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된 줄 아세요? 복음을 처음부터 안 전하려 했던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해보니 교인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마지막에는 자기 식구들만 남더라는 겁니다. 나중에는 자기 마누라도 떠나가고 목사 혼자 남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구원이에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조금의 실수도 없어요. ‘십사만 사천’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에요. 우리 인간들이 우리 것을 아무리 보태고 바쳐도 그 십사만 사천에서 한 명도 더할 수 없어요. 또 성도가 아무리 개판을 쳐도 십사만 사천에서 한 명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잖아요. 세상 교회들처럼 예배당이 꽉 차도록 사람들을 모으는 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란 말입니다. 있던 교인도 복음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가야 진짜 피로사신 교회예요. 복음은 그런 능력으로 세상과 갈라내는 복음이에요. 구원받지 못할 자는 절대 구원받지 못하도록 막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는 설교자 자신부터 복음에 소유가 되고 그 능력으로 해체되어진 사람이에요. 양날 선 검으로 골수까지 쪼개져 육적자아가 해체된 사람이에요. 우리 옛사람이 그렇게 날마다 죽어가면서 우리 안에서 새 사람이 살아 올라온단 말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지금도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날선 말씀의 능력으로... 그래서 성도는 그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으로 진리의 죽음을 날마다 살고있는 사람입니다.
(고후 4장)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동시에 일어나는 거예요. 이 죄의 몸, 율법의 몸, 선악의 몸으로는 그 나라를 못 가는 것을 계속 확인당하는 게 우리 속에서 새롭게 지어지고 있는 새 사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현실을 살아내지 못하면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예수의 증인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하나둘 떠나는 게 눈에 보이는데, 어떤 목사가 그런 설교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씩 양보하고 타협하다가 결국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을 전하게 되는 거에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좋게 하는 게 바로 다른 복음이에요. 사람을 좋게 하는 게 뭐예요? 우리 안에 있는 가치 가능성을 부추겨주면서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능력의 주 하나님... 박수치면서 광란의 시간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최면에 걸리게 하는 것이죠. 이왕 예수 믿는 거 신나게 신앙생활하고 기쁘고 즐겁게 살자 이게 다른 복음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 좋죠. 그런데 문제는 그 기쁨이 성경이 말하는 기쁨과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평안이라’고 하잖아요.
이 기쁨을 모르고 그냥 세상에서 잘 나가는 축복,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자는 고지론, 번영신학, 삼충축복 오중축복.. 신 나죠. 세상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이 좋아하는 걸 똑같이 좋아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다 그렇잖아요. 축복받으면 모두 그렇게 된다고 하니까... 이런걸 전하면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입니다. 대형교회들이 뭘 전했는지,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이 모이는지를 한번 보세요. 딱 하나예요. 복에 환장한 인간들에게 맞춤 복음.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 복, 즉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건 기본이고, 그래도 우리가 세상을 사니까 세상 복도 좀 챙겨주세요.. 하는 겁니다. 이걸 잘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무조건 많이 모입니다.
새벽기도 가장 많이 나온다는 명성교회 보세요. 새벽부터 수만이 모여서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한다고 주시옵소서..를 외칩니다. 입을 크게 열어 외쳐라 하나님이 채워주신다...순복음교회 조ㅇㅇ 목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모았습니까? 예수 믿으면 병 낫고 축복받고 죽어서 천당 가고... 살아서 교회에 얼마나 충성하는지에 따라서 천국 상급이 다르더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다른 복음이에요.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던 그 다른 복음입니다. 이런 것을 전하는 곳을 계시록은 사단의 회당, 귀신의 처소,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합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우리 몸은 본성적으로 복음을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반발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꾸 내가 듣고 싶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찾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믿고 싶은 예수를 믿도록 내버려 두심을 성경은 심판이라고 합니다. 심판은 우리가 힘들고 아프도록 고생시키는 심판이 아니라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도록, 인생 사는 동안에 믿고 싶은 예수를 믿도록 내버려 두심이 심판입니다. 다니고 싶은 교회 다니고 믿고 싶은 예수를 믿도록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이게 무서운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죽어서 주님 앞에 가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 찾아가고 나그네되었을 때 영접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다 했는데, 왜 저를 모른다고 하십니까?.. 그들은 다 자기목적을 가지고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런데 진짜 성도는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제가 언제 예수님을 공궤했습니까? 제가 언제 예수님을 챙겨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 능력 없고, 주님께 드릴 게 아무것도 없으며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님을 평생 믿고 살았다고 했을 때, 바로 그거야.. 그게 천국의 상급이야.. 그게 바로 내가 너에게 준 선물이란다.. 이런 믿음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다른 복음 없어요. 그게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좀 오래됐습니다만, 예전에 어떤 목사가 부인과 함께 와서 상담을 한 적이 있어요. 십일조, 주일 성수 등을 이야기했는데, 제가 그랬어요. 예수 믿는다면서 십일조를 하는 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부정하는 거라고... 그랬더니 이분이 말하길 그럼 우리는 뭐 먹고 삽니까? 아니, 목사 밥 먹고 살라고 목사하는거에요? 주의 말씀을 맡았다는 게 이런 거냐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가 영원히 산다고 하셨지요. 요즘 같은 세상에 밥 못 먹는 사람 없습니다. 무얼 해도 기초생활은 되잖아요. 바울같이 밥 굶고 다니고 헐벗고 다니고, 도시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 이런 것만 안 해도 참 좋은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목사들이 굳이 교회를 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복음 안다는 목사들까지도 교회 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던데. 지금 신학생들의 로망이 무언가 하면 서울의 어떤 목사같이 대형교회 해서 밴틀리 타는 거랍니다. 대형 교회 해서 밴틀리 타고 다니고 60평 아파트에 살고 .. 아예 정신머리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런 거 하고 싶으면 신학교에 가면 안 되죠.
전에 맥아더 목사가 한국에서 한 얘기가 그거잖아요. 한국 교회가 이 모양이 된 건 엄마들이 새벽기도에 나가서 우리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얼마 전 통계를 보니까 신학생 수는 계속 늘어나는데 교회 수는 줄어들고 있어요. 공급은 많은데 수요는 주니까 안 되는 겁니다. 국민 소득이 3천 불을 넘어서면 그때부터 종교시장은 쇠퇴한답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교회를 다니는 거지 배부르면 교회가 필요 없다는 겁니다. 지금 미국이나 유럽은 기독교가 하나의 문화가 돼버렸어요.
그런데 하나님께는 절대 실패가 없잖아요. 교인들이 다 떠나고 목사 혼자 남아도 그게 하나님의 성공이라니까요. 교회 부흥이란 건 그런 거예요. ‘부흥’이라는 단어가 성경 하박국서에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부정한 것들, 거룩하지 않은 것들이 다 잘려 나가고 순전한 것, 깨끗한 것만 남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수가 많은 게 부흥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얼마나 잘못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말하길 이제 다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 칠천을 남겨놓았다고 하셨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의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은 다르단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고요. 우리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 수도 개입할 수도 없는 거예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자기 사람들을, 자기 몸 된 교회를 지키고 돌보시는 하나님.. 그래서 이스라엘에 남은 자들이 있단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세상에 이렇게 교회가 많고, 이렇게 기독교인이 수억 명이 된다고 하는데, 그들 가운데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자들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압니까? 오늘도 해가 떴기 때문이에요. 마지막 성도 한 사람의 목이 잘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이 되면 그때는 해가 뜨지 않습니다. 달도 안 뜨고 모든 별이 다 떠나가고 우주가 해체되는 겁니다. 불타 없어진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직도 이 세상에 성도가 남아 있기 때문에, 남은 자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해가 뜬거에요...
(롬 11장)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기신 자들을 온전한 자라고 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온전한 자입니다.
(고전 2장)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한다는 건 온전한 자들이 아니면 하나님의 지혜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여름캠프에서도 말했지만 바울의 말은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누구에게 편지를 쓴 겁니까? 온전한 자들에게 쓴 것이죠. 하나님이 감추어두신 것을 스스로 알아서 찾아낼 자가 있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자, 하나님의 영으로 눈과 귀를 열어주신 자들을 온전한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그 온전한 자들에게 내가 이 지혜를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하는 성도는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서 온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우리는 온전해졌다는 말의 의미를 자꾸 우리가 계발되고 학습되고 훈련되어서 부족한 자들이 점점 성숙하고 괜찮은 자들이 된다고 오해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온전한 자는 처음부터 온전한 자예요. 그래서 온전한 자들, 약속 안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이 전해지면 ‘아, 맞아. 이게 진리지. 이게 진짜 하나님이지.’하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아무리 큰 교회 세상이 존경하는 훌륭한 목사님이라 할지라도 그 목사의 말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고, 그게 아닌 것 같고..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하고 있는 성도예요. 이미 묵시 안에 완성되어 있는 거룩한 교회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인생을 사는 동안에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에 결코 부족하거나 더럽혀질 수 없다는 뜻에서 온전한 자라고 하는 거예요.
(요일 2장)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분명하죠? 성도는 사람이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자들은 가르칠 필요가 없다.. 주께서 그들을 직접 관리하고 계신다.. 얼마나 신이 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창세 이후로 한 번도 타락하거나 부패한 적이 없는 교회입니다.
요즘 보면 교회를 개혁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대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인간이 어떻게 개혁해서 건강한 교회가 되겠다고 하는 겁니까? 이게 얼마나 건방지고 교만한 말입니까? 기껏 개혁한다는 게 돈 안 밝히는 교회, 계급 없고 민주적인 교회를 하겠다는 건데, 그런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어떻게 타락합니까? 주님이 낮잠 자는 동안에 타락합니까?
참된 교회는 머리이신 그분이 공급하시는 생명력, 그리고 그분의 의와 거룩으로 온전한 교회예요. 그분이 직접 관리하고 다스리시는 교회란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가 어떻게 타락하고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개혁됩니까? 교회 개혁이란 이름으로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하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믿음 없음이고 탐심입니다. 성도는 아름다운 교회에 관심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는 자예요. 그 자신이 교회란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니까 그따위 짓을 하는 겁니다. 이게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의 탐욕이에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는 아들의 피로 이미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입니다. 어느 누구 하나도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그들 안에 계신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나를 보면 괜찮은 곳이 없고 내놓을 만한 게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보십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의 피 뿌림이 있고 예수의 죽음이 나누어졌기 때문이고, 예수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온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좋다고 이 자리에 지금 앉아있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온전한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와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지혜를 나누어주고 싶은 거예요. 세상은 알 수도 없고 몰라야 하는 하나님의 지혜, 그래서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를 나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 온전한 자들과 나누려고 한다는 게 고린도전서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라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므로 성령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내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로, 생명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세상의 영을 받은 자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의 다름이고, 갈라짐이고, 구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의 지식이나 열심 등 사람의 손이 탈 수 없는,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영광임을 계속 알게 하시고 확인시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의 영, 성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십자가의 죽음, 진리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살게 되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생명에도 참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영광을 모일 때마다 나누는 자들은 바울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할 일이 바로 그것임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밝히 드러내면서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문제,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교회와 교회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를 십자가라는 창으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너희 가운데 성령을 받은 자가 있느냐?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이 어떤 것이며, 그 은혜의 영광이 너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해서 이제부터 함께 살펴보자는 겁니다. 그런 가운데 은혜로 주어진 게 아닌 것, 진리 아닌 것, 생명 아닌 것들이 드러나게 되고, 그것들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교회가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섬김과 열심으로 완성되어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남기신 온전한 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가지고 흔히 세상 교회들처럼 좋은 교회 하기, 건강한 교회 하기로 가르치는 자들은 다 가짜인 거예요. 1장 2절에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하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바울의 편지는 읽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의 증거에 사람의 말과 지식은 전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날 신학에서 가르치는 설교학, 전도학 같은 것이 사도바울에게는 육에 속한 자에게서 나오는 악한 행실일 뿐이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인간의 자존심이란 말이에요.
제가 얼마 전에 카페에 ‘신인 협력설’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읽어보셨어요? 오늘날 대부분 교회가 신인 협력설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도 인간이 없으면, 교회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미 이천 년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것인데도 오늘날 대부분 교회가, 아니 신학교에서부터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렇게 인본의 신학에 매몰된 교회와 목사들.. 그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배웠으니까. 하나님도 교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게 오늘날 정통이라고 하는 교단이고 신학교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우리야말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 확장에 이 한 몸을 바쳐야 하는 게 주의 종이라는 겁니다. 세상 교회가 다 그렇다 보니 자기 교회가 커지는 걸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거에요.
본래 성경의 교회는 니 교회, 내 교회가 없어요. 그렇게 칸막이를 치면 안 돼요. 동부교회 따로 있고 대봉교회 따로 있고 제일 교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의 교회만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 교회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원수 된 교회임을 알지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는 그냥 한 번의 통과 의례 정도, 이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 있었던 한 번의 우발적 사건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어찌해서든지 내 교회 키우기에만 몰두하는 이 땅의 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 같습니다. 구약에도 나오잖아요. 이스라엘이 바로 물을 채울 수 없는 구덩이라고.. 그 끝없는 욕망이 투사된 게 바로 내 교회입니다. 나의 확장으로의 교회니까요.
늘 결핍이 있다 보니 모이면 하는 게 뭡니까? “주시옵소서”죠. 두손 들고 주시옵소서.. 그런 종교 행위, 그런 인간의 지식과 열심으로는 아무리 기어올라도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게 종교의 세계예요. 바꾸어 말하면 은혜로 주신 것들에 대하여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자들끼리 모여서 집단자살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아는 건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한데, 성령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공유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것이 다 우리 것인데 왜 배가 고프고, 왜 결핍이 있습니까? 한 마디로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임을 모르니까..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엡 1:23).. 교회는 그 충만인 거예요.
그런데 뭐가 부족해서 온갖 민원이 들어오는 이천억짜리 예배당 지어서 뭐 하려고... 지금도 소송 중이랍니다 건축법 어겼다고... 그야말로 바벨탑이에요. 예수로만 부족함이 없는 그 현실을 살지 못하고 자꾸 헛것만 씹어서 늘 배고픈 겁니다. 그러다 보니 모일 때마다 달라고 떼창하는 겁니다. 사도는 이런 자들을 향해서 ‘너희 신은 배다’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의 배를 채우는 게 예수 믿는 거냐는 말이에요. 전부 세상 것들을 달라고 새벽부터 잠도 안 자고 모여서 그 짓들을 하는 거예요. 그것도 자랑이라고.. 세계에서 새벽기도 가장 많이 모이는 교회라는 자랑질을 하면서..
교회는 이미 예수 안에서 주신 것들을 나누고 찬송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충만을 모르니까 자꾸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내가 나를 위해서 내 이름으로 구할 게 없어요. 내 이름 자체를 빼앗긴 자들이기 때문이에요. 그들을 온전한 자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이 있어요.
(계 14장)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이미 하늘에 완성되어 있는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 거룩한 교회를 배우는 기간이 우리의 일생이에요. 우리 인생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고 또 오고 있고 또 완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사람의 지식을 좇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알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구원, 자기 신자 됨이 아니고 내가 천국 가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상속받는 은혜의 영광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났는지를 고린도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지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나누어지는 말씀이에요.
앞으로 언제까지 우리가 이 말씀을 나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사도와 동일한 성령을 받은 여러분과 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우리가 오래오래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오늘 강론은 여기까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주님의 그 은혜의 영광이 나타난 그 십자가가 여전히 우리의 현실임을 알았습니다. 그 십자가만이 진짜 현실임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리지만,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날마다 그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시고 우리 입에 은혜의 찬송을 담아주시니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하옵기는 이 자리에 모인 주의 성도들이 그 십자가 은혜만 붙들고 그 십자가 아래에서 천국 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넘겨주신 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 안에 담긴 은밀한 지혜들을 함께 나누고 누릴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