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에 강원도 영월에 갔었다.
오후 3시 경에 서울을 출발했다.
평일이라 길은 막히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있다보니 오후 6시가 넘어서야 영월읍에 도착했다.
해병대 동기를 보러갔다.
"현 해병. 잘 살고 있노? 보고싶다. 동기야"
오랜만에 울린 한 통의 전화.
그 사내의 이 한마디 때문에 만사를 제쳐둔 채 무작정 고속버스에 올랐다.
원래 그의 고향이 강원도 영월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곳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알콩달콩 잘 살고 있었다.
내가 단순한 건지, 무모한 건지, 무식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강원도 사내와 전화를 끊자마자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고 가장 빠른 버스를 탔다.
영월에 도착해 확인해 보니 서울로 가는 마지막 고속버스가 저녁 8시 50분이라고 했다.
일단 티켓 한 장을 끊었다.
영월에서 동기와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 30분 남짓이었다.
그래도 감사했다.
"그래 굵고 짧게, 임팩트 있게 보자. 해병대 스타일로"
나는 그렇게 마음 먹었다.
동기는 거칠고 단순하지만 속이 비단 같은 전형적인 강원도 사내였다.
배가 고팠다.
"식당에 가더라도 터미널까지 왕복하는 시간을 아껴야 하니 멀리 가지 말자" 했다.
그리하여 터미널 부근에 있는 '꼼장어집'으로 들어갔다.
꼼장어를 구우며 시원한 소주를 들이켰다.
소주를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키더니 신 해병이 그랬다.
"내가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기들에게 간혹 안부전화를 하는데, 보고싶다고 했을 때 전화를 끊자마자 그날 바로 이 산골짜기까지 달려온 놈은 현 해병 니가 처음이데이. 난 니가 온다고 했을 때, 자네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처음엔 농담하는 줄 알았제이. 서울에서 강원도 영월군이 어디라고. 허허. 자넨 진짜로 무식하고 대단한 놈이야. 하기사 그랬으니 85년도 한여름에 신병 훈련소를 수료할 때 악날한 지옥을 경험하고 싶다면서 '해병대 특수 수색대'에 2차 지원을 했겠지. 동기들 모두가 개고생을 피하려고 열심히 잔대가리 굴릴 때 지 스스로 지옥문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으니, 아이고 키도 쪼맨한 놈이. 특수부대에서 개거품 물며 훈련받아 보니 그리 좋더냐? 내가 니한테 졌다 졌어. 부랄 달린 놈들끼리 무슨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노? 니는 진짜로 해병인기라. 아무튼 오늘 참말로 감동했데이 감동했어. 현 해병. 자 한 잔 진하게 마셔보제이"
동기가 연신 건배를 제의했다.
권커니 자커니 하면서 소주를 나눠 마셨다.
술이 시원하고 달았다.
강원도 감자바위, 신 해병과 얘기 보따리를 질펀하게 풀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진솔하게 이어갔다.
군대 동기들을 만나면 우리들 대화엔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다.
솔직 담백했고 대개 간결한 직설화법이었다.
군대 얘기, 사업 얘기, 자녀들 얘기, 건강문제, 노후준비, 동기회 발전 방안, 취미생활, 지속적인 공부와 운동, 최근의 관심사에 대한 얘기 등등 다양한 주제들이 식탁 위로 쏟아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거의 매일 만난 친구처럼 격의 없는 얘깃거리들이 유성처럼 술잔 위로 떨어졌다.
가공과 포장을 잘 모르는 중년 사내 둘이서 입술에 근육이 생길 정도로 열정적인 수다를 떨었다.
거친듯 하면서도 눈물 많고 의리 쩌는 영월의 신 해병.
그에게서 우정과 배려가 무엇인 지를 다시 한번 가슴으로 절감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영월에서 그렇게 소중한 시간이 번갯불처럼 흐르고 있었다.
귀한 밤이었다.
감자바위 친구는 오랜만에 동기가 찾아왔다며 식사비 계산은 물론 내 주머니에 차비까지 찔러주었다.
받지 않겠다고 계속 거부했지만 자기가 서울에 가면 그때 돌려주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버티지 않았다.
"그래 다음에 그리움이 차고 넘칠 때, 그땐 니가 서울에 온나"
막차에 올라타기 전에 우리는 서로를 꼬옥 껴안았다.
나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을 만큼 키가 큰 신 해병.
그는 떠꺼머리 총각 같은 전형적인 강원도 사내였다.
중년 남자들의 우정과 사랑도 무척이나 살갑고 따뜻한 것임을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한 채로 심야 고속버스에 올랐다.
승객도 별로 없는 고속버스는 칠흑같은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이 잔잔하게 달렸다.
갈 길은 멀었고 적당히 피곤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상경하는 내내 내 가슴속엔 연신 감사와 감동이 윤슬처럼 일렁였다.
고속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댄채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버스가 호법 JC를 통과해 용인을 지나고 있을 때쯤 전화가 울렸다.
사촌 여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동생은 울고 있었다.
수년 전에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 암수술을 했었다.
나는 완치가 된 줄 알았는데 다시 재발했다고 했다.
이번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담당 의사가 "사태가 위중하므로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했다면서 여동생은 흐느껴 울었다.
나도 모르게 내 눈가에도 이슬이 번졌다.
"기도하마, 힘내자, 사랑하는 동생아. 내일 저녁에 전주에 갈 테니 그때 보자"
이 말 외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이미 대중교통은 모두 끝난 상태여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그렇게 가슴 아픈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새날이 밝았다.
오늘 일을 마치는 대로 저녁에 다시 전주에 가보려 한다.
사랑하는 동기간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싶다.
슬픔에 잠겼을 사촌 여동생도 마음을 담아 위로해 주고 싶다.
그동안의 숱한 추억들과 만남들 그리고 행복했던 영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작년에도 이종 사촌 누이가 암으로 먼저 떠났는데 이래저래 억장이 무너진다.
세상은 쉼없이 흐른다.
제 아무리 바빠도 가끔씩은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며 살자.
거리나 시간에 관계 없이 가서 만나고, 그들의 진솔한 눈빛을 다시 한번 바라봤으면 좋겠다.
당신이 있어 고마웠고 행복했으며 내 삶의 여정에 더 큰 기쁨과 감동이 샘솟았노라고, 그렇게 고백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삶에 정답은 없다.
다만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가 돈이나 권력보다는 사람을 향해 쓰여지기를 기도할 뿐이다.
쓰나미 한 방에 몇 만 명의 사람들이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목숨을 잃어버리는 두렵고 참혹한 세상이다.
그런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에 빠질 필요도 없으며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 볼 일도 아니다.
다만 바삐 뛰던 길을 한번 쯤은 뒤돌아 보며 '진짜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다.
그것 뿐이다.
바쁨 속에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을 하나 하나 챙기면서 주변을 세세하게 살폈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길을,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로 환하게 웃으면서 가보자.
열정적으로 달려 보자.
오늘은 수요일이다.
사랑발전소 회원님들 모두에게 행복한 하루가 되길 기도한다.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2011년 4월 13일.
아침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