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번 째 쿠테타 )
스페인 역사를 알아보겠다고 책을 잡았던 나는 솔직히 후회하였다. 아무리 역사서란 것이 그 시대의 사건과 사고를
중심으로 엮어진다고는 하나 그들의 역사는 시종 굴곡 된 영혼들이 빚어낸 전쟁사와 다름이 없다. 그들처럼 줄곧 대립하고 투쟁하고 침략당하고 치열한
내전을 벌인 나라는 이 지구상에 거의 없지 싶다. 참 지독히도 많이 싸우고 많이 견뎌 내었다. 그렇게 해서 남아 날 것이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20세기 세기적 대표적인 침상으로 보는 그들의 내전의 대목에 이르러선 나는 숫제 책을 놓아버렸었다. 1950년 우리가 겪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고스란히 맛보는 듯 몸서리쳐지며 그들의 파단을 내가 겪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종교싸움보다도 더 잔인하고 맹렬한 것이 이데올로기다.
종교전쟁은 같은 동족 간에 피를 부르지는 않는다. 여직 이데올로기만큼 인류를 처참하게 만든 것은 없다.
1930년대는 이데올로기가 만발하던 시대이다. 그런 점에서는 전 세계가 겪어야 할 것을 스페인이 떠맡아 겪은 것
같기도 하다. 스페인의 내전 (1936~1939)은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사상적 정열이 시대를 움직여 발발한 것이다. 세계적 경제
공항, 국제 파시즘의 대두와 공산주의 운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스페인은 그 이전에도 절대주의와 자유주의가 늘 대립을 하여 1차
내란(1833~1839)을 겪은 바 있으며 1873년에 이루어 낸 제 1공화국은 11개월 만에 종식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1898년에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서 스페인은 쿠바와 필리핀도 상실하며 극도로 쇠약해진 현실을 맞게 된다.
그런 스페인은 개혁 정책의 실패로 말미암아 극도의 혼란이 야기되어 1923년 카탈루냐 지구사령관인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독재(1923~1930)를 맞게도 된다. 1930년 그가 프랑스로 망명을 하자 1931년
제2공화국(1931~1936)이 탄생을 한다. 하지만 혼란은 끊이지를 않는다. 스페인 민주정치 실현의 기초라 할 수 있는 토지개혁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였기 때문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은 지극히 열약하였고 사회는 봉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스페인 전체의 토지와 재산의 1/3을
갖고 있는 교회와 자주들은 이를 과격한 혁명으로 받아들여 늘 맞서고 있었다.
드디어 1936년 사회당 계통의 노동자 총연맹(UGT)과 노동자 국민동맹(CNT)가 손을 잡고 인민전선을 형성하여
총선에서 승리한다. 그들은 노동자의 임금인상과 농민의 조세 경감, 중소기업 보호등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을 단행하고 위험성이 엿보이는 프랑코
장군을 카나리아 제도의 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킨다. 그러자 총선에 패배한 대지주들과 브루주아들과 가톨릭 교회와 지주, 군부 등이 범 파시즘 세력을
형성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전선 정부를 방해하고 전복할 기회를 엿보는데 마침 왕당파 지도자가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마침내 보수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은 군부가 1936년 7월 17일 스페인 령 모로코에서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다. 당시 모로코에 가 있던 프랑코는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 군에게 본토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공화국 정부가 실수로 본토 상륙을 허용하는 바람에 스페인 전체가 내전이라는
양상을 띠고 정부 측과 반란군이 서로 편을 갈러 증오하고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이 대목은 1980년도 전두환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군부가 동경사 발령을 내자 전방에 배치된 공수여단을 빼내어 12 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을 쟁취한 전두환의 쿠테타와 수순이
똑 같아 아연해지고 만다. 그것만 유사한 것이 아니고 훗날 프랑코가 정권을 잡고 국민들을 무마하기위해 스페인 국민들에게 축구를 장려하고 검열을
하면서도 영화관을 늘리고 TV 시청율을 높이려고 애를 썼다는데 이 또한 모두 똑같아 할 말을 잃을 정도이다. 알다시피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국풍이란 놀이 쇼를 비롯하여 칼라 TV와 프로 야구가 80년도 그 무렵 우리에게도 시작되었었다.
스페인 내전은 초기 단계부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 정부군을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지원했다. 공화국 정부군 측에서는 작가인 헤밍웨이와 조지오웰 등이 참여한 의용군으로 이루어진 국제여단이 활약을 해 유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전은 정규군으로 구성된 반란군이 절대적인 우세를 보이는 가운데 1939년 3월 28일 마침내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반란군이 승리했다. 그
내전에서 60만 명이 사망했으며 25만 명에 이르는 공화국 정부군과 민간인들이 프랑스로 망명을 했다. 당시의 참전을 토대로 훗날 배반당한 혁명을
우화적으로 묘사한 동물농장 이란 글을 발표한 조지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고 했다.
독재자 프랑코는 마드리드에 입성한 1939년부터 그가 죽는 1975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했다. 그는 규율을 철저히
지키는 군인의식으로서 살았다. 내전이 끝나자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분쇄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스페인에 번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19세기 자유주의 사상이 싹텄던 무렵의 스페인 때 사리사욕에 날뛰는 정당 정치인 에게 이골이 났던 것인지 그는 틈만 나면 나는 정당을 미워한다고
했다. 그로 인해 스페인은 많은 인사들이 투옥되거나 정치범이 많이 발생하였으며 문화는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다. 이 또한 우리의 1970,
1980년대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런 그는 국가재건을 위해 대규모 산업단지와 관개 공사와 수리시설을 하였으며 정유공장이나 자동차, 시멘트 공장
등을 건설하고 관광 사업에 공을 들여 많은 외화가 들어오도록 했다고 한다. 독재자이면서 경제부흥에 앞장 선 것 또한 우리의 70년대의
박대통령을 보는 것 같다. 나는 그가 세웠다는 사자들의 계곡이라는 곳의 산위에 세운 십자가를 세고비아를 가는 길에 엘에스 코리아 조금 못
미쳐 보았었다. 언뜻 산위에서 번쩍이며 십자가가 보이기에 무얼까 하였는데 그 당시는 몰랐는데 여행을 마치고 와 그에 대해 공부를 하다 자연
그곳이 그가 세운 위령탑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경제의 기틀은 그로 인하여 다져졌다고는 하나 내란으로 인해 죽은 많은 사람의 넋이 그런 것으로
달래지고 위로가 될까 싶다.
이후 스페인엔 203번 째 쿠테타가 1981년 2월 23일 또 발생한다. 테헤로 중령이 이끄는 치안경비대가 국회에
난입을 한다.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3백 명의 치안 경비대원이 각료와 347명의 의원을 인질로 잡고 의사당을 점령했다. 국회를 접수한 중령은
공모한 발렌시아 지방의 보슈장군에게 임무완수를 보고한다. 당시 프랑코 총통의 사망으로 당시 37세에 왕위에 오른 부르봉왕조의 알폰소 13세(재위
1902~1931)의 셋째 아들인 카를로스 1세는 24일 군복 차림으로 TV에 나타나 "헌법으로 정해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나는 군사평의회에 명령했습니다. 나는 스페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최후까지 저항하겠습니다. 따라서 반란자는 나를 총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의지를 단호하게 밝힌다. 이후로 국왕은 스페인 민주주의 수호자로서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다.
당시로선 긴장되는 상황이었겠지만 참 나는 이대목이 여러 번 읽어도 좋고 상상을 해도 무척 포근하다. 스페인의
현재는 그로 인해 화창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204번 째 쿠테타가 그들에게도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이제 민주주의는 꿈과
희망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일상이고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서 확고히 자리잡았다. 하지만 처절한 항쟁을 겪지 아니하고 순순히 우리가
이러한 행복과 삶의 가치를 얻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들의 근대와 현세가 우리와 그렇게 닮았을까 싶다. 이데올로기의 충돌은 내전을 낳았으며
독재와 빈곤에서 벗어나 비로소 민주주의가 정착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는 달리 여전히 분단의 현실 속에 있다. 이 또한 큰 획을 긋기
위한 역사의 과정일 것이다. 필시 통일조국 또한 그 역사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뜻이 모두 그러하여 두드리면 열리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