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단의 근원적인 뜻은 혼인이 성사된 증표로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신부의 옷감을 끊어 보낸 것에서 유래된 것인데 일부 지배계층에서 혼인을 집안의 재부를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되면서 사회적인 폐단을 낳게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혼인에 앞서 "남자 집에서 고기와 술을 보낼 뿐이다. 재물을 보내는 례는 없다. "만약 "폐백을 받으면 그것을 녀종을 파는 것이라 하여 풍속에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였다. 신랑에서도 "오직 술과 음식을 보낼뿐이고 그 경중은 빈부에 따른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의 이러한 건전한 혼인풍습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 "옛날에는 혼례 때 납채로 다만 무명을 얼마 썼으나 ... 지금은 납채로 모두 비단을 쓰는데 많으면 수십필, 적어도 몇필씩은 쓴다. ... 나라에서 재함(예단함)을 지우고 가는 것을 금하니 미리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부 양반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폐단으로 국법으로 금하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예단이라하는 것은 일생을 같이할 배우자에게 혼인을 맺은 상징으로 나누어 가졌던 물건이 점차 예단감으로 변하게 된 것으로 처음에는 보통 옷감을 사용하던 것이 16세기경에 이르러 붉은색과 청색의 양단 두필을 청실 홍실로 양끝을 묶어 혼서와 함께 함에 넣어 보내는 것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혼인이 성사되면 신랑집에서는 예단을, 신부집에서는 자장을 준비하였다.
자장은 신부가 시집을 가서 입을 자신의 옷가지와 그 밖의 생활에 필요한 살림살이를 마련하는 것으로 신부의 새살림을 준비하는 것이다.
혼인을 하고 살아가자면 식생활도구와 옷가지, 이부자리와 같은 필수품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랑의 옷과 밥바리, 대접, 합, 수저는 물론 옷장과 소반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남편의 옷과 시부모와 일가친척들에게 폐백으로 드릴 것을 마련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딸을 낳으면 집 앞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가 시집갈 나이가 되면 그것으로 옷장을 만들고 천을 짜서 옷감이나 이불감을 마련하기도 했다. 자장의 내용과 양은 계급과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일부 계층에서 권력과 부를 과시하여 필요이상의 과용으로 폐단을 낳기도 했다.
혼인을 위한 예장과 자장의 부담은 지방에 따라 차이는 있었다.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를 비롯한 중부지방과 함경도 지방에서는 대체로 여자의 부담이 훨씬 많았으며, 반대로 평안도와 경상도 지방에서는 남자가 거의 모든것을 부담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두가지를 모두 합쳐 "예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경선 우리옷
010-4414-7874 최창섭
첫댓글 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