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 시118: 5-7
<도 입>
오늘 본문인 시편 118편은 누가 쓴 시인지를 모르는 소위 ‘무명의 시’입니다. 당시 시인은 1절을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시작하고 있어 평안한 마음으로 시를 쓴 것 같지만 실상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시를 썼습니다
시인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사실을 6절과 7절에서 두 번 거듭 반복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통의 터널을 지난 후에 본 시를 쓴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내편이다. 아마 이렇게 좋은 말은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 구원의 확신과 두려움에서 자유하며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 ‘편’은 한 두 사람보다는 어느 정도 그룹을 이루고 있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편을 가르고 경기 시합을 하거나 어떤 일을 진행하게 됩니다
1)스포츠 안에 편이 있습니다. 아마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편일 것입니다.
스포츠는 같은 성향 안에서 대부분 편이 나누어집니다. 편이 없는 스포츠는 아마 없을 것이며 또한 보는 재미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국과 중국이 축구 시합을 하면 어느 편에서 응원할레요. 네 당연히 중국 편을 응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우리 민족이지만 국적은 중국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국가관은 중국이며, 민족관은 조선족입니다. 그런데 정신이 약간 이상한 한국사람 중에는 조선족이 중국편을 응원한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국가관과 민족관을 분별하지 못한 무지의 발상입니다.
그러면 조선족과 한족과 축구하면 누구편이예요. 여기서는 조선족 편을 응원해야 합니다. 만약 한족을 응원하면 민족의 배신자입니다. 일본과 한국, 미국과 한국이 축구하면 누구 편을 응원할 것입니까? 네 한국 편을 응원해야 합니다.== (운동회/청군과 백군, 프로축구, 야구, 동네 경기 등등 모두 편이 있음)
2)편은 스포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편 곧 생활 속에도 다양한 편이 있습니다
T.V를 켰는데 흑룡강성과 산동성하고 노래자랑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흑룡강성 편을 들 것입니다. 이것은 작정하지 않아도 무의식중에 자기 지방 편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편은 있는 것 같지만 또한 뚜렷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정치, 지방색, 사상, 국가관 등등 모두 편이 있음)
3)종교적인 편이 있습니다.=============================== 종교의 편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아마 가장 뚜렷하게 나타는 것이 종교일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반드시 뚜렷하게 편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가 됩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도교 등등)
4)심지어는 가정에도 편이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은 딸만 둘을 났는데 딸 둘이=========== 모두 엄마편이라며 불만을 토로합니다.
스포츠나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에까지 ‘편’이 있다는 것은 ‘편’은 우리의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있다는 지극한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스포츠나 가정에서 나타나는 편은 뚜렷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의 폭이 깊어지며,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 지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폭력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적으로 스포츠 현장에서 폭력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뚜렷할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뚜렸하지 않으면 가짜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다리는 불교, 한 다리는 교회(기독교)에 걸치고 있다면 ==이것은 뚜렷하지 않는 행동이며, 가짜입니다.
반면에 ‘편’이라는 속성은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영향을 줍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의 편이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가치관,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좀 더 거대하게 말하면 인생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입니다.
무심코 보면 제목이 전혀 이상할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좀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의아하게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은「하나님이 내 편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오늘 설교는「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제목을 잘 잡은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설교 제목을 제대로 잡았으면 당연히 시편 기자처럼「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인과 반대되는 개념의 제목이기 때문에 의아한 설교 제목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설교 제목이 이상하게 보이십니까?
저는 오늘 작정하고 설교를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이상한 설교를 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잘 들어야 하는데 ------------오늘 설교는 특별히 잘 들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상한 설교를 하려고 준비했기 때문에 오늘 설교가 정말 내 영혼을 망치는 설교인가를 판단하기바랍니다. 그러므로 다른 때보다 오늘 설교는 잘들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것입니다.
<본 문>
시편 118편은 ‘무명의 시’입니다. 서론에서 밝힌 바 있듯이 1-4절만 보면 당시 시인은 평안한 마음으로 시를 쓴 것 같지만 실상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쓴 시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은 이처럼 시작하고 있습니다. :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인이 고통 중에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 ‘고통’은 ‘가두다’, ‘속박하다’란 뜻으로서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오늘 본문에만 사용한 특별한 케이스(사례)입니다. 시인이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는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본시(118편)의 전 문맥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10-14절에 보면 시인이 아주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급한 위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죽음일 것입니다. 시인은 죽음의 고통까지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17, 18). 그리고 계속해서 여호와의 문을 구원의 문으로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5절)의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은 시인의 부르짖음을 ‘구원’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14). 여기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넓은 곳에 세우셨다.”는 것은 자기(시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두 가지 의미로 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시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응답은 자기 백성들이 부르짖는 기도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항상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다른하나는 시인의 기도는 자신의 사심이나 욕심보다는 공의적인 입장에서 기도한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사망의 늪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고통’은 구원은 응답이며, 선물이며, 가장 큰 기쁨과 평안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지난날의 고통은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은 간구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지금 생생하게 기억하며,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붓을 든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가 받은 은혜를 마음의 간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증언하기 위해 시적으로 글을 남겼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하게 보여 집니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는 겸손함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8편은 무명의 시입니다
: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인의 대단한 발견입니다. ------시인이 대단한 발견은 보물이나 돈 금고가 있는 노다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다른나라 군대가 자기를 지켜주기 위해 갑자기 나타난것도 아닙니다. 시인의 대단한 발견은 바로 이것입니다
1. 첫째,=========================================================“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여러분! 이것이 그렇게 대단히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말을 무심코 보면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은 상황에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며 그저 넘어갈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발견입니다. 아니 대단한 발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시인은 좋은 상황이 절대로 아닙니다===========. 고난, 고통의 선을 넘어서 죽음에 이르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발견이 아니라 대단한 발견인 것입니다. 지금 시인은 죽음의 사선에서 “여호와는 내 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대단한 발 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이라는 원어적 의미는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과 비슷한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나’와 ‘우리’는 약간 다른 뉘앙스(느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 속에 때로는 ‘나’와 함께 하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