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고전 1장>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는 말씀은 이사야서 2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의 어떤 반응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고린도교회의 변화 자체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 자기는 지금 증거만 하는 것이지 결과는 바울이 챙겨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거두시는 결과라는 말이죠.
그리고 바울의 증거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말로 전해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의 개입이 없는 자,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는 십자가는 당연히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복음에 대해서 고린도교인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속한 지혜가 아닌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전에 그런 훈련을 해보셨죠? 전도 훈련, 사영리 훈련..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결국 교회 데려오라는 거잖아요. 그러나 전도는 그런거 아니란 말이에요. 바울이 하는 말과 세상 교회가 말하는 전도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아니 그렇게 사람 하나를 설득해서 교회에 데려다 놓으면 뭐 할 거예요? 오히려 배나 지옥 자식 만드는 것을요. 성령의 개입이 없는 자는 이 십자가가 반드시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는 지금 복음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강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세상 인간들이 이 십자가의 진리를 알아들었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으리라.. 그들에게 십자가는 저주받은 것으로 보이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세상에게 있어 그 자체로 심판이다.. 예수님이 사람과 같이 되어서 모든 자기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그 구원의 이야기를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닌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겁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세상 교회들 모여서 임마누엘이라고 찬송하고 야단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건 엄청나게 무서운 사건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 부정한 죄인들과 함께하셨다는 말은 이제 너희들 다 죽었다.. 는 말이거든요. 그걸 모르고 임마누엘이라고 떠들 일이냐고...
자, 그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한 십자가는 무엇이었던가?
(고전 1장)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말은 사람의 말로 전해질 수 없는 십자가.. 그래서 십자가를 전하는 것 자체가 전도의 미련한 것인데, 그 십자가는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는 능력으로서의 십자가라는 말이에요. 지혜 있고 총명한 자들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인간의 지혜 총명으로 알 수 없는 십자가란 뜻입니다
그래서 뭐가 등장하느냐? 믿음이 등장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없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으로만, 다시 말해서 그 믿음 안에서만 십자가가 보인다는 말입니다. 약하심으로 못 박히신 그 십자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십자가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십자가가 되고 말았지요. 이게 무슨 무당 잡교도 아니고.. 저랑 아주 가까운 분인데, 아침에 밥풀 때 십자가를 긋고 퍼요. 나쁜 일 생기지 말라고 집에 들어가는 문지방 위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또 목에 걸고 차에 붙이고 다닙니다. 한번 봅시다. 차에 십자가를 왜 매답니까? 제가 다니던 교회 입구에는 유명한 터가 하나 있는데, 새 차를 뽑으면 세워놓고 고사 지내는 곳이에요. 그 터가 제가 다니던 교회 입구에 있다 보니 자주 보는데 심지어 젊은 사람들도 돗자리 깔고 과일 깎아놓고 고사 지내더라고요. 여러분, 그거나 차에다 십자가 걸고 다니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어떤 노력으로도 전해질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몰라야 해요. 그냥 세상이 자기 필요에 따라 걸고 다니고 붙이고 다니는 십자가인 거죠. 세상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에요. 십자가의 원수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여기서 믿음이 등장하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없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지 않으면 종교인들의 십자가는 부적에 다름 아닙니다. 또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는 능력으로의 십자가라는 말은 다른 말로 소위 안다는 자들의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 십자가 복음은 누구에게 주신 것입니까?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의 모든 언어는 세상이 오해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반드시 오해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주일학교에서부터 잘못 배워왔기 때문에 이게 아니지 싶으면서도 누구도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교회에서 목사가 가르친대로 알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대전모임에서 오해시리즈를 시작했지요. 믿음에 대한 오해, 은혜에 대한 오해 거룩에 대한 오해 천국에 대한 오해.. 그렇게 우리 몸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지혜 있는 말로, 어떤 지식을 전해 줘도 우리 몸에 들어오는 순간에 그 말들은 오염이 됩니다. 어떻게 ‘나를 위하여’
그럼 어떡하느냐?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성경 말씀이 진리로 들리고 예수로 들리고 생명의 말씀으로 들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아까 읽은 말씀에도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이렇게 분명히 못을 박아놓았음에도 신학교 3년 마치면 다들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게 오늘날 세상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제가 젊은 청년들이 신학을 공부하려고 하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립니다. 그런데도 갈 사람들은 또 가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성도라면 거기 가서 후회하게 될 거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신학을 하되, 신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신학을 해라.. 다시 말하면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정당하기 위해 있는 신학이다..
제가 목사들과 밥을 먹다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창원에 있는 어떤 목사가 대뜸 그러더라고 강장로는 언제 신학했어요?.. 비꼬는 거지요. 목사를 비판하는 것으로 들렸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인간도 신학을 안 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은 다 종교인이에요. 태생적으로 나름의 신학이 다 있단 말이에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우리 조상들 신에 대한 탐구 신을 찾는 종교성이 다 있었지요 하다못해 장독간에 물 떠놓고 빌기라도 하니까. 인간 말고 다른 짐승들 강아지가 기도하거나 예배드리는 것 본적 없지요? 이런 게 다 아담의 선악과 독성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 사람의 신학과 복음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신학은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모든 작업이지만 복음은 그런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하늘로부터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거란 말입니다. 값없이...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료 생명이다. 인간들이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자기 사람들을 찾아 오신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사람에게서 나온 신학이 진리가 돼버리면, 캘빈이 진리가 돼버리면 그 사람은 캘빈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으면 인간들의 종교행위가 죄란 걸 모르는 거에요 신학 한 죄를 모른단 말이지요 그렇게 대부분의 목사들이 신학하고 지옥 가는 거에요. 예수 안 믿고 신학을 믿었으니까
그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다.. 그런데 복음을 믿은 건 내가 믿고 싶어서 믿은 게 아니잖아요.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었습니까? 어쩌다 보니 믿었습니까? 나중에 생각해보면 성도들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었는지 알 수 없는 게 맞아요 내가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어쩌다 보니 교회 안 믿고 목사 안 믿고 예수 믿게 된 거예요.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내가 예수라는 길 위에 있더라는 말입니다.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지금 예수님 안에서 그 길을 가고 있더라.. 그분과 함게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더라.. 는 이야기예요. 이게 모든 성도의 고백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선택도 아니고 우리의 능력도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에요. 그분과의 모든 관계가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이 그러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니까 전도의 미련한 것(십자가의 도라는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알게 되는 자들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이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 있지 못하면 버림받은 자다..
(고후 13장)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이렇게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알게 되는 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언제부터? 영원전부터.. 십자가의 그 말씀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아무리 애쓰고 발버둥쳐도 안 된다.. 그러나 십자가의 영을 받은 자들은 그런 자기 지식과 총명을 배설물로 버리게 된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유대신학에 탁월했던, 정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빌 3장)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알고
이렇게 자기 의로 삼던 모든 지식과 공적들로부터 자유해야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진의를 읽어낼 수 있고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가 직접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했겠어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그의 몸된 교회에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에 세상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성가대도 하고, 함게 성경공부도 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나 각자의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성은 우리가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각자가 믿는 예수가 다 다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 목사도, 장로도 예수 안 믿으면서도 평생 설교 하고 가르치고 세례 줄 수 있어요. 그들도 자기 역할을 다 하고 지옥 가는 겁니다. 지옥도 하나님의 영광이니까
이렇게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는 인간의 지성 이성에 포착될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인간에게 포착되고 해석되는 순간 오염되기 때문에 여러분잘 아시는 마이더스의 손 있죠? 손만 대면 금이 되는... 그런데 인간의 손은 닿는 곳마다 모두 죄로 오염시켜 버립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그렇게 더러운 거에요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니들 입으로 들어가는 게 더러운 게 아니라 니들 존재자체가 더럽기 때문에 니들에겐 답이 없다고...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하고자 하는 말 전체가 1장 18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고전 1장)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십자가의 도를 직역하면 ‘그 십자가의 그 말씀’이라고 했죠? 그 십자가의 그 말씀이 멸망 받을 자에게는 당연히 미련해야 한다.. 그 십자가가 왜 미련한 것인가? 우리가 있기도 전, 창세 전에 세워진 십자가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비밀이란 말입니다. 앞에 말씀드린대로 선악과 따 먹은 인간들에겐 다 자기가 아는 구원의 길이 있단 말이지요 자기를 구원해주는 신에 대한 바램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십자가는 그런 인간들의 탐심을 죄라고 부정하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니들의 그런 탐심 때문에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살해 당했잖아...그런데 그렇게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 진짜 하나님이시다...그래서 도저히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창세전에 이미 피를 흘리신 어린양의 언약의 피란 말입니다. 인간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그 창세전의 약속 에베소서 1징 7절에 나오는 어린양의 피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창세전 약속이 실행된 아들의 죽음, 그 십자가, 그 말씀.. 그 말씀이 뭐예요? 그 십자가의 그 말씀이 뭐예요? 말씀 육신으로 오신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이해 못하는 게 정상이에요 성경 전체가 그 한 분을 가리키고 있고 예수 그 말씀 안에 성경 전체가 응축되어 있다.. 예수님이 직접 그러셨잖아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그 말씀이, 구약에서부터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포되었던 그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단 말이에요. 말씀 육신으로... 그러다 보니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 말씀 육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알아보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 왔는데, 그 말씀에게로 나오는 백성이 하나도 없더라.. 요한복음이 이렇게 시작되는 거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멸망 받을 자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멸망 받는 게 아니라 멸망 받을 자이기 때문에 그 말씀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말씀을 못 깨닫고 말씀을 못 들어서 멸망 받는 게 아니고 멸망을 받을 자이기 때문에 그 말씀과 관계를 못 가진 거예요.
1장 18절의 그 십자가 그 말씀이 그 안에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단 말입니다. 관계.. 주님과의 관계가 뭐라 그랬죠? 믿음 안 무조건적인 용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 사랑, 영광...주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에요.
그럼 미련한 건 뭐냐? 말씀의 판단을 받지 않고,
말씀에 해석 당하지 않고 자기가 말씀 판단하고 해석해서 내것으로 사유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과 관계를 가지지 못한 거에요. 나의 자원과 열심을 동원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십자가라는 말씀을 깨우치고 말 거야.. 내 것으로 만들고 말 거야.. 이게 탐심이고 미련이에요 그래서 사도는 탐심이 죄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안 되요 어떤 사다리를 만들어도 하늘에 닿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럼 뭐냐? 십자가 자체가 지혜 있는 자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의 총명을 폐하는데, 그래서 십자가는 지혜있다는 자에겐 영원한 비밀인 것입니다.
그럼 십자가의 그 말씀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십자가가 말씀이 자기 사람들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 십자가의 그 말씀이 자기 사람들을 찾아감으로 그 말씀에 의해서 해석당하고 해체당하는 것, 육의 자아가 죽임당하는 것, 없음의 자리로 되돌려지는 것이 그 십자가의 그 말씀과 관계를 가지는 겁니다. 그때 새 창조가 일어난단 말입니다. 본래 창조는 없음에서 일어나는 게 창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가치관, 자기 역사관, 자기 인생관을 가지 자들, 진리를 안다는 자들 하나님을 안다는 자들 그렇게 본다고 하는 자들을 소경 되게 하시고 보지 못하는 자들 불가능한 자들 죄인들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인 거에요
(요 9장)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본다고 하는 자들을 소경 되게 하신다.. 너희들이 본다고 하니 죄가 그냥 있다고 하십니다. 이게 십자가의 심판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여기서 ‘구원 받는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고 은혜임을 아는 자, 곧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와 창세전부터
관계를 가진 자, 곧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자입니다. 이게 요한복음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요 6장)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게 구원받은 우리에요. 열심을 내어 예수 잘 믿는 우리에게 구원의 자격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을 예수님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게 구원받은 우리입니다.
(요 13장)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 따로 있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슴 밑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림이 있는 거에요
(요 17장)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말씀을 어떻게 지킨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예수님의 영단번의 제사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율법의 완성이고 우리가 말씀을 다 지킨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들, 하나님의 씨가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합니다.
(고전 1장)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 이름을 안다는 뜻이라고 했죠? 그 이름으로 인해서 자기 이름이 삭제된 자, 주께 빼앗겨버린 자들에게만 십자가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담으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었다..
(빌 1장)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빌 2장)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뭐가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 저는 아니요 당신이 하나님이십니다..
자,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 이렇게 예수, 만대로부터의 비밀인 예수, 인간의 신학과 인간의 지혜에 가둬질 수 없는 예수.. 그래서 요한복음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어둠의 세상은 예수를 몰라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이 예수가 진짜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요 1장)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은 이 예수가 어떻게 했다고요? 아버지와의 약속을 위해서 어떤 인간들에게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협조도 받지 않고 혼자 묵묵히 자기 길을 가셨다.. 세상에는 없는 그 길을 예수님이 스스로 만들면서 가셨다. 어디로? 십자가로... 이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햬요 하나님의 의요 능력인 것입니다.
그럼 그 예수, 그 십자가는 어떤 구원의 능력인가?
(갈 2장)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도가 하나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이고 얼마나 큰 평안이고 얼마나 큰 은혜요 위로인지 모른단 말이에요. 성도는 내가 사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사셨어요. 이십 년을 살았든 삼십 년을 살았든 팔십 년, 백 년을 살든 내 안에서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심이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이미 하늘로 옮겨진 자들이에요. 그 하늘에서 지금의 내 인생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이미 완료된 그 지점에서 ‘아 저 때 주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막아주셨기 때문에, 내가 정말 가기 싫었던 저 길로 끌고 가셨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구나..’ 그런 걸 하나하나 확인시켜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 이름으로 모여서 그 십자가의 도를 다시 확인하고 있는 거예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그 하나님 아들의 믿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 예수는 주가 되시는 거예요. 십자가의 도는 그들에게만 복음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그들은 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본의 아니게 그들의 인생 동안 십자가라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괴수 된, 지옥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실체가 날마다 폭로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에요. 그게 고난이에요. 고난은 다른 게 고난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부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인생을 살게 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함을 받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이 십자가의 필연성을 온몸으로 체휼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피 흘리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 고백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이렇게 우리를 날마다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그 십자가가 영원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예수님의 죽으심, 그 십자가만 현실이에요. 하나님의 관심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누가 우리 인생이 행복하고 원하는대로 고지에 올려주고, 어려운 일 모두 해결해주고, 인생 행복하게 살다가 천당 가도록 하는 걸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바로 사단의 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현실은 지금도 아들의 십자가만 현실입니다
(고후 4장)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보배를 어디에 가졌다고요?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질그릇이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는 건 그 보배만 남기기 위해서 질그릇은 장렬하게 깨져야 한다는 말이에요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세상 교회대로 하면 예수믿고 복 받으면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렇게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쉴틈 없이 극진하게 보실피고 계신단 말에요 ㅠ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이왕 구원받는 것이라면 우리 인생에 그런 핍박과 힘듦과 욱여쌈을 당하는 일이 없으면 좋잖아요. 그런데 그게 없으면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모른단 말이에요. 우리 몸이 그런 몸이니까..그런 아픔을 통해 ‘아, 그렇구나.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똑똑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믿었으니까 이 정도는 되야지 하면서 자꾸 우리 질그릇을 닦고 칠하는 데에 신경을 쓰는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나’라는 질그릇이 아니라 내 안에 담아주신 보배에만 관심을 가지고 보배만 사랑하는 성도로 만들어가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은 그 보배로만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 그것이 성령충만입니다 그래서 2장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고 한 것입니다.
어느 인간도 자기 주체가 부정되고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종이 되기를 자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하기 위해서 종의 자리로 내려갈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성도인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게는 반드시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이어야지 세상 교회들처럼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설득하고 학습시키고 세례를 주면 교인이 되는 그런 종교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욕 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이에요. 그래서 사도는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세례와 복음 전함이 대척점에 있죠? 한 마디로 고린도교회 너희들에게 예수 믿는 자가 있다면 그건 세례도 아니고 나 바울의 말과 지혜도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사람의 지혜나 신학으로 학습할까 봐, 나를 배울까 봐, 예수 믿는 대신 바울을 믿을까 봐 두렵고 떨렸다고 했습니다.
(고전 2장)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진짜 전도자입니다. 그러나 세상 교회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를 않죠? 어떻게 하든지 교회 교인 숫자 늘리는데만 정신이 팔리고 자기 교단 자기 신학에 줄 세우려고만 하는 거에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왜 바울에게 다른 지식이 없었겠습니까? 많죠. 그런데 굳이 이 말을 하는 건 사람들에게 굳이 나에게 배우려고하지 말라..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너희가 그 십자가의도가 뭔지 알기를 원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2장 1절~5절의 내용입니다. 조금 전에 읽은 고린도후서 4장의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바울이 알았던 거예요.
(고전 12장)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복음을 들은 자가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증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건 주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잘 연구해서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해서 이천 년간 교회가 수많은 신학과 교리와 프로그램들을 생산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면 누구든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게 오늘날 십자가의 원수된 교회들입니다
세상 신에 장악된 종교 집단들이 수많은 땅의 교회들을 세워놓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 십자가의 그 말씀 곧 복음을 못 듣게 하려고.. 그렇게 교회에 가둬 두면 어디에 가서 복음을 듣습니까? 동화사에서 들을 거예요? 해인사에서 들을 거예요? 그나마 성경을 읽거나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곳은 교회밖에 없는데, 그 교회를 세상 신이 장악해버리면 그 교회에 통용되는 복음이 뭐겠어요 다른 복음 다른 예수란 말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저주했던 그 다른 복음이 오늘날 세상교회를 다 장악하고 있어요 사람을 좋게 하는 다른 복음입니다.
온 세상 교회들이 복음을 사람의 복음,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으로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니다 싶은, 진짜 이단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 정통이라 하는 대한 유대교입니다. 그 안에 가둬 두니까 평생을 교회 다녔음에도 복음을 십자가의 그 말씀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서 십자가가 뭔지, 십자가의 도가 뭔지를 몰라요. 이게 오늘날 세상 현실입니다.
그런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 어떻게 애통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을 가두어놓고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회당,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한 거에요
사람의 신학과 교리가 진리가 된 교회.. 물론 여러분들이 다 경험하셨겠지만, 그들과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가 나도 복음 알고 나도 본다는 거예요.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말이 안 통하잖아요. 그래서 바울이 같은 마음으로 같은 말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하면 세상 교회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건 초신자 때, 학습 받을 때 했던 거지 아직도 그런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지.. 이제 성령 받고 성화 되고 장성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 맨날 십자가 타령이나 하면 되겠어? 또 어떤 사람은 그러죠. 십자가가 맞긴 맞는데, 성경에는 십자가만 있는 게 아니고 부활도 있고 축복도 있잖아.. 이왕 예수 믿었으면 즐겁고 행복하고 활력있는 신앙생활을 해야지 부활의 능력을 누리지 못하고 맨날 죽는 얘기 십자가 이야기만 하면 안 되지..
저기 강원도 춘천에 가면 그런 교회 있잖아요. 한때 사람들 많이 끌어모아서 부활 신앙을 가르쳤던 목사 십자가를 넘어서 부활 신앙으로 가자..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부활이 있단 말입니다. 이 양반 한때 전광훈이 태극기 집회하는 데 가서 십일조 거두는 데서 자기는 오천만원을 헌금했다고 자랑질을 하더라고요. 이게 대한 예수교 현실입니다.
아니 도대체 정치 집회에 왜 목사들이 가서 헌금함을 돌립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거기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던데.. 아고 참... 세월호 집회하는데 목사들이 가서 세월호 추모 집회하고, 세월호 음모설 밝힌다고... 이런 잡귀들이 ...
그런데 그 이단들 정통되는 건 시간문제예요. 사람 대가리 수 많이 모으고 돈만 쌓아두면 정통 됩니다. 보세요. 옛날에 조용기 순복음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합동, 고신, 통합 할 것 없이 전부 다 서로 손잡고 우리는 다 형제다... 한번 보세요. 나중에는 신천지도 정통되고 장길자 하나님의 교회도 정통될 거예요. 십자가가 진리가 아니라 돈이 사람이 진리란 말이에요.
자, 다시 돌아갑시다. 바울은 편지 서두부터 사람이 해석하고 교리화 신학화 해버린 십자가를 경계하고 있어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죽음은 사람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 어느 종교에도 신이 죽는 종교는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은 죽으면 안되는 신이니까 그렇게 인간들의 머리에 가두어 놓은 신만 신인 거에요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는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한 하나님의 죽음으로서 십자가인 겁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 합류되지 않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그 십자가를 모르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