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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쿠바리와 숨기기
▶ 휴먼 드라마 속의 인간 관계
『 한 그릇 메밀 국수 』 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낸 휴먼 드라마이다. 자연이라든가 혹은 유별난 사건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북해도(北海道. 그러나 이 이름은 왜국의 왜인들이 붙인 이름이고, 원주민인 ‘아이누[야운쿠르]’족은 같은 땅을 ‘인간의 땅’이라는 뜻인 ‘아이누 모시르[모시리]’로 불렀다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의 북국 정취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야 겨우 끝 장면에서 잠깐 내리다가 만 눈 정도이다.
거기에 비하면 짧은 동화인데도 등장하는 인물의 수와 그 인간 관계는 상상외로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 마디로 답변하기 힘들다. 메밀 국수 한 그릇을 시킨 여자 손님인가, 아니면 북해정 소바집 부부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한 그릇 메밀 국수를 시킨 부인의 지독한 검약(儉約. 돈이나 물건, 자원 따위를 아껴 씀 – 옮긴이)과 그 의지인지, 혹은 국수 한 그릇 시킨 손님을 소중하게 대하는 북해정 주인의 상도덕이요 그 인정인지 …… 그 감동 역시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와 객이 서로 얽혀 있는 인간 관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선 음식을 시킨 객(손님 – 옮긴이) 쪽에서부터 따져가 보자. 그 객의 입장은 한 개인이 아니라 세 사람으로 구성된 가족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가족 안에도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모자 관계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어머니를 돕자.’고 말하는 아들과, 그 도움을 감사하게(고맙게 – 옮긴이) 생각하는 어머니가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제끼리의 수평적 관계가 나타난다. 작문을 쓴 당사자인 아우(‘남동생’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 – 옮긴이)와, 학부모로 대신 참석하여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는 형의 입장이 그렇다. 이런 형제 관계가 발전하여, 학교 생활을 통한 교우(校友. 같은 학교[校]를 다니는 벗/동무[友]. 동창생 – 옮긴이) 관계라는 아이들 세계가 나타난다.
그 인간 관계의 끈은 (사람들이 – 옮긴이) 직접 등장하고 있는 이야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교통 사고를 내고 세상을 떠난 남편과 그 여주인공의 부부 관계, 여덟 명의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문맥상 ‘남에게 입힌 손해를 물어 줌’이라는 뜻을 지닌 ‘배상’을 써야 한다 – 옮긴이)을 하게 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빚을 갚기 위해서 직장을 갖게 되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보너스를 받게 된 사원과 직장장(일터, 그러니까 직장의 우두머리 – 옮긴이)의 관계도 생겨난다.
이 세 사람을 에워싼 인간 관계의 그물만 보더라도 모자 관계, 형제 관계, 교우 관계, 부부 관계, 채권 채무자의 관계, 그리고 직장 관계 ……, 이 이야기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북해정 주인과의 주객(主客. 주인[主]과 손님[客] - 옮긴이) 관계를 빼고서도 넉넉잡아 여섯 종류가 된다.
그리고 그 인간 관계의 어떤 한 가지 끈이 끊어지거나 바뀌어져도 이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만다. 교통 사고를 내고 죽은 남편을 잊고 그 여인이 다른 곳으로 개가(재혼 – 옮긴이)를 하였다면, 절대로 메밀 국수 한 그릇의 그 작고도 큰 드라마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아이들이 어머니를 돕는 모자 관계의 효(孝. 효도)와 서로 의좋게 지내는 형제 관계의 우애가 없었더라면, 한 그릇을 시켜 놓고 세 사람이 먹는 그런 장면은 생겨날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사원(여주인공)에게 보너스로 보답하는 직장장이 없었다면, 빚을 그믐 전에 다 갚고 오랜만에 한 그릇의 메밀 국수가 두 그릇으로 불어나는 드라마의 발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때 그 세 식구는 카운터(계산대 – 옮긴이)에까지 들리는 은밀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을 것이고, 북해정 부부도 영영 그들의 속사정을 몰랐을 것이다. 결국 북해정과 그들의 주인/손님의 관계도 깊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북해정의 주인 쪽은 어떤가. 그 쪽 역시 한 개인이 아니라 부부 관계의 복수(複數. ‘겹치는[複] 수[數]’ → 하나 이상인 수 – 옮긴이)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한 부부 관계가 아니라 북해정 내에서 남편은 주방장이고, 아내는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라다 주는 종업원이다.
북해정의 무대에서는 부부의 가족 관계가 그대로 직장 관계, 한 회사에 있어서의(‘한 회사의’ - 옮긴이) 사원 관계와 일치한다. 북해정의 번영은 부부의 화합, 그리고 그 근면과 친절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다시 발전하여 북해정을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관계로 연계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야기 속에서는 북해정과 손님 관계가 그 중요한 줄기를 이룬다.
그것이 북해정 주인과 단골 손님과의 관계이며, 2번 테이블의 행운을 찾아 모여드는 젊은 고객들이며, 해마다 도시코시 소바를 먹으며 설을 맞이하는 동네 나카마들의 모임이다.
손님 관계도 다층적이다. 그중에 특수한 고객 관계를 이룬 것이 세 모자와의 관계인 것이다.
최종적인 그 단계는 소바집 주 – 객 관계가 주와 객만이 아니라 손님과 손님의 관계, 즉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처럼 소바를 먹으러 온 손님들이 세 모자를 맞이하며 박수를 치는 손님끼리의 기묘한 인간 관계로 발전된다.
그러므로 이같이 섬세하게 얽혀 있는 그 인간 관계의 거미줄을 한 가닥씩 살펴가 보면, 일본의 집단주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몸으로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인간 관계를 맺어 주고 지탱해 주는 그 끈들을 찾아 내게 되면, 예외없이 우리 한국말(내지는 조선말/고려인을 비롯한 코리아[Corea]계 민족들의 말까지 포함하는 배달말 – 옮긴이)로는 옮기기 어려운 일본 특유의 키 워드(key word. 순수한 배달말로는 ‘열쇠말’ - 옮긴이)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 기쿠바리
단순한 이야기 속에 이렇게도 많은 인간 관계가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러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패러다임은 아주 단순한 몇 가지 키 워드(Key word. 순수한 배달말이자, 새로운 배달말로는 ‘열쇠말’ - 옮긴이)에 의해서 반복 사용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누구 눈에도 금시(今時. 바로 지금 – 옮긴이) 띄게 되는 ‘기쿠바리(氣配り[기배리 – 옮긴이])’라는 말이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도 ‘기(氣)’라는 말을 잘 쓴다. 분위기, 기분, 기운, 기세 등(같은 것처럼 – 옮긴이) 생활 용어에서 일치하는 말들이 그대로 통용된다.
그런데 기쿠바리라는 말은 한국말에는 없다(나아가 고려인을 비롯한 코리아[Corea]계 민족들의 말이나, 조선 공화국의 언어이자, 배달말의 한 갈래고, 한국말의 형제자매인 조선말에도 이런 낱말은 없다 – 옮긴이). 문자 그대로 하면 ‘기운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는 뜻이지만, 일본인들은 남에게 신경을 써 주는 행동 일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고 있는 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행동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처지 – 옮긴이)과 마음을 배려해서 행동하는 경우이다.
우리 나라 말(한국어 – 옮긴이)로 하자면 표면적으로는 ‘배려’에 가깝고, 실질적인 뉘앙스로는 ‘눈치’에 가까운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눈치를 보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눈치는 이 쪽에서 상대방 압력 때문에 수동적으로 신경을 쓰게 되는 경우인데, 일본의 경우에서는 자발적으로 자기 쪽에서 신경을 써 주는 적극적인 윤리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이다.
쉽게 말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손님에게 물건을 팔 때의 서비스 정신, 그리고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 그것을 사용하는 소비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쿠바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경우(이 이야기에서는 – 옮긴이), 왜 그 여자 손님이 하필 남이 (가게 – 옮긴이) 문을 닫는 시각에 북해정에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풀어 주는 낱말이 바로 이 ‘기쿠바리’인 것이다.
어느 해설가들은 이 여자(여성 – 옮긴이)가 빚을 갚으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기 때문에 그 날도 늦게 일터에서 돌아왔을 것이라고 토를 단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그런 물리적인 시간의 개연성이 아니라, 그녀의 행동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내면적인 필연성인 것이다.
만약 일을 끝내고 일찍 돌아왔다 할지라도, 그녀(이 글은 여성도 ‘그’라고 부르자는 원칙이 나오기 스물다섯 해 전에 쓰였다 – 옮긴이)는 그런 시각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직접 이 이야기의 지문(바탕글 – 옮긴이)에도 나타나 있는 것처럼, 소바집에서 가장 바쁜 때는 섣달 그믐날이다.
몇 번 이야기한 대로 도시코시 소바를 먹고 묵은 해를 결산하려는 일본인들의 풍속 때문이다.
그것을 일본 주부 중의 주부로 그려져 있는(그려진 – 옮긴이) 그녀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한창 붐비는 시간에 세 식구가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서 메밀 국수 일 인분만을 시켜 먹는다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과 자리를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다 같이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성은 – 옮긴이) 자신에게 있어서도(자신의 관점에서 보아도 – 옮긴이) 남의 눈들이 잔뜩 있는 자리에서 한 그릇만 시켜 먹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메이와쿠오 가케루나
손님들이 다 가고 없는데도 그 여인은 ‘저, 메밀국수 일 인분인데, 되겠습니까.’라고(하고 – 옮긴이) 머뭇거리면서 어렵게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만이 아니라 메밀국수 일 인분을 주문할 때 만화 속의 아이들 표정에는 겸연쩍어하는 빛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표정, 말투, 몸짓, 그것을 한 마디 말로 나타낸 것이 ‘기쿠바리’이다.
(그 여성은 – 옮긴이)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기 전에는 한 가족(식구 – 옮긴이)이 단란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아마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처럼 섣달 그믐날이 되면 도시코시 소바를 먹으러 북해정 같은 소바집을 다녔을지 모른다. 그 날도 아이들은 옛날 생각을 했을 것이고, 어머니를 졸라 소바 먹으러 가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찍 가면 폐가 되니, 기다렸다가 손님들이 다 가고 나면 가서 딱 한 그릇만 나눠 먹고 오자고 했을 것이다(처음부터 ‘메밀국수 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고 왔던 것은 아이의 작문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일본 사람들은 ‘메이와쿠’라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아이들에게 사회 교육의 제1장 제1과로 가르치는 말이 ‘다닌니 메이와쿠오 가케루나(일본어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뜻이다 – 옮긴이).’이다[그러나 이런 교육조차도 그야말로 ‘국내용’이자 ‘순혈 일본인끼리만 지키는 도덕을 담은 교육’이고, 백번 양보한다 해도 이 교육을 하는 왜인(倭人)들은 타이(Thai)나 브라질이나 수오미 같은 친일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나 서양 백인들에게는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왜국(倭國)이 짓밟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나 ‘약자’로 여기는 사람들 – 예를 들면, 한국인이나 서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제하(諸夏 : 수도 북경[北京]) ‘한족(漢族)’들 – 에게는 “폐”를 끼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얼마 전, 자기 식당 앞에 “중국인/한국인 출입금지”라고 써 붙인 왜인이 좋은 예이며, 길거리에서 “<조센징>을 죽여라!”하고 시위하는 넷우익과, 두세 해 전 일본 열도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센징>과 흑인이 수도관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을 퍼뜨린 왜국 누리꾼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 옮긴이].
이같은 기쿠바리(배려 – 옮긴이)는 손님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바집 주인들은 손님이 미안해할까 봐 역시 기쿠바리를 한다.
손님을 위해 기쿠바리를 하고 있는 장면은 이 동화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첫 장면이 "소바를 삼 인분 내자."는 아내 말에 "그렇게 하면 오히려 손님이 신경을 쓰니 안 된다."는 남편의 말이다. 이때 신경을 쓴다고 한 말이 일본말로는 ‘기오쓰카우’라고 되어 있는데, 이 때의 ‘기’는 바로 ‘기쿠바리’라고 할 때의 그 ‘기’이다.
그것을 직접 일본말로 표현하면 손님이 ‘기오쓰카우’ 할까봐 ‘기쿠바리’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남편은 – 옮긴이) 그러면서도 아내나 그 손님이 눈치채지 않게 몰래 사리 반(半. 순수한 배달말로는 ‘가봇’ - 옮긴이) 덩어리를 더 넣어 준다. 그런 행동을 우리는 ‘기쿠바리의 기쿠바리(배려하고 또 배려하는 것/배려 중의 배려 – 옮긴이)’라고 할 수 있다.
기쿠바리는 섬세한 상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고, 그 균형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기쿠바리의 연출은 ‘기쿠바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연출이 붕괴된다(무너진다 – 옮긴이).
이 인간 관계에서 기쿠바리가 없었다면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동화는 태어나지 않는다. 한번 생각해 봐라. 이 세 모자가 소바집에서 일 년 중(한 해 가운데 – 옮긴이) 가장 바쁘다는 섣달 그믐날 밤에 손님이 밀려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1인분의 메밀 국수만 시켜 놓고 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었다면 어떠했을 것인가.
또 반대로 (소바집 주인 부부가 – 옮긴이) 문을 열고 어렵게 들어와 미안해서 겨우 메밀국수 1인분을 시키는 손님을 향해서 ‘귀찮다.’는 내색을 보였거나, 혹은 (손님들을 – 옮긴이) 거지(걸인 – 옮긴이) 다루듯이 불손하게 했다면 그들은 이듬해에도 다시 찾아왔겠으며, 아이들은 작문에 소바집 이야기를 썼을 것인가.
(중략)
▶ 왜 야사시를 요구하는가
기쿠바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서로를 염려해 주고 상대방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끼는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러한 마음을 일본말로는 ‘야사시(優い[우이 – 옮긴이])’라고 한다.
이 말 역시 일본 사람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 잘 쓰는 말의(말들 가운데 – 옮긴이) 하나지만, 우리말(배달말의 한 갈래인 한국어 – 옮긴이)에는 딱 들어맞는 게 없다. ‘부드럽다.’, ‘상냥하다.’, ‘따뜻하다.’, ‘착하다.’ 등(같은 – 옮긴이) 여러 가지 복합적인 뜻이 함께 들어있는 말이다.
이 동화에서 북해정 바깥 주인은 아주 무뚝뚝한 사람(‘부아이소나 히토’)으로 그려져 있다. 만화(동화를 만화로 옮긴 것 – 옮긴이)를 보아도 광대뼈에 네모진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성격 설정이나 표정이 오히려 이 ‘야사시(상냥함/따뜻함/착함 – 옮긴이)’를 강조하기 위한 아이러니(역설[逆說]. 여기서는 ‘반대 장치’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의 기법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2인분만 시킨 그 손님 가족에게 몰래 3인분의 양을 담는 것이다.
그것을 엿본 그 아내가 ‘당신은 무뚝뚝해 보여도 속마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하듯이, 일본 문학에는 주인공들의 이 감춰진 야사시의 극적 효과를 이용한 작품들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일본 가부키에도 곧잘 등장하게 되는(나오는 – 옮긴이) 그 유명한 ‘벤케이의 눈물’이라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거친 사무라이의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그 야사시를 강조하는 것은(까닭은 – 옮긴이), 윤리 의식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야사시의 감성에 의존해서(기대서 – 옮긴이) 인간 관계와 집단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일본 사회이기 때문이다.
가부키의 그 ‘벤케이의 눈물’의 미학은 복잡한 일본의 지하철의 한 광경을 노래한 현대 시 속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길지만 야사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현대에서는 어떻게 변질되어 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시의 – 옮긴이) 전문을 읽어 보도록 하자.
늘 그랬던 것처럼 그 날 전차(일본에서는, 지하철의 열차도 ‘전차’로 부른다. 그러니까, 이 시에 나오는 “전차”는 사실은 지하철 열차다 – 옮긴이)도 만원이었지.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젊은 애들은 앉아 있었고
노인네들은 서 있었다.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소녀가 일어서더니 자리를 양보했지.
얼른 노인네가 그 자리에 앉았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노인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역에서 내렸다.
소녀는 다시 제자리에 앉았지.
다른 노인네가 소녀 앞으로 밀려왔어. 소녀는 그냥 고개 숙인 채로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노인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지.
노인네는 다음 역에서 인사를 하고 내렸다.
‘두 번 일어난 일은 또 일어난다.’더니
다른 노인네가 소녀 앞으로 또 밀려왔다.
딱하게도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이번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지.
다음 역에서도 또 다음 역에서도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몸이 굳은 채로 …….
나는 전차에서 내렸다.
딱딱하게 굳어 고개를 숙인 채
소녀는 어디까지 타고 갔을까.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수난자가 되는 법.
왜냐하면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남의 아픔이 제 아픔처럼 느껴지니까.
여린 마음으로 가책을 느끼며 어디까지 갈 것인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거북한 마음 때문에
아름다운 저녁노을도 보지 못하고.
▶ 미국 차에는 없는 실내 손잡이
문학에서만이 아니라, 이 기쿠바리와 야사시는 일본의 산업 현장에서도 나타난다. 일본 자동차가 미국 자동차와 다른 특징의(특징들 가운데 – 옮긴이) 하나는 세단 내부의 도어 바로 윗천장에 손잡이를 달아 놓았다는 것이다(이것은 서른두 해 전의 미국/일본 자동차 특징을 설명한 글이므로, 오늘날에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 – 옮긴이).
미국이나 유럽 차에는 없는 것이 왜 일본 차에만 있는가.
서서 흔들려 가는 전차(지하철/전철 – 옮긴이)도 아닌데 자동차 천장에 손잡이를 달아 놓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합리주의자들인 서양 사람들이 설계한 자동차에는 그것이 없다.
그러나 실제 자동차를 사용하는 고객 입장에서 보면, 가끔 손을 올려 무엇인가 높이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 이치가 아니라 이러한 사용자의 마음을 생각해서 그 자리에 손잡이를 붙여 준 것이 일본 차이다. 일본 제품이 세계 시장을 제패하게 된 이유(까닭 – 옮긴이) 가운데 하나가 사용자에 대한 이같은 기쿠바리이며 야사시이다(그러나 오늘날, 그러니까 이 글이 쓰인 지 서른 두 해가 흐른 뒤에는 일본 제품이 – 적어도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는 – 더 이상 세계 시장을 제패하지 못하고 하나둘씩 밀려나고 있다. 이 글에서 설명하는 배려나 상냥함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나라의 회사들이 이런 일본 기업의 강점을 따라하며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때문일까? - 옮긴이).
그리고 서구 사회에서도 이 야사시를 뒤늦게 도입해서 21세기의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이른바 ‘하이터치’ 상품이다.
흔히 말하듯이 서구 사회를 지탱하고 또 끌어가고 있는 것은 개인주의이다. 그리고 개인과 개인을 잇고 있는 것은 바로 대립 관계이다. 이 대립이 있기 때문에 사회는 발전하고 끝없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갈등과 마찰은 나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극과 경쟁을 통해 자기 자신은 물론(말할 것도 없고, – 옮긴이) 사회나 국가(나라 – 옮긴이) 전체의 향상을 이룩하게 된다. 누가 뭐라고 간섭하거나 도와 주지 않아도 개개인이 이렇게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각자가 분발하며 성장해 가는 것이 우리가 오늘날(서기 1992년 – 옮긴이) 겪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틀이다(그러나 이런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틀”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서기 1997년에 ‘국가 부도의 날’을 겪고 난 뒤에는 완전히 끝났다. 오늘날, 그러니까 서기 2024년에도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이기는 하지만, “각자가 분발하며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도생[各自圖生. 제각기 살길을 꾀함]’하는 사회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
그러나 일본 사회는 이와는 다른 틀을 가지고 발전해 간다. 한 마디로 개인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의 성격이 강하다. 그것은 대립이 아니라 합의, 마찰이 아니라 양해와 타협, 그리고 자기 주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뜻을 읽는 ‘오모이야리(易地思之[역지사지. (남/상대방과 자신의) 처지(地)를 바꾸어서(易) 생각함(思之) - 옮긴이])’이다.
그래서 서구의 근대 사회를 계약 사회라 하고, 일본은 합의 사회, 또는 ‘야마모토 시치헤이’ 같은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하나시아이(말로 풀어 가는)’ 사회라 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미국에는 변호사가 75만 명이나 되는 데 비해서, 일본의 경우에는(일본에는 – 옮긴이) 겨우 2만 5천 명밖에 되지 않는다(이것도 지금으로부터 서른두 해 전의 통계이므로, 지금은 바뀌었을 수도 있음을 헤아리며 읽으시기 바란다 – 옮긴이).
▶ 감추기와 나카마
기쿠바리의 단계가 훨씬 더 농밀해지면(진하고 빽빽해지면 – 옮긴이), 이번에는 숨기기, 감추기가 된다.
이 동화에 나오는 인간 관계의 중요한 연기는 숨기기, 감추기를 통해서 전개되어 간다(펼쳐진다 – 옮긴이). 큰 것만 따져도 수십 건이 넘는 숨기기를 이 이야기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우선 모자 관계를 보아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아버지가 저지르고 간 사고와 보상금을 갚아 나가는 일을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숨겨 왔고, 또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온 학부모회의 통지서를 숨기고 대신 나간다. 그리고 작문에 ‘한 그릇 메밀국수’를 쓰고 그 낭독을 하게 된 학교 일도 숨겨 왔다.
북해정 주인 부부 역시 서로 숨기기를 한다. 내심으로는(속으로는 – 옮긴이) 그 여자 손님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도,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는다. 매년(해마다 – 옮긴이) 섣달그믐에 모여드는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내놓고 이 모자를 기다리는 자기 내심(속마음 – 옮긴이)을 감추려고 한다.
북해정 주인이 모자 일가족에게 베푸는 일련의 관심과 친절은 모두가 이런 감추기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몇 개나 되는가를 한번 계산해 보라(세어보라 – 옮긴이).
주문한 것보다 메밀국수를 많이 담으면서도 그것을 몰래 숨긴다. 2번 테이블(식탁 – 옮긴이)에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갖다 놓고 그 가족을 기다리다가도, 막상 그들이 나타나면 그 팻말부터 얼른 치워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또 (메밀국수[‘소바’]의 – 옮긴이) 가격(값 – 옮긴이)이 올랐는데도,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옛날 가격표가 적힌 메뉴판으로 뒤집어 놓는다. 세 모자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카운터(계산대 – 옮긴이) 뒤에 숨어서 주인 부부가 수건 끝을 서로 끌어 잡아당기며 우는 것도 그런 숨기기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런 숨기기의 비밀들은(‘숨긴 비밀들은’ - 옮긴이) 서로 털어놓게 되거나 이심전심으로 상대방에게 전달됨으로써, 즉 비밀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내밀(內密. ‘안쪽[內] 깊숙이[密] [감춤]’ → 어떤 일이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함. 또는 그런 일 : 옮긴이)의 관계를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숨기기와 비밀 털어놓기의 과정은 이 동화를 구성하고 있는(이루는 – 옮긴이) 가장 중요한 플롯(plot. 줄거리 : 옮긴이)이 되어 있다.
이러한 숨기기를 일본말로는 ‘우치와(內輪)’, 그리고 그 털어놓기를 ‘우치와바나시’라고 한다(‘은밀한 이야기’, ‘밀담’, ‘나이쇼바나시’라고도 한다).
‘우치와’라는 말은 (‘안’을 뜻하는 ‘내[內]’가 들어간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 옮긴이) 본래 가족(식구 – 옮긴이) 내부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진짜 혈연 관계가 아니라도 동질성을 지닌 집단 내의(안의 – 옮긴이) 성원들이면 모두 이 개념에 속하게 된다.
‘우치와’를 문자(글자 – 옮긴이) 그대로 읽으면 ‘내륜(內輪)’으로 ‘동그라미 안’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앞서 본 바대로 숨기기와 털어놓기이다. ‘비밀’을 뜻하는 영어의 ‘SECRET’는 원래 ‘분비물’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땀이든 침이든 모든 분비물은 체내(몸속 – 옮긴이) 깊숙한 곳에서 배어 나온 것이다. 이 체액처럼 끈끈한 것에 의해 맺어지는 집단(무리 – 옮긴이)을 그 과정대로 펼쳐 보여 준 것이 이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동화는 일종의 북해정이라는 한 소바집의 우치와바나시인 것이다.
전연 낯선 손님, 단지 한 그릇 메밀 국수의 거래 관계밖에 없는 세 모자가 어떻게 북해정의 한 우치와가 되는가 하는 단계로서 그 마지막 장면은 음식점 고객이 바로 그 음식점의 ‘나카마’가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동화의 끝 장면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라 섬뜩한 느낌을 주는 어떤 공포심(두려운 마음 – 옮긴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 공포심은 10여 년 걸려서 끝내 같은 날 같은 시에 나타나 기어코 메밀 국수 삼 인분을 시켜 먹는 그 집념 때문만은 아니다.
주소도 이름도 모르는 손님을 10여 년 동안이나 식탁을 비우고 기다리고 있는 북해정 주인의 끈질긴 기다림도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까닭은 – 옮긴이) 아니다.
그것은 원래 입장(처지 – 옮긴이)과 그 이해가 서로 다른 음식점 주인과 손님 관계가 어느덧 하나의 나카마로 변해(바뀌어 – 옮긴이) 버린 데 있다. 북해정 부부 가족은 파는 쪽이요, 세 모자 손님은 사는 쪽이다. 사는 것과 파는 것은 입장이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한국인 – 옮긴이)가 아직도(그러니까, 이 글이 쓰이던 때인 서기 1992년까지도 – 옮긴이) ‘동업자’를 일본말 그대로 ‘나카마’라 부르고, 고객과는 달리 동업자끼리만 통하는 시세를 ‘나카마 가격’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더라도, 원래 사는 사람이 파는 사람의 우치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을 보면 모두 도둑으로 알라.’는 것이 에도 시대 상인들의 생활 철학이요, 그 신조이기도 했다. 사고 파는 거래에는 부자(父子. 아버지[父]와 아들[子] - 옮긴이)도 없다는 것이 냉혹한 (일본 – 옮긴이) 상인들의 물질 세계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믿을 것은 우치와이며 나카마이다. (참고로, - 옮긴이) 나카마를 한자로 쓰면 (‘가운데[로] 받아들임’이라는 뜻을 지닌 – 옮긴이)‘仲間(중간 – 옮긴이)’이 된다(그러니까, 나카마를 한자의 뜻대로 풀이하자면, ‘[우리들] 가운데[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는 이야기다 : 옮긴이).
▶ ‘하게미’와 ‘간바루’의 사회학
그런데 이 이야기의 라스트 신(last scene. 마지막[last] 장면[scene] - 옮긴이)은(‘마지막 장면에서는’, - 옮긴이) 10여 년 만에 돌아온 손님이 장사하는 사람끼리 모인 북해정 섣달 그믐의 우치와 잔치에 나와 하나의 나카마처럼 우치와바나시를 하고 비밀을 공유하는 집단의 하나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일본 사회를 ‘의사 혈연 집단’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혈연으로(핏줄로 – 옮긴이) 맺어진 가족(식구 – 옮긴이)이 아니면서도 일본의 집단들은 가족 관계와 유사한(비슷한 – 옮긴이) 특성을 지니고 있다(지닌다 – 옮긴이).
일본의 웬만한 모임은 야쿠자들처럼 모두가 호형호제하는 혈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조직을 지배하는(다스리는 – 옮긴이) 종(세로 – 옮긴이)의 관계(여기서는 ‘세로’, 그러니까 ‘상하관계’ - 옮긴이)는 ‘오야분(親分[친분] : 일본어로 “어버이처럼 기대는 분”/“두목”/“우두머리”라는 뜻 - 옮긴이 )’ ‘고분(子分[자분] : 일본어로 “수양아들”/“임시로 아들 취급을 받는 사람”/“부하”라는 뜻 – 옮긴이)’의 ‘부자 관계’와 같다. 일본에서 ‘오야지(아버지)’라는 말은 혈연 관계로서의 아버지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보스(boss. 두목/사장님/상관/우두머리 : 옮긴이)는 다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치와나카마의 동일성으로 단결하여 사회 전체의 발전을 꾀해 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삼는 – 옮긴이) 집단주의적 일본 사회에서는(집단주의 사회인 일본에서는 – 옮긴이) ‘하게마사레루’, ‘간바루’라는 말이 대립과 마찰 그리고 경쟁심이라는 말에 대응한다. 이 말 역시 일본 사람들이 인사말로 가장 많이 애용하고 있는(애용하는/즐겨 쓰는 – 옮긴이) 단어(낱말 – 옮긴이) 가운데 하나이다.
‘하게무’는 우리말(배달말 – 옮긴이)로 ‘독려(督勵. 살펴보며[督] 권장[勵]함 → 감독[督]하며 격려[勵]함 : 옮긴이)’라고 할 때의 ‘려(勵)’에 해당하는 것이다. 영어의 ‘인컬레징’과 맞먹는 말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경쟁자는 항상(늘 – 옮긴이) 가까운 데 있는 것이므로,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일본은 그것을 ‘하게무’의 관계로 옮겨 나카마 의식을 고취하는 것으로 바꿔 가려고 해 왔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나카마가 되어 가는지, 그리고 그 원동력인 ‘하게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 단서를 직접 이 동화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 한 그릇 메밀 국수 』 에서 ‘하게미’에 대한 말이 직접 나오는 대목을 읽어 보면 이렇다.
“12월 31일 밤 세 식구가 먹은 한 그릇의 메밀 국수가 정말 맛있었다는 것 …… 세 사람이 한 그릇만 시켰는데도 소바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하고 – 옮긴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해 주었다는 것, 그 인사말은 꼭 ‘(힘든 현실에 – 옮긴이) 지면 안 돼! 간밧테(열심히 뛰어)! 힘껏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는 것, 그래서 준은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자기도 손님들에게 ‘열심히 뛰세요. 힘껏 사세요.’라고 정성껏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소바집 주인이 되겠다는 것, 이런 것을 큰 소리로 읽었던 거예요.”
그리고 수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그들이 이 소바집을 찾아왔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하게미’에 대한 말을 반복한다(되풀이한다 – 옮긴이).
“우리는 15년 전 섣달 그믐날 밤, 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1 인분의 메밀 국수를 시켜 먹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 그 한 그릇의 메밀 국수에 ‘하게마사레루’, 셋이서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지요.”
소바집 주인(파는 사람) 쪽에서 보면 손님을 ‘하게무(용기를 주는 것)’ 한 것이 되고, 손님 쪽에서 보면 ‘하게마사레루(용기를 받는 것)’가 된다.
그러나 이 ‘하게미’라는 말은 손님 쪽에서만이 아니라 북해정 주인의 입에서도 똑같이 나오고 있는 말이다. 식당을 모두 고쳐 놓고도 낡은 2번 테이블의 옛 의자와 식탁을 남겨 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손님들의 질문(물음 – 옮긴이)에, 북해정 주인은 ‘한 그릇 메밀 국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이 테이블(식탁 – 옮긴이)을 보면서 그것을 우리의 ‘하게미’로 삼고 있답니다. 언젠가 그 세 손님이 다시 우리를 찾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때 그 테이블로 맞이하려고 말입니다.”
모자 세 사람은 북해정 주인에게서 힘을 얻고, 북해정 주인 부부는 모자 세 사람의 힘을 입어 번창해 간 것이다. 이 공존공영의 법칙을 일상 생활에서 표현한 것이 ‘하게미’요 ‘간바루’라는 일본 인사말이다.
기쿠바리에서 시작된 인간 관계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행위에서 차차 야사시 → 오모이야리 → 우치와바나시 → 우치와나카마 → 하게미로 발전하여 공존공영의 세계로 나간다. 이것이 개인주의에 토대를 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 “미국의 꿈”이라는 뜻. 의역하자면 “미국으로 건너가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과 대조를 이루는 집단주의의(‘집단주의에 바탕을 둔’ - 옮긴이) ‘저패니즈 드림(Japanese dream. “일본의 꿈”이라는 뜻. 문맥상 “일본인이 생각하는 발전과 성공”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 옮긴이)’이다.
그리고 그 꿈(저패니즈 드림 – 옮긴이)의 중심은 (할리우드에서 내놓은 – 옮긴이)「 자이언트 」영화에서 보듯이 그런 대유전(큰 유전[油田] - 옮긴이)이 아니라 150엔짜리 작은 한 그릇의 메밀 국수이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이 유럽계 미국인이나 유대인에게만 ‘이룰 수 있는 꿈’이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중남미계 미국인[라틴계 미국인인 ‘라티노’]이나 아랍계 미국인에게는 사실상 ‘이룰 수 없는 꿈’이듯이, 저패니즈 드림도 일본 안에 사는 ‘순혈’ 일본인에게만 ‘이룰 수 있는 꿈’이고 일본으로 건너와서 사는 아시아인들이나 흑인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 옮긴이)
▶ 소바집 주인과 의사
이 동화에서 한 그릇의 메밀 국수를 나눠 먹던 가난뱅이 아이는 의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 역시 이런 ‘하게미’의 시각을 통해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확실해진다.
왜 하필 의사가 되었다고 했는가. 우리(한국 – 옮긴이) 식으로 말하면 의사란 이른바 ‘사’자 붙은 인기 직업의 하나로, ‘고생 끝에 낙을 얻게 된 경제적 의미’로 해석되기(풀이되기 – 옮긴이) 쉽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의 문맥으로 보면 일본에서 제일 가는 메밀국수집 주인이 되겠다고 한 그 아이의 원래 포부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의사 역시(또한 – 옮긴이) 북해정 소바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곤경에 빠져 있는 손님들에게 따뜻한 말과 삶의 용기를 북돋는 친절을 보여 줄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 메밀국수집 주인이 하얀 가운을 입고 진료소에 나타난다면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
현실적으로 북해정 주인과 같은 ‘기쿠바리’/‘하게미’의 정신을 살리면, 요즘(서기 1992년 현재 – 옮긴이) 일본 의학계에 일고 있는 개혁 물결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요즘 일본 의학계에서는 ‘환자들에게 진료 카드를 공개하고, 그 카드 내용도 보통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 적도록 해야 한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의 의학 관계 의식 조사를 보면, 네 명에 한 명꼴로(그러니까, 백분율로 따지면 전체의 25%가 – 옮긴이) 의사의 진료에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그 가운데서도 – 옮긴이) 특히, 진료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가장 많아서 (그들이 제기한 불만들 가운데 – 옮긴이) 5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차지한다는 – 옮긴이) 것이다.
이러한 통계는 의료에 있어서(의료에서 – 옮긴이) 환자에 대한 의사의 ‘기쿠바리’와 ‘하게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일깨워 준다. 한방(漢方. 한방 의사 – 옮긴이)이든 양의(洋醫. 서양식 의술을 배운 의사 – 옮긴이)이든 환자에 대해서 의사는 일방통행적 치료를 해 주는 경우가 많다(서른 두 해 전의 일본 의사들이 이랬다는 이야긴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 옮긴이).
한방에서는 약봉지에 환자가 읽을 수도 없는 약명(藥名. 약의 이름 – 옮긴이)을 초서로 그냥 갈겨 써 주기도 하고, 양의들은 라틴어/독일어(도이칠란트어 – 옮긴이)의 전문 용어로 처방전을 쓴다. 그나마도 그 부적 같은 진료 카드를 환자에게 보여 주지도 않는다.
진료 카드를 환자에게 보여 주고 병을 자세히 설명하여 준다는 것은, 의사와 환자가 하나의 우치와나카마가 된다는 것이다. 병과 싸우는 손님에게 어깨를 쳐 주며 큰 소리로 ‘간밧테’라고 말해 주는 북해정 주인의 서비스 정신인 하게미인 것이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관계를, 치료해 주는 사람과 치료를 받는 사람의 관계로 바꿔 놓듯이, 이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인간 관계는 무한히 확대 확산해 갈 수 있다.
( → 8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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