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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 북해정(北海亭)의 늦손님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12월 31일 삿포로 도시의 소바야(메밀국수집. “소바”는 일본어로 “메밀국수”고, “야”는 밥집이나 술집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북해정(北海亭)에서 시작된다.’ 그 동화책 책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만화에서는 이같은 도입문과 함께 북해도(北海道. 왜국식 발음은 ‘홋카이도’. 그러나 올바른 이름은 원주민인 ‘아이누[야운쿠르]’족의 말인 ‘아이누 모시르[아이누 모시리. “인간의 땅”이라는 뜻이다]’다 – 옮긴이)의 정취가 듬뿍 배인 삿포로(아이누 모시리에 있는 도시 – 옮긴이)의 어느 작은 거리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사람들이 쓰고 가는 우산에도, 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 지붕에도 하얀 눈이 쌓여 있고, 그 눈발 너머로 일본 특유의 이층 목조 건물의 상가가 떠오른다. 그 중(그 가운데 – 옮긴이) 한 구석에 ‘소바(메밀) 북해정’이라고 쓴 노렌(옥호[屋號. 가게나 술집의 이름 – 옮긴이]를 적어 문에 늘어뜨린 천)이 바람에 나부낀다.
거리의 설경(雪景. 눈[雪]이 내리거나 쌓인 경치[景] - 옮긴이)은 북해정의 노렌으로 클로즈업(close up. 대상의 일부를 두드러지게 강조하려고 크게 찍거나 크게 나타냄. 근접 촬영 – 옮긴이)되고, 다시 그 장면은 그 메밀국수집 안으로 옮겨져, ‘메밀국수집에서 가장 큰 대목[명절을 앞두고 경기(景氣. 경제 활동 상태)가 가장 활발한 시기 – 옮긴이]은 섣달 그믐날이다.’라는(하는 – 옮긴이) 설명이 붙은 북해정 소바집 광경이 나타난다.
테이블(식탁 – 옮긴이)마다 가족(식구 – 옮긴이) 단위의 손님들로 꽉 차 있고, 그 사이를 누비면서 안주인은 주문을 받으랴 음식을 나르랴 정신없이 뛰고 있다. (그 안주인이 – 옮긴이) ‘메밀(국수) 하나!’라고(하고 – 옮긴이) 외치면, ‘아이욧 메밀(국수) 하나!’라고 복창을 하면서 바깥 주인은 카운터(계산대 – 옮긴이) 뒤에서 음식을 조리하며 땀방울을 흘린다.
섣달 그믐이 되면 으레히 ‘도시코시 소바(해[여기서 “해”는 “년(年)”이라는 뜻이다 – 옮긴이] 넘기기 메밀국수)’를 먹으러 오는 손님들로 복작거리는 일본 소바집의 흔한 광경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오히려 이 부산한 장면이 지나고 마지막 손님들이 자리를 뜬 밤 10시경, 북해정 주인 부부가 막 가게 문을 닫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노렌을 막 걷으려고 할 무렵, 삐걱(하고 – 옮긴이) 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 손님이 두 아이를 데리고 들어선다. 체크 무늬의 허름한 옷차림이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다가 “저 ……, 메밀 국수 …… 일 인분만인데 …… 되겠습니까?”라고(하고 – 옮긴이) 말한다.
만화에서는 기죽은 아이들이 엄마 등 뒤에 숨어서 곁눈질로 어른들을 훔쳐보고 있다. 안주인의 의아해하던 얼굴 표정이 얼른 변하면서(바뀌면서 – 옮긴이) 보통 손님들에게 대하듯이 “예, 어서 오십시오. 이리 앉으시지요.”라고 말하면서 난로 가까운 데 있는 2번 테이블로 안내한다.
“가케 잇쵸(국수 일 인분)!” 안주인은 평소 그대로 카운터(계산대 – 옮긴이)를 향해서 소리친다. “아이욧 가케 잇쵸!” 바깥 주인은 막 꺼 버린 곤로의 불을 다시 켜고, 챙긴 그릇들을 꺼내면서 복창한다.
만화에서는 이 장면이 아주 실감 있게(실감나게 – 옮긴이) 그려져 있다. 얼굴은 무뚝뚝하게 생겼는데, 국수를 담는 손은 일 인분 사리 한 덩어리에 반 정도의 뭉치를 더 보태어 곱빼기로 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손님도 아내도 눈치채지 않게 곁눈질로 흘깃거리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한가운데에 메밀국수 한 그릇이 놓여진다. 세 모자가 어울려서 메밀국수를 먹어 가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주인들이 있는 카운터에까지 들려 온다.
“맛있다.”
“그래, 정말.”
“자, 엄마도 빨리 잡수세요.”
만화에서는 깨끗하게 비어 있는 그릇, 그리고 메뉴와 그 값을 붙여 놓은 벽 쪽을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 ‘메밀 국수 150엔’이라고 써놓은 표찰,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모습, 반쯤 미소를 띄우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하고 – 옮긴이) 인사를 하는 여자 손님의 얼굴이 차례차례 클로즈업으로 처리되어 있다(강조되어 크게 나타난다 – 옮긴이). 그러고는 세 모자가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소바집 부부는 그들 등 뒤에다 대고 큰 소리로 “아리가토 고자이마시타(감사합니다).” / “도우가요이 오 도시오(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라고 말하며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힌다.
▶ 일 년 뒤에도 또 한 그릇
다음 해 다시 섣달 그믐날이 돌아온다.
만화의 그림은 앞의 것들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밤 10시가 지나 가게문을 닫으려는데, 삐걱 문이 열리며 아이 둘을 데리고 여자 하나가 들어선다. 안주인은 체크 무늬의 옷을 보고는 일 년 전(한 해 전 – 옮긴이) 그때 찾아왔던 마지막 손님이란 것을 알아본다.
“저 ……, 메밀국수 …… 일 인분만 …… 되겠습니까?”
“예, 어서 오십시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안주인은 손님을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며 카운터를 향해 외친다.
“가케 잇쵸!”
남편은 “아이욧 가케 잇쵸!”라고 복창하면서 막 꺼 버린 곤로(풍로. 전기나 석유로 불을 붙이는 취사용 도구 – 옮긴이)의 불을 다시 켠다.
아내(‘안주인’ - 옮긴이)가 서비스로 (메밀국수를 – 옮긴이) 삼 인분 말아 주라고 하는데, 그 남편(‘바깥주인’ - 옮긴이)은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퉁명스럽게 잡아뗀다. 그렇게 하면 손님이 오히려 신경을 쓰게 되니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로는 그러면서도, 벌써 사리 한 덩어리에 반(半. 가봇 – 옮긴이) 정도의 뭉치를 더 집어넣고 끓인다. “(겉으로는 – 옮긴이) 무뚝뚝해 보여도, 당신은 인정 있는 사람”이라고 (남편이 한 일을 본 – 옮긴이) 아내가 슬며시 칭찬한다.
테이블 위에 한 그릇의 메밀 국수를 놓고,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모자(母子. 어머니[母]와 아들[子] - 옮긴이) 세 사람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카운터 뒤의 주방에까지 들려 온다.
“정말 맛있지?”
“올해도 북해정 메밀 국수를 먹으니 참 좋다.”
“내년(다음 해 – 옮긴이)에도 또 먹으러 오자, 응?”
소바집 부부는 다 먹고 나서 돈 150엔을 내고 나가는 세 사람을 향해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하루에도 수십(몇십 – 옮긴이) 번 한 말을 되풀이하면서 손님을 배웅한다.
그 다음 해 섣달 그믐날 밤이 되자, 소바집 부부는, 이번에는 비록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그 여자 손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밤 – 옮긴이) 9시 반이 지나자 마음이 들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10시 반 가까이 되자, 주인은 그 해 여름에 값을 올려 200엔이 된 메밀국수 메뉴판(차림표 – 옮긴이)을 얼른 돌려 옛날대로 150엔으로 바꿔 놓는다. 그리고 아예 2번 테이블 위에는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세워 놓았다.
10시 반이 되자, 그 모자 세 사람이 나타난다. 형은 중학생 제복(교복 – 옮긴이)을 입고, 아우(남동생 – 옮긴이)는 작년(지난해 – 옮긴이)에 형이 입고 있던 커다란 잠바를 걸쳤는데, 어머니만은 여전히 체크 무늬 반코트이다.
“저 ……, 메밀 국수 …… 이 인분인데 ……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일 인분이 이 인분으로 바뀐 것이다.
“가케 닛쵸(국수 이 인분)!” “아이욧 가케 닛쵸!” 바깥 주인은 신나게 화답하면서, 이번에는 사리(국수/새끼줄/실 따위를 사리어[동그랗게 포개어] 감은 뭉치 – 옮긴이) 세 덩어리를 끓는 물 속에 집어 넣는다.
두 그릇의 메밀 국수를 나눠 먹고 있는 세 모자의 밝은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카운터 뒤에 있는 주인 부부에게도 들려 온다.
아내는 미소를 짓고, 무뚝뚝한 남편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 엿들은 이야기
여인은, “오늘은 너희 둘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해야겠구나.”라고(하고 – 옮긴이) 운을 뗀 뒤, 아버지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실 때 여덟 사람이나 다치게 한 것과, 보험으로도 다 지불할 수가 없어 빚을 내어 그동안 매월(每月. 달마다 – 옮긴이) 5만 엔씩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보내 주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그러고는 큰애가 신문 배달을 하고, 작은애가 날마다 장을 봐 저녁을 지어 주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과, 그 덕분에 회사에서 특별 수당을 타게 되어 내년 3월까지 갚기로 한 빚을 드디어 오늘로 다 갚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아이들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면서, 빚을 다 갚았어도 계속해서 자기들이 저녁밥을 짓고 신문 배달을 해서 어머니를 돕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큰애가 자기도 어머니에게 숨겨 온 비밀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말한다.
지난 달 일요일 준(동생)의 수업 참관 안내에 사실은 선생님으로부터 온 편지 한 통이 더 들어 있었는데, 자기가 감춰 버렸다는 것이다.
준이 쓴 작문이 북해도(北海道) 대표로 뽑혀 전국 콩쿠르(실력을 겨루려고 여는 경연 대회. 그러니까, 경연 대회 – 옮긴이)에 출품하게 되었는데, 수업 참관일에 준이 그것을 발표하게 되었다는 통지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면 회사를 쉬려고 하실 테니까, 자기가 그 날 엄마 대신 나갔다는 이야기이다.
그 작문은 장차 커서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에 대하여 쓰라는 것이었는데, 준은「 한 그릇 메밀국수 」라는 제목으로 북해정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셔서 많은 빚을 남겼다는 것, 어머니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고 있다는 것, 형이 조석간(朝夕刊. ‘조간[朝刊 : 아침에 발행함]과 석간[夕刊. 저녁때 발행함]’을 줄인 말이다 – 옮긴이) 신문 배달을 하고 있다는 것, 그러고 나서 준은 12월 31일 밤 세 식구가 먹은 한 그릇의 메밀국수가 정말 맛이 있었다는 것을 수업 참관일에 읽어 내려갔다는 것이다.
또한, 세 사람이 한 그릇만 시켰는데도 소바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해주었다는 것, 그 인사말은 꼭 “지면 안 돼! 간밧테(열심히 뛰어)! 힘껏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는 것, 그래서 준은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자기도 손님들에게 “열심히 뛰세요. 힘껏 사세요.”라고 정성껏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소바집 주인이 되겠다는 것, 이런 것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숨겨 온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 역시 만화는 아주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글(그러니까, 동화 – 옮긴이)에서는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만 적혀 있지만, 만화에서는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표정과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빈 국수 그릇 두 개가 놓여 있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카운터 뒤에서 (세 모자의 이야기를 – 옮긴이) 엿듣던 주인 부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 옮긴이)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도 못 내고, 한 장의 수건 끝을 서로 잡아당기며 눈물을 닦고 있는 중이다.
이 대목을 그린 만화에서는 안주인은 카운터 뒤에 숨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고, 무뚝뚝한 바깥 주인은 뒤로 돌아서 있다가 이윽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만화 아니고서는 어떤 매체로도 표현하기가(나타내기가 – 옮긴이) 어려운 것이다.
준이가 작문을 다 읽고 난 뒤, 선생님이 (준의 형에게 – 옮긴이) 한 마디 하라고 해서, 자기는 준이가 맨 처음 한 그릇의 메밀국수에 대한 이야기를 썼을 때 창피하다고(부끄럽다고 – 옮긴이) 느꼈지만(그 제목을 보고 창피했다고 말하는 이 대목에서, 만화는 메밀국수 한 그릇에 젓가락 세 짝을 찔러 넣은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이제는 그런 마음이 도리어 (더 – 옮긴이) 부끄럽게 여겨진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를 위하여 메밀국수 한 그릇을 시킨 어머니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형제가 힘을 합쳐 어머니를 지켜 가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만화 장면은 서로 꼭 부여잡고 있는 세 사람의 손이 크게 그려져 있다.
이번에는 300엔을 내고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하고 나가는 세 사람을 향해서, 소바집 부부는 한 해를 마무리짓는 커다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한다.
또 한 해가 지나, 북해정은 밤 9시부터 예약석 팻말을 2번 테이블에 세워 놓고 세 모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만화책은 이 이야기의 공백을 마치 영화의 인서트(insert. 화면의 특정 동작이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화면, 또는 삽입하는 것. 그러니까, ‘삽입 화면’ - 옮긴이)처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가로수, 떨어지는 낙엽들, 시계탑 위로 조용히 내리는 함박눈, 그리고 다시 북해정 노렌, 예약석 팻말이 놓여 있는 빈 테이블 , 거의 자정을 가리키는 시계탑, 눈이 쌓인 텅 빈 거리 ― 이런 그림 위로 ‘다음 해에도, 그리고 또 그 다음 해에도 2번 테이블을 비우고 기다렸지만, 세 사람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라는 설명문이 적혀 있다.
북해정은 장사가 번창하여 가게를 늘리고 뜯어 고쳐 테이블도 의자도 다 새것으로 바꾸었지만, 그 2번 테이블만큼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새것들 틈에 낡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손님들에게, 주인은 한 그릇 메밀국수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러고는 이 테이블을 보면서 자기네들은 옛일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그들이 다시 찾아 줄 것이고, 그때 이 테이블로 맞이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야기가 번져 (북해정의 – 옮긴이) 2번 테이블은 ‘행운의 테이블’로 소문나고, 일부러 그 테이블에서 식사하기 위해(식사하려고 – 옮긴이)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이 늘게 된다.
▶ 메밀국수 세 그릇
그 뒤 또 수년(몇년 – 옮긴이)의 세월이 흐른 12월 31일 밤이다. 북해정에서는 같은 동의 상점회 멤버들이 가족 동반으로 모여 도시코시 소바를 먹은 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가까운 신사(神社)로 가서 첫 참배를 하는 것이 5,6년 전부터 하나의 풍습처럼 되어 버렸다.
그 날 밤도 이웃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부산을 떤다. 다른 자리는 모두 서로 포개 앉을 정도로 옹색하게 꽉 차 있는데, 여전히 2번 테이블은 비워 둔 채로 ‘예약석’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10시가 가까워 오자, 사람들은 비록 말들은 안 했지만, 금년(今年. 올해 – 옮긴이)에도 또 저 자리를 비운 채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닌지 마음을 졸인다.
그런데 10시 반에 (북해정 – 옮긴이) 입구의 문이 삐거덕 열린다. 사람들의 시선(視線. 눈길 – 옮긴이)이 문 쪽으로 쏠리고, 시끄럽던 주위가 조용해진다. 두 청년이 들어선다. 실망의 한숨 소리가 나더니 주위는 다시 시끄러워지고, 안주인은 빈자리가 없어 미안하다고 손님을 돌려 보내려고 한다.
그때, 뒤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두 청년 앞에 나선다. 북해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인다. 그 여인은 아주 나직한 소리로 말한다.
“저, 메밀국수 …… 삼 인분인데요 …… 괜찮겠습니까?”
별안간 안주인의 안색이 바뀐다. 십수 년의 세월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옛날의 모자 세 식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삼 인분인데요.”라고(하고 – 옮긴이) 말할 때의 그 만화 장면의 여인 얼굴에는 약간(조금 – 옮긴이) 지친 듯하면서도 아주 조용하고 밝은 미소가 어려 있다. 그리고 처음에는 마치 V자를 그려 보이듯이 삼 인분을 가리키는 손가락 셋을 펴 보이고 있다.
그것을 본 북해정 안주인의 깜짝 놀란 얼굴, 그리고 그 배경에는 처음 이 가게에 들어섰을 때의 체크 무늬 옷과 두 아이를 양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던 그 여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머릿속에 떠오른 옛 추억의 모습이다.
한 그릇을 시킬 때의 그 여인의 얼굴과 15년 뒤 세 그릇을 시킬 때의 그 여인의 얼굴 ―― 그 미묘한 표정의 차이가 절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청년 하나가 말한다.
“우리는 15년 전 섣달 그믐날 밤 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일 인분의 메밀국수를 시켜 먹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 그 한 그릇의 메밀국수에 ‘하게마사레루(용기를 얻어서)’, 셋이서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지요. 그 뒤 외갓집이 있는 고장으로 이사를 갔고, 저는 금년 의과 대학을 나와 대학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요. 내년(來年. 다음 해 – 옮긴이) 봄이면 이곳 삿포로의 종합 병원에서 근무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소바집 주인은 되지 못했지만, 은행에 다니는 제 동생과 상의 끝에 지금까지 지내 온 날 가운데서 최고로 한 번 사치를 해 보자고 계획을 짰지요. 그 계획이란 바로 어머니와 함께 셋이 북해정에 가서 삼 인분의 메밀국수를 시켜 먹는 거였어요.”
주인 부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옆에 있던 손님들이 일어서면서 소리친다.
“무엇들 하는 거야. 아니, 10여 년 동안 이 날을 위해 마련한 예약석이잖아. 빨리 모셔요.”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여보, 2번 테이블에 메밀(국수) 셋이오(가케 산쵸).”
“아이욧 메밀(국수) 셋(가케 산쵸).”
환성과 박수 소리가 길거리까지 흘러 나온다. 만화에서는 이 장면을 두 페이지(두 쪽 – 옮긴이) 통으로 그려 놓았다. 애(아이 – 옮긴이), 어른, 여자, 남자, 할아버지 할 것 없이 기립 박수를 하듯이 모두 일어나 2번 테이블 주위에 모여들어 웃음과 박수를 보낸다.
다만 두 여자, 북해정 안주인과 그 여인(북해정에 찾아온 청년들의 어머니 – 옮긴이)의 얼굴만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활짝 웃고 있으면서도 눈시울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날리던 눈발도 멎고, 하얗게 쌓인 신설(新雪. 새[新] 눈[雪] - 옮긴이)에 반사되어 유리창 불빛에 어렴풋이 떠오른 북해정 노렌이, 한 발 일찍 온 새해 바람을 타고 나부낀다.
만화의 끝장면도 첫장면과 마찬가지로, 바람에 날리는 북해정의 노렌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 → 3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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