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출신지
| 본관
| 기록내역 및 근거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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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처현(安處玄)
| 경주부(慶州府)
| 안강(安康)
| 888년 동궁내양(東宮內養)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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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조(安尼藻)
| 중원부(中原府)
| 충주(忠州)
| 사마(司馬) 역임. 진관선사(眞觀禪師, 912 - 964)의 부친. 지곡사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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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초(釋超)
| 중원부(中原府)
| 충주(忠州)
| 진관선사(眞觀禪師, 912 - 964). 안이조(安尼藻)의 아들. 지곡사진관선사비(智谷寺眞觀禪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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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빈(別嬪) 안씨(安氏)
| 경주? 안산?
| 안강? 안산?
|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 ?~978, 재위 927∼935)의 부인으로 별빈(別嬪) 안씨(安氏)가 여러 기록에 보임. 경순왕과 별빈을 추모하는 성황제(城隍祭)가 시흥과 안산 두 지역에서 고려초부터 지금까지 매년 행해지고 있다고 함. 시흥 군자 성황제(君子 城隍祭) : 매년 음력 10월 3일 (군자봉) 안산 잿머리 성황제 : 매년 음력 10월 (여기서는 경순왕의 비가 홍씨, 장모가 안씨라고 함.)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 시흥 군자봉 성황제의식과 제물 (동영상 보기) 안산 잿머리성황제 굿의식과 제물 (동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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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安樂)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대광(大匡). 고려 태조(재위 918-943) 공신. 안직숭(安稷崇:1066~1135)의 선조. 안직숭 묘지명(安稷崇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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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경(安帝京)
| 죽주(竹州)
| 죽주(竹州)
| 997년 동량(棟梁) 대행명도교위(大行明徒校尉) 호장(戶長) 통화명안성장명사석탑지(統和銘安城長命寺石塔誌) 장명사지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서부동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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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령(安昌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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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9년 문과 장원 급제. [高麗史4卷-世家4-顯宗 즉위년] 是月賜 安昌齡 等及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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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광(安紹光)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1010년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상장군(上將軍) 안소광(安紹光, ?-1017)을 행영도병마사(都兵馬使)로 함. [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安紹光 爲行營都兵馬使 / 高麗史4卷-世家4-顯宗 1년 /《고려사》 제94권 - 열전 제7 안소광(安紹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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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균(安宰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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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6년 司憲 安宰均 李元秀 劉玄佐 李懷 郭紳 李周佐 爲監察. [高麗史4卷-世家4-顯宗1-07-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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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표(安仁表)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증조 인표(仁表)는 검교소부감(檢校少府監)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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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화(安鼎和)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조부 정화(鼎和)는 소부감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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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점(安鴻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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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0년 안홍점(安鴻漸)을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임명하였다.[以 安鴻漸 爲司憲雜端. / 高麗史4卷-世家4-顯宗1-11-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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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安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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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1년 加徐訥洪賓有暹 [安甫] 高烈等重大匡.[#高麗史6卷-世家6-靖宗-07-24-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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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보(安民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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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6년 겸 감찰 어사(兼監察御史) 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 안민보(安民甫)를 관서, 관북, 관내 등 세 지방의 무문사로 함.[兼監察御史試殿中內給事 [安民甫] 爲關西北關內三道撫問使; / #高麗史7卷-世家7-文宗1-10-15-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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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신조(安申祚)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아버지 신조(申祚)는 대자대부(大子大傅)에 추봉되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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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연 모(坦然 母) 안씨(安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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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1069 ~ 1158)은 고려 전기의 명필로 신품4현의 한 사람이다. 단속사대감국사비(斷俗寺大鑑國師碑)에 <<..휘는 탄연(坦然)이요, 속성은 손씨(孫氏)며, 선조(先祖)는 (결락) 양현(陽縣) 사람이다.아버지는 숙(肅)이니 군공(軍功)을 세워 교위(校尉)가 되었고, 어머니는 안씨(安氏)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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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安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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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9년 九月日本國歸我飄風 商人 [安光] 等四十四人.[#高麗史9卷-世家9-文宗3-33-12-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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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보(安德保)
| 대원군(大原郡)
| 충주(忠州)
| 외손자 최유청(崔惟淸:1095~1174) 묘지명(墓誌銘)에 " 어머니는 □ 대원군대부인 안씨(大原郡大夫人 安氏)로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 덕보(德保)의 딸이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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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후(安民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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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5년(선종2년)에 세운 국보 59호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의 글씨를 씀. "승봉랑(承奉郞) 상서도관(尙書都官)낭중(郞中)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안민후(安民厚)는 칙선(勅宣)을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다." 안민후는 구양순체를 잘 썼다고 하며, 서예사에 이름이 나옴.[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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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선준(安先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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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1년 甲辰都兵馬使奏: "往年蕃賊寇昌州兵馬錄事 [安先俊] 等領卒出屯德寧戍遣郞將高猛等 追捕奮擊賊大潰校尉崇儉隊正邊鶴等突入賊中士卒增氣 斬有功乞加職賞以勸將來." 制可.[#高麗史10卷-世家10-宣宗-08-11-1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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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감(安仁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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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7년 甲辰遣 [安仁鑑] 如遼賀天安節.[#高麗史11卷-世家11-肅宗1-02-27-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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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공(安子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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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2년 壬申遣 [安子恭] 如遼賀天興節.[#高麗史11卷-世家11-肅宗1-07-58-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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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직숭(安稷崇)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1113년 九月乙酉遣西頭供奉官 [安稷崇(1066-1135)] 如宋. 牒宋明州云: "去年入朝金緣等同稱: '在闕下 時蒙館伴張內翰等諭來歲又當 祀申覆國王遣使入朝以觀大禮.' 聞此已令有司方始 備辦忽母氏薨逝迫以難憂今年未遑遣使入朝以達情禮請炤會施行."[">#高麗史13卷-世家13-睿宗2-08-34-1113]/ 안직숭 묘지명(安稷崇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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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린(安寶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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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2년 丁丑御紗樓召文臣五十六人刻燭命賦牧丹詩六韻詹事府注簿 [安寶麟] 爲第一. 賜絹有差.[#高麗史14卷-世家14-睿宗3-17-1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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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중(安居中)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1135년에 지은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장남 거중(居中)은 어려서 과거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금 수주판관 예빈주부(樹州判官 禮賓主簿)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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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정(安居正)
| 동주(洞州)
| 동주(洞州)
| 1135년에 지은 안직숭(安稷崇, 1066-1135) 묘지명(墓誌銘)에 "차남 거정(居正)은 음서[廕]로 관직을 얻었는데 장사랑 양온령동정(將仕郞 良醞令同正)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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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숙(安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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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8년 가을 7월에 지어사대사 최관(崔灌)과 잡단 박정유(朴挺蕤)와 시어사 인의(印毅)ㆍ최술중(崔述中)ㆍ안숙(安淑) 등이 3일 동안 합문 밖에 엎드려 추밀사 진숙(陳淑)을 탄핵하기를, “일찍이 서경을 토벌할 때에 남의 노비와 보대(寶帶)를 받은 바 있다." 하였는데, 왕이 답하지 않자 모두 집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최관 등을 불러 일을 보도록 타일렀으나, 오직 정유와 술중은 굳게 다투고 나오지 않고, 안숙은 결국 면직되었다. [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무오 16년(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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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수(安正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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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2년 癸丑遣 [安正脩] 如金賀萬壽節.[#高麗史17卷-世家17-仁宗3-20-33-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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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작유(安綽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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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5년 丙子遣借戶部侍郞 [安綽裕] 謝橫宣.[#高麗史17卷-世家17-仁宗3-23-36-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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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필공(安弼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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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위 오천유(吳闡猷, 1168~1238) 묘지명(墓誌銘)에 "먼저 좌우위낭장(左右衛郎將) 안필공(安弼公)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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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언(安之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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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4년 덕수가 주(州)의 부사(副使) 최박문(崔博文), 판관(判官) 안지언(安之彦)ㆍ김공유(金公裕) 등과 더불어 군사를 나누어서 모든 성문을 진치고서 지켰다. [고려사절요 제12권 명종 광효대왕 1(明宗光孝大王一) 갑오 4년(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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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민(安置民)
| 경주부(慶州府)
| 안강(安康)
|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지인(知人)으로, 시화에 능하였으며, 미술사에 이름이 나온다. [고려 중기 경주의 안치민(安置民) / 高麗時代 화가 安置民의 現實認識 / 안치민(安置民)의 시와 관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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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발(安劉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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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8년 시어사(侍御史) [고려사 절요] / 고려사 제101권 - 열전 제14 안유발(安劉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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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공(安允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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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2년 癸未遣將軍 [安允恭] 如金謝賀生辰; 兵部郞中崔永儒賀正.[#高麗史20卷-世家20-明宗2-12-27-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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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부(安有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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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0년 十二月丁未 以崔詵守*大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 奇洪壽守*大師柱國; 任儒守*大傅門下侍郞平章事; 崔忠獻守*大尉上柱國; [安有孚] 爲右副承宣中書舍人; 趙準爲戶部侍郞右諫議大夫. [#高麗史21卷-世家21-神宗-03-2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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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완(安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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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년 八月宋商船將發禮成江監檢御史 [安琓] 行視 出之物得犯禁宋商數人笞之太甚. 忠獻聞之罷琓又論不擇遣御史罷侍御朴得文. [#高麗史21卷-世家21-熙宗-01-0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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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좌(安劉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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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돈 조충(趙冲 : 1171∼1220) 묘지명(墓誌銘)에 "둘째 딸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안유좌(安劉佐)의 □째 아들에게 시집갔는데, 공의 문생(門生)이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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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린(安永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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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9년 의주 선유사(宣諭使) 조염경 등이 돌아와 말하기를, “의주의 반민(叛民) 50여 명이 가주(嘉州 평북 가산(嘉山))에 와서 말하기를, '병마사 조충ㆍ김군유ㆍ정공수(丁公壽) 등은 청백하고 백성을 사랑하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백성에게서 재물을 거두어 살을 벗기고 뼈를 긁어서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으므로, 이러한 반란이 일어났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최우가 그 말을 듣고, 안영린(安永麟)ㆍ유비(柳庇)ㆍ준필(俊弼)ㆍ이정수(李貞壽)ㆍ최수웅(崔守雄)ㆍ이세분(李世芬)ㆍ고세림(高世霖)ㆍ홍문서(洪文叙)ㆍ이윤공(李允恭)ㆍ최효전(崔孝全)ㆍ송자공(宋自恭)ㆍ이원미(李元美)ㆍ최밀(崔謐) 등이 일찍이 충헌에게 아첨하여 섬겨서, 안찰사가 되기도 하고, 분도(分道)ㆍ분대(分臺)ㆍ감창사도 되었으며, 큰 고을을 구하여 한없이 착취를 하였으므로, 여러 섬으로 나누어 귀양보내었다.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기묘 6년(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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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정(安碩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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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1년 봄 정월에 어느 사람이 상소하기를, “어사 중승(御使中丞) 안석정(安碩貞)은 사노(私奴)의 아들이니, 대각(臺閣)에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이때에 최우가 사사로이 석정에게 후히 하여 외람되게 이 직을 제수하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신사 8년(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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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安孚)
| 경주부(慶州府)
| 안강(安康)
| 외손자 오잠(吳潛 : 1259~1336) 묘지명에 "어머니는 안강군대부인 안씨(安康郡大夫人 安氏)로 안강(安康) 사람이며, 아버지인 금오위 정용별장(金吾衛 精勇別將) 부(孚)의 딸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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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安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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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3년 봄 정월에 교위(校尉) 조보수(趙甫壽)가 그 표형(表兄) 대장군 송백공(宋白恭)을 최우에게 참소하니, 우가 백공을 강에 던져 죽이고 보수를 낭장으로 삼았다. 또 어떤 사람이 장군 김치(金偫)를 참소하니 우가 치를 불러 꾸짖기를, “네가 무뢰배를 모아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머리를 깎아서 하동현(河東縣)으로 귀양보내고 김치와 친하게 지내던 장군 김정희(金正曦), 평로진 부사(平虜鎭副使) 손중수(孫仲秀), 다방(茶房) 안기(安琦) 등 35명을 강에 던지었다. 김치는 곧 최우의 외손 정(晸)이었다.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계묘 30년(1243), 송 순우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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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安戩)
| 죽주(竹州)
| 죽주(竹州)
| 1249년 6월 "계축일에 시랑 안전(安戩, ?∼1298)과 낭장 최공주(崔公柱)를 몽고에 보냈다" [高麗史23卷-世家23-高宗 36년(1249)/ 癸丑遣侍郞安戩郞將崔公柱如蒙古]. / 고려사 제106권 열전 제19 안전(安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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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열(安邦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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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5년 己未命判司天事 [安邦悅] 脩智陵以爲蒙古所壞也.[#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2-16-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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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열(安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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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7년 원주(原州)의 적 안열(安悅) 등이 옛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장군 윤군정(尹君正)과 낭장 권찬(權贊)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치게 하였다. [原州賊 [安悅] 等據古城叛遣將軍尹君正郞將權贊領兵討之./ #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4-11-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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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安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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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7년 東北面兵馬使報: "分司御史[安禧]設伏於永 山谷挾擊東眞兵獲兵仗鞍馬及所虜男女牛馬等物."[#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4-19-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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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민(安洪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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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9년 2월에 등주와 화주 등 여러 성의 반민들이 관인(官人)이라 자칭하고 몽고 사람을 인도하여 와서 한계성(寒溪城)을 쳤다. 방호별감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를 거느리고 나와 쳐서 전부 섬멸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기미 46년(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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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정(安世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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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1년 봄 정월에 공유(孔愉)ㆍ안세정(安世貞)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또 장군 인공수(印公秀)를 몽고에 보내어 아해(阿海)가 겁내어 우리 군사를 구원하지 않은 일을 아뢰니, 황제가 아해를 면직시키고 소환하였다. [고려사절요 제19권 원종 순효대왕 2(元宗順孝大王二) 신미 12년(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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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열(安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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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1년 신축일에 착량(窄梁)의 초소를 지키고 있던 몽고 군대가 대부도(大部島-남양 대부‘大阜’섬)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침해 약탈하니 주민들의 원망이 심하였다. 대부(大部) 사람들이 숭겸 등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몽고 병사 6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주(水州) 부사 안열(安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으므로 안열의 관직을 5품으로 올리어 주었다. [辛丑窄梁防戍蒙古兵入大部島侵奪居民民甚怨之大部人聞崇謙等起遂殺蒙古六人以叛 水州副使[安悅]率兵討平之進悅秩五品. / #高麗史27卷-世家27-元宗3-12-15-1271] (1257년 원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안열과는 동명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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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재(安迪材)
| 제천(堤川)
| 제천(堤川)
| 1277년 "6월 경신일에 .. 장군 안적재(安迪材)를 합포 방호사로 임명하였다.[六月 庚申 ... 以將軍安迪材爲合浦防護使. / 《고려사》 제28권 - 세가 제28 - 충렬왕 정축 3년(1277)]" 증보문헌비고에 제천 안씨(堤川安氏) 시조(始祖)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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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정(安社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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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7년 전 대장군 위득유(韋得儒)와 중랑장 노진의(盧進義) 등이, 김방경이 반역을 계획한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흔도(忻都)에게 참소하기를, “방경이 아들 흔(忻)과 사위 조변(趙抃) 및 공유(孔愉)ㆍ나유(羅裕)ㆍ한희유(韓希愈)ㆍ안사정(安社貞) 등 4백여 명과 함께 왕ㆍ공주ㆍ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화로 들어가 점거하여 반역하기를 계획했다.” 하면서, 여러 가지로 죄를 꾸며서 무고하였다.......[고려사절요 제19권 충렬왕 1(忠烈王一) 정축 3년(1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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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安珦)
| 흥주(興州)
| 흥주(興州)
| 1288년 안향(安珦, 1243∼1306)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함. [高麗史30卷-世家30-忠烈王 14년(1288) 春正月己丑以安珦爲左副承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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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정(安守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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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1년 경신일에 적이 양근성에서 잡아간 여자 두 사람을 보내어 성 아래에서 유인하자, 충갑이 또 이들의 목을 베니, 적은 북과 함성을 울리고 전진하면서 온갖 계략을 써서 성을 공격하였다. ....고을의 아전 원현(元玄)ㆍ부행란(傅行蘭)ㆍ원종수(元鍾秀)가 국학 양정재(國學養正齋)의 유생 안수정(安守貞) 등 1백여 명과 함께 서쪽 봉우리로부터 내려가서 합세하여 공격하는데, ...이로부터 적의 예기(銳氣)가 꺾이어 감히 다시 공격해 오지 못했고, ... 이는 모두 충갑의 공이었다. [고려사절요 제21권 충렬왕 3(忠烈王三) 신묘 17년(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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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安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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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安山)
| 1314년 "9월 초하루 무자일에 안진(安震, ?-1360) 등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九月 戊子 朔賜安震等及第/《고려사》 제34권 - 세가 제34 충숙왕 1] 한중연 인명사전에는 순흥안씨로 나오나, 순흥보에는 없고, 안산군(安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안산(安山) 안씨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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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유(安子由)
| 안산(安山)
| 안산(安山)
| 1342년 전 군부판서 안자유(安子由) [《고려사》 제36권 - 충혜왕 임오 후 3년(1342)]/ 1347년 6월 갑술일에 참리(叅理) 안자유(安子由)를 원나라에 보내 모시베를 바치게 하였다. [고려사 충목왕 정해 3년(1347)] 증보문헌비고: 안산 안씨(安山安氏) 시조(始祖) 안자유(安子由)〔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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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길상(安吉祥)
| 광주(廣州)
| 광주(廣州)
| 1350년 경인 2년(1350) 봄 정월 ...경진일에 왕이 사부 상의(師傅商議) 민사평, 시학(侍學) 신덕린(申德鱗), 안길상(安吉祥, ?-1380), 봉질(奉質), 손계(孫桂) 등을 위하여 간단한 연회를 베풀었다.[《고려사》 제37권 - 세가 제37 > 충정왕 > 충정왕 경인 2년(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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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安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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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公山)
| 1378년 10월...성여완(成汝完)을 정당문학 상의(政堂文學商議)로 임명하고 왕승귀(王承貴), 김광후(金光厚), 최준(崔準), 김한제, 안익(安翊, ?-1410), 장하(張夏), 목자안(睦子安) 등을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고려사》 제133권 - 열전 제46 신우 무오 4년(1378)] 익재 이제현의 사위이며, 공산안씨의 시조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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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단군의 자손이다'라고 하는 것을 믿지는 않지만, 우리는 단군 신화를 역사책에서 배웁니다. '이땅에 살고 있는 모든 안씨들은 한사람의 시조로 부터 안씨 성을 쓰기 시작했다'라는 신화도 문제가 있지만, '각각의 안씨는 각각의 시조로 부터 시작되었고, 시조 이전의 그 어떤 안씨와도 그 혈통이 다르다'라고 단정짓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조 이전의 상계를 궁금해 하는 후손된 사람들의 노력은 진지해야 하지만, 사실은 사실로 받아드리고, 사실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기까지는 확정하여 단정 짓는 것은 무모하단 생각이 듭니다.
동국안문은 모든 안씨가 함께 출입하며 역사적 증거에 의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각 족보상의 기록의 차이와 서로가 믿고 있었던 인식의 다름을 공감하는 방향으로 바로잡아가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터넷세대와 각 안씨 대종회의 임원진들간에는 한세대의 차이가 아니라 거의 100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고 보아집니다. 제가 그 세대차이를 해소해보려는 노력은 일차 실패하였습니다. 그 동국안문CD는 재중님과 다른 분들께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의견교환을 좀 하려합니다.
모든 안씨들이 참여하여 토론하는 광장이 필요합니다. 안씨들간에 갈등의 근원이 되는 기록과 주장을 서로 올리면 격한 논쟁이 되기 쉽습니다만 결국은 역사적증거에 근거한 주장만이 살아남고 공감대를 가질 것으로 봅니다. 자신의 씨족사가 중요한만큼 다른 관향의 씨족사도 그만큼 중요하며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해하고 존중하여 화합할 수 있을 것이며 아마도 수십년후에는 각 대동보에 반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토론의 광장을 다시 만들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구구절절한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씨족사(氏族史)도 분명 역사의 한 장르(genre)지만, 핏줄과 관계된 것에는 항상 감정이 실리게됩니다. 글줄이나 읽은 사람치고 족사에 관심갖지 않는 이가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후손들은 대물림하여 또 관심을 두는 것이겠지요. 관심은 애정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그 애정이란 것도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하지요. 분별력 있는 애정을 물려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려말선초의 반목과 갈등, 조선시대 사색붕당의 갈등, 친일과 항일, 친탁과 반탁,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갈등, 그리고 망국적인 영호남의 지역갈등, 근래에 들어서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까지...
감정이 실려있는 씨족사에 대한 애정이 과연 이런 갈등을 해결 해 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동국안문의 실패를 통해서 한 번 경험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으로 각 안씨 문중들은 이러한 경험을 밑거름 삼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동국안문 또는 농서이씨설은 광범위하게 각 안씨 문중에서 받아들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학회 활동을 하다보면, comment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comment는 많은 것을 함축하여 요점만 말합니다. 즉 뉘앙스(nuance)만을 전합니다. 알아들으면 된 것이고, 못 알아들으면 그 뿐인것이지요.
안병식님 오랜만입니다....씨족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조사하는 객관적 자세입니다...제가 저희 사과공파에 최근 자료를 안올리지만 광주안씨의 주장처럼 안씨동원 기록이 후대의 기록이 아님을 알게되었고 군호가 죽산,광주,죽성으로 결정된 시점과 당시 족보의 원문형태는 찾았습니다...
위의 글의 주제가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그럼 과연 상계 계보가 독자로만 존재했을까요???....한 예로 죽산 6세에 현재 두분만이 있는데 다섯분이 계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전쟁,반역 등 어떠한 이유로 선대와 단절될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또한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인이 서로 결혼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으며 중국인이 신라에 살다 당나라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지요...그중 안씨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신라중기 이후 유학생중에 당나라에서 결혼을 안했을까요???....그럼 배위에 안씨가 있을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비판해 주십시요???
"안씨동원이 거짓이다"라는 가설을 세워 광주안씨가 이를 증명하는 자료중에 가설과 반대되는 자료가 있으면 그 비판은 무의미합니다...한 예로 안씨끼리의 혼인이 문제라면 다른 성씨에 그런 동성혼이 없어야합니다...동국문헌비고에 없고 증보문헌비고에 없으니 인정못한다는 논리는 순암공 변무에 군호가 죽산,광주,광주인데 그 이전 고성이씨 심원록과 을축보서문에 나타난 죽산,순흥,광주의 군호가 먼저라는 점 생각해 보셨나요...안윤채가 죽산보에 없으니 실존인물이 아니다라는 비판도 1909년 장단파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장단파보서문을 보셨으면 비판할까요???...
목은 이색 축하시에 문성공 증손자 논란에 상계가 기록된 족보에 3자가 다 기록되었을까요???...안 보시고 비판하셨더군요...고성이씨 관련 비판도 고성이씨 족사연구회에 자문을 구해보고 글을 쓰는지 모르겠네요...이제 안병식님이라고 객관적 자세로 비판하고 글을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아직은 제가 자료를 공개 안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하겠지요...
마지막 숭묘단 제막식때 광주인 참가 얘기는 제가 들은 바 없습니다...단지 회장님 면담시 나온 얘기로 광주안씨가 글로 쓴 것만 보았습니다...이 부분은 중요한 내용이 아니며 안씨동원 기록이 광주안씨의 주장처럼 사대주의나 모화사상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또한 제가 올린 자료를 짜집기식으로 글을 써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에 올리지 않는 것입니다...광주안씨가 마치 1741년에 사셨던 것처럼 안씨동원기록이 없고 1790년대에 누군가 유포했다는 식의 무책임한 글을 지양해주시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예로 고성이씨 심원록이 결코 후대의 글이 아님을 자료를 찾아보시고 나의 주장에 자료가 충분한 것인지 판단하시고 비판을 하셔야 하는데 주먹구구식의 글로 쓰시니 저역시 무시하는 것이지요...안병식님의 말씀처럼 동국안문 시절처럼 서로 자료를 공유하는 공간은 필요합니다...저역시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족사를 시작한 단계이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너무 비판만 하시는데 적어도 그런 글에는 반대되는 자료가 없어야 하겠지요...광주안씨의 주장에는 반대되는 모든 자료가 존재함을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도시조 이원 할아버님의 윗대 고증은 광주안씨 비판에 저역시 인정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결자해지 차원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당시 안씨원류 고증에 함께 했던 죽산인 뿐만아니라 결정적 당종실을 말씀하신 광주안씨(누군인지 아시는 분들이라 존함은 생략) 분들도 책임이 있습니다....그러나 안씨동원 기록에 당종실(광주안씨만 존재),이기의 동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고증은 고증일뿐 후대에 정확한 기록이 나오면 언제든지 수정되는 것이 고증입니다...이 글 오해마시고 또 댓글을 이용해 죽산인이 이렇다드라 식의 글은 안쓰시면 좋겠네요...족사연구에 참조만 하시면 좋구요...
댓글을 안쓰려 했는데 참 너무하십니다....안병식님이 은둔학자라고 표현하신 안씨 족사 탐구(이글루)에 역시 반박글이 있더군요....저는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좀 자료를 찾아보시고 글 쓰라고 전해주십시요....소설쓰지 말라고 하시고요...신죽산안씨 카페에 저도 예의가 아닌지 알지만 글을 쓸 때는 적어도 그 글에 책임을 져야합니다..그리고 안윤채의 족보만 있는지 아시는데 직접 자료를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