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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갚는 문화와 지속하는 문화
▶ 왜 섣달 그믐인가
(비록 이 동화가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짧은 이야기지만, 그 시간은 국민 학교(초등학교. 이 글은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나오기 전인 서기 1992년에 쓰였다 – 옮긴이) 학생이 대학을 나와 취직을 할 만큼의 긴 세월이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는 언제나 섣달 그믐이라는 하루, 그것도 밤 10시대의 짧은 한 순간으로 집약(集約. [한데] 모아서[集] 요약[約]함 – 옮긴이)되어 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해마다 돌아오는 무슨 기념일처럼 되풀이된다.
만약 이 이야기에서 섣달 그믐이라는 날을 빼내거나 바꾸면 이야기 전체가 금시(今時. ‘지금[今] [이] 때[時]’ → 곧/바로 : 옮긴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이[勿], - 옮긴이) (동화와 그것을 만화로 옮긴 책에서 나온 – 옮긴이) 그러한 사건도 감동도 일어날 수가 없다.
섣달 그믐날이 아닌 보통날에 세 모자가 와서 메밀 국수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면, 그 의미는 변질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수 년을 지속하는 이야깃거리를 낳을 수도 없다. 이 이야기는 섣달 그믐이기 때문에, 그것도 일본의 섣달 그믐이기 때문에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섣달 그믐(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음력 12월의 마지막 날 – 옮긴이)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경계선이다. 이 시간의 건널목은 어느 나라에서나 통과 제례의 상징적 의미를 띠게 된다. 우리도 이 날을 ‘까치(의) 설날’이라고 부르고(그리고 ‘사람’인 ‘우리[의] 설날’은 음력 1월 1일인 설날, 그러니까 이른바 ‘구정’이다 : 옮긴이), 묵은 것을 청산하고 새것을 받아들이는 날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일본 사람만큼 철저하게 그믐(‘섣달 그믐’을 줄인 말 – 옮긴이)을 지키고 챙기는 나라도 드물다. 섣달(음력 12월 – 옮긴이)이 되면 우리(한국인 – 옮긴이)가 요란하게 치르는 그 망년회(올바른 이름은 ‘[한]해를 보내는 모임’이라는 뜻인 ‘송년회’ - 옮긴이)라는 것도 실은 식민지 때(그러니까, 대일[對日] 항전기 – 서기 1910 ~ 1945년 – 때 : 옮긴이) 들어온 일본 풍습인 것이다.
섣달 그믐의 그같은 행사는 일본인들의 문화적 특성의 하나인 바로 ‘갚는 문화’를 상징한다.
이미 고전이 되어 버린 베네딕트 여사(이자 교수 – 옮긴이)의 『 국화와 칼 』 을 읽은 사람이라면, 일본인들이 인사말로 많이 쓰고 있는 ‘스미마센(濟みません[제미마센. 일본어로 “죄송합니다.”라는 뜻. 존댓말이다. 반말인 “미안/미안하다.”는 일본어로 “고멘(御免[어면. ごめん])”이다 – 옮긴이])’이라는 말과 그 섣달 그믐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미마센’이라는 말은, (직역하자면 – 옮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갚을 것이 남아 있다.’ 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상대방에게 – 옮긴이) 덜 갚았다는 것, ‘아직 당신에게 부채(빚 – 옮긴이)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 관계를 하나의 부채 관계(도와주거나 물건/돈을 내어준 사람과 도움을 받거나 빚을 진 사람 사이의 관계 – 옮긴이)로 보고, 그 신세를 갚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한 목표요 정형(正形. 올바른[正] 형태[形] - 옮긴이)이라는 사상이 그 말 밑바닥에 깔려 있다.
스미마센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다니는 말이 ‘오카게사마(お陰さま[오음사마 – 옮긴이)’이다. 한국말로 하자면 ‘덕분’(좀 더 의역하자면 ‘당신 덕분입니다.’ 라는 뜻. 덕분[德分]이라는 말 자체가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이라는 말에 가까운 것인데, 일본 사람들은 조금만 좋은 일이 생기면 관계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도 ‘오카게사마’라고 인사를 한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하는 말은 – 옮긴이) 궂은 일이 있으면 ‘스미마센’이고, 기쁜 일이 생기면 ‘오카게사마’이다.
이러한 ‘은혜와 갚음’은 연기(緣起.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생긴다.’는 ‘연기론[緣起論]’을 줄인 말이다. - 옮긴이)를 중시하는 불교적 영향에서(불교의 영향에서 – 옮긴이) 온(비롯된 – 옮긴이) 것이기도 하지만, 세속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다분히 사고 파는 상업 문화를 반영한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을 비롯한 유교 문화권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은 ‘납향(臘享. 섣달[臘]에 제사 지내기[享] - 옮긴이)’이라고 해서 조상님들의 은공을 갚는 의식을 치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다른 유교 국가(예를 들면, 근세조선이나 다이비엣[한자로는 ‘대월(大越)’. 비엣남(Vietnam)이 중세 ~ 근세에 썼던 나라 이름. 이는 한국의 옛 이름이 후기 고리(高麗)나 근세조선이었던 것과 같다]이나 명나라 – 옮긴이)와는 달리, 조상에 대한 수직적이고도 정신적인 보은보다는, 오히려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 옮긴이) 수평적이고 물질적인 부채 청산이라는 거래에 더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섣달 그믐은 ‘빚을 청산하는 결제일’이었던 셈이다.
즉, ‘거래 관계를 깨끗이 끝마무리 짓는 달이요, 그 마지막 날’로서, 스미마센과 오카게사마의 인사를 최대한으로 치르는 의식 일이다.
무심코 읽어 넘어가게 되는 이 이야기의 대목 가운데서도, 우리는 ‘섣달 그믐’의 일본적 특성을 여러 군데서 찾아 낼 수 있다.
북해정이 섣달 그믐이면 일 년(한 해 – 옮긴이) 중에(가운데 – 옮긴이) 가장 바쁜 날이라는 직접적인 설명이 아니더라도, 세 식구가 그 곳에 나타나게 된 이유(까닭 – 옮긴이)도 그것이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일 년 동안 고생한 아들들에게 무엇인가를 갚아야 한다. 그것이 메밀 국수 한 그릇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들과의 대화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 여자 손님은 그 동안 갚아야 할 빚(보상금)을 섣달 그믐날 모두 갚았던 것이다.
메밀 국수 한 그릇을 놓고 전개되는 이 이야기를 이와 같은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것은 ‘한 여인의 빚 갚는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다.
교통 사고로 남편을 잃고 여자 혼자서 살림을 꾸려 가면서도, 그 사고 때 (피해를 – 옮긴이) 입은 여덟 명의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몇 해를 두고 갚아 나간다. 한 그릇의 메밀 국수를 셋이서 나눠 먹었다는 것도 바로 이 빚을 갚기 위한, 그 (‘빚을 갚고 피해자들에게 속죄하겠다.’는 – 옮긴이) 약속을 지키기 위한, 남편의 과실(過失. ‘법을 어기고[過] 잘못을 저지르다[失]’ → 잘못이나 허물/부주의한 나머지 어떤 결과의 발생을 미리 내다보지 못한 일 : 옮긴이)을 보상하기 위한 ‘스미마센’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동화 속의 어머니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제대로 – 옮긴이)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근면과 절약의 나날을 보낸다. 결국 이 빚을 다 갚은 그믐날 비로소 메밀 국수를 한 그릇 더 시켜 두 그릇이 된다. 이 극한적인 갚음의 문화, 자학에 가까운 헌신적인 갚음 …… 이러한 이야기들이 바로 우리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감동의 원천이다.
그뿐이 아니다. 10여 년이 지난 섣달 그믐에 이 세 모자가 북해정 소바집에 다시 들르는 것도, 전에 한 그릇밖에 시키지 못했던 미안함을 갚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갚는 것은 은혜만이 아니다. 이 ‘갚는 문화’가 어둠으로 반전되고(뒤집히고/거꾸로 바뀌고 – 옮긴이), 부정적인 것으로 기울면, 미담(美談. 아름다운 이야기 – 옮긴이)은 처철한 복수담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은혜와 빚만이 아니라 원한도 (다른 사람에게 – 옮긴이) ‘갚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화기 때 일본 문단의 대표적 작가였던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하목 수석 – 옮긴이])’는, 어째서 일본 문학에는 복수의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사소한 시비, 원한, 그리고 모욕을 갚기 위해 수십 년을 벼르다가 끝내는 복수를 하고 마는 그런 이야기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그냥 많은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고전 – 옮긴이) 문학은 주군의 원수를 갚는 47명의 사무라이 이야기 『 주신구라(忠臣藏[충신장. ‘장(藏)’은 일본어로 ‘곳집/창고’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충신장’은 ‘충신들이 [가득 찬] 창고’라는 뜻이다 – 옮긴이]) 』 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한 그릇 메밀국수 』 와 같이 따뜻하고 감동적인 미담을 조금만 뒤집어 놓으면, 한 그릇 메밀국수가 아니라 한 자루 칼이, 그리고 한 방울 눈물이 아니라 피가 튀는 무시무시한 복수담(복수 이야기 – 옮긴이)이 전개된다(펼쳐진다 – 옮긴이). 빚이나 은혜를 갚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원수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앙갚음을 하는 것도 – 옮긴이) (다른 사람에게 – 옮긴이) ‘갚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국수 문화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이야기는 왜 섣달 그믐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 옮긴이) 왜 그것이 일본의 섣달 그믐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대답은 이 이야기의 표제어로 등장할(나타날 – 옮긴이)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건의 ‘태풍의 눈’이 되는 ‘소바(메밀 국수)’와 관련된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배달민족 – 옮긴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섣달 그믐을 샌다. 즉 ‘도시코시 소바(해넘이 메밀국수 – 옮긴이)’라는 것을 먹으면서 한 해를 보내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있어’는 빼야 문법/어법에 맞다 – 옮긴이) ‘올드 랭 사인(한국에서는 <석별의 정>/<작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알바[Alba. 영어권에서 “스코틀랜드”로 부르는 곳의 바른 이름이자 켈트어 이름] 노래. 헤어짐/떠나보냄을 아쉬워하는 노래다 – 옮긴이)’은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입으로 먹는 소바(메밀국수 – 옮긴이)이다.
만약 이런 풍습이 없었더라면, 이 이야기( 『 한 그릇 메밀 국수 』 - 옮긴이 )는 탄생될( 태어날 – 옮긴이 )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과 사건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떼어놓을 수 없는 – 옮긴이)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관계를 갖고 있다( 맺고 있다 – 옮긴이 ).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도시코시 소바의 풍습과 소바를 좋아하는 일본 문화의 한 정체성을 담고 있는 셈이다.
비록 한 그릇을 시켜 놓고 셋이서 먹더라도 한 가족이 모여 도시코시 소바를 먹으려 한 마음이 바로 이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낳게 한 불쏘시개 같은 발화점이 된 것이 분명하다.
일본 사람들이 도시코시 소바를 먹는 것은 다분히 제례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중국(제하[ 諸夏 ] - 옮긴이)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국수 문화권에서, 국수는 경사스러운 잔치 음식이다. (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 옮긴이 ) 국수 가락이 실처럼 길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이어지기 때문에 – 옮긴이 ), ‘국수를 먹으면 장수를 한다( 오래 산다 – 옮긴이 ).’ 고 믿는다.
그러고 보면, 섣달 그믐에 도시코시 소바를 먹는다는 것은 약간의 모순처럼 느껴진다. 섣달 그믐이 앞에서 본 것처럼 ‘모든 것을 결산하고 분명한 매듭을 짓고 넘어가려는 갚는 문화의 상징’이라면, 국수는 오히려 그 반대로(그와는 거꾸로 – 옮긴이) ‘이어지고 지속하고 연속하는 것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 사람들의 오랜 생활 풍습 역시(또한 – 옮긴이) 밀린 것을 갚고 묵은 것을 매듭지어 가면서 끝없이 변신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시코시 소바처럼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綿綿히. → 이어지고[綿] 이어지며[綿] → 끊이지 아니하고 끝없이 이어지며 – 옮긴이 ) 지속해 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인연의 끈, 거래의 끈, 그 인과의 끈을 국수 가락처럼 길게 길게 이어 가려고 한다.
여러 가지 예를 들 것 없이, 일본은 하루가 다르게 신(新. 새로운 – 옮긴이)발명품을 만들어 새 시장을 개척하고 있지만(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서른 두 해 전, 그러니까 한 세대 전인 서기 1992년에 쓰였다. 그 때는 오늘날과는 달리, 일본의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나 컴퓨터가 온 누리에 퍼져 있었고, 널리 팔렸다 – 옮긴이 ),
이른바 국수 가락처럼 끊어지지 않고 ‘만세일계( 萬世一系. “아주 오랜 세대를 한 [ 집안이 ] 이어져 내려오면서 [ 다스림 ]”이라는 뜻. 왜국[ 倭國 ] 정부와 신국[ 神國 ]사상을 따르는 왜국 국수주의자들이 자기 나라 왕실의 “독창성”과 “뛰어남”을 강조하려고 내세우는 말이기도 하다.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왜국 왕실은 “고대부터 오늘날[ 서기 2024년 현재 ]까지 한 번도 왕통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뜻이기도 하며, 왜국 우익이 “따라서 우리[ 왜국 ]는 왕조나 왕통이 여러 번 바뀐 다른 나라들보다 더 뛰어나고 훌륭하고, 우리의 < 황실( 왕실 ) >은 거룩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이 말과는 달리 “일본”이 “왜국”이던 시절[그러니까, 고대]에 이미 왕통이 세 번 – 또는 여덟 번 – 이상 바뀌었으며, 중세에는 일본 왕실이 둘로 갈라져서 [ 일본의 ] 남북조시대를 열기도 했고,
서기 1868년에는 메이지 유신을 꾀하던 세력이 그때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일본 왕실의 후계자[ 진짜 무쓰히토 왕자 ]를 죽이고 천민 출신인 “오무라 도라키치”를 무쓰히토 왕자 대신 내세워 메이지 왜왕으로 삼음으로써 왕통이 끊어졌고, 서기 1920년대 후반에 요시히토의 친아들이 아니라 사이온지라는 대신의 친아들인 히로히토가 새 왜왕이 됨으로써 왕통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이 두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게시판의 글인 「 ※ 메이지 유신 최대의 흑막 두 번째, 바꿔치기한 메이지 왕 」 1 ~ 9 편과, 「 메이지 일왕이 무쓰히토 왕자가 아니라 오무라 도라키치라는 설명을 믿을 수 있는 까닭 」 을 읽어보라 ].
그러므로 이 말과 이 말에 담긴 개념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정확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 옮긴이 )’로 이어져 내려온 천황(왜왕[倭王] - 옮긴이) 밑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 옮긴이) 온 세계(온 누리 – 옮긴이)가 사용하고 있는(쓰는 – 옮긴이) 서력(다른 말로는 ‘서기’ - 옮긴이)를 제쳐 두고( 그러나 이슬람권은 오늘날에도 ‘헤지라[ 히즈라 ]’라는, 자신들만의 달력을 쓰고, 불교 국가인 미얀마[ 버마 ]도 ‘버마력’이라는, 서력과는 다른 달력을 쓰므로, 이 교수의 이런 설명은 지나치게 유럽 중심주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 옮긴이 ), 아직도 ‘소화(昭和. 왜국식 발음은 “쇼와”. 히로히토 왜왕이 쓰던 연호. 서기 1929년부터 서기 1989년까지 쓰였다 – 옮긴이)’니 ‘평성(平成. 왜국식 발음은 “헤이세이”. 히로히토 왜왕의 아들인 아키히토 왜왕이 쓰던 연호. 서기 2019년까지 쓰였다 – 옮긴이)’이니 하는 왕의 시간, 왕의 연대 속에서 살아간다.
‘시간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국수를 먹는 것도, 주로 우리는 장수(長壽. 긴[長] 목숨[壽] → 오래 삶 : 옮긴이)의 뜻을 지니고 있는 데(지니는데 – 옮긴이) 비해서, 일본의 그것은 ‘사업운의 연장’, ‘번영의 지속’을 뜻하는 상업 문화의 색채가 짙다. (일본에서 – 옮긴이) 장사하는 사람들이, 끝이 넓게 펼쳐져 ‘스에히로(末廣[말광. “끝[末]이 넓혀진다[廣]”는 뜻이다 – 옮긴이])’라고 부르는 부채를 선물하는(순수한 배달말로는 ‘< 아토 >로 주는’ - 옮긴이) 풍습과 같다.
더구나 일본인이 국수 가락을 빼는 방법을 중국( 제하[ 諸夏 ] - 옮긴이 )이나 한국( 그리고 조선 공화국[ 수도 평양 ]도 – 옮긴이 )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견주면 – 옮긴이 ), 더욱 이같은 상징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먼저 – 옮긴이) 한국(과 조선 공화국 – 옮긴이)의 경우는 밀가루 반죽한 것(그냥 ‘밀가루 반죽’이라고 쓰면 안 될까? - 옮긴이)을 구멍 뚫린 그릇에다 놓고 짓눌러 빼는 (방법인 – 옮긴이) ‘착면법’을 쓰고,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은 그것(반죽 – 옮긴이)을 늘여서 빼는 ‘납면법’으로 국수 가락을 뺀다.
그런데 일본은 같은 납면법이면서도 국수 가락을 한 발에서 두 발, 두 발에서 네 발로 (조금씩 조금씩 – 옮긴이) 늘여 빼는 중국과는 달리, (마치 – 옮긴이) 누에고치에서 실을 빼듯이 한 가닥으로 길게 빼낸다고 한다.
(이 글을 옮겨적다 보니, ‘그렇다면 쌀국수[“포”]를 먹는 비엣남[Vietnam] 사람들이나, 역시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 타이[Thai] 사람들이나, 밀가루 국수를 먹는 몽골 사람들은 국수 면발을 어떻게 만들까?’ 하는 의문이 든다. - 옮긴이)
『 한 그릇 메밀 국수 』 의 이야기 발(‘국수의 가락’인 ‘면발’을 줄인 말. 여기서는 ‘이야기 그 자체’를 빗대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을 빼내는 솜씨가 바로 그렇다. 한 사람의 도둑(좀 더 정확히는, 영웅호걸. 여기서는 맨 처음 나오는 호걸인 ‘구문룡 사진[ 史進 ]’ – 옮긴이)이 108명의 도둑( ‘급시우 송강[宋江]’ 을 비롯한 양산박의 온 여덟[108] 영웅호걸들 – 옮긴이)으로 불어 나가는 양산박 이야기인 『 수호지 』 ( 다른 이름은 ‘『 수호전 』’ - 옮긴이 )가 중국식 납면법이라면, 길고 가늘게 한 가닥으로 뽑아 간 이야기가 바로 이 동화이다.
형식만이 아니다. 미망인(이 말은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여성 인권을 고려하지 않은 말이라 쓰면 안 된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일곱 해 전[그러니까 서기 1997년], 여성 지식인인 ‘이옥순’ 교수는 이 말 대신 ‘홀어미’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했고, 성향이 중도인 남성 역사학도인 나도 이 교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옮긴이)으로 죽은 남편의 빚 치다꺼리를 하면서 가정을 지켜 가는 여인상 자체가 봉건 시대의 일본 여인의 부덕(婦德. 결혼한 여성[婦]이 [지켜야 할] 덕행[德] – 옮긴이)을 한 줄기로 답습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메이지노 하하(明治の母[“메이지 시대의 어머니”라는 뜻 – 옮긴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면서도 빚을 갚기 위해, 그리고 자식을 대학까지 보내 한 사람 몫으로 키워 내는 그 진취적인 삶의 태도는 현대의 직장 여성과 다를 게 없다.
(이처럼 – 옮긴이) 변하면서도(바뀌면서도 – 옮긴이) 지속하는 원리, 일견(一見. 언뜻 보면 – 옮긴이) 모순된 것 같은 두 생활 감각이 함께 호흡하고(숨쉬고 – 옮긴이) 있는 것이 일본 사회이다.
북해정이 점점 번영하여 새로 단장을 하면서도, 세 모자가 국수 한 그릇을 놓고 먹던 2번 테이블만은 그대로 그 자리에 놓아 두고 있다. 사업이 날로 새롭게 번창해도, 단골 손님들은 옛날과 변화 없는(달라지지 않은 – 옮긴이) ‘국수 가락의 지속성’을 지니고 이어져 간다.
한 가정이, 한 기업이, 사회와 국가(나라 – 옮긴이) 전체가 이 원리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움직이는 것이 – 옮긴이) 일본이다. 일본처럼 빨리 변신하여 외국 문물을 받아들인 나라도 드물다. 그러면서도 한옆으로는 실오라기 하나 자기 것을 버리지 않고 쌓아가는 나라가 또한 일본이다.
▶ 국수와 소바
국수는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에서 한국(과 조선 공화국[수도 평양] – 옮긴이)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면(麪. ‘국수’를 일컫는 한자말. 오늘날에는 라면의 가락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 옮긴이) 문화는 마르코 폴로를 통해서(혹은 중국의 제지[製紙. 종이(紙)를 만듦(製) - 옮긴이] 기술이 실크 로드[Silk road. 비단길 – 옮긴이]를 타고 유럽에 전래될 무렵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로 들어가 전세계(全世界. 온누리 – 옮긴이)로 퍼졌다.
그런데도 ‘냉면’하면 한국(과 조선 공화국 – 옮긴이)을, ‘스파게티’나 ‘마카로니’(또는 ‘파스타’ - 옮긴이)라고 하면 이탈리아를 연상하듯이(떠올리듯이 – 옮긴이), ‘소바(메밀국수 – 옮긴이)’하면 일본을 생각하게 된다.
일본의 국수 문화는 원래 절간(한자말로는, ‘사찰[寺刹]’ - 옮긴이) 음식으로 시작했었다고 하지만, 우리(배달민족 – 옮긴이)의 (역사책인 – 옮긴이) 『 고려사 』 에도 절간에서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따라서, 후기 고리[高麗]시대의 국수는 달걀도, 고기조각도, 육수도, 회도, 육회도 집어넣지 않은, 순 식물성 음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불교는 사람을 죽이는 일 뿐 아니라,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를 죽이는 일[그러니까, ‘살생’]을 막고 그것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수에 국물이 없었던 건 아닐 테고, 후기 고리 시대의 국수는 아마 육수 대신 순 식물성 물김치의 국물을 집어넣어 말아먹었을 것이다 – 옮긴이).(그것은 – 옮긴이) 일본에 국수를 전수한(전해준 – 옮긴이) 것이 조선조(근세조선 왕조 – 옮긴이)의 선승들이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어느 칼럼니스트(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칼럼을 쓰는 사람. ‘칼럼[column]’은 ‘시사 문제/사회/풍습을 짧게 평가하는 특별기고’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특별기고가’ 정도로 옮길 수 있다 – 옮긴이)도 지적한 것처럼,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먹은 국수는 ‘끈기가 없는 메밀 국수, 칡 국수, 마 국수, 청포 국수, 들쑥 국수, 밤 국수, 백합 국수, 꽃 국수, 수수 국수 등 다양했으며, 기근이 드는 해에는 백토(白土. “흰[白] 흙[土]” → 빛깔이 희고 부드러우며 고운 흙 : 옮긴이)를 캐다가 흙 국수까지 빼어 먹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다양한 면 문화를 만들어 냈고, 그것을 일본에 전수했는데(전해주었는데 – 옮긴이), ‘면 문화의 말단국인 일본에서 (면발을 기름에 튀기고, 스프를 봉지에 따로 넣은 뒤 그 둘을 한 봉지 안에 집어넣어서 파는[그리고 그 둘을 끓은 물에 집어넣어 끓인 다음 먹는] – 옮긴이)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해(만들어내 – 옮긴이) 거꾸로 한국에 역수출하여 음식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일으킨 것이다 – 옮긴이).
이렇게 중국 대륙(제하[諸夏] - 옮긴이) 그리고 한국(과 조선 공화국 – 옮긴이)의 반도 문화를 흡수하면서도(빨아들이면서도 – 옮긴이), 그리고 근대에는(사실은 근세부터 – 옮긴이) 서양 문화를 수입하면서도, 일본은 소바 같은 자기네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 낸다.
일본은 도자기의 후진국으로(내가 열다섯 해 전에 본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서기 1592년 이전의 일본 사람들은 가장 수준이 낮은 흙그릇인 토기나, 중간 정도 수준인 흙그릇인 도기[陶器. ‘오지그릇’이라고도 부른다. 장독대의 장독도 오지그릇에 속한다]는 만들 줄 알았지만, 가장 수준 높은 흙그릇인 자기[瓷器. ‘사기그릇’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까 청자나 백자나 흑자[黑磁. 검은 도자기]는 만들 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나 서기 1592년 이전에는 일본 안에서 쓰인 자기는 모두 수입품이었다. 참고로, 한국과 조선 공화국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배달민족은 – 왕건이 세운 나라인 - 후기 고리[高麗] 때부터, 그러니까 서기 10세기 전기부터 자기의 일종인 청자를 굽기 시작했고, 이는 일본보다 6세기 더 앞선 시기다. 게다가 후기 고리 사람들은 청자의 원산지인 제하에서 만든 청자보다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고, 더 품질 좋은 청자를 만들어, 그것을 송나라에 역수출하기도 했다 – 옮긴이),
그들이 처음 자기를 구워 낸 것은 ‘이삼평(李參平)’ 등 임란(‘임진왜란’을 줄인 말. ‘임진왜란’의 바른 이름은 6년 전쟁 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이다. 이른바 ‘중화권’에서 고집하는 ‘명나라가 [근세]조선을 도와준 전쟁’이나, 왜국[倭國]에서 고집하는 ‘조선 출병’은 절대 이 전쟁을 일컫는 올바른 이름이 될 수 없다 – 옮긴이) 때 한국(근세조선 – 옮긴이)에서 잡아온 도공들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우리(한국인들 – 옮긴이)는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이 어떻게 그 기술을 가져다가 조선조 백자와 다른 일본 특유의 도자기 문화를 개발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일본의 초기 (도자기인 – 옮긴이) ‘이마리야키(伊万里燒[이만리소. “이마리”는 지역 이름이고, “소[燒]”는 “불태우다”/“익히다”/“불에 쬐어 익하다”는 뜻이므로, “이마리야키”는 “이마리라는 곳에서 불태운 것”/“이마리라는 곳에서 익혀서 만든 것”/“이마리라는 곳에서 불에 쬐어 익힌 것” → “이마리에서 만든, 불에 구운 흙그릇[그러니까, 도자기]”라는 뜻이다 : 옮긴이)’는 분명히 조선조의 기술을 받아 만든 것이었지만,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도자기를 만든 도공들의 제자/후손들은 – 옮긴이) 불과 수년(몇 해 – 옮긴이) 뒤에는 명조 말기 청조 초기의 양식을 도입하여(들여와서 – 옮긴이) 새 기술을 받아들였고, 끝내는 일본 고유의 독자적인 양식미를 도입해서 일본적인 것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 됨됨이[骨]를 고치고[換] [옛 요소가] 없어져[奪] [새롭게] 태어남[胎] → 전보다 훨씬 나아져서 완전히 다른 것처럼 됨 : 옮긴이)한다.
그 하나가 일본화의 기법과 색채를 도입한 ‘고린(光琳[광림 – 옮긴이])’파 양식의 기천요(其泉窯. ‘요[窯]’는 ‘자기를 굽는 가마 또는 장소’를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 ‘아리타야키(아리타[라는 곳에서 만든] 도자기라는 뜻 : 옮긴이)’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가 조선조(근세조선 왕조 – 옮긴이) 5백년 동안 백자만 굽고 있을 때 ‘아카에(赤繪[적회 – 옮긴이])’등 채색 도기(정확히는, 도자기 – 옮긴이)를 개발하여 포르투갈과 심지어 도자기의 본고장인 중국에까지 역수출한다.
(그리고 그들은 – 옮긴이) 근대화 이후(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해인 서기 1868년 이후 – 옮긴이)에는 프랑스의 찻잔을 재빨리 모방하여(본떠 – 옮긴이) 현대 생활(오늘날의 삶 – 옮긴이)에 맞는 도자기 문화를 만들어 낸다. 차(茶)가 뜨겁기 때문에, 전통 찻잔들은 모두 두껍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손에 들고 마실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찻잔에 손잡이를 붙이는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일본 사람들은 그것을 재빨리 들여와 얇은 찻잔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내놓았다. 세계에 아리타야키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서기 16세기 말에 – 옮긴이) 한국의 도자기 기술을 들여와 자기 것으로 개발하여(사실은 재창조하여 – 옮긴이) 수출을 하였던 그 똑같은 패턴으로, 현대(서기 20세기 – 옮긴이)에는 미국의 트랜지스터 반도체 기술을 들여와 새 상품을 개발하여 전세계의 시장으로 보내고 있다.
섣달 그믐에 등을 구부리고 도시코시 소바를 먹고 있는 궁상맞은 일본인의 모습 뒤에는, 그리고 그 세 모자가 메밀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있는 청승맞은 광경 뒤에는, 일 년 동안 천억 불(弗. ‘달러[dollar]’를 일컫는 한자말 – 옮긴이) 이상의 무역 흑자를 내는 놀라운 비밀 무기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 → 4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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