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건물이 수천 개 달려 있고, 작은 발코니가 수백 개 붙어 있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건물이다. 사람들은 햇볕이 잘 들어오는 베란다에다 빨래를 넌다.
하지만 베란다에도 창문이 있어 창백하게 색이 바랜 햇볕만 들어올 뿐이다.
조 씨가 일하는 건물은 19동이다.
19라는 글자는 창문이 없는 벽에 검은 글씨로 쓰여 있다.
그 건물이 19동이라는 이야기는 똑같이 생긴 건물이 18개나 더 있음을 의미한다.
용산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19동은 단지 내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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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의 방은 오후 햇살이 들어서 환했다.
이 시간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였다면 우울했을 것이고, 환자 냄새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환자 냄새는 커녕 재스민 향기가 가득했다.
간병인이 우리를 위해 재스민차를 준비해 주었던 것이다.
살로메 곁 카드놀이용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재스민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일종의 의식처럼 보였다.
두 번 밖에 오지 않았으니 의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게는 의식처럼 보였고, 나는 의식에 속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다 좋아한다.
그 의식은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손이 떨릴 만큼, 조바심이 날 만큼.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집에 들어선 순간, 살로메에게 삶의 의욕을 북돋워
주는 것은 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나는 그 의식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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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원장은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일이 딱히 굿 럭 아파트, 그것도 B단지에서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주병이 어지럽게 널린 아파트 안에서 목을 메어 자살한 젊은 여가수가 발견되었다고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하나의 이야기, 전설 중 하나, 이 도시의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에 블과한지도 모른다.
그 사건들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이상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끔찍할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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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쥐들은 쥐약은 귀신같이 알아요. 절대 안 건드릴 걸요. 게다가 그건 아이들한테 위험해요.”
아저씨는 깨진 소주병 조각들을 신문지에 싸서 내게 주었다.
“이걸 잘 빻아서 주먹밥에 섞어 봐요. 그놈은 그걸 먹고 죽을 거요.”
처방치고는 상당히 잔인했다. 하지만 쥐와 나의 사활을 건 싸움이었다.
며칠 밤이 지난 후 더는 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어느 컴컴한 구석에 가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쥐는 시작에 불과했다.
얼마후 훨씬 더 기막힌 습격의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메트리스에서 자고 있던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을 깼다.
악몽을 꾼 줄 알았다.
하지만 창문 쪽으로 머리를 돌렸을 때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창문 밖에서 어떤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이 항상 쓰레기 더미로 가려져 있던 터라 창밖에서 누군가 나를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래서 창문에 커튼도 달지 않았던 것이다.
한여름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한창이었기에, 나는 창문을 조금 열어놓았다.
나는 남자의 숨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창틀에 바싹 들이댄 콧구멍 때문에 생긴 두 개의 수증기 자국까지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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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계속되는 동안 박을 만나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되었다. 그 남자가 내게 전화를 해야 했지만 그는 연락하지 않았다. 나 또한, 토요일 오후 그를 만나러 종로에 있는 서점으로 가야 했지만, 그 대신 혼자 스릴러 영화를 보러 갔다.
마치 스토커의 부재가 사랑의 종말을 가져온 것 같았다.
아니면 두 사람은 그저 한 인간이 가진 두 얼굴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자기만 아는 지배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하고 욕심 많고 낯선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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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하늘 높이 날아서 내 고향까지 가거라. 움푹 파인 계곡에 묻혀 있는 과수원까지.
배나무가 있는 멋진 과수원을 보면 그곳이 내 고향인 걸 알 거다.
우리 가족들에게, 나의 조카들에게, 내 사촌 형들과 사촌 누이들에게, 내 편지를 전해다오. 조한수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해다오. 강 건너 저편에 있는 가족들한테 내가 쓴 편지를 전해다오. 희망과 사랑이 담긴 편지, 기쁨과 웃음이 담긴 편지, 행복이 담긴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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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으라는 인사도 없이 조용히 집을 나온다.
치료 시간이다.
간병인이 거실문 앞에 서 있다.
하얀 앞치마가 희미한 빛 속에서 반짝이면서 그녀는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조 씨는 꿈을 이루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더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제 그에게 세상은 완벽하다.
하지만, 이곳, 조 씨와는 다른 곳에 사는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몇 가지 꿈과 몇 마디 말이 있을 뿐이다.
새들이 강어귀를 지날 때 부는 바닷바람, 깃털을 엉망으로 헝클어지게 만드는 그 바닷바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실은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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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였다.
할머니와의 만남은 없었다.
남길은 단호하게 말했다.
“노래를 마치고 나서는 강단을 내려와 뒷문으로 떠나는 거야. 유미가 널 도우려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노래 마지막 소절이 끝나자마자 할머니는 두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또 너를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을 거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아시니 말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의 그 만남 이후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으로 보아 할머니는 분명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2월경, 나비는 전화에 남겨진 메시지로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나비 자신도 놀랐다.
교회에서 마지막 공연때의 열광적인 함성이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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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새벽에 일어났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새벽은 가장 잔인한 시간이다.
밤이 지나면 날이 밝지만, 잠을 설친 그들은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비는 부엌까지 걸어갔다. 아니, 다리를 접고 땅바닥에 주저않은 채 기어서 갔다.
아마도 술과 약 기운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창문이나, 거실 옷장에 달린 거울이나, 꺼져 있는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철사로 만든 옷걸이를 쥐고 있다.
잘 다른 옷을 단추까지 채워 걸어두려고 세탁소에서 사용하는 그 옷걸이 말이다.
전에는 한 번도 그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엌 바닥에 옷걸이가 질질 끌리는 기분 나쁜 소음이 들린다. 아마도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또 불평하러 올 것이다.
그녀는 위층에서 소음이 난다고 항상 불평한다.
무도화의 굽 소리,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는소리, 갑자기 앉았을 때 뒤뚱거리는 소파 소리 등에 대해서 말이다.
나비는 옷걸이를 다시 집어 들려고 한다. 하지만 팔에 힘이 없다. 옷걸이가 손에서 떨어지면서 더 큰 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말한다. 죽을 때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목구멍으로 꿀이 들어가듯 달콤하다고, 가슴을 가득 채우는 향기로운 연기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고, 머릿속에서 활짝 열리는 죽음의 문은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과 유사하다고.
그리고 영혼은 피부의 모든 모공을 통해, 눈과 귀와 머리털과 콧구멍을 통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 바람 속에서 흩어지고,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위를, 민들레가 만발한 들판을, 연꽃잎들과 가벼운 구름 위를 용처럼 여행한다고.
그러다가 그 영혼은 다른 형태의 생명체를 만나 그 생명체와 결합하여 다시 태어난다고. 식물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하고, 잠자리나 고양이가 되기도 한다고.
“알 것 같아요. 미용실을 방문한 고양이 키티처럼 말이죠!”
살로메는 다시 어린 소녀가 된다.
미소가 번지며 얼굴은 밝아진다. 잠깐 몸의 통증이 멈추었나 보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행복은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
잡자기 벌떡 일어나 이 목가적인 거짓말에 종지부를 찍는다.
“아니요, 살로메, 죽음이란 끔찍한 거에요.”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며칠 후, 조 씨는 나비의 아파트로 들어가 볼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 놓아둔 음식들이 그대로 있는 바람에 벌레가 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악취가 나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았다.
그는 비상키로 아파트 문을 열었다.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경찰 출신이다.
조 씨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부엌 창문에 매달려 있는 나비를 발견했다.
목은 보잘것없는 철사 옷걸이에 걸려 있었고, 철사는 나비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조씨는 천천히 나비를 내린 후 부엌 바닥에 눕혔다.
몸은 이미 차갑고 뻣뻣했다.
그는 마치 나비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왜? 도대체 왜?”
나는 살로메에게 잘 있으라는 말도 없이, 부엌에 있는 왕 씨 아줌마에게도 인사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온다.
이제 곧 해방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현재만 중요하고 산 사람만 중요한 이 큰 도시에서,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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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훨씬 명확해 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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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를 만나고 난 후 내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조금씩 알 것 같다.
믿기지 않을 만큼 이상한 일이라 지금까지는 그다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살로메를 만난 후 내 인생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것이 그냥 우연인지,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계획된 것처럼, 마치 내가 더 높은 차원의 메신저,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후의 나는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내 마지막 이야기다.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이 이야기를 살로메에게 해줄 것이다.
살로메를 위한 이야기다.
그녀가 내 인생에서 의미가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음을, 내 부모보다도 프레데릭보다도 더 중요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프레데릭은 내게 절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존재하는 수백만의 사람들, 서울의 모든 동네, 모든 건물에 사는 사람들, 큰길과 골목길, 다리와 지하철, 터널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그리고 한강과 세월을 함께 한 사람들 중에서도 살로메가 유일했음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전쟁과 범죄와 열정이 지켜본 역사의 증인인 한강, 푸르고도 누런 그 강물은 지금도 바다로 흘러 들어가 태평양의 더러운 물과 뒤섞인다.
그리고 그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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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새의 부리로 숨결을 불어넣었다.
솜털 사이로 심장을 마사지하기도 했다.
갑자기 새의 몸이 굳었다.
마치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날개를 편 채, 나오미의 손에 안겨 오’제이는 죽었다.
이제 살로메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어제부터 코마 상태에 들어갔다.
인공호흡기에서는 여전히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났다.
그녀의 들숨과 날숨이 내는 고통스러운 소리가.
생명이 그녀의 육체를 떠날 때,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도, 단 한마디 말을 속삭이지도 않았다. 그저 갑자기 아주 하얘졌을 뿐이다.
나는 그녀를 구해보려고 했다.
팔다리를 주무르기도 했고, 그녀의 입술에 입김을 불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너 멀리 가고 없었다.
오’제이처럼.
가슴에 공기펌프를 고정시킨 채, 고통을 잊게 해주는 뿌연 액체를 혈관으로 보내주는 튜브를 손목에 매단 채, 살로메의 시신은 병원 침대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죽는다 해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지배와 심술에서 벗어나면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사라졌다.
전라도에 있을 때 아버지는 낙지를 잡자마자 뒤집어 놓곤 했다.
그렇게 금방 뒤집히는 낙지처럼 내 감정도 갑자기 반대가 되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가 거의 불가능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로메는 진정 내게 관심을 가져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자기만을 위해 살기를 바랐고, 바깥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나를 이용했다. 하지만 나를 보호해 준 것도 사실이다.
살로메를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내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나오미는 밤새도록 오’제이 곁을 지켰다.
아침이 되어 엄마가 일어나기 전에 나오미는 아파트 정원으로 내려갔다.
손으로 목련나무 밑에 구멍을 팠다.
그리고는 그 안에 오’제이를 내려놓았다.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기다릴 때처럼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모로 눕혔다.
꽃은 심지 않았다. 기도도 하지 않았다. 누구한테 기도해야 할지 몰랐다.
세상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서울 하늘에 살고 있는 두 마리의 용마저도 서로 얽힌
채 아직 자고 있었다. 나오미는 땅 위에 눈물을 뿌렸다.
이제 나오미는 어제의 나오미가 아니다. 정신과 육체는 살고 싶은데, 그런데도 죽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멋진 색깔의 무지개다리를 향해 영혼이 날아가기 전까지는, 소리도 지르고 몸을 떨기도 하면서 완강하게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나오미는 오’제이를 잊지 않았다.
매일매일 학교 가기 전이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목련나무 앞에 서서 오’제이와 대화를 나누며 그날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한다. 그날 본 재미있는 일이나 슬픈 일을 이야기하고, 해가 나는지 바람이 부는지 같은 날씨 이야기도 한다.
조금 있으면 피기 시작할 꽃들에 대해서도, 움푹 파인 나무 밑동에서, “우리를 먹어 봐, 우리를 먹어 봐”라고 말하려는 듯 꿈틀거리는 작은 벌레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나오미는 종종 하늘에서 날개짓하는 소리를 듣는다.
날카로운 울음소리도 듣는다.
나오미는 오’제이가 멀리 있지 않음을, 다시 돌아올 것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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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빛나다.
이제 스무 살이다.
나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하늘 밑에 혼자이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사건을 겪었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있고, 꿈에서 본 것도 있고, 또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있다. 나는 살로메, 본명 김세리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프레데릭 박이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살로메의 가족은 그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은 프레데릭 자신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어느 날, 그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프레데릭을 제비라고, 그러니까 여자를 등쳐먹는 놈팡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판단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다른 많은 남자와 똑같은 남자이다.
원하는 것을 취한 후에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는 남자인 것이다.
나는 서울의 하늘 밑을 걷는다.
구름은 천천히 흐른다.
강남에는 비가 내리고, 인천 쪽에는 태양이 빛난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