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시퀀스/김다희-
살바람의 어깨가 닿을 때마다
땅의 눈이 자란다
바람이 빗질한 고랑마다
몸을 낮춘 지난 계절
제 뼈를 깎아 내고 있다
저기, 몸 일으키는 소리
그들이 당겨 앉는 소리
가장 낮게 엎드려 있던 어린 것들
가장 큰 소리를 내며 뛰어온다
더덜뭇한 나도
돋을볕에 서서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이희숙-
살아서 외로웠던 사람
더는 외롭지 말라고
선물처럼 두고 온 서향 한 그루에서
죽어서 더 그리운 사람들이
별꽃처럼 피었다는 소식이
안부처럼 들려
반가운 마음에
천 리를 걸어서도 만나고 싶은
이름들에 편지를 씁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오랜만의 안부가 마음에 걸려
정작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서향 꽃잎에 묻어둔 채
안녕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곳도 봄인가요? 라고 고쳐 썼다. 지우고
살아서 외로웠던 사람에게 라고 써서
봄이 오는 길목에서
성급하게 건져 올린 소식들을 띄웁니다
-망울 터뜨리는 봄/손병흥-
길 위 봄 햇살 아픈 그리움
푸른 날개 돋듯 미풍 되어
마른 가지 꽃샘추위 달고서
온 몸 가득 졸음 덕지덕지 묻혀
질긴 생명 흔들어 고갤 내민다.
간밤 목축인 움트는 새싹들
겨우내 길러낸 버들강아지 꿈
빗질해 보낸 듯 고운 바람결 따라
아지랑이 가슴앓이도 풀어버리고
부푸는 몽우리 봄 맞는다.
짧은 생이라도 추억 소중한 것
춥고 길었던 겨울 쫓아내듯
훌쩍 떠나 뜻하지 않게 만나는
속살거리는 봄비 그친 산봉우리
고개 들어 봄바람 흠뻑 마시면
남녘 꽃소식 속절없이 길손 된다.
-봄을 스치다/서효륜-
인왕산 가는 길목
좌판에 도라지를 펼쳐놓은 아이의 눈빛이
똘망똘망하다
길섶에 핀
제비꽃, 개불알꽃, 쥐오줌풀, 애기똥풀이
아이의 눈망울과 겹친다
산은 보지 않고
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의 발자국만 부산하다
아직도
도라지 앞에
고개만 떨구고 있는 아이
화창한 봄날
도라지 향에 찔려
산을 내려왔다
-봄/이능표-
유리창 밖은 봄이다.
새들은 날아오르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내민다.
십 리 밖 강물 속에서
물고기들이 물고기들의 삶을 살듯
새들은 새들의 삶을 산다.
나무들은 나무들의 삶을 산다.
말 걸지 말자.
물고기들은 강물에
새들은 하늘에
나무들은 숲속에
나는 유리창 안에 있다.
말 걸지 말자, 말 걸지 말자.
느린 듯 더딘 듯
불쑥 왔다 울컥 가는 봄.
-봄에는 연두/배월선-
우리, 사는 동안
겨울이 지날 때마다 봄이 온다
봄에는
순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빈 가지마다 연두에서 초록이 짙어지는 것처럼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처음엔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찬바람에 맞서 독하게 버티다가
겨울도 마지막엔 두 손 들고 순하게 하얀 눈을 내려준다
눈 위를 뽀드득, 눈 뜨는 연두
계절 하나 덮기 위해 연두는 초록을 끌고 가을까지 간다
순하게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것이다
나는 봄이면 자연스레 일어나는 연두만큼 평화로운 색깔을 본 적이 없다
봄에는 연두에 드러누워 연두처럼 순해질 생각을 하자
알고 보면
우리, 사는 내내
계절은 겨울이 조금 더 길었을 뿐이었다
-봄, 윤회/진영대-
담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
햇볕을 받아먹던 할머니
멀리서 보면 먼지버섯처럼 동그랗게 보인다...
금방 먼지 폴폴 날리며
쪼그라들 것 같다
자신을 잔뜩 부풀리고 앉아
햇볕도 송구스럽다는 듯이
연신 굽신거리며
받아먹는다
빨간 플라스틱 목욕의자에 앉아
전단지도 펴서 쌓아 놓고
골판지박스도 할머니 키보다 높게 쌓아 놓았다
한겨울 지나고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있던 자리에
할미꽃이 다소곳 피어
할머니가 받아먹던 햇볕을
받아먹고 있다
-봄으로 가는 염색 길/전정아-
염료와 섞여지는 날, 서성이는 발자국 안에 숨어버린 주소의 문패
채송화 꽃이 문지기처럼 서서, 구부정한 걸음을 멈춰 세우네.
취루 액이 닿은 듯, 눈시울 붉어진 봄비, 부엌에선 밥 푸는 소리가
유행가처럼 달그락거리네. 눈 감은 골목이 꿈속을 거닐 듯
멈춘 걸음을 뒤적이는 기억들.
어제란 다시 돌아가고 싶다가도, 머뭇거리게 되는, 소금 꽃 같은 곳이었네.
검은 것들은, 알록달록 태어날 새끼들 입에서, 웃음으로 태어나고
기역자로 꺾인 허리는, 밤마다 신신파스에 기대어, 통증을 밀어내곤 하네.
벼 이삭 하나에도, 공손하게 몸을 굽혔던 이유는,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없는
물음표 투성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내일이란 이상기후 때문이었네.
빗질 따라 오르내리던 향료들, 새치 곳곳 빠짐없이 스며드네.
남은 날들에게 저당 잡힌 늙은 몸뚱이, 아직 살아 있다고,
핏기 없는 나뭇가지에 부싯돌을 비비며, 부화를 기다리는 김노인
곧 펼쳐질 풍경은 아기들이 우는 마을
삭신 곳곳 삐걱거리던 관절을 일으켜 세우는 봄 숲
허리 편 노인 하나 숨어드네.
-봄은 이렇게 오더이다/송 진-
글을 못 써서 병든 악사처럼
악기를 연주 못해 실성한 작가처럼
횡설수설
설수설횡
왼손 마스크로 자신의 입술을 가두고
오른손 식칼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며
설겅설겅
겅설겅설
이 소리가 듣기 좋다면
동박새 너도 오라
핏물 뚝뚝 떨어지는
허벅지 한 사발
산수유 혀 끝에 물고 혹은 묻고
개구리 지나간 자리
곰 발바닥 피비린내 웅덩이로 오기 전에
-도화 아래서 봄/손성태-
이사 온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베어 버린다는 게 그만,
대추나무를 베고야 말았다
집주인은 붉으락 푸르락
10만 원으로 애틋하게 달래면서
속으론 웃었다
대추나무 잘못이다
마당 가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가 석류든 보리수든
잿빛 겨울은 복숭아나무로 둔갑시켰고 나는,
거슬리는 기억을 시원하게 캐 팽개치듯
둥치를 자르고 뿌리째 뽑아버렸다
덕분에 나무는 매화, 산수유, 개나리, 살구꽃 뒤로
벚꽃과 더불어 도도하게 피었다
어떻게 죽임을 피하고 살아남았을까
귀신도 눈을 피한다는 복숭아
나무가 틔우는 도화
아래에서 쳐다보는 연분홍
꽃잎 속의 선홍빛 핏방울
절정의 향긋한 내음에 봄이 비틀거린다
삶은 늘 열매에 취해 갈증이 일지만
이렇게 대추를 자르고 도화를 보게 된 것은
내 생의 마당 가에서 썩 잘했던 일이고
부푼 종기에 고약을 붙여 뿌리째
뽑아내는 일이었다
-봄의 노래/고운기-
봄은 왔다
그냥 가는 게 아니다
봄은 쌓인다
내 몸은 봄이 둘러주는 나이테로 만들어졌다
스무 살 적 나이테가 뛰기도 하고
그냥 거기 서 있으라
소리치기도 한다
어떤 항구의 풍경이 그림엽서 속에 잡히고
봄밤을 실어오는 산그늘에 묻혀
어둠이 어느새 마을을 덮어주는 내내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봄은 왔다 그냥 가지 않는다.
-봄, 희망/김영승-
일곱달 째 신문대가 밀려
신문도 끊겼다
저녁이면 친구인 양 받아보던 신문도
이제 오질 않는다
며칠 있으면 수도두 전기도 끊길 것이다
며칠 있으면
이 생명도 이 몸에서 흘리던 핏줄기도
끊길 것이다
은행의 독촉장과 법원의 최고장
최후통첩장
수많은 통고장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아내가 보낸 절교장도
그 위에 놓여있다
진달래가 피었노라고
아내에게 쓰던 편지 위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가장 빛나는 것을
나는 한 장 집어 들었다
-봄, 짧은 낮잠/조미희-
우주 쇼를 본다 겨울 동안의 긴 게으름, 그리고 세수, 눈 녹은 화단 한 평으로 얼굴을 닦는다 실눈
틈으로 여린 뿌리 하나 들어온다 작은 씨앗들이 폭발하고 팽창하고 골목의 단단하던 보도블록이
출렁! 희끄무레하던 골목이 날아오른다 무릎까진 듯 빨간 봄, 누군가 입김을 불고 있다는 느낌
투명한 곤충들이 날아오른다 바람은 대지의 혈관을 타고 흐르다가 수명을 다하고 꽃잎은 나비로
환생하는 변태를 꿈꾼다 팔랑! 설익은 소년과 소녀의 반팔 위로 푸른 소름을 옮겨 받은 노인들의
눈동자가 잠시 꾸는 꿈, 한껏 허공을 쥐어 잡는 이름 모를 풀들의 악력이 눈물처럼 커지는 가혹
구름이라는 짧은 베개 위에서 후드득
씨앗봉투에 인쇄된 종들의 가계家系를 흠모하며 잡초들이 다발성 모의를 시작하는 어느 봄날의
절정에서 초신성의 꽃들이 앞뒤를 다투며 터지는 봄, 칸이 모자란 사다리 설핏 엿본 우주
목련 그리고 목련, 이름을 가진 봄날의 꽃들은 우주를 떠도는 각기 다른 별이라는 것 내 낮잠까지
흘러왔다 문득, 서로 부딪혔다는 것
-봄의 환(幻)/강 수-
마약같은 봄이 왔고
사람들은 흘러간 유행가처럼 또다시 봄을 노래했다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이뤄졌다
기막힌 각본에 맞춰 꽃망울은 피어났고
적절한 시간에 꽃잎을 날리며 떨어졌다
고장난 CCTV는 순식간에 교체되었고
질서를 깨뜨리는 오류는 바로바로 수정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으나
자기 배역을 거부한 사람들을 솎아내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봄의 중독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는 형태로
스스로 자신의 배역을 내려놓았다
해마다 좀 더 완벽한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완벽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태어나면서 처음 정해진 배역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봄이라는 꿈은,
내일이라는 희망은,
치료할 수 없는 바이러스가 되어서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겨울에 지친 사람들이 진짜 꽃의 혁명을 일으킬까 두려워
크고 무서운 손이,
나프탈렌으로 빚은 꽃송이들을 세상에 매달고 있었다.
마약처럼,
우리는 나프탈렌 향기나는 봄에 취하여
봄은 애초부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두 개의 봄/김병호-
누가 끌고 가다 놓쳤을까, 저 그림자
중국 할머니의 전족처럼 삐걱거리는 꽃나무
누가 슬그머니 놓았을까, 저 발걸음
비에 젖은 상복처럼 피곤한 꽃망울
딸애의 가슴이 봉긋이 올라오고
모래언덕 망루처럼 봄은 따금거린다
뼈마디가 자라는지, 자면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딸애의 침대 끝에 걸터앉아 창 너머 봄눈을 본다
다시는 살지 못할 듯이
다시는 대신하지 못할 듯이
바다를 건너와, 사막을 건너와
종소리처럼 쌓이는 이름들
오래 오래 쓰다듬으면
서로의 봄이 달라도 삶은 다정해질 수 있을까
숭숭하고 팽팽한 울음처럼, 눈처럼
봄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버지의 봄/김용화-
병원에서 하 고생을 하셔서 하나도 서운치 않더니
살아가며 가끔씩 생각날 때가 있다
강남 제비 돌아온다는 삼월도 삼짇날에
헐렁한 신을 끌고 아버지
아지랑이 속에서 나와 텃밭에 고추모를 놓으신다
구십 노인이 이젠 욕심 좀 자그매 부려유
고춧대는 오치기 세울 꺼구
소독은 또 오치기 다 헐라구 성가시게 그러능 거유
......
어머니 잔소리에
아버지,
슬며시 아지랑이 속으로 다시 들어가신다
헐렁한 신을 끌고
노랑나비 한 마리
나울나울 아지랑이 속을 날아오른다, 화창한 봄날이다
-새로 생긴 봄/김희업-
한 발짝만 나오면 밖인데
미숙한 걸음이 두려운지
꽃은 걸음을 감춘다.
꽃이 피는 일은 미래에 속하는 것이라서
당장은 우리가 모르고
말이 곧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아이에게서
말을 기대하는 어른의 심정으로
꽃이 핀다 했는데
지금 꽃은 어느 밤을 걷고 있는지
나무를 들여다보면 온통 캄캄한 모습뿐이어서
내 동공은 어둠에 파묻힌 지 오래
무엇보다 그와 나는 혈통이 달라서 나무의 피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밖으로 나가도 되느냐고, 꽃은
내가 잠이 든 사이 문을 두드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밖을 나서면 벼랑이기에
대신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 하나 서둘러 지었으면 했다.
어느 날
새로 생긴 봄을 보았다
밖을 나와 아름답게 벼랑을 걷는 꽃을
죽음에 한 발 다가선 위험한 꽃을
-애타는 봄/윤홍조-
훤한 동래어귀
개 한 마리 달려간다.
앞선 오토바이와 나란히
드문드문 집과 밭들 사이를 한달음에
쏜살같이 마음 길 빠져나간다.
하마 닿을 듯 닿지 않는
저 개와 오토바이의 거리
길의 고무줄 늘렸다 줄였다......,
무슨 내기 경주라도 하듯이
하나가 하나를 놓기 위해
하나가 하나를 놓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밀고 당기는
숨가픈 줄다리기,
뚝 심장 하나 떼어 쓰다듬어 놓고
조용히 집이나 지키라 일렀거늘
어찌하여 빛 그림자 하나로 내닫는
둘이 곧 하나로
뜨거운 불길로 확
애타게 애타게
봄날은 간다.
-가려운 봄/김기리-
산골마을 복사꽃 잔치에 다녀오고 난 후
나는 한 동안 가려움증으로 몸살을 앓는다.
이 늦은 독수 공방에
잠들지 않는 가려움과 한 이불을 덮는 호사
긁적이는 새벽, 온 몸으로 깨어 있어본 날의 아득한 기억이
피부 여기저기에서 붉게 일어난다.
봄날의 버릇,
가려움은 봄날의 손버릇일까
철철 넘치던 꽃들이 웃는 듯 내 눈 안으로 날아들던
연분홍빛 복사꽃들, 산마을 누추한 봄을
온통 무릉도원으로 끌어 들였던 복숭아밭
지금쯤은 바람에 뿔뿔이 흩어지고
연분홍꽃잎향내마저 그 옛날처럼 날아갔을 것이다.
고개를 살짝 돌렸을 뿐인데
그 사이 다 날아간 꽃피던 시절
꽃잎 짓이겨 홍조를 만들었을 뿐인데
며칠 몸에서 떠나지 않는 간질거리는 봄날
꽃피는 한철은 모두 착각이라는 자조가 분분하다
천천히 꽃 지는 몸 여기저기에 흰 분가루 같은 흔적
접분의 시절은 어림도 없고
그저 꽃가지 하나 숨겨두고 싶었는데
풍선처럼 둥둥 떠 있던 며칠이
줄 끊고 날아가 버렸다
도화 꽃놀이는 내년에도 계속되겠지
그전에 나는 이 가려움증을 되돌려 주어야겠다
지금 막 하얗게, 볼그족족하게, 고운 눈매로 분바르는
복숭아꽃 열매에게 다녀와야 되겠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