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증거된 대로 베드로의 선포와 함께 성전 미문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가 정말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 사건은 하나님의 세계, 복음의 세계, 믿음의 세계에 있어 아주 핵심적이면서도 원론적이고 신령하면서도 현실적인 부분을 잘 보여 주고 알 수 있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따지고 보면 우리 모든 인생들과 온 세상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단절케 된 것이며, 영적으로는 진노와 저주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노예 상태에 빠지게 된 것으로..
진정 원래는 이 세상이나 인생들 자체에서는 진정한 소망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반대로 절망 그 자체가 된 것이며, 더욱이 값없는 은혜들이나 하늘의 능력들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실상인 것임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과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잘 통찰해 보면 그러한 상황에서 구주 예수님께서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시고 온 우주보다도 더 크시며 영원보다도 더 작으실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가 된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과 실제는..
일반 은총이든지 특별 은총이든지 간에 어쨌든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에 있어, 특히 믿음으로 인한 값없는 은혜와 공짜와 같은 선물인 역사들에 있어서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과 인류 역사의 상황들 속에서의 누림과 경험들에 있어, 더 나아가 세상 끝 날의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에 있어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만이 유일한 방법과 통로라는 것이고, 그에 있어서의 정도와 강도와 분량과 종류와 범위 등은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상상 이상의 일들과 시공을 초월하는 무한대 그 자체인 것으로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만큼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상 그러한 것이기에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구주 예수님의 이름 한 번으로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 사건이 실제로 가능했던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대략 2000년이라는 시간들과 여러 공간적인 요소들을 넘어서 오늘날의 우리들이 단지 바로 그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이신칭의의 구원이 가능한 것이며, 게다가 날마다 순간마다 그 예수님의 이름과 함께 크고 작은 하늘의 힘과 역사들, 응답과 예비들도 가능한 것이고, 심지어는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도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이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었던 것일 뿐 아니라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살아 있는 말씀의 신앙이 됨도 가능했던 것이고, 더 나아가 세상 끝 날의 부활과 영생까지도 가능한 것으로 사실상 다른 그 누구보다 오늘 이 시간 나 자신에 있어서의 모든 일들, 사함과 나음들, 회복과 변화들, 응답과 예비들, 용서와 사랑들, 평안과 담대함들, 승리와 역전들, 이적과 기사들, 믿음의 결단과 몸부림들 등과 같이 세상이 주지 못할 온갖 하늘의 힘과 구원의 역사들, 복과 열매들, 부흥과 영향력들 등이 실상은 나 자신 자체 뿐 아니라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 더군다나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있어서까지도, 참으로 온 지경들, 지구 반대편에 이르기까지도 수십, 수백, 수천 가지 이상의 모양과 방법과 역사와 실제들로 구주 예수님의 이름과 함께 생생하고 강렬하며 풍성하게 맛보게 되는 것이 원론적으로는 가능한 것인데..
좀 더 정확하게 부연하면 그러한 구주 예수님으로 인한 모든 구원의 일들마다 단 하나,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 전부터 계획, 약속, 준비,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심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고 애초부터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모든 일들 하나하나마다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인 성령님께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정말 누리고 경험하며 나타나고 성취되어 지게 하신 일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그렇듯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그대로 모든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본질적으로는 그러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자체가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다 실행하시며 모두 이루시는 분인 것임을 감안할 때 아무나에게, 아무렇게나, 무조건 주여 주여 한다고 다 되거나 더군다나 그렇게까지 강력한 역사들이 나타날 수는 없는 것으로 그 무엇보다 말씀,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이 모든 우선과 전제, 기준과 관건, 방법과 통로가 아닐 수 없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며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직접적, 현실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고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된 자가 삶의 자리와 역사의 현장에 있어서도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어느 정도로 죄악들과 싸우면서 얼마나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느냐가 중대하고 직결되며 절대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실제로 아래 본문에서의 베드로야 말로 그때 당시는 그 전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던 때와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던 때였을 뿐 아니라 정반대로 생명을 아끼지 않았고 목숨까지 걸었을 정도의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었던 시기였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3:1~10)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7월 6일(토)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