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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렌이란 무엇인가
▶ 상도(商道)의 상징물
섣달 그믐(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이라는이라는 시간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 도시코시 소바였듯이, 북해정의 공간적 배경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노렌(暖簾[난렴. ‘따뜻하게 하는(暖) 발(簾)’ → 포렴[문에 간판처럼 늘인 베 조각/상점 입구의 처마 끝이나 점두에 치는 (상호가 든) 막] – 옮긴이])이다.
‘노렌’은 원래 햇빛을 가리기 위해 처마에 차일처럼 드리운 천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에도 시대 때 상점에서 이 노렌을 많이 사용하고, 거기에 자기네 상점 옥호(屋號. 가게나 술집[屋]의 이름[號] - 옮긴이)를 물들여 걸어 놓았기 때문에, 상업 문화를 상징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상인들은 그 노렌을 자기 점포의 로고 마크(의장 부호 – 옮긴이)로 사용한 것이다. 가시적인(눈으로 볼 수 있는 – 옮긴이) 간판만이 아니라, 노렌이라고 하면 그 점포의 신용이나 전통과 같은 무형의(형체가 없는 – 옮긴이) 재산까지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국가(나라 – 옮긴이)에게는 국기가 있고, 군인에게는 군기(軍旗. 군대[軍]의 각 단위 부대를 상징하는 깃발[旗] – 옮긴이)가 있었듯이, 상인들에게는 노렌이라는 상인 깃발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에도 시대의 상인들에게 있어서(‘있어서’는 빼야 올바른 문장이 된다 – 옮긴이) 이 노렌은 자신의 분신 같은 것이어서, 대를 물려주기도 하고, 열심히 봉사한 종업원에게는 ‘노렌와케’라 하여 가게를 따로 차려 분가(分家. ‘집[家]을 나눔[分]’ → 딴 살림을 차려 나감 : 옮긴이)를 시키기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심지어 화재가 날 때에는(불이 났을 때에는 – 옮긴이) 그 상가(商家. 장사[商]하는 집[家] - 옮긴이)의 역사(갈마 – 옮긴이)와 얼이 배어 있는 노렌을 구하려다가 타죽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군국주의가 지배한 전쟁기(제2차 세계대전 때인 서기 1937 ~ 1945년 – 옮긴이)에도 (일본의 – 옮긴이) 상인들은 자기네의 노렌을 지키기 위해서 (근대 왜국[倭國]의 – 옮긴이) 군부(軍府)의 명령에 복종하지(따르지 – 옮긴이) 않았던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세(伊勢) 신궁 앞에서 그 순례자들을 상대로 수백 년 동안 떡을 팔아 온 (떡집인 – 옮긴이) ‘아카모치야’가 군인들의 위문용으로 떡을 다량 생산하여 납품(納品. ‘물건[品]을 바침[納]’ → 주문받은 물품을 주문한 사람이 바라는 곳에 가져다 줆 : 옮긴이)하라고 강요당한 적이 있었지만, 그 질(품질 – 옮긴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까닭 – 옮긴이)로 끝내 거부했다는 일화도 그 중의(가운데 – 옮긴이) 하나이다. 품질이나 서비스를 저하시키는 것은 ‘노렌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만화책( 동화 『 한 그릇 메밀 국수 』 를 만화로 옮긴 것 – 옮긴이 )에서도, 작은 소바집이지만 북해정이라는 노렌이 자랑스럽게, 그리고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해정’이라고 쓴 노렌이 한 프레임(틀. 여기서는 만화의 칸, 그러니까 ‘컷’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전체를 차지하고 커다랗게 클로즈업 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 동화에서는 하루 일을 마친 소바집 부부가 ‘노렌을 그만 내립시다.’라고(하고 – 옮긴이) 말하는 순간에 문제의 세 식구가 들어와 그 드라마의 막이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부분은 ‘신설(新雪. “새[新] 눈[雪]” → 새로 쌓여 내린 눈 : 옮긴이)에 반사되어 유리창 불빛에 어렴풋이 떠오른 북해정이라고 쓴 노렌이, 한 발 일찍 온 정월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라는(하는 – 옮긴이) 묘사로 마감된다.
그러니까 노렌에서 드라마가 시작하여 노렌에서 그 드라마가 끝난다. 이 이야기를 열고 닫는 막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하는 – 옮긴이) 것이 북해정 노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에 있는 어머니나 북해정 주인 부부의 이름은 전연 겉에 나타나 있지 않다. 아이들 이름이 대화 속에서 딱 한 군데 나오긴 하지만, 그나마 성(‘성씨’를 줄인 말 – 옮긴이)은 비치지도 않는다.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들도 거의 개인 이름 같은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그 눈물은 누구에게 흘리는 눈물일까. 하지만 개인 이름이 아니라, 북해정(이라는 – 옮긴이) 소바집 이름은 선명하게 남아 귀에 쟁쟁하다. 적어도 일본에서만은 ‘인생은 짧고 노렌은 길다.’이다.
▶ 조닌(町人[정인 – 옮긴이])문화
우리(근세조선 – 옮긴이)와 마찬가지로, 에도(江戶[강호 – 옮긴이])에도 사농공상(士農工商) [이라는 – 옮긴이] 사민(四民. 네[四] 가지 신분으로 나뉘는 백성[民]들 – 옮긴이)의 구별이 있어, 명목상으로는 (‘상[商]’에 속하는 – 옮긴이) 상인이 최하위 계층으로 되어 있었으나, 우리와는 달리 서구의 부르주아처럼 겐로쿠(元祿[원록 – 옮긴이]) 시대(서기로는 1688 ~ 1704년. 에도시대에 속한다. ‘원록’은 그 무렵 일본에서 쓰이던 연호의 이름이다 – 옮긴이)만 되어도 이미 사무라이의 힘을 압도하는 계층으로 부상된다(떠오른다 – 옮긴이)[ 그러나 내가 읽은 역사책에 따르면, 이들은 부를 쌓아도 유흥과 쾌락에만 몰두했지, 서양의 상인들처럼 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그래서 한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은가? - 옮긴이 ]. 이른바 ‘조닌’이라고 불린 사람들이다.
일본과 한국( 한국인이 한국과 다른 나라를 함께 거론할 때, 왜 한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를 앞세워야 하는가? 게다가 글쓴이는 한국인 교수인데, 왜 이런 식으로 일본부터 먼저 내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 – 옮긴이 )의 문화, 그리고 사회에 가장 차이(다름 – 옮긴이)가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노렌’으로 상징되는 상인 정신이다. 노렌은커녕, 상점을 뜻하는 ‘가게’란 말이 ‘가가(假家. “임시[假]로 지은 집[家]”이라는 뜻도 있는 말이다 – 옮긴이)’에서 왔듯이, 기둥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것이 우리의 상업 문화였다.
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감동의 원줄기는 바로 소바집 부부의 철저한 상인 기질에 있다.
(만약 일본에 – 옮긴이) 노렌 문화가 없었다면 이 이야기도 없다. 왜냐 하면, 조리대의 불도 이미 다 끄고 문 닫을 준비를 마친 폐점 시각에, 그것도 섣달 그믐날 밤에, 또 세 사람이 와서 1인분만 시키는 손님을 싫은 기색 없이 오히려 반겨 맞아 주었기 때문에, 그 드라마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비의 나라, 일찍이 노렌 문화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우리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였을까 상상해 보면 된다. 문전(門前. 문[門] 앞[前] - 옮긴이)에서 내쫓아버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돈도 받지 않고 3인분의 메밀 국수를 말아 주었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해정 주인은 비록 때늦게 찾아온 귀찮은 손님이요, 세 사람이 한 그릇을 시켜 먹는 가난한 손님일지라도 다른 손님과 똑같이 대한다. 150엔 동전을 내놓고 나가는 손님도, 만 엔짜리 지폐를 내놓고 나가는 손님도 다같이 ‘아리가토고자이마시타(일본어로 “고마웠습니다.”라는 뜻 – 옮긴이).’라고 고개를 숙여야 할 손님인 것이다.
(물건을 – 옮긴이)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 옮긴이) 파는 사람이 있다. (가게인 – 옮긴이) 내 집을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므로, 비로소 ‘자기 직업’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고객 지향적 발상은 일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상업 문화를 꽃피운 나라(예를 들면, 아르메니아나 이란이나 레바논이나 네덜란드나 제하[諸夏] – 옮긴이)에서는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가 성공한 것도 바로 이 소바집 주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고객을 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 1페니(동전의 이름 – 옮긴이)를 들고 상점에 갔다가, 상점 주인에게 쫓겨났던 일이 있었다. 그는 어린 마음에도 자기가 만약 어른이 되면 1페니를 들고 찾아오는 손님에게도 따뜻하게 서비스하는 그런 가게를 내겠다고 결심한다(마음먹는다 – 옮긴이). 그는 일생 동안 어렸을 때의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실천했고, 그런 서비스 정신은 그를 ‘백화점 왕’이 되게끔 하였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된 것은 이러한 워너 메이커의 정신을 초석(礎石. 주춧돌 – 옮긴이)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메밀 국수 한 그릇을 시킨 손님인데도 난롯가의 2번 테이블(식탁 – 옮긴이)로 친절하게 안내하고, 조금 전에 (다른 – 옮긴이) 손님들에게 하던 그대로 ‘가케 잇쵸!’라고 외치는 안주인(북해정의 운영자인 아내 – 옮긴이), 그리고 그 말을 받아 ‘아이욧 가케 잇쵸!’라고 말하며 꺼진 불을 다시 켜고 국수를 마는 바깥 주인(북해정의 요리사인 남편 – 옮긴이)의 그 모습에서 우리는 장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서비스 정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다. 150엔 짜리 가케소바 한 그릇을 파는데도, 성심(誠心. 정성스러운[誠] 마음[心] - 옮긴이)을 다 기울이는 것이 그 노렌 문화이다.
셋이서 한 그릇을 시켜 먹는 딱한 사정을 보고, 안주인은 슬며시 (메밀 국수를 – 옮긴이) 3인분 내자고 하는데도, 바깥 주인은 오히려 손님이 거북해한다고 주문 그대로 한 그릇만 내놓는다. 우리 같았으면 아이들도 있겠다, 장사하는 입장(처지 – 옮긴이)을 떠나서 세 그릇을 차려 주었을 것이며, 그까짓 150엔 안 받는다고 망할 것 아니라며 아예 돈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해정의 원리는 다르다. 장사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어떤 상황이라도 – 옮긴이 ) 장사하는 사람의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장사는 장사, 인정은 인정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인에게는 – 옮긴이) 인정마저도 상도(商道)의 하나이다. 그러기 때문에 소바집 주인 부부는 카운터 뒤에서 모자간의 말을 엿듣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그릇 수와 받을 돈은 정확하게 셈을 한다.
그렇다고 (그들 부부가 – 옮긴이) 약정서(約定書. 일을 약속하여[約] 정한[定] 내용을 적은 글[書] : 옮긴이)대로 가슴에서 한 폰드(무게/부피를 재는 잉글랜드의 옛 단위 – 옮긴이)의 살을 도려 내겠다는 베니스의 상인(셰익스피어의 희곡인 『 베니스의 상인 』 에 나오는 악역인 ‘샤일록’ 노인을 일컫는다 – 옮긴이)은 아닌 것이다.
(요리사인 남편은 – 옮긴이) 주문대로 1인분을 내놓으면서도, 눈치 안 채게 사리 반 덩이를 더 넣어준다. 그리고 (북해정의 운영자인 부부는 – 옮긴이) 이듬해 메밀 국수 값이 200엔으로 올랐을 때에는, 그들(북해정을 찾아온 손님인 세 모자 – 옮긴이)이 나타나기 전에 메뉴판(차림표 – 옮긴이)을 뒤집어 옛날 가격 표시로 바꿔 놓기도 한다.
(그들 부부는 – 옮긴이) 계산은 계산대로 하면서도, 그들이 ‘닌죠(人情[인정 – 옮긴이])’라고 부르고 있는(부르는 – 옮긴이) 인간의 마음은 잃지 않으려고 한다. 닌죠와 계산의 모순이 갈등이나 대립이 아니라, 융합하여 한덩어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프로 상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상도요 상술이다.
( 그러나 오늘날,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거품 경제가 무너진 서기 1990년 이후에는 일본에서도 이런 정신은 많이 사라졌다. 서너 해 전쯤, 일본의 한 중소기업이자 자동차 수리 업체인 회사의 여러 지부에서 ‘좀 더 많은 수리 실적을 올리고, 그만큼 더 많은 수리비를 받으려고’ 기술자와 지부장들이 일부러 손님이 맡긴 멀쩡한 자동차를 망가뜨리다가 들킨 일이 일어난 것이 좋은 예다. 그런 사례를 보면, 오늘날[서기 2020년대]의 일본 기업이나 상인들에게는 ‘이익을 셈하는[“계산하는”] 마음’만 있지, ‘[손님을 위한] 인정’은 없는 것 같다 – 옮긴이 )
그러한 마인드(mind. 마음 – 옮긴이)로 노렌을 지켜 가는 것이 북해정을 번창하게 만들고, 패전(여기서는 근대 왜국[倭國]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진 일을 가리킨다 – 옮긴이)의 잿더미에서 일본 전체를 오늘(서기 1992년 – 옮긴이)과 같은 경제 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상인 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그런 문화를 지녔다 하더라도, 냉전이 시작된 뒤 미국이 일본을 ‘용서[!]’하고 원조한 일과, 6.25 전쟁과, 비엣남[Vietnam] 전쟁이 없었다면, 2차 대전 이후의 일본은 빠르게 성장하거나 번영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 옮긴이).
이 노렌 중시의 문화라는 것을 딱딱한 말로 옮기면, ‘상업 긍정의 사상’을 뜻하는 것이고, 경제적 용어로 (정의 – 옮긴이)하자면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중국(사실은 제하[諸夏] 왕조로 볼 수 없는 청나라 – 옮긴이)이나 한국(근세조선/대한제국 – 옮긴이)과 달리 하루 일찍 근대화한 것은,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 성공을 거둔 것은 근대화 이전에 그와 같은 상업 긍정의 문화가 싹터 있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이와는 다르게 설명/주장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은 당시, 그러니까 서기 19세기 중/후반에 서양 제국주의 열강과 로[Ro]시야 제국의 관심이 온통 서아시아나 무굴 제국이나 청나라에 쏠려 있었고, 특히 무굴 제국과 청나라를 탐내는 나라들이 많았으며, 그 때문에 일본은 주목을 덜 받았고, 일본은 어디까지나 ‘청나라로 가는 중간 기착지’ 정도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의 압력을 무굴 제국이나 청나라처럼 많이 받지 않았으며, 그래서 숨 돌릴 여유가 있었던 일본이 자기 힘으로 나라를 바꾸고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글도 진실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무굴제국이나 청나라와는 달리 서양 제국주의 나라들의 압력을 ‘덜’ 받았다는 환경과, 이 글에서 설명하는 상업을 긍정하는 문화가 일본이 서양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만나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긴다는 이야기다 – 옮긴이)
▶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석전매암 – 옮긴이])의 심학(心學)
동서양 할 것 없이 근대화 이전에는 상업이나 상인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아 왔으며(한 예로, 유교의 성인인 맹가[‘맹자’의 본명]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이 장사꾼 흉내를 내며 논다는 것을 알고 기겁을 하고 – 장사꾼이 없는 –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맹자를 따랐던 근세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아예 ‘농자천하지대본’을 내세우며 장사꾼들을 ‘가장 낮고 천한 족속’들 가운데 하나로 못박았다.
또한 남아시아의 가르침인 베다[Veda]교 - 다른 말로는 '브라만교'. 힌두교의 전신[前身]이다 - 는 장사꾼도 속하는 바르나[흔히 '카스트'로 불리나, 현지에서는 '바르나'와 '자띠'라는 말을 쓴다. '카스트'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바르나/자띠 제도에 붙인 이름이다]인 '바이샤'를 '사제[브라만]나 임금/귀족/군인[끄샤뜨리아]보다 낮은 신분인 평민'으로 평가절하했다[한마디로, 불교나 자이나교가 나타나기 전에는 남아시아 사회에서 장사꾼이 사제나 군인보다 '격이 낮은 인간'으로 여겨졌다는 이야기다].
이 점은 근세 이전의 서양도 마찬가지라서, 옛 헬라스 서사시이자 본향풀이[ ‘ 신화 ’ ]인 『 오뒷세이아 』 에는, 한 인물이 주인공인 오뒷세우스에게 ‘이곳 저곳으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장사치들’이 천박하다고 말하는 구절이 나오고,
중세 유럽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책이기도 했던 『 성경 』 의 「 신약성서 」 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악[惡]의 뿌리가 되나니,”라는 구절이나 “사람은 창조주[예수교와 유대교의 신인 여호와]와 [다신교도들이 ‘돈의 신’으로 모셨던] 맘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느니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 옮긴이), 그런 점에서는 일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유통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기’ - 옮긴이)과는 달리, ‘(물건을 – 옮긴이) 사고 파는 일’은 정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단지 물건을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옮겨 놓고 (그 대가로 - 옮긴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반윤리적인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비록 우리(근세조선 – 옮긴이)와 같은 귀곡천상(貴穀賤商. ‘곡식을 기르는 일[穀]이 소중하고[貴], 장사[商]는 천하다[賤].’ → ‘여름지이[‘농업’/‘농사’/‘농경’]가 귀한 일이고, 장사는 천한 일이다.’라는 뜻 : 옮긴이)의 유교나 불교의 금욕적인 종교의 틀 안에서도 상업 긍정론을 들고 나온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가령(假令. 이를테면/예를 들면 : 옮긴이) ‘가이야스(海保 淸陵[해보 청릉. 네이버 검색에서는 ‘가이호 세이료’로 나온다. 일본 에도 시대의 유학자 출신 경세사상가이며, 번[藩]이 전매 정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옮긴이 ])’ 같은 사람은 “상업 자본의 발달을 긍정하여 그것에 적응하지 않으면, 무사들도 살아 남기 힘들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무사의 주종 관계를 ‘의(義 : “의리” - 옮긴이)’라고 규정한 (일본 에도 막부 – 옮긴이) 유가의 윤리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다.
그는 군신(君臣. 임금[君]과 신하[臣] - 옮긴이) 관계는 ‘의’가 아니라 상업 관계의 ‘이(利 : “이익” - 옮긴이)’에 의해서 맺어져야 한다는 시장 원리를 내세웠다. 그의 말에 의하면(따르면 – 옮긴이), ‘군(君)은 신(臣)을 (자리나 벼슬이나 돈이나 재물을 주고 – 옮긴이) “사는” 것이고, 신은 군에게 자기를 (마치 물건처럼 – 옮긴이) “파는” 것이다.’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이[勿] - 옮긴이) 이러한 극단적인 중상주의적(여기서는 ‘장사/상업을 중요하게 여기는’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발상은 ‘사무라이들은 군주에게 얽매여 있고, 농민(農民. 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기” - 옮긴이)은 토지와 기후에 얽매여 있고, 장인(匠人.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 그러니까 기술자 – 옮긴이)은 자신의 기술과 연장에 얽매여 있지만, 상인은 이익에 따라 욕망에 따라 일하기에 따라 자유롭게 능력주의 자유경쟁 속에서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오사카 상인들의 생각을 등받이(의자에 앉을 때 등이 닿는 부분 → [무언가를] 뒷받침해 주는 것 : 옮긴이)로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에도 시대 때의 상인들은 무사들에 필적(匹敵. 능력/세력이 엇비슷해서 서로 견줄 만함 : 옮긴이)할 만한 세력을 형성하고(이루고 – 옮긴이) 있어서(형성해서 → 이루어서 : 옮긴이), ‘오사카의 부상(富商. 넉넉한[富] 장사꾼[商] → 돈이 많은 상인 : 옮긴이)이 한번 화를 내면 천하의 다이묘(봉건 제후)들이 떤다.’라는 말도 있었고, ‘일본 땅은 겉에서 보면 무가(武家. 무관/무사 집안 → 무사 집단 : 옮긴이), 안에서 보면 상가(商家. 장사[商]하는 집[家] → 상인 집단 : 옮긴이)의 것’이라는 표현도 있어 왔다.
그러나 서양의 부르주아(서기 19세기에는 자본가가 되는 장사꾼/은행가들 : 옮긴이)와는 달리, 조닌들은 무(武)와 상(商)이 공존하고 윤리와 이익이 어깨동무를 같이하는 절충과 조화의 방향으로 노렌을 움직여 왔다. 그것이 이른바 ‘사혼재상(士魂才商. “무사[士]의 넋[魂], 장사꾼[商]의 재능[才]” → 정신은 무사의 그것을 따르되, 현실 세계에서는 장사꾼의 재능으로 살아간다 : 옮긴이)’이라는 이상론이다.
‘미나모토 료엔(源 了圓[원 요원 – 옮긴이])’ 교수가 『 도쿠가와 사상 소사( 德川 思想 小史 ) 』 ( ‘도쿠가와’는 ‘에도 막부’의 다른 이름인 ‘도쿠가와 막부’를 줄인 말이고, ‘소사’는 ‘작은[小] 갈마[史]’. 그러니까 ‘줄여서 간략하게 적은 갈마[“역사”]’라는 뜻이니, 이 책의 이름은 ‘에도 시대의 [일본] 사상을 간략하게 적은 갈마’라는 뜻이다 – 옮긴이 )에서 증언하고 있듯이(증언하듯이, - 옮긴이),
‘이하라 사이카쿠(井原 西鶴[정원 서학. 에도 시대의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서기 1642년에 태어나 서기 1693년에 세상을 떠났다 – 옮긴이])’의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나오는 – 옮긴이) 에도의 조닌(상인)들은 근면과 검약으로 합리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하는 – 옮긴이) 자본주의 부흥기의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 바로 상인의 이익 추구를 ‘국중(國中. 나라[國] 안[中] - 옮긴이)의 자유를 증진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맡는 – 옮긴이) 직분(職分. 직무상의 본분/마땅히 해야 할 본분 : 옮긴이)’이라고 정의한 전국시대 때[원문에는 “가마쿠라 때”라는 말이 나오지만, 가마쿠라 막부는 서기 16세기가 아니라 서기 12 ~ 14세기에 있었던 정권이기 때문에, 일본의 전국시대인 서기 16세기에 맞게 “전국시대 때”로 고쳤다 : 옮긴이](16세기)의 승려 ‘스즈키 세이산(鈴木 正三[영목 정삼. 이 사람은 “(인간은) 깨달음을 얻고자 (절에) 출가하는 행위를 (일상생활의) 노동으로써 대신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 사람이다 – 옮긴이])’이었다.
그것을 다시 100년 뒤(에도 시대 초기 – 옮긴이)에 꽃피운 사람이, (일본의 – 옮긴이) 상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심학(心學. 문맥상 왕수인[‘왕양명’의 본명]이 만들어낸 양명학이 아니라, 일본에서 만들어진 학문으로 보인다 – 옮긴이) 운동의 창시자 ‘이시다 바이간(石田 梅岩[석전 매암 – 옮긴이])’이다.
그(이시다 – 옮긴이)는 ‘사(士 : 여기서는 무사 – 옮긴이)가 군주(번주/다이묘 – 옮긴이)의 신(臣)이라면, 상공(商工. “상공업”을 줄인 말. 여기서는 “장사꾼과 기술자”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은 시정(市井. 저자[市]와 우물[井] →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 → 시장 : 옮긴이)의 신(臣)’이라고 말하면서, ‘팔아서 이익을 얻는 것은 상인의 도(道. 여기서는 “이치”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 자신이 어렸을 때 상가의 점원 노릇을 했던 체험도 있어서, 그의 심학 운동은 상인들에게 그들이 나가야 할 뚜렷한 방향과 신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심학은 근면/검약/정직이라는 상도의(商道義 : 상도덕. 장사할 때 지켜야 하는 도덕/장사꾼들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도덕과 의리 – 옮긴이)를 토대로 한 일본적 자본주의의 길을 열게 된다.
북해정 소바집의 노렌을 나부끼게 하는 그 바람 속에는 세이산과 바이간의 입김이 숨어 있는 것이다.
두 아이를 거느린 그 부인( 『 한 그릇 메밀 국수 』 에 나오는, 메밀 국수를 사 먹으러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북해정으로 온 홀어미 – 옮긴이 )의 모습에서, 우리는 근면/검약/정직의 세 가지 일본식 자본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고 있는 것(일하는 것 – 옮긴이)은 근면이요, 300엔을 아끼기 위해 도시코시 소바를 한 그릇만 시키는 것은 검약이요, 제 날짜에 보상금의 빚을 갚기 위해 이와 같은 각고(刻苦. ‘괴롭게[苦] 새김[刻]’ → 무엇을 이루려고 고생을 견디며 몹시 애를 씀 : 옮긴이)의 희생을 치르는 것은 정직이다.
( → 6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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