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교인가
Why Buddhism
엠오시 월슈 지음
M.O'C. Walshe
홍종욱·서형석 옮김
(Bodhi Leaves ·B5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 Sri La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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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부 · 대승 · 소승 (1/2)
상좌부는 빠알리 경전들에 근거를 두는 불교의 한 형태로 스리랑카와 미얀마 그리고 태국에 널리 퍼져 있고, 런던에 있는 세 곳의 불교 사원도 모두 이 종파에 속해 있다. 상좌부 불교는 ‘기본불교’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기본불교란 말은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덧붙이거나 변형하기 이전 원형 그대로인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더 높은 형이상학적 상부구조를 구축하기 위한 ‘기초’ 토대쯤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다양한 대승불교의 제 학파들 중에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파가 몇몇 있다. 이제 이런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큰 수레 또는 경로’라는 뜻의 대승이라는 용어는 ‘보잘것없는 수레 또는 경로’를 뜻하는 소승이라는 말과 짝지어 만들어졌고, 이 폄하 투의 용어가 암시하듯이 주로 대승 측에서 상좌부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들을 만들어낸 초기 대승 신봉자들에게 상좌부란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대상은 고대의 다른 부파들, 그중에서도 특히 설일체유부였던 것이며 이들의 견해는 대승 쪽보다는 상좌부 쪽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 여러 부파는 이미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는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 와서 동양의 상좌부 측에서 스스로 소승이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나서는 경우조차 볼 수 있다. 그런 판에 여기서 딱지를 놓고 입씨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만 무방하다면 일체 가치판단을 배제한 가운데 ‘좁은 길Narrow Path’과 ‘넓힌 길Expanded Path’이란 표현을 써볼까 한다. 우리가 상좌부를 ‘좁은 길’이라 하는 의도는 열반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실제적 길이 빠알리 경전에 제시되어 있다는 점, 그 목표를 성취시키겠다는 단 한 가지 목적 아래 부처님께서 선포하신 바, 원래의 독창적 교의가 갖는 본질적 특성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빠알리 경전 여기저기에 후대에 전개된 교리에 연원한 문구들이 보이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빠알리 경에 빠진 중요한 내용이 다른 자료들에서 발견된 예는 아직 없다. 이는, 다시 말해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빠알리 경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멀리 딴 곳으로 눈을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게 되는 까닭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대승불자들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논지는 물론 아니다. 또 빠알리 경에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서 대승경전이 틀렸거나 쓸모없다는 것도 아니다. 교리적 천명 또는 실수행법 규정의 형태를 띤 모든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방편이라는 것은 교파의 차이를 막론하고 불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우리가 바른 길을 걷도록 만들어주기만 한다면 어떤 방법도 정당한 것이다. 진리는 말이나 사변적 이론을 뛰어넘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에 대해 어떻게 말한다 해도 그것은 상대적으로만, 그리고 잠정적으로만 옳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대승불교의 교묘한 방편들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유용할 수도 있고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대충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불교는 ‘좁은 길’의 형태로서 인도의 남방과 동남방에, 그리고 ‘넓힌 길’의 형태로서 북방과 동북방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근대에 와서 불교가 서방에 처음 소개될 때에는 맨 처음에는 주로 스리랑카를 필두로 ‘좁은’ 형태의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상당한 기간이 지난 연후에야 ‘넓힌 길’의 여러 형태들이 수입되었는데, 주가 된 것은 티베트에서 들어온 탄트승(금강승)이며―이 파의 가르침은 신지학에 의해 다소 희석되거나 재해석되었다―다시 한참 지나서 일본으로부터 선禪의 형태가 소개되었다. 서양 여러나라에서 그 나름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수많은 종파 가운데 비교적 추종자가 많은 종파로는 이 셋을 꼽을 수 있겠다. 일본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시 눈을 돌리자면, 일본 국내에서는 선종禪宗보다 ‘정토종淨土宗’의 신도가 훨씬 많은 형편이다.
‘신新불교’의 여러 유파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불교의 원래 가르침과는 물론 ‘넓힌 길’과도 희미하게 연결될 뿐이어서 이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일본에도 티베트의 탄트라 불교와 대단히 유사한 진언종眞言宗이 있으나 서양에서 탄트라처럼 호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설마 진언종이 탄트라처럼 섹스 상징주의를 채택하지 않은 탓은 아닐지.
교리 문제와는 별도로 일부 사람들이 ‘넓힌 길’을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로 꼽히는 것이 있다. 대승불교가 상좌부 불교보다 한층 다채롭고 또 정서적 만족을 더욱 직접적으로 줄 것처럼 보여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독교권에서 일부 근엄한 개신교 종파에 비해 로마 가톨릭이 어떤 종류의 호소력을 갖는 것과 유사하다. 상좌부 불교는 무미건조하고 교의적인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목표를 선명히 그려 보여주지도 않는다. 어느 작가는 좌부 불교를 뾰족한 부분을 잘라버린 원뿔에 비유했다. 그것은 마치 산자락은 보이나 정상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산과 같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의 선禪은 기슭은 보이지 않고 꼭대기만 하늘 높이 선명하게 솟아오른 후지산처럼 보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올바른 마음상태에 들기만 하면 문득 그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니! 아니, 이미 그 위에 올라서 있는지도…. 티베트 불교를 믿는 서양인들에게는 후지산보다 훨씬 높은 에베레스트 정상마저도 홀연히 안개 밖으로 그 성스러운 자태를 드러내 보여줄 테고, 어떤 신비로운 의식을 잘치러 내기만 하면 경이적 방식으로 어느덧 그 정상에 옮겨지는 황홀한 경험도 코앞에 임박해 있을테지…. 너무 빈정거린다 하겠지만, 실은 세 가지 불교를 놓고 선택에 고심하는 무명 중생들이 그리고 있을 모습들을 단순화시켜 본 것이다.
이러한 범부들에게 상좌부라는 길은 갈데없이 힘들고 고된 일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이고 목표점 또한 너무나 불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다른 길들은 재미도 있고 쉽기도 할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결국, 겉보기와 내용이 다른 것은 ‘방편’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런 겉모습은 한 유명한 대승의 우화가 말해주듯 ‘교육용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아버지가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아주 매혹적인 장난감들을 바깥에서 보여주어 아이들을 유인해낸다는 우화 말이다. 이제 우리는 교리논쟁을 일삼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 옛날 대승경전에서 소승이라고 언급할 때 고자세로 폄하하는 어투를 쓰게 된 것도 원인이 있었다. 소승, 즉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설일체유부 등 몇몇 부파들이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하리만큼 교리논쟁에만 열중하였고, 그러다 보니 사변을 지나치게 많이 하고 명상은 너무 적게 한 결과로 마침내 메마른 교리의 사막에서 말라 죽고 말았던 사실을 상기해야 할 때이다.
대승불교에는 여러 갈래의 방대한 경전군이 있지만 세속적 의미에서의 역사적 전거성典據性을 주장하는 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세속을 초월한 높은 차원의 천계天啓를 빌려 그 공백을 보완하고 있다. 일례로 용수보살이 용궁에 가서 화엄경을 얻어왔다는 얘기처럼. 소위 실체적 사실을 고집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얘기는 신앙 상좌부 · 대승 · 소승 심이 빚어낸 한낱 황당한 허구로밖에 보이지 않을, 이 저술들이 어디까지나 영적 스승들의 소산이라는 점이 이런 방식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될 것이다. 설사 허구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묘한 방편’이라는 뜻에서 일 뿐, 천박한 거짓이라는 뜻의 허구는 아닌 것이다. 대승경전이 주장하는 바는―진부는 여하 간에, 깊은 사려에서 나온 주장인 것만은 분명한데―대승경전은 소승경전보다도 진리의 더 심오한 측면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소승경전을 능가할 따름일 뿐 하열한 경전을 폐기시키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기독교 학자는 이러한 대승경전 중어느 한 권을 ‘고등불교의 신약성서The New Testament of Higher Buddhism’라고 부른 일이 있는데, 우리야 그런 단정을 용납하지 않지만, 그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