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1920년 10월에 있었던 일본군들이 벌인 대학살의 현장인 장암동에 다녀왔다. 골짜기에는 눈이 덮혀 있었고 실개천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다. 여러 차례 방문으로 익숙해져서 학살기념비가 있는 언덕이 고향의 언덕처럼 다정하였다.
장암동은 현재 용정시 동성용진 동명촌으로 용정으로부터 동남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1900년대 초기에 조선인들에 의해 개간되었으며 골짜기에 노루가 많아 노루바위골로 불렸고 간장암이라고도 한다. 1911년 독립운동가 강백규의 전도로 김영섭, 김동희 등 10여 명이 입교하여 간장암교회가 세워졌다.
강백규의 영향으로 마을 주민들이 민족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마을에는 영신학교가 있었으며 교사들은 전원이 크리스천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이었다. 3.13용정 만세시위 때 교사들의 지도아래 학생들과 마을 주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6월에는 간도 국민회 동부지방회 제4지부 본부가 되었다. 마을에 경호대가 설립되었고 경호대원들에게 총기가 보급되었다. 영신학교에는 대한학생광복단이 조직되어 독립의연금 모금에 앞장을 섰다. 이외에도 마을 주민들은 도독부와 의군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무기 구입과 운반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인근 남양촌에 가서 일본 앞잡이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운동에의 열정과 투지가 불타고 있는 장암촌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10월 30일 아침 6시 30분 즈음에 80명가까운 군인들과 헌병, 경찰관을 동원하여 마을을 포위하고 36명의 남성 청장년을 교회 안에 가둔 채 불을 질렀다. 뿐만 아니라 가옥과 양식도 함께 방화하였다. 그들의 죄목은 독립군과 내통한다는 것이었다.
장암 언덕에는 일본군의 학살 폭력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기념비가 있다. 방문 시 마다 기념비의 문구에 장암교회와 영신학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는데 금번에 가보니 있는 것 마저 무참하게 지워져 있었다.
훼손당한 기념비를 보는 순간 나 자신 테러를 당하는 것 같아 멘붕에 빠졌다. 돌에 새겨진 글을 박박 긁어낸 것이 내 가슴에 못을 박았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고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기념비에 테러를 가한 것은 역사를 지우고자하는 역사 테러다.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역사를 지우고자 하는가?
전쟁과 독재를 부추키는 악의 세력이 심장을 옥죄었다. 소름끼치는 전율이 전신에 퍼졌다. 두 번 죽음을 당하고 또 다시 역사 테러를 당하는 선열들에게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우리는 기념비가 언제 역사 테러를 당했는지도 모른다. 작년 6월에 다녀왔으니 테러는 지난 9개월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다.
훼손된 장암동 학살기념비(참안유지비). 끔찍한 역사 테러다. 역사의 생명을 빼앗고 매장하려는 소행! 선열들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살아서도 나라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였지만 돌아가신 지금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교회가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들의 저지른 만행이 아닐까 추측한다.
훼손 되지 않은 기념비(이중학살을 당한 36명이 장암동교회 청장년 님을 밝히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에 의한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타성 때문이다.)
36분의 순교자(순국자) 들의 합장된 봉분
장암동 참안유지(장암동 대학살이 일어난 터라는 뚯이다)
언덕 위에 외롭게 서있는 기념비
옛 이름인 '노루바위' 마을 표지석, 마을 입구에 서있다.
현재 마을 이름인 '동명'촌 표지판
아무리 역사가 역사로 기록되었다 해도 후세대들에 의해 읽히고 조명받으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일제 36년 식민지 통치기간에 민초들의 독립운동의 터였던 장암동교회에서
일어난 일제의 악랄한 민간대학살을 잊으면서 독립운동사를 배우는 것은 민초의
혼이 빠진 독립운동을 공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2024년 4월 3일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