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5/2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고운 빛깔 드러낸 백제 보석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출토 청동합 6개 1400여년 전 백제 귀족들이 아끼며 소장했던 보석상자의 실체가 드러났다. 지난해 1월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에서 백제 무왕 시대의 금동사리함, 명문과 함께 나와 눈길을 모았던 원형 청동합들이 백제 귀족층이 소유했던 고급 보석함으로 밝혀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청동합 6개에 대한 보존처리를 마치고 열어본 결과 내부가 구슬류, 금제 장식, 곡옥 등 보석, 귀금속류로 가득 채워진 사실을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특히 1번 합 뚜껑에서는 당시 백제 고위 부서인 ‘상부’(上部)와, ‘달솔’(達率·백제 16관등 중 2품)이란 직위, ‘목근’(目近)이라는 관리 이름이 새겨진 채 발견됐다. 연구소 쪽은 “글씨 기록으로 미뤄 합은 원래 백제 상류층 관리의 보석함 용도였다가 탑을 세울 때 시주한 공양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6개의 청동합 안에서는 금제 구슬 370여점을 비롯한 금제 고리, 금제 소형판 등 다량의 금제품과 유리구슬, 진주, 곡옥 등 유물 4800여점이 쏟아졌다. 이들 가운데 곡옥 1점은 정교하게 채색된 금장식 모자가 씌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이외에도 직물과 향가루로 추정되는 유기물질 등도 확인됐다. 청동합은 지난해 초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에서 꺼낼 당시 심한 훼손과 부식 때문에 내부를 열지 못한 채 1년여간 보존처리 작업을 거쳤다. 청동합 유물에 대한 1차 조사 내용은 27~28일 열리는 미륵사 국제학술심포지엄(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개된다. 노형석 기자,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한겨레 2010-05-26 오후 10:18:44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22751.html
2009 - 헵번 우표, 독일에서 1억2천만원에 팔려 헵번 우표, 獨서 1억2천만원에 팔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담배를 입에 문 모습을 담은 희귀 우표가 26일 경매에서 6만7천유로(약 1억2천만원)에 팔렸다.
[우정이야기]오드리 헵번 우표 한장에 1억2000만 원 "편지 한 통에 숨겨진 대박.”
2008 - 네덜란드 연구진, 인간 여성 게놈지도 완성 네덜란드 과학자들이 인간 여성 개인의 게놈 지도를 세계 최초로 완성했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 아동병원의 스티븐 셰러는 “인간 유전자에 관해 더 많은 자료가 공개될수록 개인간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그리고 유전자들이 협동하는 방식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최초의 여성 게놈 지도와 비교할 수 있는 여성 게놈 지도가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조선닷컴 2008.05.27 09:09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27/2008052700310.html
- 'The Firm', Sydney Pollock, Tom Cruise
2008 - 미국의 영화 감독, 제작자, 배우 시드니 폴락(Pollack, Sydney) 사망 폴락 [Pollack, Sydney, 1934.7.1~2008.5.26] [어제의 오늘]2008년 시드니 폴락 감독 사망 ㆍ‘아웃 오브 아프리카’ 등 명화 남겨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등 숱한 명작을 만들어낸 할리우드의 감독이다. 2008년 5월26일 암 투병 중 사망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252115375&code=100100
2002 - 임권택 감독, 영화 `취화선`으로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 2002년 5월 26일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의 임권택 감독이 영화 `취화선`으로 미국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과 공동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주요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한국 영화나 한국인 감독·배우가 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취화선`은 조선 후기 유명 화가였던 오원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이다. 66세의 감독은 시상식 단상에 올라가 예의 `느릿느릿 분명한` 어투로 1600여명의 전세계 영화계 VIP 앞에서 소감을 말했다. "이 상은, 남북한을 통틀어 우리 한민족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 시절 끼니를 해결하려고 충무로에 들어갔던 청년이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 거장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의 40년 영화 인생은 한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1936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임권택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얼룩졌다. 부친의 좌익 활동 가담이 빚어낸 그늘이 소년 임권택을 고통스럽게 했다. 학력도 중졸에 그쳤다. 그러던 그가 1955년경 충무로에 처음 뛰어든 것은 "영화판 일을 하면 밥을 굶지 않을 수 있다"는 주변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촬영 현장에 들어가서 처음 맡은 임권택의 역할은 소품 조수. 식사 때가 되면 배우들이나 주요 스태프들 밥을 나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1962년 임권택은 `두만강아 잘있거라`로 데뷔, 1970년대까지 무려 60여편의 필름들을 정신없이 찍어댔지만 40대 들어 임권택은 "이 `싸구려 영화`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싶다"는 자각을 한다. 임권택이 국제 영화제의 문을 노크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 `만다라`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부터. 그의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씨받이`)을 시발로 국제영화제 수상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으나, 감독은 1990년대 초반부터 `세계 최고` 영화제인 칸을 겨냥했다. 1992년 `서편제`부터 `축제` `춘향뎐` 그리고 `취화선`에 이르는 영화들은 아예 5월 칸 영화제 시기에 맞춰 매년 4월 안팎에 완성했다. 그리고 임권택은 `3전4기` 끝에 과녁을 맞혔다. /조선
2001 - 아프리카 연합(AU) 공식 출범 아프리카 대륙의 정치·경제적 통합을 목표로 한 `아프리카 연합(AU)`이 `아프리카단결기구(OAU)` 53개 회원국 중 37개국의 비준을 얻어 2001년 5월 26일 공식 출범했다. 이에 따라 아프리카 중앙은행과 단일 통화, 의회, 법원 등의 설치를 목표로 한 `유럽연합(EU)`식 아프리카 국가연합체가 첫 발을 내딛었다. 살림 아흐메드 OAU 사무총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정치적·법적 실체로 볼 때 내일부터 우리는 아프리카 연합을 갖게 됐다"면서 "아프리카 대륙은 이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AU 회원국들은 2001년 7월 잠비아의 루사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아프리카 의회의 창설 시기 등을 논의했다. AU는 4월 26일부터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OAU 본부에 대한 인수작업을 시작했으며 이 작업을 12개월여에 걸쳐 계속했다. AU는 무아마르 가다피 리비아 국가 평의회 의장이 `아프리카 합중국` 설립을 제안하면서 논의를 시작해 탄생했지만 그 동안 정상회담에서 `아프리카 합중국` 개념이 훨씬 약화된 조직으로서 출범하게 됐다. AU 창설에 합의한 OAU 53개 회원국 중 이를 비준한 국가는 AU 출범에 필요한 3분의 2 선을 약간 넘는 37개국에 불과한 형편이어서 AU의 단결력이 의문시되고 있다. /조선
1999 -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현 국가원수 처음으로 전범협의 기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이 `전범` 리스트에 올랐다. 구 유고 국제전범재판소(ICTY)는 밀로셰비치를 코소보에서의 만행과 관련, 전쟁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했다고 CNN방송이 1999년 5월 27일 보도했다. 현직 국가원수가 국제 전범으로 기소되기는 밀로셰비치가 처음이다. 코소보 사태 발생 이후 인접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로 쫓겨난 코소보 알바니아계 난민들은 세르비아계가 학살과 집단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증언해왔으며, 국제 인권단체들은 ICTY에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유고 지도자들을 전범으로 기소할 것을 촉구해왔다. 밀로셰비치와 함께 밀루티노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 유고 연방군 총사령관, 세르비아 공화국 내무장관 유고연방 부총리 등 유고연방 간부 4명에 대해서도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밀로셰비치의 기소로 코소보 평화협상에서 밀로셰비치에 대한 사면조치를 하나의 `협상카드`로 내밀어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는 주장과 오히려 외교적 노력의 입지를 좁게 만들어 발칸반도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수포로 만들 것이라는 상반된 주장이 제기됐다. /조선
페르시아만안협력회의 [─灣岸協力會議, Gulf Cooperation Council] 1981년 5월에 페르시아 만안의 6개 아랍산유국이 역내(域內)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한 지역협력기구. 걸프협력회의라고도 한다. 1979년 2월 이란혁명으로 인한 왕정붕괴,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80년 9월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 발발 등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걸프만 주변에서 발생한 정치적 불안에 대한 공동대응책을 모색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오만·바레인 등 6개국 정상들이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모여서 결성한 단체이다. 상호간의 경제 및 안전보장의 협력과 치안·국방면에서 결속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6개국은 석유의 생산·수출국일 뿐만 아니라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며 세습왕정체제를 유지하는 동일 민족국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며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를 적대시하는 이란의 반발이 심해지자 동맹국간의 보조가 흐트러져, 1982년 11월의 제3차 정상회담에서는 경제통합협정만을 조인하고 집단안전보장에 관한 결정은 유보하였다. 1983년 3월부터는 역내의 관세장벽 철폐, 여행제한의 해제 등을 실시하고 있다. 2008년 1월 1일에는 공동시장을 출범시켰다. 6개국은 해마다 각국을 돌면서 정상회담을 개최하는데, 결성 이후 10년 동안 활동의 중심은 정치·군사적인 면보다는 경제협력에 있었다. 그러나 1991년의 걸프전쟁을 계기로 공동방위력의 증강 등 정치·군사적 협력에도 무게를 두고 있다. /네이버
1969년 11월 17일 제럴드 스미스 군축 국장을 앞세운 4명의 미국 대표와 블라디미르 세미오노프를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소련대표가 헬싱키 교외 스몰라궁에 마주 앉았다. 스미스는 "책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전세계의 관심사"라고 운을 뗐고, 세미오노프는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앞으로 협상을 해나갈 비밀 장소를 정하는 것으로 첫 회의를 시작했다.
1970 - 소련의 초음속 여객기 TU-144 시속 2,150km(마하 2) 기록 [초음속 여객기 TU-144 연혁] 1968-12-31 - 첫 시험비행 성공 1969-06-05 - 음속 돌파 1970-05-26 - 시속 2,150km(마하 2) 기록 1970-06-15 - 시속 2,443km 기록 1971-07-01 - 양산형 TU-144S 첫 비행 1973-06-03 - TU-144S 파리 에어쇼에서 공중폭발 사고 1975-12-26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취항(화물과 우편물 수송) 1977-11-01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여객기로 취항 1978-06-01 - 추락사고 발생하여 여객기로 운항을 금지
1966 - 가이아나, 영국으로부터 독립 1838~1917년에 인도인(人)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설탕 생산을 위해 이입(移入)되었는데, 현재의 복잡한 인종 구성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영국은 1928년 선거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단원제 의회를 두고, 점차적으로 자치정부를 육성하였다. 1953년 헌법으로 자치정부가 약속되었으나, 선거 결과 체디 자간(인도계)의 사회주의 정당이 압승을 거두자, 영국은 10월에 군함을 파견하여 헌법을 정지시켰다. 그후, 인도계 주민과 아프리카계 주민 사이에 인종적 대립이 격화되었다.
엘즈워스 [Ellsworth, Lincoln, 1880.5.12~1951.5.26] 미국의 탐험가. 시카고 출생. 철도·광산업에 종사하였다가, 1924년 안데스산맥을 넘어 페루의 태평양 연안으로 갈 탐험대를 조직한 뒤에는 극지탐험과 극지비행 등 탐험가로서 활약하였다. 1925년 R.아문센이 비행기를 이용한 북극탐험을 계획하였을 때 경제적으로 원조하였고, 그 뒤로는 아문센의 북극비행에 동행하였다. 1926년에 아문센, U.노빌레 등과 함께 비행선 노르게호(號)로 스발바르(전 스피츠베르겐)에서 알래스카까지 비행하였고, 1926년 5월 12일에 북극점 상공을 통과하였다. 1935년에는 비행선 체펠린호(號)의 북극비행에 참가하였으며, 1935년과 1939년에는 비행기로 남극대륙 내륙부의 탐험과 조사에 성공하였다. 남극대륙에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명명된 엘즈워스랜드와 엘즈워스산맥이 있다. 주요저서에 아문센과 공저(共著)인 《극 비행》(1952)과 《북극해 첫 횡단》(1927) 《지평선의 저쪽》(1938) 등이 있다. /네이버
1940 - 영국군, 덩케르크에서 철수 시작 덩케르크 전투(Bataille de Dunkerque, 1940년 5월 26일 - 1940년 6월 4일)는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대규모로 행해진 탈출 작전 중 하나였다. 1940년 5월 말, 벨기에군과 영국 원정군(BEF) 및 3개 프랑스군 부대는 독일 A 집단군에 의해 도버 해협에 포위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항복이나 괴멸을 막는 길은 덩케르크 항을 통하여 영국으로 철수하는 방법 뿐임을 인식하고 다이나모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으로 198,000여명의 영국군과 14만여명의 프랑스군 및 벨기에군 등 총 34만여명이 구출될 수 있었다. /위키백과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 1940년 5월 26일 - 6월 4일)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행해진 작전 중 하나로서, 덩케르크 전투에서 벨기에군과 영국 원정군(BEF) 및 3개 프랑스군 등 총 34만여 명을 구출할 목적으로 실행된 작전이다. 영국 해군 중장 버트람 렘지가 작전을 계획하여,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에게 다이나모 룸(다이나모는 발전기가 있던 도버 성 지하의 해군지휘소의 방 이름)에서 이 작전에 대한 개요를 설명한 것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9일 동안 860척에 달하는 선박이 급히 모여, 총 338,226명의 병사(영국군 192,226명, 프랑스군 139,000명)을 프랑스의 덩케르크에서 구출하였다. 이 유명한 "덩케르크의 작은 배들"(Little Ships of Dunkirk)에는 여러가지 화물선, 어선, 유람선 및 왕립 구명정협회의 구명정등 민간선박이 긴급히 징발되어 병사들을 해안에서 바다에서 대기중인 대형 선박(주로 대형의 구축함)으로 운반했다. 이 "작은 배들의 기적"은 영국 국민의 마음에 깊히 각인되어 사기를 복돋아 주었으나, 실제로는 병사들의 80% 이상이 항구의 방파제에서 42척의 구축함 등 기타 대형 선박에 탑승해 철수하였다. 철수 경과 /위키백과
1933 - 미국의 가수, 기타 연주자 지미 로저스(Rodgers, Jimmie) 사망 로저스 [Rodgers, Jimmie, 1897.9.8~1933.5.26] 본명은 James Charles Rodgers. 팝 음악에서 컨트리 음악과 웨스턴 양식을 낳게 하는 데 공헌한 미국의 가수, 기타 연주자. 전 음악 경력을 통해 '노래하는 차장'(brakemam)이라고 알려졌다. 14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미시시피와 오하이오 철도에서 물 수송 일을 맡았다. 차장을 비롯하여 철도와 관련된 많은 직업을 거쳤다. 철도 노동자로서의 삶은 그에게 음악 기술을 훈련시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기타와 밴조를 배운 것도 철도에서이며, 흑인 철도노동자들로부터 블루스 기법을 배웠다. 전통적인 컨트리 음악, 노동요, 블루스, 호보, 카우보이 노래가 섞인 그의 독특한 음악세계는 한마디로 철도 노동자 생활에서 습득한 것이었다. 1924/25년경 폐가 좋지 않아 철도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연주자가 되었고, 1927년 테네시 주 RCA 빅터 레코드회사와 계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최고의 음반판매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남부지방을 돌아다니며 연주하다 마침내 텍사스에 정착하였다. 110개 이상의 음반을 남겼으며, 대표곡은 〈우울한 요들 1번 Blue Yodel No.1〉·〈차장의 블루스 Brakeman's Blues〉·〈미시시피 강 블루스 Mississipi River Blues〉·〈My Time Ain't Long〉 등이 있다. 그의 노래들은 많은 대중가수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컨트리 앤드 웨스턴 양식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브리태니커
1922 - 벨기에의 공업화학자 에르네스트 솔베이(Solvay, Ernest) 사망 솔베이 [Solvay, Ernest, 1838.4.16~1922.5.26] 벨기에의 공업화학자. 유리와 비누 제조에 널리 쓰이는 소다회(탄산나트륨)의 생산방법인, 상업적으로 개발가능한 암모니아-소다 법을 고안했다. 지방학교에 들어간 뒤 아버지가 경영하던 제염산업(製鹽産業)에 참여했다. 21세 때 삼촌과 함께 브뤼셀 근처 가스 공장에서 일하다가 암모니아-소다 법을 개발했다. 암모니아-소다 법은 1811년 이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공업화학자들은 유용하고도 경제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 반응이 50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솔베이 탄산염탑(여기서 암모니아-염 용액을 이산화탄소와 혼합함)을 발명하여 대량생산의 문제를 해결했다. 1861년 형 알프레드와 함께 회사를 세우고 1863년 공장을 지었다. 1865년 생산을 시작했으며, 1890년경에는 외국에 몇 개의 회사를 설립했다.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는 점차 솔베이법을 쓰기 시작했으며,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1820년대부터 써온 식염을 탄산나트륨으로 바꾸는 르블랑법 대신 이 방법을 쓰게 되었다. 그결과 솔베이는 돈을 많이 벌었으며, 화학·물리학·사회학을 연구하는 국제과학연구소를 짓는 등 많은 자선사업에 자신이 번 돈을 썼다. 물리학에 관한 솔베이 회의는 양자역학과 원자구조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브리태니커
1913 - 영국의 배우 피터 쿠싱(Cushing, Peter) 출생 쿠싱 [Cushing, Peter Wilton, 1913.5.26~1994.8.11] Peter Cushing 인물 소개 60년대에 세계적인 선풍을 불러일으켰던 〈드라큐라〉 시리즈에서 드라큐라(크리스토퍼 리)의 숙적인 헬싱 박사 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타워즈〉에서는 죽음의 별의 지휘관 타킨 총독 역을 했었다. http://movie.naver.com/movie/bi/pi/basic.nhn?code=1236
1910 - 멕시코의 대통령 로페스 마테오스(López Mateos, Adolfo) 출생 로페스 마테오스 [López Mateos, Adolfo, 1910.5.26~1969.9.22] 아티사판 출생.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고 멕시코주 주지사 비서를 거쳐 국민혁명당(PNR) 당수의 비서가 되었다. 1946년 상원의원, 유네스코의 멕시코 대표가 되었고, 1957년 입헌혁명당(PRI)의 대통령후보에 선출되어 1958년 대통령이 되었다. 쿠바혁명의 영향에 의한 국내의 좌우대립 속에서 인플레이션 문제, 토지개혁을 다루어 대통령 카르데나스 이후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 미국과의 엘 차미사르 영토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였다. /naver
웨인 [Wayne, John, 1907.5.26~1979.6.11] 본명은 Marion Michael Morrison. 아이오아주 출생. 할리우드의 인기 스타로 많은 서부극 ·전쟁영화에 출연하였다. 대학시절부터 연극을 지망하여 1929년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39년 J.포드(Ford, John, 1895~1973) 감독의 명작 《역마차 Stagecoach》에 출연하여 스타가 되었다. 그로부터 《코레히도르 전기(戰記)》 《아파치 요새 Fort Apache》 《황색 리본 She Wore a Yellow Ribbon》 《리오그란데 요새 Rio Grande》 《조용한 사나이》 《라스트 슈팅》 등 포드 감독의 영화에서 계속 주연을 맡았다. 감독한 작품으로 《알라모》(1960) 등이 있으며, 《진정한 용기》(1969)로 1970년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naver
1898 - 군산, 성진, 마산항 개항 결정 일본이 마산포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은 처절할 정도로 집요했다. 마산 개항 이전에 부산(1876년), 원산(1879년), 인천(1882년), 목포(1879년) 등이 개항되고 1899년에는 군산, 성진과 함께 마산이 개항된다. 마산포의 개항은 1898년 5월 26일 열린 의정부 회의에서 이루어진다. 고종의 지시에 의해 외부대신 박병목이 청원한 ‘성진, 군산, 마산 3구 개항 및 평양을 개시’ 한다는 안은 찬성 7표와 반대 3표로 통과됨으로써 가결된다. 광무 3년(1899) 5월 1일 마산포는 개항장으로 발족하고, 마산포의 개항업무를 담당할 관청인 ‘창원 감리서(1898년 현재 남성동 제일은행 건물 자리)’가 설치되고 창원 부윤이었던 안길수가 감리업무를 겸임했다. 개항이 되면 외국인이 거주하며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치외법권지대인 조계지가 필요했다. 창원군 외서면의 신월리·월영리 2개 지역의 해안 약 13만여평이 외국인 거류지, 즉 조계지로 확정되었다. 조계지가 확정되자 각국 공동조계의 획정을 내용으로 하는 조계장정을 조인했다. 조계장정에는 조계지 주위 10여리를 개방하여 매매양도가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마산포 조계장정은 다른 개항장과는 달리 영사관이 보유할 수 있는 부지면적은 최대 4500평으로 제한했지만, 일본은 이 조항을 무시했다. 러시아도 마산포를 조차해 러시아의 해군기지를 마련할 속셈으로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섰다. [마산창원 역사읽기]제국주의 침략과 마산포 개항 김용택(마산여고 교사) /경남도민일보 2004년 04월 03일 (토)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385
1896 -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1896년 오늘!
1895 -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랑어(Lange, Dorothea) 출생 랑어 [Lange, Dorothea, 1895.5.26~1965.10.11]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1930년대 경제 대공황 희생자들을 소재로 한 작업은 후대의 다큐멘터리 보도 사진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랑어는 포토 시세션이라는 사진작가 모임의 회원이었던 클래런스 화이트에게 사진을 배웠으며 그뒤 20세 때 세계를 여행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사진작품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러 돈이 다 떨어지자 그곳에 정착하여 1916년 사진관을 열었다. 대공황이 발생하자, 그녀는 거리를 방황하는 집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는 등 작품의 영역을 넓히고자 애썼다. 그들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하얀 천사의 빵배급소 White Angel Breadline〉(1932)와 같은 작품들은 곧 에프 64 그룹에 속한 사진작가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랑어는 연방 이주 관리국(뒤에 농촌 안정국이라 부름)의 의뢰를 받아 빈민층을 소재로 한 사진을 만들었으며 이는 범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과 함께 그들이 얘기한 내용을 설명으로 붙인 사진들은 주정부가 그들을 위해 집단수용소를 세워줄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다. 1939년 사진작품 모음집 〈미국판 출애굽기 : 인간 침식에 관한 기록 An American Exodus : A Record of Human Erosion〉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2년 뒤 구겐하임 예술기금을 받았지만 진주만 공습이 발생한 이후 이를 포기하고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수용소로 집단 후송되는 광경을 기록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이프〉지에 〈모르몬 마을 Mormon Villages〉·〈아일랜드의 시골사람 The Irish Countryman〉 등 많은 사진 수필집을 만들었다. 병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다. /브리태니커
- Max Brothers, S.Signoret, P.Sellers, D.Kaye, Jolson 1886 - 미국의 대중가수, 코미디언 졸선(Jolson, Al) 출생 졸선(졸슨) [Jolson, Al, 1886.5.26~1950.10.23] 미국의 대중가수·코미디언.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1940년까지 뮤지컬과 영화에서 검정칠을 한 얼굴로 출연했다. 7세 때 미국으로 와 워싱턴 D. C.에서 자랐으며 1899년 그곳에서 첫번째 무대를 가졌다. 1909년 류 덕스태더의 민스트럴 공연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의 형제와 다른 이들과 함께 보드빌 단원으로 일했다. 뉴욕의 인기있는 연예인이 되어 뮤지컬 〈La Belle Paree〉(1911)·〈신혼특급 Honeymoon Express〉(1913)·〈밤보 Bombo〉(1921)·〈빅 보이 Big Boy〉(1925)에 출연했다. 〈신바드 Sinbad〉(1918)에서 인기 없던 조지 거슈윈의 노래 〈스와니 Swanee〉를 개작하여 그를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만들었다. 〈마이 마미 My Mammy〉를 선보였던 〈밤보〉에는 〈툿,툿, 툿시 Toot, Toot, Tootsie〉·〈캘리포니아에 내가 왔다 California, Here I Come〉·〈4월의 소나기 April Showers〉 등 그의 애창곡 3곡이 포함되어 있다. 뉴욕 윈터 가든에서도 큰 성공을 몇 차례 거두었다. 졸선은 1927년 음악과 음향 효과는 물론 대사까지 동시 녹음한 최초의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영화 산업에 일대 개혁을 가져왔으며 무성영화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밖의 영화로는 〈노래하는 바보 The Singing Fool〉(1928)·〈노래로 말해요 Say It with Songs〉(1929)·〈마미 Mammy〉(1930)·〈Hallelujah, I'm a Bum〉(1933)·〈춤을 춥시다 Go into Your Dance〉(1935)·〈스와니 강 Swanee River〉(1940)이 있다, 그의 생애는 〈졸선 이야기 The Jolson Story〉(1946)와 그 속편인 〈졸선 다시 노래하다 Jolson Sings Again〉(1949)를 통해 영화화되었다. 그는 많은 히트 송을 작곡했으며 매우 인기 있는 음반 가수이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77 - 미국의 무용가 덩컨(Duncan, Isadora) 출생 덩컨 [Duncan, Isadora, 1877.5.26(1878.5.27)~1927.9.14] 미국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출생 1877년 5월 26일, 고전 발레의 형식을 거부하고 창작 댄스를 창조적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인물인 이사도라 덩컨이 출생했다. 그녀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발레를 배웠지만, 몸과 다리를 조이는 코르셋과 토슈즈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했다. 고전 발레의 엄격함을 거부한 그녀는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하늘하늘한 감의 옷을 입고 자유로운 율동과 움직임을 바탕으로 맨발로 춤을 추었다. 베토벤 등 고전 음악가의 음악에 맞춰 감정이 흐르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프리 스타일에 의한 독자적인 춤을 구사했다. 미국에서 처음 공연했을 때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자유분방한 공연 양식과 춤으로 기존 발레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신선을 충격을 주며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곳에서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녀의 사생활 또한 세간의 금기들을 줄곧 거부한 탓에 그녀의 예술만큼이나 화제가 됐다.그녀의 두 아이는 타고 있던 차가 갑자기 움직여 세일즈 강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익사했고 러시아 출신 시인이었던 17세 연하의 남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은 정신적 불안감에 휩싸여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불행은 끊이지 않아 그녀 역시 1927년 9월 14일, 요양차 머물던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의 니스에서 오픈카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다 그녀의 목에 매고 있던 스카프가 차의 뒷바퀴에 말려들어가 질식사했다. /조선
1872 - 러시아의 오페라 가수 소비노프(Sobinov, Leonid) 출생 소비노프 [Sobinov, Leonid Vitalievich, 1872.5.26~1934.10.14] Leonid Sobinov (26. 05. 1872 - 14.10. 1934) - the outstanding Russian opera lyrical tenor. He graduated from Moscow University, Legal Department, and School of Music and Drama of Moscow Philharmonic Society. He has been the Bolshoi Theatre soloist since 1898, the soloist of the Mariinski Theatre in S. - Petersburg since 1901 and he actively performed on the best world opera stages within the period from 1904 till 1914. L. Sobinov worked as the first elected Director of the Bolshoi Theatre in 1917 - 1918. In 1923 the singer was titled as Merited Artist of Soviet Republic. And in 1934 he started his career as the Artist Director of the Opera Studio named after K. S. Stanislavski. http://www.sobinov.yar.ru/english/index.htm
1871 - 벨기에의 작가, 정치가 호이스만스(Huysmans, Camille) 출생 호이스만스 [Huysmans, Camille, 1871.5.26~1968.2.25] 1900년대 플랑드르 민족주의 운동에서 중도파 지도자였으며 1946~47년 벨기에 총리를 지냈다. 언어학자로서 호이스만스는 벨기에 이페르에 있는 콜레주, 익셀에 있는 아테네(학술진흥기관), 브뤼셀의 누벨대학교 등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910년부터 하원에 진출하여 브뤼셀과 안트웨르펜 대표로 활동했으며, 브뤼셀에 본부를 둔 제2인터내셔널에서는 간사로 일했다(1905~22).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몇 년 동안 〈인민 Le Peuple〉을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적 신문에 기고했으며,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안트웨르펜에서 플라망어로 발간되는 〈볼크스가제트 Volksgazet〉에 글을 썼다. 안트웨르펜에서 그는 사회당 지부의 창설을 도왔고 1933년에는 시장이 되었다. 호이스만스는 1925~27년 교육장관을 지내면서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플라망어로 가르칠 것을 장려했다. 1936~39년 동안 하원의장을 역임했고 1940년에 나치가 벨기에를 점령하자 런던으로 피신하여 '벨기에 의회 자문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연립내각을 이끌었고(1946~47), 폴앙리 스파크가 이끄는 내각에서는 교육장관을 지냈다(1947~49). 호이스만스의 저서로는 〈75년 동안의 부르주아 지배 Soixante-quinze années de domination bourgeoise〉(1905)·〈1830년 혁명가 정치운동 La Révolution de 1830 et le mouvement politique〉(1905)·〈노동조합의 강화 L'Affiliation des syndicats〉(1907)·〈사회보험에 관한 연구 Études sur les assurances sociales〉(1913)·〈4개의 모델 Quatre Types〉(1937)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30 - 미국 대통령 앤드류 잭슨 '인디안 이주법' 서명 [역사속의 인물] '인디안 이주법' 서명한 잭슨 근대적 의미에서 '인종세탁'의 시작이었다. 1830년 오늘, 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1767~1845)은 자신이 주창한 '인디안 이주법'(The Indian Removal Act)에 서명했다. 남부에 사는 5개 부족을 서부 오지로 내쫓고 유럽 이민자들에게 농지를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조지아주에서 금광까지 발견돼 백인들의 탐욕이 극에 달할 때였으니 미국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법률이었다. 군대가 동원되고 약탈, 협박에 의한 강제 이주였다. 체로키족 1만5천명은 1838년 서부 오클라호마까지 수천리길을 맨발로 걸어갔다. '눈물 젖은 행군'에서 4천명이 전염병,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다. 이 부족은 1812년 인디언 전쟁 때 당시 민병대 대장이던 잭슨 대통령과 함께 싸웠고 목숨까지 구해줬지만, 돌아온 건 배신밖에 없었다. 잭슨을 구해준 기독교인 추장 주날루스카는 그 참상을 지켜보고는 울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오 나의 하나님! 그 전투 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사실을 알 수만 있었더라면 미국역사는 달리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5월 2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3374&yy=2009
1822 - 프랑스의 형제작가 에드몽 공쿠르(Goncourt, Edmond de) 출생 공쿠르 [Goncourt, Edmond de, 1822.5.26~1896.7.16] 형 에드몽(Edmond de Goncourt, 1822∼1896), 동생 쥘(Jules de Goncourt, 1830∼1870). 당시의 명문 출생으로 형 에드몽은 내향적인 공상가였고, 동생 쥘은 정열적인 활동가였는데, 두 사람 모두 병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자부하였다. 이 형제는 동생이 죽을 때까지 합작(合作)의 형식으로 작품을 썼는데, 주로 형이 작품을 구상하고 동생이 문체를 다듬었다. 소설 《18××년에》(1851)가 처녀작이며, 처음에는 프랑스 18세기의 사회·여성·미술에 대해서 연구하여 《대혁명기의 프랑스 사회사》(1854) 《18세기의 여성》(1862) 《18세기의 미술》(1859∼1875) 등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역사가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소설가는 현재를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정밀한 관찰기록에 입각한 소설을 잇달아 써서 《샤를 두마이》(1860) 《피로멘 자매》(1861) 《르네 모프랭》(1864) 《제르미니 라세르퇴 Germinie Lacerteux》(1865) 《마네트 살로몽 Manette Salomon》(1867) 《제르베제 부인》(1869)을 발표하였다. 그들의 작품에는 급격히 발전한 물질문명의 소산으로서 얼마간 변질적인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심리분석보다는 병리학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은 자연주의의 선구로 인정되고 있지만, 한편 ‘예술적 문체’라고 하여 특이하고 정교한 문체를 이루어, 예민한 감각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조성함으로써 인상파풍의 시각적인 효과를 노렸다. 동생이 죽은 후로는 형이 단독으로 집필을 계속하여 《매춘부 엘리자》(1877) 《장가노 형제》(1879) 《라 포스탱》(1882) 등의 소설을 썼다. 동생과 함께 썼던 《공쿠르의 일기》(9권, 1887∼1896)는 19세기 후반기의 풍속과 문단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며, 일기문학의 걸작이다. ‘공쿠르상(賞)’은 에드몽의 유언에 의한 것이며, 그들의 유산을 기금으로 1903년에 설립되었다. /naver
- 'Palaceof Caserta' - 'Palace Staircase, Caserta' 1700 - 이탈리아의 건축가 반비텔리(Vanvitelli, Luigi) 출생 반비텔리 [Vanvitelli, Luigi, 1700.5.26~1773.3.1] 그가 카세르타에 지은 왕궁(1752~74)은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 최후의 걸작이었다. 니콜로 살비한테서 교육받았으며 그와 함께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키기 궁전(1664~1745, 로마) 정면을 증축했다. 그밖에 제수 교회(Chiesa del Gésu, 1743~45)를 비롯해 여러 건물을 완성한 뒤 왕궁 건설에 착수했다. 당시 나폴리 왕이던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쓸 목적으로 의뢰한 이 왕궁은 베르사유 궁전의 제정 건축양식을 본뜬 것이다. 4개의 중정(中庭)을 둘러싸고 있는 4변형 건물로 1,200개의 방, 큰 예배실, 극장을 갖추고 있는 이 궁전은 이탈리아 최대의 계단으로 유명하며, 그밖에도 여러 방향으로 트인 조망이 아주 훌륭하다. 반비텔리는 또한 교황 클레멘스 12세를 위해 안코나에 나병원과 클레멘스 아치를 지었고, 나폴리에 안눈치아타 교회(1756/61~82)와 산토아고스티노 수도원을 지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산타마리아델리안젤리 교회를 개축했고 밀라노·시에나·페사로·마체라토·페루자·로레토와 그밖의 여러 곳에 있는 건축물을 짓는 데도 이바지했으며 건물설계뿐 아니라 나폴리에 물을 공급해주는 길이 40㎞의 카롤리노 송수로(1752~64)도 건설했다. /브리태니커
- 'Angel and Mary, from the Annunciation'
- 'Cardinal Richelieu'
- 'Girl with Falcon' - 'Christ at Emmaus'
- 'Honore II, Monaco' - 'Louis XIII, France'
- France, 10 Francs (1961, Banknote)
1602 - 프랑스의 초상화가, 역사화가 샹파뉴(Champaigne, Philippe de) 출생 샹파뉴 [Champaigne, Philippe de, 1602.5.26~1674.8.12] 벨기에의 브뤼셀 출생. 풍경화가 푸키에르의 제자이다. 1621년부터 파리로 나와 N.푸생과 함께 뤽상부르궁전의 장식에 종사하였다. 1628년 루이 13세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주로 종교화 ·초상화분야에서 활약하였다. 플랑드르 전통의 사실성과 프랑스풍(風)의 기품을 겸비한 초상화가 뛰어났다. 대표작으로 《루이 13세 상(像)》 《재상 리슐리외의 초상》 《1662년의 봉헌물》 등이 있다. 최초의 회화아카데미 회원의 한 사람이다. /naver
1521 -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자 코르테스, 아즈텍 제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함 :: 에르난 코르테스와 아즈텍 문명 황금의 저주를 아느냐! 카스티야 태생의 스무살 청년 에르난 코르테스(Cortés, Hernán, 1485~1547)는 1504년 맨몸으로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그는 무법자에 가까웠고 정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이끈 1519년 멕시코 원정은 코르테스뿐만 아니라 찬란했던 아즈텍 문명의 운명까지도 바꿔놓았다. 그무렵 코르테스의 모국 에스파냐는 국가 재정의 1/4을 멕시코와 페루에서 가져온 금괴와 은괴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에스파냐 정부는 빼앗은 금의 1/5만 정부에 바친다면 어떤 약탈도 눈감아주곤 했다. 황금에 고무된 코르테스는 고작 5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인구 100만명에 달하는 아즈텍 제국을 침공했고, 손쉽게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했다. 멕시코 인들이 백인 군대를 흰 피부의 날개 달린 신 케찰코아틀로 착각해 초기에 허점을 보인 탓이었다. 코르테스에게 아즈텍은 눈부신 황금의 제국이었다. 지휘관들은 황금으로 만든 방패를 들고 있었고, 귀족들은 커다란 보석과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었다. 황제 몬테수마를 생포한 코르테스는 기지로 금을 모아들여 녹인 다음 커다란 황금봉의 형태로 저장했다. 그러나 1520년 ‘슬픈 밤’, 수도에 머물던 코르테스 군대는 아즈텍인들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갔다. 그날 가장 먼저 살해된 이들은 아즈텍의 황금을 포기하지 못해 몸이 무거웠던 자들이었다. 황금의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코르테스는 군대를 정비해 1521년 제국을 완전히 정복했고 총독까지 지냈지만, 가난하고 천대받는 빈민이 돼 최후를 맞았다. 김현정 (객원기자) /씨네21 2003.09.02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2001001&article_id=206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