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어디다 붙여야되는지 잘 모르겠음....ㅎ
닉네임 Converse High님 감사합니다♥
석찌의 삶이 조금 달라졌다.
모두들 잘 알다시피 석진의 일상은 단순하고 단조로웠다. 석진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이폰으로 아침뉴스를 챙겨보면서 밥상을 차리고 나서 날 배웅하고, 노트북으로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 따위를 돌려보곤 했다. 그러다가 피곤해지거나 졸리면 햄스터로 뿅! 하고 변신해서 핑크우리에서 낮잠을 즐겼고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 이런 행동패턴이 반복되곤 했다. 남준이의 증언에 따르면 석진은 무려 10년 가까이를 이렇게 살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석진은 이제 더이상 그런식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한순간에 그의 일상이 뒤바뀌어 버렸다.
"뭐, 뭐야.....? EBS? 너 인강들어??"
아파죽겠는 허리께를 붙잡고 밍기적밍기적 하교를 하면 석진은 집에서 갖고 왔다는 핫핑크색 노트북을 열심히 보며 공책에 무언가를 받아적고 있다. 안경까지 쓰고 열심히 뭘 적길래 보니까 EBS 영어강의다! 헐. 김석진이 공부? 지금 공부하는거야?! 놀라서 처다보니까 민망한건지 입을 삐죽 내민다.
"나도 알아. 이거 사실 고등학교 수준이거든. EBS는 무료더라고."
"아니 근데 왜 갑자기 영어공부를 해? 너 무슨 시험치게?"
"알아보니까 토익을 취업 때문에 많이 치던데 나도 그거나 할까봐. 그런데 일단은 아는게 너무 없어서 다시 기초부터 쌓는 중이야."
"너 취업하게?!?!?!"
"그런게 아니라-."
석진이 안경을 고쳐 올려쓰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냥. 앞으로 살려면 영어자격증 하나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이 뿐만이 아니다. 석진은 어느 순간부터 매일같이 챙겨보던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대신 아이폰으로 경제지나 주식 관련쪽 기사를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날은 처음보는 까만색 노트북으로 뭘 열심히 하고 있길래 들여다보니까 화면에 요상한 그래프가 막 어지럽게 떠있었다.
"주식이야."
물어보기도 전에 석진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그는 담배를 끊겠다며 먹기 시작한 츄파츕스 막대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심각하게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근차근 해나가는 중인데 아무래도 요즘 경기가 안좋다보니까..... 이 길은 좀 위험하려나. 돈을 어떻게 해야 많이 불릴 수 있지?"
"아니 너.... 매달 집에서 생활비 보내온다며? 어머님도 보내주신다고 하셨고. 돈 필요한 일 있어?"
"집에서 오는거 내 쪽에서 끊어버린지 꽤 됐어. 엄...마.... 제안도 내가 거절해버렸고."
'엄마'라는 친근한 단어가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지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며칠 전에는 어머님과 통화도 하길래 사이가 많이 좋아졌나 했더니 그것도 아닌가보다. 하기야 15년을 미워하고 원망해왔는데 하루아침만에 좋아질리 없지.
"주인, 대한민국에서 제일 마음 편한 직업이 강남에 건물하나 두고 건물세 받으면서 사는 건물주래."
"? 설마 그래서 주식을 하는거라고? 돈모아서 건물살려고? 야 울엄마가 그랬는데 주식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랬어."
"당장은 안되겠지만 그래도 이미 많이 모아놨어. 봐둔 곳도 몇군데 있고. 이미 한 집 찜해두긴 했는데 그 아파트는 아직 짓는 중인지라. 완공이 후년이야."
"아파트 분양을 받겠다고?"
"어..... 그리고 주인, 너 면허땄었다고 그랬지. 그거 많이 어려워?"
석진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면서 나에게 노트북을 돌려 보여준다. 어느새 그래프 대신 색색깔의 운전면허 필기시험 기출문제집들이 차지하고 있다.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서..... 어떤 문제집 할까?"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니까 큼큼거리면서 얼른 대답이나 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노트북 화면을 쿡쿡 찔러보인다.
석진의 버킷리스트 항목 가운데에 "면허 따서 고속도로 미친듯이 달려보기"가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안 일이다. 무려 별표가 다섯개나 쳐진 항목으로 말이다.
[방탄소년단/석진] 방가방가 김햄찌
그날 온 집안이 난리가 났었다.
처음에는 내가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어서 좀 민망했다. 바지춤을 부여잡고 화장실에 불난 사람마냥 헐레벌떡 뛰쳐나와서 나 M이 생겼어!! 라고 소리를 질러주는데 남준이가 사온 쿠키를 우적거리던 석진과 커피를 홀짝거리던 민윤기는 나를 무슨 비오는날 밖을 뛰어댕기는 머리에 꽃단 여자 보듯 봤다. 답답해서 그냥 바지를 내려 보여주려니까 그제야 기겁을 한다.
"주, 주, 주, 주인!!! 뭐하는거야!!!! 왜이래 갑자기!!!!!"
"아 M이 생겼다고!!!! 못 믿겠어?! 나 여기, 여기 치골에!!!!!"
"... 뭐? 잠깐만. 뭐라고??"
나중에 들은 바로는 내가 애미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소리를 질러대서 자기들한테 느닷없이 욕하는줄 알았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민윤기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허얘진 얼굴로 손수 내 바지로 손을 뻗는데, 이번에는 김석진이 시뻘개진 얼굴로 내 앞을 막고 선다.
"야이씨!!! 지금 어디다가 손을!!!!! 후. 일단 진정하고. 일단 주인, 일단 나한테만 보여줘봐."
"..... 얘가 그러니까 뭔가 굉장히 수치스러운데."
"뭘 형한테만 보여줘!! 우리가 봐야지!! 나도 저주걸린 몸이야 형!!!"
"그래. 일단은 다같이 봐봐. 여기-."
"미쳤냐?! 어디 외간남자한테 함부로 막!!!"
"야 너도 외간남자지 그렇게 따지면!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아 안돼안돼!!! 민윤기는 안돼!!!! 아니 다 안돼!!!! 나 빼고 다 안돼!!!!!"
그렇게 한참 셋이서 목청을 높이다가 결국 내가 그 'M자'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기로 이 동물들과 합의를 봤다. 다시 손을 덜덜 떨어가며 사진을 찍을 때 깨달은건데,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이 부위가 남에게 막 보여주기엔 얼마나 야시꾸리하고 민망한 곳인지.
어쨌든 사진을 본 민윤기와 김석진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시발 진짜잖아!!!!!!! 말도 안돼!!!!!!!!!!! 집주인 네가 드디어 해냈구나!!!!!!!!!!"
사람 마음이 생각대로 쉽게 되는거 아니라며 내가 열쇠일리 없다고 일말의 가능성조차 부정하던 민윤기는 손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와락 안았고,
".... 아아아아아아아악!!!!!!!!!"
김석진은 내 치골사진이 담긴 핸드폰을 뚫어져라 처다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빼애액 소리를 지르더니.
뿅!
"0△0"
놀라움과 환희, 감격, 기쁨 등등이 가득 들어찬 그 표정 그대로 햄스터로 변해서 핸드폰과 함께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솔직히 징표 보고 조금이라도 운 사람은 나 뿐인 것 같아서 눈물났다는 말도 못하고, 마치 월드컵 결승전에서 역전골을 넣은 것과 같았던 그 자리에서 또 울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남준이가 다짜고짜 석진에게 달려들어 엉엉 우는걸 보고 나도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 살았어...... 형 이제 살았다고....."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석진은 자신을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남준이의 등을 말없이 쓸어내려주다가 다시 뿅! 하고 햄스터로 변하고 말았다. 아마 꾹 참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서 그걸 못 이기고 변한 것 같았다. 내게서 치골사진을 받아서 본 남준이는 아예 통곡을 하기 시작했고 그걸 시작으로 결국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햄찌 또한 바닥에 웅크려서는 그 작은 몸을 연신 들썩거렸고 내가 휴지곽까지 들면서 남준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운건 당연지사였다.
"아 무슨 초상났냐! 좋은날에 울고 지랄들이야."
밖에서 술과 안주거리, 먹을거리를 양손 한가득 잔뜩 사들고 들어온 민윤기마저 우리를 보고 몰래 눈가를 훔쳤다.
누구도 의견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곧바로 파티가 시작되었다. 석진이 내 주정 때문에 분노하여 내렸던 금주령은 아주 자연스럽게 풀렸다. 아무도 이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금주령을 선포했던 김석진이 직접 부엌에서 술 안주를 만들어서 조달하기에 이르렀다. 모두들 화기애애하고 아직도 어딘가 물기어린 분위기에서 잔을 부딪혔다.
"야 이제 윤기형만 풀리면 정말로 해피엔딩인데!! 형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에이ㅁ,"
"시끄러. 그럴 일 없으니까."
"야. 사람일은 아무도 몰라. 너 맨날 나한테 징표따위 생길 일 없을거라고 못박았잖아."
"..... 그래도 걘 아냐. 걔는-."
"오빠♡ 나 왔어요♡"
"뭐야 시발!!!!!! 쟤 누가 부른거야!!!!!!!!"
"짜잔♡ 프레젠또♡"
"너, 너 그 술들은 뭐야!!!! 미성년자가 무슨....!!!!!!"
다들 적당히 기분좋게 취해서 거의 파장이던 파티는 어디서 쓸어온 것 같은 양주를 바리바리 싸들고 현관문을 벌컥 열면서 민윤기를 찾는 래미 덕분에 다시 시작되었고, 석진은 래미에게서 양주를 받아들고 자연스럽게 폭탄주를 말기 시작했다.
그렇게 파티는 밤새 지속되었다. 그동안 래미가 물을 마시는 척하고 민윤기 몰래 김석진이 말아놓은 폭탄주를 비롯해서 남아있던 모든 술들을 홀짝이다가 결국 걸려서 잔뜩 혼났고, 남준이가 출출하니 팬케잌을 만들어먹겠답시고 후라이팬을 달구다가 부엌에 불을 낼 뻔하고, 김석진이 취한 나머지 젓가락으로 소맥을 떠마시려다가 제뜻대로 되지 않아 찡찡거린 일 빼고는 별 일 없었다. 나중에는 다들 아예 방바닥에 뻗어버렸다. 사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편이라는 민윤기는 이미 고양이로 변해서 낡은 방석 위에 널부러졌고, 미성년자인 래미는 오히려 오래 버티다가 결국 알코올을 이기지 못하고 방바닥에 쭈그린채 잠이 들어버렸다.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 사실 마실 수 없었다. 징표를 발견한 이후, 통증은 꾸준히 나를 괴롭혔다. 치골을 포함해서 오른쪽 허리와 배 전체가 망치로 두드려대는 것마냥 얼얼하게 아프고 화끈해서 애초에 술이고 뭐고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김석진이 내가 술을 마시려는 족족 맥주인지 소맥인지 검사한답시고 모조리 가로채서 마셔버린 탓도 컸다.
그래서 아까 저 쥐자식이 드디어 정말 '쥐'로 변해버렸었지. 어느새 협탁 위에서 갖다놓은 분홍색 수면양말 안으로 몸을 3분의 1쯤 구겨넣고 코까지 골면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햄찌를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조심스럽게 몸을 마저 양말 안으로 넣어주었다. 대자로 뻗어서 잠깐 뒤척이던 햄찌가 다시 도롱도롱 코를 곤다. 아마 저 보송보송한 털이 양주냄새에 쩔어있겠지. 그래도 모찌스럽고 귀여운 모양새에 피식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털을 쓰다듬어주었다. 살면서 햄스터가 취해서 코를 고는걸 볼 수 있을 줄이야. 그래도 오늘은 그럴만한 날이니까.
이제는 계속 함께 할 수 있어. 앞으로도 쭈욱.
"전 사실 수의사가 꿈은 아니었어여."
나 빼고 모두들 잠들어서 조용하던 집안에 느닷없이 약간 혀꼬인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잠든 줄 알았던 남준이가 벽에 기대 앉아서 허공을 향해 연신 눈을 꿈벅이고 있었다. 아까 내일 집에 일이 있어서 대리를 불러서라도 집에 가야겠다고 하더니 술기운을 깨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집이 좁지만 않았으면 여기서 재웠을텐데 이미 동물 둘이랑 여자 하나까지 모텔방 잡듯 자취방 여기저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준이가 약간 꼬인 혀로 말을 이었다.
"딱히 꿈이 있는건 아니었는데 수의사는 아니었단말이져. 근데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랬어요. 내가 의사가 되면 석진이 형을 고칠 수 있겠지. 그깟 저주, 비과학적인 얘기니까."
"......"
"그렇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져. 햄스터는 너무 쪼끄맣고 연약해서 마사지도 못해주구. 그냥..... 내가 처음부터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구여."
"......"
"그래도 뭐라도 도울 수 있을까 해서 간게 수의대였는데, 저 형이 한 3년 전인가, 저한테 그랬어요. 나 때문에 네 미래를 함부로 결정하지 말라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그 말 듣고 많이 울었죠. 그리고 바로 신검받아서 입대했어요. 난 착한 동생이니까."
부엌에서 시원한 물 한 컵을 떠다가 남준이에게 건네주었다. 주욱 들이킨 남준이가 크으- 소리를 내며 도리질을 쳤다. 이제 좀 술이 깬건지 발음이 차분해졌다.
"사실 의대생이랑 수의대생들은 학부과정을 다 마치고 군의관으로 가거나- 뭐 하여간 일반 남자애들처럼 군대를 육군현역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어요. 제가 일부러 현역으로 다녀온건 수의대를 자퇴하고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예요. 그것 때문에 우진이 형이 절 경계하기도 했었죠. 정작 저는 어느 길로 가야할지 아직도 결정하지는 못했지만..... 어..... 아버지는 미국대학으로 진학해서 경영배우라고 난리시고..... 뭐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있긴해요. 근데 거기에 재능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누나도 알다시피, 요즘 세상은 하고싶어서 했다고 먹고 사는 일까지 보장되진 않으니까요. 저같은 재벌 3세가 하기엔 너무 건방진 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미래를 고민하게 되는건 똑같아요."
"원래 하고 싶은건 뭐였는데?"
"춤이요."
"......"
"이래뵈도 뭐, 재능이 없는건 아니라는 소린 들어봤어요."
아냐.... 그건 아닌거같아...... 남준아 미안하지만 딱히 근거는 없는데 넌 왠지 춤을 추면 이족보행 로봇처럼 보일 것 같아......
"초딩 때는 석진이 형이랑 막 댄스그룹 결성하자고 그랬었는데. 근데 그 형이 춤을 너무너무 못춰서 관뒀어요. 저주 탓도 있었지만."
"......"
"어쨌거나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누나가 구한건 석진이형뿐만이 아니라는 거."
남준이가 핸드폰을 한번 확인하고서는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어쩌면 햄스터로 변하는 사람, 사람으로 변하는 햄스터가 무섭고 끔찍했을 수도 있는데..... 기꺼이 거두어주고, 같이 살게 해주고, 친구처럼 대해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
"다 감사합니다. 전부 다요"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어디선가 담요를 물고오는 하얀고양이를 발견하고는 입을 열지 못했다. 남준이가 비틀거리며 신발을 신는 동안, 고양이는 낑낑거리며 쭈그리고 잠든 래미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곤히 잠든 래미의 옆에 다시 웅크리고 앉았다.
남준이를 배웅해주고 집에 오자마자 보인건 아까와 달리 사람으로 변해서 술상을 치우고 있는 민윤기다. 잠든 햄찌가 들어있는 분홍색 수면양말은 협탁 위에 안전하게 올려두었고, 바닥에서 자던 래미는 내 침대 위로 옮겨졌다. 방바닥 여기저기 널려있는 종이컵들과 술병들을 치우다가도 뒤에서 래미가 끙 소리를 내며 뒤척이자 모든 것을 멈추고 침대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팔 아래까지 내려간 담요을 제대로 덮어주고 헤 벌려져 있는 입까지 닫아준다음 조용히 어꺠를 토닥여준다. 그러자 래미는 이내 얌전해져서 죽은듯이 소리도 내지않고 잠들어버렸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생각해봤는데."
".....?"
"혹시 래미가 네 '열쇠'일 수도 있지않-."
"닥쳐. 시끄러워. 그럴 일 없어."
뭐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대답하냐.... 사람 상처받게......
어딘지 잔뜩 얻어맞은 기분으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용감하게 말을 꺼냈다.
"아니 야, 생각해봐. 아무리 봐도 래미가 딱 그 조건에 맞아떨어져. 넌 모르겠지만 사실 저번에 래미가 너한테 혼났다고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데. 걔 진짜 너 많이 좋아해. 상상 이상일걸."
"집주인. 너는 내가 진짜로 하나도 모르는줄 아냐."
"..... 뭐야. 그럼 진짜로......?"
"알지만 모르는척 하는거야. 그리고 '열쇠'는 더더욱 아니야."
민윤기가 다시 일어서서 술병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나도 도우려다가 갑자기 훅 치고들어오는 통증에 숨을 들이키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윤기는 상 위의 남은 음식들을 치우면서 말을 계속했다.
"일단 쟤는 징표가 없어. 그럴 기미도 없고."
"그걸 어떻게 알아. 숨기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
"쟤는 자기한테 무슨 일있으면 카톡으로든 전화로든 이메일로든 나한테 다 털어놓는 애야. 내가 모를리도 없고, 쟤가 나한테 얘기 안할리도 없고."
"너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니야? 네가 알고있는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18년을 봤어."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검은색 비닐봉투를 꽉 묶던 민윤기의 얼굴이 갑자기 쓸쓸해진다. 마치, 내게 모든 진실을 알려주던 그날밤 부엌에서처럼.
"막 태어나서 꼬물거리는 것부터 유치원 학예회, 초등학교 중학교 입학식 졸업식까지 내가 다 갔어. 단순히 노는 것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걸 나랑 같이 했지."
"......"
"한마디로 나한테 춘녀는 친여동생같은 애야. 좀.... 또라이 스토커같은 짓을 하긴하지만, 그렇다해도 미워할 수가 없어. 아직도 아기 때 모습이 눈에 선하니까."
"......"
"내가 쟤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진다는건 나한텐 거의 근친상간이나 다름없는 일이야. 뭣보다 내 처지를 봐. 내년이면 반오십인데 검정고시로 겨우 고등학교 졸업하고 무직에다 하루가 멀다하고 거리를 돌아다니지. 당장 7개월 후에는 사라질 몸이고."
"......"
"쟤한테는, 좀 더 젊고 똑똑하고 자상한 놈이 필요해. 청춘건설을 물려받아 경영을 해도 흠이 없는 놈. 나같은 괴팍한 시한부 망나니말고."
봉투를 들고 일어선 민윤기가 한숨같이 말을 뱉는다.
"나는 절대로 래미에게 감정을 가질 수 없어. 아니 가져선 안돼. 그건 내 스스로가 용납못해."
부엌으로 쌩하니 가버리는 마른 뒷모습을 처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몸을 일으켜서 어기적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설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채 민윤기와 함께 영국행을 계획하고 있는 - 이라고 쓰고 납치라고 읽어야 맞지만 - 래미를 생각하면 민윤기의 행동은 지극히 이기적이었다. 게다가 래미가 자길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
나는 그럴 자격이 없었지만 래미는 자격이 있었다. 진실을 알고 슬퍼할 자격이.
"네가 그랬잖아. 사람 마음은 생각대로 되지않아."
식탁 의자에 끙차하고 앉았다. 나를 힐끔 돌아본 민윤기가 다시 방으로 향하더니 접시들을 들고 나온다. 여느 때와 달리 나보고 넌 왜 일안하고 노냐는 식으로 채근하지 않는걸 보니까 이미 내가 얼마나 아픈건지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나 눈치가 빠르면서 왜 자길 좋아해주는 여자 마음은 헤아리질 못하는 걸까.
"내가 보기엔 너도-."
"아니야." 아니어야해.
"하지만 민윤기. 가장 중요한건 마음이야. 너도 잘 알잖아. 그걸 나한테 말해준 사람이 누군데."
"현실 또한 무시할 수 없지. 그리고 우린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어."
".... 래미는 자격이 있어. 모든걸 알려줘야해. 그게 널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도리야."
민윤기가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걔는 스스로 칼로 옆구리를 후벼파서라도 내 징표와 똑같은 문신을 새겨두고 내가 네 열쇠다- 라고 박박 우길 애야."
"그게 아니라면?"
"아니면 날 따라 죽겠다고 한강물에라도 뛰어들겠지."
"민윤기."
"아니면..... 많이 울겠지. 지금보다 더더욱 많이."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은 민윤기가 반쯤 열려있는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싫어."
"......"
"아직 어리니까, 훗날 풋풋했던 감정 정도로 남을 수 있을거야. 하지만 다 알아버린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원망할거야.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걔는 너처럼 혼자 조용히 삭히려고 들지 않아, 집주인. 춘녀는 모든게 서툰 아이야. 자기자신을 괴롭히는 방법조차 극단적으로 갈 수 있어. 난 그런걸 원하지 않아. 쟤는 그냥.....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거야."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식탁을 가운데에 두고 앉아있었다. 민윤기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담배를 찾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쪽은 신경쓰지말고, 잘해 집주인. 징표가 나타났다는건 너랑 형이 비슷하게나마 같은 마음이라는거겠지. "
"......"
"그리고 3개월이면 징표가 다 나타나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생각해. 충분하다고 봐. 너네 둘은 이제 정말 행복할 일만 남았어."
"그렇게 말하니까 너는 아닌 것 같잖아."
"사실이지 뭐. 그리고 난 아마 내일 아침에 여기 없을거야. 김춘녀가 오늘처럼 저렇게 왔다는건 이번엔 작정하고 날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 이거거든. 안된다면 양주를 담아온 봉지 안에 우겨서라도 날 데려가겠지."
이내 라이터까지 손에 넣은 민윤기가 한대 태우고 오겠다는 듯 담배갑을 흔들며 현관쪽으로 걸어갔다. 지금 당장 떠나는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근데 여기 계속 살아도 괜찮아!"
"......"
"햄스터 한마리에 고양이 한마리 더 얹는다고 집이 좁아진건 아니었으니까......"
내 외침에 날 쳐다보던 민윤기가 코웃음을 친다.
"됐거든. 난 남의 러브하우스에 남아있기 싫어."
"야, 러브하우스는 무슨-."
"고양이 말고, 네 햄스터를 많이 예뻐해. 저번 일 겪고도 몰라? 저 형 질투 장난아니야."
슬리퍼를 발에 꿰차면서 민윤기가 말했다.
"내가 저런 사람들 잘 알거든. 일단 김춘녀가 그래."
"......"
"빈말 아니다. 너 앞으로 형한테 잘해야돼. 안그러면 괜한 오해사서 저 형 엄청 삐질걸."
"춘- 아니 래미도 그래?"
"김춘녀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내일 보면 알아."
그리고 족집게무당 민윤기선생의 말대로, 다음날 아침 느지막히 눈을 떴을 때 민윤기와 래미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있었다. 식탁 위의 단 한 장의 쪽지만 남긴채.
「 내꺼 찾아감.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는 볼 일 없기를. - 윤기부인 」
그렇게 아니라고 수없이 해명했건만, 래미는 여전히 나와 민윤기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했었나보다.
또 달라진 것이 있다면 김석진이 햄스터로 변하는 빈도수가 확 늘어났다는 거다. 자유자재로 조절하면서 원하는 때에 햄스터로 변했던 예전과 달리 석진은 시도 때도 없이 뿅뿅 햄스터로 변했다.
"야 김석진아, 혹시-. 어우씨 깜짝이야!!"
예를 들자면 바로 이렇게 말이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내 옆에서 견과류 통을 들고 냠냠 먹어대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는 견과류 통 안에 떨어져있다. 하마터면 땅콩 대신 햄스터를 집어 먹을 뻔 했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럽게 햄스터를 꺼내주자 햄찌가 초롱초롱한 까만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ㅇ▽ㅇ"
그러니까 이 표정은- 매우 기쁘다, 정도다.
느닷없이 변신을 할 때는 이렇게 햄찌 주제에 바보멍청이같은 표정을 짓고 있거나 떨어진 그대로 몸을 뒹굴뒹굴거리며 즐거움과 행복을 잔뜩 표출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요즘 김석진이 햄스터로 변해버리는 이유는 바로 '기뻐서' 라는 거다.
내가 저의 '열쇠'라는게 기뻐서.
3개월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아이고 우리 햄찌자식, 이런 곳에 떨어지기나하고. 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
꺼내놓고 보니 그새 온몸에 견과류 가루가 잔뜩 묻었다. 때마침 통증이 심하지 않길래 얼른 털어주려고 느긋하게 앉아있던 침대 위에서 일어나서 거의 쓰지않는 메이크업용 브러쉬를 찾았다. 그러나 그걸 찾고 돌아서기도 전에 석진이 내 뒤를 덮쳐온다.
"아 깜짝이야!!! 야 쫌!!!!!"
"주인 주인~"
"아 왜!!! 너는 말 좀 하고- 가 아니라 너 옷!!! 너 옷은!!!!!"
"조용히해. 너만 뒤로 안돌면 완벽해."
"완벽은 무슨, 이 변태야!!!!!"
"사실 이불로 두르고 있어서 봐도 괜찮아."
"아니 그래도 딱히 보고 싶지는- 아 쫌!! 매달리지 좀 마!!"
그러거나 말거나 이 덩치 산만한 햄찌는 실실 거리면서 내 등 뒤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머리끄댕이라도 잡으려고 어깨 뒤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움켜쥐는데 손에 묻어나오는 견과류 가루를 보고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견과류 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내 햄스터맞네. 이 변태 쥐자식.
"주인아."
"왜."
"나 이제 너 없으면 못산다. 알지?"
"하 제발.... 신이시여 왜 이 가련한 햄찌에게 드라마시청 따위의 취미생활을 내려준겁니까."
"진짜야. 나 너 없으면 죽어."
갑자기 진지해지는 목소리 톤에, 그리고 따지고 보면 맞는 이야기에 나는 한탄을 멈추었다.
열쇠가 죽으면 저주받은 반인반수는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구아나라는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다행이야. 너 조금이라도 다치면 내가 다 알 수 있으니까. 그 여자가 완전 못되진 않았나봐. "
"그럴 일 없으니까 엄한 소리 그만해. 말이 씨가 된단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이라도 학교 때려칠래?"
"쥐 주제에 또 개소리 시작하네. 나 막학기라고 김석진아. 가뜩이나 하반기공채도 다 광탈삘이어서 졸업유예하게 생겼구만. 네 달만 지나면 네 저주도 풀리고 나도 계속 집에 있게 생겼으니 보채지 말렴."
"불안해. 네가 내 옆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내 어깨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면서 아이처럼 꿍얼거리는 철없는 석찌의 머리채를 정말 잡아당길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불안할만하지. 내 목숨에는 나만이 아니라 김석진의 인생까지 걸려있으니까.
그래도 이제 별 일 없을거야.
3개월만 있으면 다 끝나고 완전히 해피엔딩일테니까.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주에 걸렸고 평범하지 못한 사람이라지만 김석진도, 민윤기도, 그리고 똑똑한 남준이까지도. 아무도 몰랐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
안녕하세요 레몬마카롱입니다!!!!!!
늦어서!!!!!! 스미마셍!!!!!!!!! 제가 양꼬치에 칭따오를 한잔 하느라!!!!!! (진짜임)
근데 양고기 생각보다.... 냄새는 좀 있긴한데 뭐 못먹을 정도는 아니더라구요.
근데 그렇다고 찾아먹을 맛까지는 또..... 민윤기랑 전정국은 이걸 왜 찾아먹을 정도로 좋아하는거지.
하지만 칭따오는 최고였습니다 헤헤 칭따오 이번에 처음먹어봤는데 앞으로 제 최애 술이 될 것 같은 예감이....♡
아 속에서 아직도 양고기 냄새나 꾸엑
근데 청빌 왜이렇게 정적이져.... 뭐 저도 요즘 너무바빠서 잘 못들어오고 오더라도 눈팅만하고 그러긴 했지만ㅠㅠ
서점에 이틀동안이나 새글이 없었다니 덜덜 근데 내가 할 소리는 또 아니고....ㅎ
32-2는 이번주 일요일 밤에 옵니다!!! 32편이 너무 길어서.... 쓰다가 토할 것 같아서 그냥 또 두개로 쪼갰습니다.
굳이 33편으로 안넘긴건 무슨일 있어도 더이상 편수를 늘리지않겠다는 다짐이랄까요 촤하
새로운 에피소드이자 마지막 에피소드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윤기의 결말은 번외에서 확인하실 수 있구요!
참고로 본편 완결 후에는 꾹토끼가 찾아옵니다! 꾹토끼는 6~7편 정도로 예상하고요 이것도 끝나자마자 텍파뿌립니다.
그리고나서 바로 호석이번외, 윤기번외, 그리고 마지막 번외!! 이런 순서로 아시면 됩니당
아 그리고 저번에 어떤 독자분이 댓글 하나하나 다 보시는 것 같다고 놀라셨는데 당근입니다!!
다만 제가 너무 바빠서ㅠㅠㅠㅠㅠ 댓글을 읽으면 답댓으로 화답해드려야하는데 마음속으로만 화답하고 있어요 흑흑ㅠㅠ
댓글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뭐 안달아주셔도 막 상처받고 그러진 않지만.... 아무래도 꼬박꼬박 댓글달아주시는 분이 더 친근하고 정이 가고... 그렇기는 합니다 힣
32-2는 절대 늦지 않습니다. 늦으면 진심 손모가지 짜른다 내가 ㅠㅠ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믿어주시는 모두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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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잼이야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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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마지막 뭐져 불길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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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 순간 진짜 기다려왔습니다ㅠㅠㅠㅠㅠ 이제 마지막 에피소드 오겠죠??ㅠㅠㅠㅠㅠㅠ 일요일 밤에 꼭 보고 학교 갔으면 좋겠어요 'ㅅ' 작가님 사랑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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