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고 천상병 시인 생각
이승하
역사가 덮이는 시간이기에 밤은 무섭다
그 세계…… 낮은 당연히 밝고 밤도 환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몽둥이가 있었고
비명이 있었고…… 비웃음이 있었다
흉터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태양 아래 서면 우리 모두 죄인이지만
거짓자백을 해야만 했던……
천상병 시인, 6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행려병자로 떠돌다 보니 소식 두절
친구들이 모여 내준 유고시집의 이름은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사는 것이란 결국 버티는 것
천원만 있으면 버틸 수 있다는 것
앙버팀이 아니면 엉거주춤
그렇게라도 목숨 부지하면
고문의 시간은 가리라 흉터는 평생 남겠지만
굴욕의 시간은 가리라 후유증은 오래 가겠지만
새벽이 오면 저 철창 밖에서
새가 또 지저귈 것이다
* 제3연의 3〜6행은 천상병의 시 「새」의 마지막 연임.
중앙정보부, 동백림 사건을 발표하다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오늘의 국가정보원)는 대형 공안 사건 하나를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소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죠. 발표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서독,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 공부하러 나간 유학생 및 현지 한인들이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교육을 받고 국내 인물들과 공조해 대남적화활동을 벌였다는 겁니다. 혐의자 중에는 유명 작곡가 윤이상 씨를 비롯해 화가 이응로 씨 등이 포함돼 있고 그 인원이 무려 194명에 달해 나라 안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남북 관계가 극단적 대치관계에 있던 당시에 간첩 사건 발표만큼 주목을 받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수사는 국내로도 파급돼 유럽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교수 및 강사를 맡고 있던 사람, 연구소장, 공무원 등이 대거 혐의자에 올라 조사를 받았습니다. 「귀천」으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도 혐의자 중인 한 사람과 친구로 친하게 지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결국 풀려나긴 했으나 행려병자 신세로 전락할 만큼 폐인이 돼 버렸습니다.
법원의 심리는 1969년 3월까지 계속돼 최종 사형 2명,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 등의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바로 이듬해인 1970년 광복절을 맞아 사형 판결을 받은 2명을 포함해 전원을 석방해 버립니다. 서독과 프랑스와의 외교마찰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한참 뒤인 2006년 1월 과거사 진실규명위에서는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 접촉을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했다며 정부에 사과를 권고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왜 사건을 무리하게 적용했을까요? 이는 1967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집권당은 '3선 개헌'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해 6월 8일 치러진 6ㆍ8총선에 대한 부정선거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던 때 였기 때문에 국면전환용 사건이 필요했을 겁니다.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애꿎은 사람들만 곤욕을 치른 셈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긴 그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요.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천상병과 삶과 시
1930년 일본에서 출생. 해방 후 귀국하여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시 담임 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
문예』지에 추천되었다. 6ㆍ25전쟁 중인 1951년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 송역택ㆍ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했으며, 『문예』지에 평론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실음으로써 시와 평론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되었다. 이때 주위 사람들은 행방불명된 천상병이 죽은 것으로 알고 그의 첫 번째 시집 『새』를 유고시집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1972년 친구 목순분의 누이동생 목순옥과 결혼했으며, 이후 시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 시집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간행했다. 1988년 간경화증으로 입원하여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했으며, 1990년 시집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를 간행했다. 1993년에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를 간행한 후 4월 28일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사망했다. 시인은 생전에 주벽과 방랑으로 이어져온 별난 기행 때문에 ‘천희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의 시는 고단한 삶과 비통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며 소박, 단순하고 투명한 시정신을 보여준다.
ㅡ출처 『시사상식사전』, 지식엔진연구소, 2013, 박문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