 나온 지성의 경우
서생포왜성에도 있고 영등포 왜성에도 있다.
명동왜성의 지성은 본성까지 거리가 약 450m.
이 정도라면 30분 이내 지원이 가능한 여건이다.
조선수군 방어용 지성은 본성에서 지원하는 구조.
.
명동왜성이 있는 곳 앞이.,음지도.
명동왜성의 지성과 본성이 보이고
조선군 진입을 감시하는 석루 & 선소.
선소는 동섬과 음지도에 막혀
일본군 왜선이 몇 척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천혜의 자연조건.
일본군이 정유재란 당시
어떤 목적으로 선소를 만들었고
명동왜성을 축성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건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남해도 남해왜성은 난공불락 요새지.
그 좌우에 순천왜성과 사천왜성이 포진.
앞으로는.,노량해협 '울둘목'의 거센 조류.
남해도 해역은 왜군 함대 총집결지로 최적지.
현재, 복원되어 있는.,순천왜성 & 사천왜성.
육지에 접해 있어 규모는 남해왜성보다 크다.
그러나, 남해왜성은 섬에 있어 방어 용도로 적지.
그리하여, 정유재란 막바지 왜군은
남해왜성에 총 집결하여 후퇴한 것.
남해도.,남해왜성 & 노량.
................남해왜성(南海倭城)..,..................
선조30年(1597) 정유재란 때 왜군 협판안치 등이 축조.
이순신 함대가 오는 길목에 방어 목적으로 왜성을 축성.
정유재란 막바지에 안전하게 퇴각하기 위하여 축성한 왜성.
정유재란 때 남해왜성에 주둔한 무장.,소 요시토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1568년 ~ 1615년 1월 31일)는
'아즈치모모야마시대~ 에도시대 전기' 무장 겸 다이묘.
소(宗) 가문 20대 당주이며
쓰시마 후추 번의.,초대 번주.
이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조선복속 하명.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주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일본과 조선 간 중계무역 요충지.,대마도.
일본과 조선이 화평해야만 중계무역도 가능.
소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이 소시쓰 등은 조선과 교섭에 힘썼다.
덴쇼 18년(1590년) 조선에서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인 조선 첨지중추부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수행무관 황진 등을
복속사로 사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알현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복속한 것으로 알고
조선에 명나라 정복의 선도역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조선사절단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각과 달리,
전국 통일에 대한 축하사절이었고, 이는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축하사절 거짓 요청으로 일본에 내방한 사절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명나라의 책봉국이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에 따를 리 없었다.
궁지에 몰린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대신에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요청.
그러나, 이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조선과의 교섭은 결과적으로 실패.
덴쇼 20년(1592년)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제1대에 속해 일본군 최선봉으로서 싸웠다.
덴쇼 20년(1592년) 음력 4월 12일 소 요시토시는
5,000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 북단 '오우라'를 출항.
부산에 상륙하여 13일 공격을 시작으로, 14일에 동래,
15일에 기장, 좌수영, 16일에 양산,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 26일에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상주에서 격파.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 신립 조선군을 괴멸, 충주를 공략.
또,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흥인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 한성 입성 후, 여러 장수들과 한성회의 개최.
음력 5월 11일에 소 요시토시는 북쪽을 향해 진격해,
18일에 임진강에서 김명원(金命元)등의 조선군을 격파.
27일에 개성 공략, 황해도의 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공략.
평안도로 나아가 음력 6월 8일에
대동강까지 도달, 16일에 평양 공략.
음력 7월 16일,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
평양을 공격해 왔지만 격퇴하고 명군을 추격.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군장수
사유, 천총, 장국충(張國忠), 마세륭 등을 사살했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의 조선군
평양 탈환을 시도하자 이도 격퇴.
분로쿠 2년(1593년) 음력 1월 7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약 4만의 명군과
김명원의 1만명의 조선군을 가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다.
명군이 평양성 성문을 돌파하자
일본군은 북부 구릉지대 진지로 퇴각.
"퇴로를 열테니 성을 양도하라"- 이여송 -
일본군은 이것을 수락하고 남쪽을 향해 철퇴.
하지만, 조명연합군의 추격도 있어 어려운 퇴피.
한성을 목표로 해 진격하는 명군에 대항하며
일본군은 한성 결집 후, 조명연합군을 무찔렀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나라 군사들은 위축되었다.
일본군도 병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화교섭 이후, 부산 주변까지 철퇴.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측의 '강화 담당자'·심유경과 평화교섭.
쌍방은 서로 요구하는 조건과는 달라,
명측 강화 담당자 심유경의 부족한 됨됨이와
이런 기만행위를 동반한 교섭은 아무 성과 없이,
각국에 혼란만 야기시켰고, 평화교섭은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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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 요시토시는 일본 좌군에 속해 참진하였다.
우선 서쪽으로 진격해,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 개시한 4일째에 성을 함락.
다음 전라도 중심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도를 제압.
그후, 겨울을 앞두고 후퇴한후 남해왜성에 머물렀다.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 파견 왜군에게 음력 10월 15일부로 귀국명령이 하달.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창선도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예정.
이때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5제장.
'고니시, 마쓰라, 아리마, 오무라, 고토'
이순신 진린 연합군에 의해 퇴각로 저지.
순천에 갇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본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増),
데라자와 마사시게 등과 순천에 갇힌 일본군 구원 출진.
이때 노량해협에서 매복한 조명 연합수군과 교전.
그 틈을 이용해 고니시 유키나가 등 5 왜장은 탈출.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부산을 거쳐 귀국.
이로써 7년 전쟁은
노량해전으로 종식.
세키가하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따라
'소 요시시게'는서군에 속해 후시미 성 공격에 참진.
당시일본은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병사 후,
세키카 하라 내전에서 대승을 거둔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일본천하통일을 위한 내전이었다.
오쓰 성 공략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소 요시시게'가 가신을 대신 출진시켰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이 승리하였고,
서군 다이묘 대부분 영지몰수, 죽임을 당했다.
특히 서군 소속 다이묘들 중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형에
조리돌림 형벌까지 받았는데
그가 '소 요시토시'의 장인어른.
하지만, 소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평소 임진왜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자신의 행동과 악화된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죄가 사면되어 영지를 보전.
하여,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던 것.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 딸'고니시 마리아와 이혼.
말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조선과의
관계수복 명을 받은.,소 요시토시,
게이초 14년(1609년) 조선과 기유약조,
국교 회복 공적을 인정받은.,대마도 소 가문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로부터 독립한 기관으로
조선과 대마도간 독점적 무역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게이초 20년(1615년) 음력 1월 3일 향년 48세.,운명
대마도주 후계는 장남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이었다.
소 요시토시가 조선과의 전쟁을 회피하려 한 이유는,
무역 이해관계 외에도 쓰시마 섬이 전쟁의 중간기착지.
대마도 번주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반대한 것은 극히 당연.
에도시대 조선과 조약으로 소 가문의 대마도는 번영.
2대 번주 소 요시나리 대에 와서 국서위조가 발각되어
소 가문은 막부로부터 단절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영향을 받아 천주교로 개종.
조선 일본군 사제.,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
"신중한 젊은이로, 지식인에 훌륭한 인격자."로 평가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의.,소 요시토시.
임진왜란 당시 맨 먼저 조선 땅을 밟은 장본인.
그의 이혼을 거론하며 간사하고 음흉한 자로 묘사.
.
"만력 28년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을 끼고 싸워
서해도(西海島)의 대명휘원(大明輝元)을 내치고,
휘원이 친근하게 신임하는 장관 소서행장과
석전삼성 등 8∼9명을 모두 살해하여 죽이고
일본 평정 후,제도를 호령하게 되었다." -(중략) -
선조 163권, 36년(1603년)
6월 9일(갑오) 7번째 기사.
일본에서는 만력(萬曆) 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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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막내 딸'인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 37대 대마도주.,소 다케유키.
'그의 정략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사위이자
부장인 소 요시토시 의 직계 후손이며
작위는 백작이고 영어학자, 시인이며 화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동아시아 지도 속.,일본.
'북부여' 소서노가 주몽을 도와.,고구려를 건국.
그후, 소서노가 '비류, 온조' 두 아들과 백제를 건국.
그후, 일본을 건국하여 삼국을 건국하였다는.,여제 소서노.
'고구려 신라, 백제'.,삼국시대.
제4국이었다는.,한반도의 가야연맹.
신라와 합병 후 가야 유민들이 진출한.,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세웠다는.,발해.
패망 발해 유민들이 진출했다는.,왜.
조선 건국 후
고려 유민들이
건너갔다는.,왜.
고조선 영역 내 민족들이
시대 별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이동을 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듯.
고조선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와 국경을 떠나서 모두 한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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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갔던
4~5만 조선인들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포루투칼 노예상인은 조선인을 어디에 팔았을까?
그당시 일본 규슈에는 나가사키,히라도에 커다란 노예시장.
그당시 서양인들이 그곳에서 노예를 많이 사들였다고 전한다.
'1608년 루벤스 그림 속 조선인 복장을 한 청년.'
1608년 루벤스는 고국 벨기에를 떠나 로마 유학 중.
그렇다면, 당시 로마에서 조선 청년을 만났다는 증거.
1608년, 조선 청년이 어떻게 로마까지 갈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4∼5만 포로.
그들 대부분 규슈로 끌려갔는데, 바로 그 당시 규슈에는
'나가사키, 히라도'에 세계적인 노예시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당시 세계적인 노예시장을 살펴보면
인도 고아, 포르투갈 라고스, 중국 마카오,
그리고, 그무렵 유럽에서 막 발견된 남미 등.
나가사키가 막 세계적인 노예시장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임진왜란 때 끌고 온 포로가 넘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노예상인들은 노예를 사기 위해
대선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돌다가 일본까지 온 것.
유럽의 노예상인에게 팔려, 유럽으로 간.,조선인 소년.
그가 1608년 그린 루벤스
그림 속 주인공이었던 것.
그림 속 주인공은 규슈 어느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갔을까?
당시 규슈 관내 유럽 상인들이 몰려 살던.,히라도 & 나가사키.
그림 속 조선인 소년은 이탈리아 알비 마을에 뿌리를 내렸던 것.
안토니오 꼬레아는 임진왜란 4~5만 포로의 무리 속에 섞여
조선 남해안, 부산, 대마도, 일지섬을 거쳐 사가현 나고야 성.
그리고나서, 나고야 성에서 전리품으로 분리 또는 분류된 증거.
조선인 포로는 자신들을 붙잡아온
일본인 장수를 따라 흩어지게 된 것.
즉, 도공은 최상급 노예로 분류되어
가고시마 성주나 마쓰우라 성주, 혹은
히젠 성주를 따라 그곳으로 갔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유명한 일본 도자기 명인., 심수관.
임진왜란때 가고시마 성주에게 끌려가 그곳에 정착.
오늘날 일본 최고로 칭송 받는.,아리타 도자기.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 이삼평에 의해 시작된 것.
또 '마쓰우라'로 끌려간 도공은 이마리 도자기 원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 도자기를 대표하는.,5 본향.
그 모두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에 의해 시작된 것.
그렇다면, 도공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집안 하인으로 쓰였든지, 아니면 노예시장에 팔린 것.
그러니까, '안토니오 꼬레아'는 노예시장에 끌려나온 것.
그런데, 1608년 그림 속 인물은 정말 조선인 일까?
'이탈리아 피렌체 노예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
그가 쓴 <나의 세계일주기>에 한줄을 써놓은 기록.
자신이 일본에서 노예를 샀는데,
그 중의 하나를 이탈리아 로마까지
데리고 왔고 이름은.,안토니오 꼬레아.
안토니오 꼬레아를 산 곳.,'나가사키'
비록, '안토니오 꼬레아' 하나 밖에 자료는 없지만.
아직도 모르는 수많은 조상들이.,노예로 끌려갔던 것.
이 같이, 앞으로 더 많은 사실을 밝혀내야 하지 않을까?
정유재란때 주둔하였던 일본군들이
남해 일대에 축성하였던.,32곳 왜성.
방어 外 어떤 용도로 쓰인 왜성일까?
.............충무공 죽음에 관한 사료..................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죽었고.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져 다음해 2월 11일 장례
그후 15년이 지난 1614년에 600km 떨어진 곳에 이장.
충무공 전사소식은 11월 23일에 선조에게 보고되는데
이 때는 전쟁이 끝난 후이며 장례비도 국가에서 지급.
장례를 늦출 이유가 없는데도 80일이 지나 치룬 장례.
사후 15년이 지난 후에 이장한 것은 더 더욱 이상하다.
450년전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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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령대첩에서 이순신 장군 사망 직후
그 시신을 안고 방 안으로 바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시신을 모신..'김, 희. 완,' 가족 세 사람만 알뿐.
이순신은 정말 전사한 것일까?
아니면, 어디로 은둔한 것일까?
그당시, 그 죽음을 둘러싼.,논란.
.
'예기치 못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는.,순국론
'노량해전 출정때 스스로 갑옷을 벗었다.'는.,자살론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고 일흔살까지 살았다는.,은둔론.
임진왜란 때 선조는조정 대신들의 뜻에 따라
이순신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형벌을 가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白衣從軍(백의종군) 하라" 명령.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던.,진린.
...........명 황제에게 올린.,진린서신............
명 도독., 진린이 본.,이순신 모습이 담긴 편지.
"황제 폐하!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의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올 수 있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튀어날뿐만 아니라
장수로 지녀야할 성품과 품덕을 지닌 자.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의 화근인 저 오랑케(청)를 견제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 오랑케 땅 모두를 우리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하여
아무 죄 없는 그에 관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이순신에게 백의종군까지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왕에게 충의(忠義)를 보였나이다.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왕은 원균에게 지휘권
'조선통제사' 벼슬을 주었으나
원균이 자신의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함대 전멸후 단 10척만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 수군통제사' 지휘권을 넘겼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척 함대로 수백 왜선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 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난다면
통제사 이순신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과 왕은 그를 해할 것입니다.
황제 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반드시 구명해 주시옵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분명, 목숨 다할 날까지 충을 다 할 것입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북쪽 오랑케(청)를 견제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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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연합작전을 폈던 명나라 장수.
충무공이 전사하자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고 통곡했다.
진린의 손자는 명나라가 망하자 고금도(완도)로 망명
이들 가족은 다시 해남도로 갔는데
현재 그곳의 진씨들은 진린의 후손.
광동 진씨는 수군도독 진린 장군의 후예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멸망.
진린의 손자 영소는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켜
청나라를 섬기지 않고 배를 타고 조선으로 망명.
영소는 진린이 싸웠던 고금도(완도)를 찾아 칩거하다가
해남으로 와서 결혼해 아들 석문(碩文)을 낳고 정착한다.
진린 장군의 증손자인 석문은 여러 곳을 떠돌다
34세 되던 무렵에 황조리에 터를 잡고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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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사신 '운덕'이 본.,충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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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 속으로 거닐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 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 나이는 15세더라.
..10살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아이 포로를 딱히 여겨 별도로 감싸준 것..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5년이 지났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에게도 책을 읽어주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어찌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한 아버지와 그 아들로 보였으니..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