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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잉걸)의 말 :
나는 한 나라의 문학작품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나 사회나 정신세계나 무의식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나아가 얼핏 보면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에 사실은 무서운 요소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이 글을 소개/인용한다.
이 글은 한국의 ‘옆 나라’인 일본과, 그 일본이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면서, 사람들이 그 위험성을 잘 깨닫지 못하는 왜국(倭國)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적(왜국)을 알고 나(한국)를 알면 적과 온(100)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손자병법 』).”는 사실을, 그리고 이 글은 그 적을 제대로 알기 위해(또는 냉정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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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축소지향과 만화
▶ 이상한 우편물
어느 날 일본에서 서류 꾸러미 같은 우편물 하나가 (이 글을 쓴 사람인 이어령 교수에게로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배달되었다. (그것을 – 옮긴이) 뜯어 보았더니, 뜻밖에도 국배판(菊倍版. 서적 판형의 한 유형. 국판(152×218 mm)의 2배 크기의 판형을 말하며, 크기는 218×304 mm이다. A4판(210×297 mm)에 상당하는 판형이지만, A4판보다는 약간 큰 치수이다. 10 밀리미터[mm]가 1 센티미터[cm]이기 때문에, 국배판 서적은 크기가 가로 21. 8cm X 세로 30.4cm 정도인 책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 크기의 만화책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온 것인 줄 알고 수신자(受信者. [우편물(信으로 줄인 서신[書信] 포함)을] 받는[受] 사람[者] – 옮긴이)의 주소를 확인해 보았지만, 주소도 이름도 틀림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발신자도 출판사가 아닌 니가타(일본 혼슈 중부에 있는 현 – 옮긴이)의 한 기업체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일본의 중소 기업체가, 더구나 만화책하고는 별 인연이 없는 사람(이 교수 – 옮긴이)에게 그런 책을 항공편으로 보내 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만화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서기 1992년 현재 – 옮긴이) 일본에는 발행 부수 100만이 넘는 잡지가 13종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그 가운데 – 옮긴이) 하나를 제외한(뺀 – 옮긴이) 12종이 모두 만화 잡지다. 제일 많이 나간다는 『 소년 점프 』 는 최고 635만 부를 찍은 기록도 가지고 있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설명은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전인 서기 1992년의 상황을 담은 것이다! - 옮긴이).
만화 손님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영국 같았으면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을 점잖은 신사들의 손에 알록달록한 만화책이 들려 있는 모습은 일본의 지하철 어디에서고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이다.
일본이 세계 제일의 만화 왕국이라는 사실은 통계 숫자가 뒷받침하고 있다. 만화의 간행물(刊行物. 간행된[인쇄되어 나온] 책/신문/그림 따위를 통틀어 일컫는 말 – 옮긴이)은 일본의 총 출판물 가운데 4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리고 연간 매상액도 4천9백억 엔이 넘는다(서기 1990년). 한국 돈으로 치면 3조 6천 7백 50억 원(서기 1990년의 환율을 기준으로 환산한 것이다 – 옮긴이)이니까, 우리나라(한국 – 옮긴이)의 전국 백화점 연간 매상액인 3조 3천억 원(1990년)을 상회하는 규모이다. 이미 그것은 코흘리개 상대의 구멍가게 시장이 아닌 것이다.
이같은 만화 기현상(기이한 현상 – 옮긴이)을 놓고 일본인 식자(識者. ‘아는[識] 사람[者]’ → 학식과 식견이 있는 사람 : 옮긴이)들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대체 만화가 무엇이길래?”(하고 물으면서 – 옮긴이)
그리고 어린이나 어른이나 포르노 같은 선정적인 이야기에서부터 까다로운 경제 입문서까지 만화로 보고 즐기는 일본인들이란 “대체 어떤 인종인가?”라는(하는 – 옮긴이) 의구심을 품는 외국인들도 많다(그러나 이 글이 쓰인 지 서른 두 해가 흐른 지금은, 한국이나 북아프리카나 서양에서도 “만화”를 읽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많다 – 옮긴이).
이 만화 천국의(이라는 – 옮긴이) 현상이야말로 일본 문화의 암호를 푸는 가장 확실한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 만화 이상으로 만화 같은 연구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사실이다. 사회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최근(서기 1990년대 초 – 옮긴이)에는 생리학적 연구까지 등장하고(나타나고 – 옮긴이) 있다.
이 중에서(이 가운데 – 옮긴이) 가장 이색적인 이론이 이른바 ‘요로 다케시(養老 孟司[양로 맹사 – 옮긴이])’ 교수의 유뇌론적(唯腦論的. 모든[唯] 지식은 뇌[腦]의 기능에 의한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이론[論]에 따른 – 옮긴이) 접근이다.
최근(서기 1990년대 초 – 옮긴이) 일본에서는 교통 사고나 고혈압 등으로(같은 것으로 – 옮긴이) 뇌졸중 환자가 늘어나면서, 지금껏 알려져 있지 않던 인간의 뇌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뇌의 손상으로 실어증(失語症. ‘말[語]을 잃는[失] 증세[症]’ → 대뇌가 망가져 언어의 표현이나 이해에 장애가 생기는 병 : 옮긴이)에 걸린 환자들 가운데 일본 글자인 가나는 읽는데 한자를 못 읽는 경우와, 그 반대로 한자는 다 아는데 가나만 잊어버리는 이상한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뜻글인 한자와 소리글인 히라가나(나아가 가타가나도! - 옮긴이)를 기억하는 인간의 두뇌 부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는[勿] 일이지만, - 옮긴이) 알파벳만 쓰고 있는 서양 사람들이나, 혹은 한자만을 사용하는 중국 사람들(좀 더 정확히는, 이른바 ‘중화권’의 ‘한족[漢族]’들 – 옮긴이)에게서는 (그리고 자신들 고유의 소리글자만 쓰는 아르메니아 사람들과 이슬람권 사람들과 캄보디아/타이/미얀마[‘버마’]의 불교도들과 남아시아의 힌두교도들에게서도 – 옮긴이) 발견할 수 없는 증상이다.
결국 이 말은, 눈으로 보는 한자와 귀로 듣는 가나를 섞어 쓰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뇌의 정보 처리 중추도 여느 민족과는 다를 것이라는 주장과도 같은 것이다.
▶ 한자를 읽는 한일의 차이
그런 경우라면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일본의 가나처럼 우리 역시 수백 년 동안 문자 체계가 서로 다른 한글(원래 이름은 ‘훈민정음’ - 옮긴이)과 한자를 섞어 써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에 대하여, 같은 국한문(‘나라 고유의 글자[국]로 된 글과 한자[한]로 된 글’. 여기서는 ‘정음[훈민정음]과 한자’라는 뜻으로 쓰였다 – 옮긴이) 혼용(混用. 한데 섞어서[混] 씀[用] – 옮긴이)이라도 일본의 경우는 한국과 또 다른 특성이 있다고 답변한다. 즉, 한문을 읽는 법이 한국과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자를 훈독(訓讀. [한자의] 뜻을 새겨[訓] 읽음[讀] - 옮긴이)하지 않는다. 가령(이를테면 – 옮긴이) ‘이인직(李仁稙)’의 신소설 『 血의 淚 』 를 우리(한국인들 – 옮긴이)는 ‘피의 눈물’이 아니라 반드시 ‘혈의 누’라고 한자음으로 읽는다.
그런데, 일본은 그렇지가 않다. ‘혈의 누’라고 써놓고, 읽기는 그 뜻을 옮겨 ‘피의 눈물(지노 나미다)’이라고 하는 것이다.
더 쉬운 예를 놓고 생각해 보자. “봄이 왔다.”라고 할 때, 우리(한국인 – 옮긴이)는 아무리 한자 중독증에 걸려 있는(걸린 – 옮긴이) 사람이라도 그것을 한자로 표기할([말을 글자로] 적을 – 옮긴이) 수가 없다. ‘봄’이니 ‘왔다.’니 하는 말은 순수한 우리 토박이 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굳이 한자로 옮겨 “春이 來하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봄이 왔다.”가 아니라 “춘이 내하다.”라고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봄이 왔다.”라고 할 때 보통 “春が來た(春이 來하다).”라고 쓴다. 그래 놓고도 읽기는 우리처럼 “춘이 내하다(슌가 라이다).”라고 하지 않고 “하루가 기타(봄이 왔다).”라고 한다. 한 마디로 한자의 음에 구애받지 않고, 그 뜻을 여러 가지로 붙여서 자유롭게 읽는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 옮긴이) 책을 인쇄할 때에도 한자 옆에 그때 그때의 문맥이나 필자의 기호에 따라 가나로 토를 달아 준다. 그것이 (일본인들이 – 옮긴이) ‘세계에 하나밖에 없다.’고 자랑하는 ‘루비 활자’라는 것이다.
(심지어 – 옮긴이) 고유 명사까지도 그렇다. 일본 사람들의 이름이나 지명(地名. 땅[地] 이름[名] - 옮긴이)은 한자로 되어 있지만, 읽기는 한자음으로도, 그 뜻으로도 읽기 때문에, 그리고 ‘어느 경우에는 음독(音讀. [글 따위를] 소리[音]내어 읽음[讀]/[한자를] 그 소리로 읽음 – 옮긴이)을 하고, 어느 경우에는 훈독을 해야 하는가?’ 라는 뚜렷한 법칙도 없기 때문에, 은행과 거래할 때에는 통장 같은 데 반드시 한자 이름 옆에 따로 후리가나를 달아야 한다(이래서 일본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이 준 명함에 적힌 이름 – 그러니까, 만난 사람의 이름 –을 어떻게 읽는지 물어보는 게 실례가 아닌 것이다. 성씨와 이름을 이루는 한자를 음독할 수도 있고, 훈독할 수도 있으며, 어느 글자는 음독하고 다른 글자는 훈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제하[諸夏]나 홍콩이나 대만에서는 사람의 이름을 이루는 한자를 그냥 소리로 읽으면 되므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 옮긴이).
(일본인이 – 옮긴이) 한자를 이렇게 음(소리/발음 – 옮긴이)만이 아니라 훈(한자의 새김[뜻] – 옮긴이)으로도 읽게 된 이유(理由. 까닭 – 옮긴이)는, 일본말의 발음 체계 영역이 좁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말에 비해(견주어 – 옮긴이) 우리말(배달말 – 옮긴이)은 모음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즉 아자줄을 읽어 보면 10개가 넘고, 다시 복합 모음(예를 들면, ‘ㅗ’와 ‘ㅣ’를 합친 ‘ㅚ’나, ‘ㅕ’와 ‘l’를 합친 ‘ㅖ’나, ‘ㅜ’와 ‘l’를 합친 ‘ㅟ’ - 옮긴이)까지 하면 그 배(곱절 – 옮긴이)가 된다.
하지만 일본말은 ‘아/이/우/에/오’ 다섯 모음이 기본이고, 이중 모음이랬자 몇 개 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같은 한자를 한국음으로 읽을 때와 일본음으로 읽을 때 어떤 현상(일 – 옮긴이)이 벌어지는지를 다음과 같은 전보문을 가상해 놓고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귀사(상대편 회사를 높이는 말 – 옮긴이)의 기자는 기차로 회사에 돌아가다.’라는 말을 한자 표현으로 줄여 쓰면 ‘귀사기자기차귀사(貴社記者汽車歸社)’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한자를 한자음만으로 읽어도 뜻이 통한다.
하지만 만약 한자 문장을 일본음으로 그대로 읽으면(그리고 그 소리를 히라가나로만 쓴다면 – 옮긴이) ‘기샤기샤기샤기샤(きしゃきしゃきしゃきしゃ)’라는 똑같은 음이 네 번 되풀이된다. (일본에서 – 옮긴이) 한자를 훈독하지 않고 한자음만으로 읽는다면 엄청난 동음이의(同音異義. [글자의] 소리[音]는 같으나[同] 뜻[義]이 다름[異].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말을 ‘동음이의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언어이자 소리의 일종인 ‘말[言]’과 네 발 짐승인 ‘말[馬]’이 동음이의어다 – 옮긴이) 현상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이래서 일본에서는 우리(한국 – 옮긴이)와 같은 한글 전용은 꺼내기 힘든 것이다.
▶ 만화와 한자
그러나 원인은 어디에 있든 한자에 후리가나를 달고 한문 활자에 루비를 붙이는 이 유난스러운 특성의 뿌리를 캐들어가면, 바로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사고와 직결된다는(直結된다는 → 곧장 이어진다는 : 옮긴이)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보통 문자(글자 – 옮긴이)와 그것을 읽는 음가(音價. 낱자가 지닌 소리. → 소릿[音]값[價] : 옮긴이)는 1대 1로 대응하는 것이 원칙이다(그러니까, 한 글자는 한 소리로만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훈민정음의 ‘ㄱ’이라는 글자는 ‘기역’으로만 읽을 수 있지, 다른 소리로는 읽을 수 없는 것이 좋은 예다 – 옮긴이). 알파벳만이 아니라 한자를 사용하는(쓰는 – 옮긴이) 중국(제하[諸夏]. 수도 북경[北京] - 옮긴이)도, 국한문을 혼용해 온 한국도 그렇다(덧붙이자면, 라틴 알파벳에서 비롯된 소리글자인 꾸옥 으[(국어)國語]를 쓰기 전의 비엣남[Vietnam]도 한자를 쓸 때 이 원칙을 따랐다 – 옮긴이).
그러나 유독 일본에서만은 같은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重(‘무거울 중’ - 옮긴이)자 하나를 써놓고 ‘오모이’, ‘가사나루’, ‘히토에(一重)’, ‘주’, ‘초’로 읽듯이 그 관계가 1대 다(多)이다.
이렇게 한자를 다중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한쪽으로는 눈으로 그림을 보면서, 한옆으로는 글자를 읽는 만화 독법(讀法. [글이나 책을] 읽는[讀] 방법[法] - 옮긴이)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서(‘있어서’는 빼야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 옮긴이) 한자는 만화의 그림과 같은 것이고, 그 옆에 달아놓은 루비가나는 만화에 붙인 설명문이나 대화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시각적 세계에 속하는 한자의 도형과 그것을 읽는 청각적 세계인 말이 따로 논다는 이야기이다.
그림과 말로 되어 있는 만화의 이중 구조는 한자를 보고 읽는 다중 구조와 같기 때문에, 이것을 더 발전시키면 일본인의 사고 영역에까지 확산된다. 이 말을 더 쉬운 말로 옮겨 보면, 만화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사고는 일본인의 의식이나 사회 구조가 이중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일본 사회는 – 옮긴이) 한 가지의 원리적 사고(예를 들면, 종교나 철학이나 이념을 바탕으로 삼은 사고 – 옮긴이)에 (따라 - 옮긴이) 흐르기보다는, (자신이 지금 처한 – 옮긴이) 상황이나 전후 문맥에 따라서 모순되는 것들이 그때 그때 하나의 형태로 결합되어 가면서 만화처럼 굴러가고 있다.
어려운 말로 풀이한 것이 아니라, 왜 일본 사람이 (한국인 교수인 – 옮긴이) 나에게 그 만화책을 보내 왔는지, 그리고 그 만화 속에 담긴 의미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차근차근히 풀어 가면서 (이 교수가 이 글을 쓰기 전에 썼던 책인 – 옮긴이) 『 축소지향의 일본인 』 에서 다하지 못한 일본인론을 다시 한 번 검증해 보고자 한다.
▶ 한 그릇 메밀 국수
(일본의 지방 중소 기업이 이 글을 쓴 사람인 이어령 교수에게 – 옮긴이) 보내 온 그 만화책은 바로 몇 해 전(서기 1980년대 후반 – 옮긴이)에 일본 열도를 눈물의 바다로 침몰시켰다는(빠트렸다는 – 옮긴이) ‘구리 료헤이(栗 良平[율 양평 – 옮긴이])’의 동화 『 한 그릇 메밀국수(一杯のかけそば. 한국에서는 『 우동 한 그릇 』 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으나, ‘우동’, 그러니까 배달말로는 ‘가락국수’인 음식은 밀가루로 만드는 국수고, ‘가케소바’는 ‘메밀국수’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책 이름을 배달말로 제대로 옮기려면 이 교수가 옮긴 대로 ‘한 그릇 메밀국수’로 옮겨야 한다 – 옮긴이) 』 를 만화로 그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만화책 속에는 ‘이 이야기의 감동을 한 사람에게라도 널리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 동화를 만화로 만들었다.’ 는 기업체 사장의 말을 적은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 작품에 관한 신문 기사와 해설들을 적은 복사물들이 첨부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이 만화책을 보내 온 뜻을 요약하자면, 바로 그 만화책 말미에서도 언급한 대로 ‘(나오는 사람들이 – 옮긴이) 슬픔과 외로움 속에서도 밝은 빛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살아가는 – 옮긴이) 이 이야기는 일본인의 테두리 안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인(온 누리 사람들 – 옮긴이)의 심금을 울릴 것’이라는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우편물을 받게 된 나(글쓴이인 이어령 교수 – 옮긴이)는 ‘심금을 울리게 될 세계인의 한 사람으로’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면, 그 불가사의했던 수수께끼(도대체 왜 만화와는 거리가 먼 한국인 교수인 이어령 씨가 일본의 한 중소기업에게서 『 한 그릇 메밀 국수 』 라는 만화책을 소포로 받게 되었느냐는 의문 – 옮긴이)는 풀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전략이 적중하게(들어맞게 – 옮긴이) 된 것도 알았다. 아무리 짧은 동화라고 해도 그것이 활자였다면 나는 선 자리에서 단숨에 그 이야기를 다 읽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글로 이루어진 종이책을 자주 읽는 나는 이 교수의 이 말에 동의/동감/공감한다. 내가 직접 책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300쪽짜리 책 한 권은 짧게는 닷새, 길게는 열흘 동안 꾸준히 읽어야 다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옮긴이).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글로 쓴 동화였다면 결코 눈물 같은 것은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뻔하기 짝이 없는 감상적인 이야기,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가 이렇게 현실감 있게 와 닿는 것은, 그것이 만화라는 형식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작 자체가 동화다. 그 동화성은 만화로 그려질 때 더욱더 그 효과가 크다는 것, 그리고 그 동화성에 숨겨져 있는(숨겨진 – 옮긴이) 감동의 원형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글 중심, 이른바 로고스(Logos. 이성[理性] – 옮긴이) 중심주의의 세계(예를 들면, 역사책이나 수필집이나 소설책 – 옮긴이)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느낌을 주는 – 옮긴이) 이 만화책(의) 갈피를 넘기면서, 나는 『 축소지향의 일본인 』 에 썼던 일본 문화론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었다.
원고지 50매 분량밖에 안 되는 이 작고 작은 이야기, 아니 그것을 다시 몇 페이지의 만화책으로 축소시킨(줄인 – 옮긴이) 이 이야기야말로 ‘축소지향의 진정한 모델(model. 모범 – 옮긴이)’이 아니겠는가.
만화는 (그 특성이 – 옮긴이) 풍자 만화든 사이언스 픽션(‘공상과학물’. 그러나 좀 더 정확히는 ‘과학물’로 옮겨야 한다 – 옮긴이)이나 액션물이든 간에 그 공통점(닮은 점 – 옮긴이)은 그 내용에 관계 없이 복잡한 사물, 사건,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생략과 변형으로 한 프레임(frame. 틀 – 옮긴이)속에 축소해 놓은 형식성에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일본이란 무엇인가?’, ‘일본 문화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도 우리는 이 『 한 그릇 메밀국수 』 속에서 건져 낼 수가 있다.
글로 씌어진 그 동화만이 아니라, 그것을 그림으로 옮긴 만화책까지 하나의 텍스트(text. 원문 – 옮긴이)에 포함시켜 『 한 그릇 메밀국수 』 를 분석해 가면(파헤쳐 보면/살펴 보면 – 옮긴이), 바로 그 ‘메밀국수’ 한 그릇 속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져 있는가를(담겼는가를 – 옮긴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그 동화와 만화책의 텍스트부터 자세하게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 → 2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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