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윈
전자상거래는 싫증나지 않는 유일한 게임이다
김환표 | 『트렌드 지식사전』 편저자
미국과 중국을 강타한 '마윈 신드롬'
2014년 9월 18일 미국의 거대 IT 기업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가 이날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기업공개(IPO)를 하며 218억 달러의 자금을 조달해 상장 첫날 시가총액에서 경쟁자인 아마존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첫 거래가 있었던 다음 날엔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알리바바의 주가가 공모가보다 38.07퍼센트 오른 93.89달러로 장을 마감하며 시가총액 2,300억 달러로 페이스북을 제치고 구글(4,010억 달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인터넷 기업이 된 것이다.
상장을 통해 그야말로 잭팟을 터트린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馬云)은 “알리바바의 성공은 중국 경제의 성공이자 중국 인터넷과 중소기업의 성공”이라며 “알리바바 상장은 102년 역사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했다.1 마윈은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겠다는 생각도 숨기지 않았다. 뉴욕증권거래소 상장에 앞서 9월 16일 홍콩에서 열린 기업설명회에서 마윈은 “알리바바는 한 종류의 동물을 키우는 농장보다는 다양한 동물을 사육하는 동물원이 될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 시장으로 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2
“천하에 놀아도 싫증나지 않는 게임은 단 하나 있는데 상거래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그것”이라며 전자상거래에 미쳐 있는 마윈은 1964년 중국 항저우(杭州)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쑤저우(蘇州)에서 중국의 민속 음악인 핑탄(評彈) 배우로 활동했지만,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핑탄 공연이 금지되면서 마윈의 집안은 생계를 꾸리기도 힘들 정도로 곤궁해졌다.4 마윈의 할아버지는 국민당 시절 지방의 치안유지 간부를 맡았는데, 이 때문에 마윈은 ‘반혁명분자’의 손자로 낙인찍혀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을 준 것은 무협지였다. 의협심에 불타는 주인공이 친구를 위해 기꺼이 칼을 뽑는 이야기에 감동해서 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에 숱하게 싸우며 성장했다고 한다.5
마윈은 지금도 열혈 무협 마니아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작가는 무협작가의 대명사로 알려진 진융(金庸)이다. 그는 언젠가 “무협소설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탐미한 것이 나에게 사유의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말했는데, 알리바바 본사 회의실 이름을 진융의 소설에 나오는 마천애(摩天崖), 광명정(光名頂), 달마원(達磨院), 백화곡(百花谷) 등으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마윈의 집무실은 도화도(桃花島)다. 마윈은 진융의 무협소설 『소오강호』에 등장하는 펑칭양(風淸揚)을 자신의 별호를 삼을 만큼 사랑하는데, 고객제일·단체합작·변화포용·성신(誠信)·격정·경업(敬業) 등으로 이루어진 알리바바의 9대 가치관에는 펑칭양이 사용하는 무술인 ‘독고구검(獨孤九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6 알리바바의 직원들도 무협소설 등장인물에서 따온 예명을 사용하는데, 이는 무협지의 등장인물처럼 의협심을 가지라는 마윈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7 마윈은 태극권 솜씨도 수준급으로 알려져 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의리 때문에 싸우느라 학교 공부는 신통치 않았다. 마윈은 학교 성적이 바닥을 기어서 선생님들이 걱정하는 열등생이었지만 한 가지 잘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영어였다. 영어를 잘하는 이유가 재미있다. 대단히 엄격했던 마윈의 아버지는 툭하면 마윈을 꾸짖었는데, 당하고는 못 참는 성격이었던 마윈도 말대꾸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대놓고 말대꾸를 하긴 좀 뭐해서 영어로 실컷 하고 싶은 말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영어 실력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8
컴퓨터 문외한이 인터넷 기업을 창업하다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가로 성장했지만 사실 그의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마윈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서른 번도 넘게 거절당해봤습니다. 입대도 거부당했고 경찰 모집에 떨어진데다 KFC와 호텔 입사 시험에 모두 실패했죠. 이렇게 수없이 거절을 당하고 좌절을 겪으면서 오히려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9 대학 입시에서도 2번이나 떨어졌다. 3수를 할 때도 간신히 전문대학에 들어갈 수준의 실력이었는데, 운 좋게도 항저우 사범대학의 영문과가 정원이 미달되어 들어갔다. 일찍부터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마윈은 공부보다는 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항저우 전역의 대학연맹 회장을 할 정도로 웅변 능력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30세의 나이에 항저우 10대 우수청년교사에 선정되는 등 잘 나가는 영어강사 생활을 했지만, 1995년 미국 시애틀에서 처음 인터넷을 접한 후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마윈은 처음 인터넷을 접하고 두 가지 충격을 받았다. 하나는 너무 신기하다는 것이었다. 하나는 온라인 세상 어디에서도 ‘중국’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으로, 그런 현실에 마윈은 너무나 속이 상했다.10 어쨌든 마윈은 인터넷을 접한 순간 인터넷이 인류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을 바꾸어놓을 것이라는 직감을 했다. 물론 구체적으로 인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인터넷을 통해 사업을 하자는 생각을 굳혔다. 훗날 마윈은 당시 자신은 ‘눈 먼 호랑이 등에 올라탄 맹인’ 같았다고 했는데, 그런 말을 할 만했다. 인터넷과 컴퓨터에 사실상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컴퓨터 활용 능력은 겨우 이메일이나 주고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11
마윈은 1999년 3월 자신과 직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50만 위안의 자금으로 알리바바를 창업했다.12 베이징이나 선전(深) 등 IT 중심지가 아닌 항저우에서 창업한 것도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다. 창업에 앞서 마윈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17명의 창업 멤버를 모아 놓고 “우리들에게는 3가지 목표가 있다”며 이렇게 선언했다. “102년 동안 지속될 기업을 만든다”, “중국 중소기업을 위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이 된다.”13
그런데 마윈은 왜 하필 중소기업을 위한 기업 간 전자상거래(B2B)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일까? 주변에서는 그가 B2B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개인 간 전자상거래(B2C)에 비해 수익 기반이 취약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마윈은 1997년 베이징에서 중국 대외경제무역부의 공식 사이트 개설과 정부와 산하 무역업체 간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때 제조업체와 무역업체들 간의 전자상거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또 인터넷에서는 기업 간 거래량이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보다 훨씬 많다는 것도 이유였다. 이와 관련해 류스잉·펑정은 『알리바바, 세계를 훔치다』에서 “새우를 잡아서 부자가 된 사람은 들어봤어도 고래를 잡아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경제의 세계에서 대기업은 고래다. 고래는 새우를 잡아먹고 생존하며 새우는 고래가 먹다 남은 찌꺼기로 연명하는 상호의존 관계다. 그러나 인터넷 세계는 개성적이고 독립된 세계다. 소기업은 인터넷에서 독립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으며 다양한 제품을 선보일 수 있다. 인터넷의 진정한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14
알리바바의 글로벌 전략
마윈은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해 알리바바는 “예선을 거치지 않고 월드컵 본선으로 간다”라는 구호 아래 국제화 전략을 추구했다. 당시 인터넷의 핵심기술과 관련 기업들이 거의 대부분 미국과 유럽에 있었고 중국 내에서는 투자자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1996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에는 인터넷이라는 용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1997년까지 전자상거래라는 용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15
그가 회사 이름을 알리바바로 지은 것도 글로벌 시장 전략 때문이었다. 글로벌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귀에 쏙 들어가는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마윈은 회사 이름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다가 종업원에게 알리바바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가 그가 이름은 물론이고 알리바바가 보물창고 문을 열 때의 주문인 “열려라 참깨!”까지 외우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 마윈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수차례 했는데, 전 세계 사람들이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을 알고 있으며, 언어가 달라도 ‘알리바바’라는 발음은 어느 나라에서나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알리바바로 지었다.16 알리바바의 바바는 아라비아나 중국에서 아버지란 뜻의 바바와 발음이 같고, 영어권의 파파(papa)와도 유사하다.17
마윈은 알리바바가 중국 기업이라는 사실도 최대한 감추었다. 세계화 과정에서 3류 기업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알리바바가 국제 전자상거래 시장을 먼저 개통하고 중국 내 전자상거래 시장을 육성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99년 8월 마윈은 미국의 경제지 『비즈니스위크』와 인터뷰를 했는데, 항저우의 한 주택가에 있던 알리바바의 초라한 사무실이 외부에 알려질까봐 두려워 인터뷰까지 끝난 상태에서 『비즈니스위크』에 전화를 걸어 그들이 쓴 기사를 내보내지 못하게 요청했다.18
마윈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손마사요시(孫正義)였다. 마윈과 손마사요시는 2000년 처음 만났다. 당시 손마사요시는 투자 요청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20분의 시간을 주었는데, 알리바바에 대한 마윈의 브리핑을 들은 지 6분도 채 되지 않아 투자 결정을 내렸다. 당시 마윈은 손마사요시에게서 3,000만 달러의 투자금을 받았다가 돈이 너무 많다며 1,000만 달러는 돌려주었다.19 이때 손마사요시는 알리바바에 투자해 알리바바 주식의 32.4퍼센트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알리바바가 2014년 기업공개를 하면서 투자 금액은 80조 원으로 4,000배 이상 불어났다.20
대규모의 투자금을 유치하고 2000년 『포브스』가 마윈을 중국인 최초로 표지인물로 선정하기도 했지만 첩첩산중이었다. 인터넷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전이었고 알리바바의 서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등의 오류가 발생하면서 마윈은 적잖은 중국인들에게서 사기꾼이나 미치광이로 간주되기도 했다.21
주변의 비웃음과 우려를 일축이라도 하듯, 2001년 말부터 알리바바는 성장궤도에 진입했다. 이해에 전 세계에서 회원 수가 가장 많은 B2B 사이트로 성장했으며, ‘미국아시아 비즈니스협회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세계경제포럼은 그를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100명의 CEO’로 뽑았다.
중국에 신용과 상생의 비즈니스 가치관을 심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닷컴과 개인 간 온라인 경매 사이트 타오바오닷컴, 온라인 결제 안전 시스템 알리페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알리바바가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4년 8월 현재 58퍼센트에 달한다.22 사실상 중국 시장을 석권한 상태라 할 만한데, 이렇게 성장한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중국에 새로운 비즈니스 가치관을 심어 주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타오바오왕(淘寶網)이 구축한 신용 시스템이다.
‘짝퉁 공장’이라는 말이 떠돌 만큼 중국 사회에서 신용은 쓰레기통에 쳐 박혀 있는 가치였다. 마윈은 전자상거래를 가로막는 최대의 난관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래에 대한 공포심이라고 지적하면서 신용 시스템과 결제 시스템 구축에 매진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소비자가 물건을 직접 받은 후 상대방에게 대금을 보내는 방식의 시스템이었다. 알리바바의 결제 시스템으로 널리 알려진 알리페이(Alipay)도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의 전자상거래를 연구하는 시드니대학의 바니 탠 교수는 “타오바오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가격을 흥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중국식 비즈니스 관행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분석한다.23
중소기업과의 상생 전략도 빼놓을 수 없다. 2002년 닷컴 버블이 발생하자 알리바바를 이용하는 중소기업들이 마윈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알리바바, 우리는 당신들 덕분에 수주할 수 있었고 신입사원도 뽑아 회사의 규모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 편지 때문이었을까? 마윈은 중소기업과의 상생에 회사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윈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오늘 내가 10곳의 회사를 도울 수 있다면 나중에는 100곳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는 10만 기업이 기다리고 있는 시장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24
마윈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닷컴과 개인 간 온라인 경매 사이트 타오바오닷컴,
온라인 결제 안전 시스템 알리페이 등을 통해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을 석권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그는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마오쩌둥이 1972년 밝힌 정치적 선동 구호인 ‘굴을 깊이 파고, 도처에 식량을 비축한다(深控洞 廣積糧)’를 인용하며 “전 세계 경제의 겨울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고, 봄이 다시 올 때를 대비해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리바바 직원들에게 쓴 편지였지만 사실상 그 내용은 알리바바의 성장 동력이 되어준 중소기업과 함께 추운 겨울을 같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눠먹으며 월동하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마윈은 150억 위안(약 2조 5,200억 원)을 중소기업을 돕기 위해 내놓기도 했다.25 마윈은 상생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자주 이런 신뢰를 강조한다. “돈을 벌고 싶다면 먼저 다른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라.” “알리바바는 고객들이 먼저 돈을 벌도록 한 다음 제 몫의 이득을 챙겼습니다. 이것은 전자상거래의 기본이고 또 인터넷 정신의 근본이기도 하죠.”26
전자상거래 이용자가 주로 젊은 층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예컨대 타오바오왕은 영화에 쓰인 기자재를 판매하고 ‘슈퍼 바이어 선발대회’ 등을 하는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을 펼쳐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27 오늘날 중국의 최대 쇼핑 축제로 자리 잡은 싱글스데이도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싱글스데이는 중국에서 매년 11월 11일을 가리키는 말로, ‘1’의 형상이 외롭게 서 있는 독신자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싱글스데이라고 한다. 1990년대 난징의 대학에서 시작된 싱글스데이는 원래 쇼핑과는 무관한 날이었다. 그런데 마윈은 2009년부터 독신 남녀들을 위해 할인 이벤트를 베푼다는 명분으로 이날 하루로 한정된 폭탄 할인(50퍼센트 전후)과 각종 쇼핑 이벤트를 기획해 대박을 쳤다.28 2014년 싱글스데이는 1분 12초 만에 주문액이 10억 위안(1,700억 원)을 넘어섰고 불과 18분 만에 1조 원을 돌파했다. 2014년 싱글스데이에서 알리바바는 우리나라 돈으로 10조 원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마윈의 ‘역발상 전략’과 ‘삼장법사 리더십’
여러 면에서 마윈은 독특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키워드는 아무래도 ‘역발상 전략’일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알리바바에 존재하는 ‘물구나무서기 문화’다. 물구나무를 서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보이는 것처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구나무서기는 알리바바의 특유한 문화이자 마윈의 가치관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29
마윈의 이런 역발상 전략은 알리바바를 창업하면서 겪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 알리바바 창업 직전 그는 24명의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자신이 인터넷이라는 걸 해보려 한다면서 장점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 가운데 23명은 마윈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왜 좋은 영어 강사 자리를 때려치우려고 하느냐며 반대했고, 딱 한 명만 “정말 하고 싶으면 해보든지”라고 했다. 마윈은 밤새 고민한 끝에 “모두가 반대한다고 해도 나는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 마윈은 이렇게 말한다.
“90%가 찬성하는 방안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것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다는 계획이라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을 것이고 그 기회는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0%의 사람들이 반대하는 방안은 시도해볼 만하다.”30
물론 그의 역발상 전략이 꼭 적중하는 것은 아니며 궤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오늘의 알리바바를 만든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중대한 결정을 할 때 ‘다수의 의견’ 대신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는 편이며 그 결정의 이유를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이런 스타일 때문에 ‘독재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31
대다수 중국 사람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를 훌륭한 리더의 표상으로 간주하지만,
마윈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야말로 최고의 리더라고 말한다.
마윈의 리더관도 독특하다. 대다수의 중국 사람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의 팀을 가장 이상적인 팀으로 생각하고 유비를 훌륭한 리더의 표상으로 간주하지만 마윈의 생각은 다르다. 마윈이 높게 평가하는 리더는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특별한 재주도 없을 뿐더러 어수룩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마윈은 왜 그를 높게 평가하는 것일까? 그건 삼장법사가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조직의 가치관과 발전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마윈에 따르면, 삼장법사는 오로지 경전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서역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온갖 고난을 넘어섰고 수시로 발생하는 조직원들 간의 의견 충돌도 조율해가며 결국엔 목표를 달성했다. 삼장법사처럼 리더가 구체적인 목표와 확실한 방향을 설정한다면 그 조직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게 마윈의 주장인 셈이다.32
물론 이건 마윈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별로 내세울 게 없는 능력을 가졌지만 수많은 실패를 딛고 목표를 성취한 삼장법사에게 자신을 투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마윈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매우 멍청한 사람이다. 계산력도 떨어지고 말주변도 남보다 못하다. 이런 나도 창업에 성공했다.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33 마윈의 리더십을 ‘삼장법사 리더십’으로 부르는 이유다.
마윈의 인재 등용관도 재미있다. 그는 이른바 엘리트주의를 싫어하며 조직 구성원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는 “똑똑한 사람들이 있을 때 어수룩한 사람에게 리더를 맡겨야 한다. 한 팀이 모두 과학자일 때 농민이 그들의 리더가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사고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양한 각도로 생각을 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유리하다. 우리는 엘리트만 찾지 않고 보통 사람도 찾는다.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엘리트들은 ‘요괴’로 변해버린다.”34
이런 인재 등용관은 알라비바 초창기 엘리트 위주로 구성된 조직원들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을 능수능란하게 통제한 삼장법사의 리더십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공익사업은 양심을 일깨우는 일
2013년 1월 15일 마윈은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인터넷 업계에서 48세의 나이는 이미 젊은 나이가 아니다”며 CEO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으로 남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이메일에서 “알리바바는 최소 102년은 가야 할 기업이다. (14년이 지났으니) 아직 88년이나 남았다”며 “알리바바 사람들이여, 가라(Go)!”라고 했다.35 5월 10일 CEO에서 물러난 후 마윈은 회사 경영보다는 공익기금 관리와 운용, 대기오염 개선, 식량안전, 수질 개선 등을 위한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급속한 경제 성장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환경과 소외 문제를 못 본 체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창업이 내 기업가 영혼을 불사른 것이라면 현재 일은 내 양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36
마윈은 2013년 12월 『파이낸셜타임』과의 인터뷰에서도 “(오염된) 물, 공기, 음식 문제로 중국인들은 10~20년 후 암과 같은 질병 문제를 마주할 수 있다”며 “이것이 바로 내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할 곳”이라고 재차 강조했다.37 2014년 11월 11일 싱글스데이 행사 마감을 앞둔 자정 직전 항저우 알리바바 본사 프레스센터에 들른 마윈은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 같다”며 “이런 고통과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번 돈을 사회에 어떻게 환원할지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와 자선활동을 위해 누가 더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지 경쟁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2014년 전체 알리바바 주식의 2퍼센트가량에 해당하는 145억 위안(약 2조 5,000억 원) 규모의 공익기금을 만들었다.38
마윈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알리바바의 미래는 탄탄대로다. 전 세계 1위 인구에 기반을 둔 성장 잠재력 때문이다. 『차이나데일리』에 따르면 지난 2010년 기준 4,610억 위안(약 76조 6,700억 원)이었던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은 2013년 1조 8,920억 위안(331조 7,300억 원)으로 4배가량 뛰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다.39 모바일 시대를 맞아 현재 알리바바는 농민이 도시민과 같은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무선화’ 전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세계 전자상거래 시장의 패자를 두고 벌이는 아마존과의 싸움은 갈수록 흥미로울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