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아미타불관세음보살의 의미 이야기》
‘나무’는 인도어로 ‘돌아가서 의지한다.’라는 뜻으로.
극락전에는 아미타부처님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시어진 전각 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돌아가 의지한다.’ 라는 뜻이 된다.
<‘아미타불’>은 서방 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서 중생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사람을 구제해 준다.
아미타불은 대승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님 가운데 하나이자 정토 신앙의 토대가 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사람들의 고통을 자비로써 모두 거두어 가는 어머니와 같은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에 관한 탱화나 조각을 보면 이마 한가운데에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같이 끝없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고 소원을 성취해 주고자 하는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고, 그 얼굴을 자신의 머리에 두고 모신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각각의 의미는?
나무는 산스크리트어'Namas'(Namo)의 음역으로, 나모', '납막', 낭모'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귀의', '귀명', '귀경', '구아'하다 입니다.
한자로는 중국에서는 '나모'라고 발음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라고 발음한다. 의미는 '돌아가서 의지한다.
아미타불은 '무한한 수명'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Amitayus'(Amitabha)의 음역입니다.
'한량없는 수명을 지닌 부처'라는 의미의 '무량수불'
또는 '한량없는 빛의 부처'라는 의미의 '무량광불'이라고 합니다.
시간(수명)과 공간(빛)을 초월하신 부처를 의미합니다.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부처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shvara'의 아바로키타(Avalokita 관하다) + 이슈와라(ishvara, 신 또는 자재천) 합성어의 의역입니다.
관자재, 광세음, 관세자재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이라고도 합니다.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으로 하는
보살로,
의미는 '세상의 소리를 관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면 왜 나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함께 부를까요?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화신으로서 이 세상에 나타나며, 이 때문에 쓰고 있는 보관에 아미타불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의 입적 이후부터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세상을 지키고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33가지의 몸으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보살의 서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자대비의 보살입니다.
그렇다면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돌아가 의지하는 것입니다.
'무량수, 무량광으로 오신 한량없는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 세상 중생들의 고통 받는 소리를
다 관찰하여 보시는 관세음 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우리 마음을 깨닫고 나면 무한한 생명이며 빛이자 무한한 자비가 보입니다.
내 마음의 아미타와 관세음을 찾으면 우리 모두는 불보살이 아닐까요?
이것을 늘 깨우치게 하는 불교의 염불 방편이 염불 정근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귀의의 공덕>부처님께서 밧지국 중각 강당에 계실 때, 많은 상인들이 타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부처님께 떠나기 전에
곳곳에 있을지 모를 위험과 두려움을 안고 부처님께 법을 청하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너희들은 넓은 벌판을 가다가 두려움이 생겨 놀라고 털이 곤두설 때 부처님을 생각하라.
여래십호를 떠올리며 귀의하는 자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라.
부처님의 바른 법과 율은 번뇌를 떠나게 하며 지혜에 통달하게 하며 법을 가까이 한 인연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승가를 생각하라. 세존의 제자는 착하고 바르게 나아가며 세상의 복받이시다라고 생각하면 두려움은 곧 없어질 것이다...
이처럼 상인들이여, 너희들이 넓은 벌판으로 가다가 두려움이 생기거든 불법승 삼보를 생각하라” 『잡아함경 권35 염삼보경』
<귀의歸依>귀의는 불교 신자들만의 전유물일까? 그렇지 않다. 용어를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라고 하다보니,
자칫 불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이 말에는 일체 모든 인류와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지혜가 담겨 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보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본다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완전한 지혜와 자비가 담겨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 용어로 본다면, 자기 내면에 신성, 영성이 충만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내 바깥에 어떤 신과 완전성과 지혜와 힘이 있다고
여기는 마음을 돌이켜, 내가 그렇게 원하고 구하고 꿈꿔왔던 그 모든 진리와 지혜와 완전성과 불성과 신성, 신이라고 알려진
그 모든 근원이 바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돌이켜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나의 내면에 완전성이 불보(佛寶)가 있고, 그 모든 삶의 지혜와 지침이 내 안에 이미 법보(法寶)가 들어
있으며
나라는 존재는 바로 그 근원적 완전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승보(僧寶)의
의미다.
그러니 어찌 삼보귀의가 불자들만의 전유물이겠는가. 이는 일체 행복과 평화와 지혜를 찾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이 가야 할 삶의 방향이다.
삼귀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귀의하는 의식이다.
<육조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자성(自性)의 삼보에 귀의하나니, 불이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
이며, 승이란 청정함이라”고 하였고,
“경에 ‘오직 자신의 부처님께 귀의한다’하였고[只卽言自歸依佛:화엄경 정행품]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 다고 하지 않았으니,
자성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돌아갈 곳이 없다”고 설함으로써,
삼보란 곧 자기 내면의 완전성인 본래 깨달음, 본래 바른 법, 본래의 청정함임을 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