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거룩한 신자들의 모임’이다. 거룩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교회엔 기쁨이 가득하고 선 정의 화평 정직이 넘쳐나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 안엔 그리스도 흉내를 내는 위선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세례받은 후에도 악행을 멈추지 않고 이전부터 즐기던 거짓말 위증 간음 중독 같은 일을 반성하기는커녕 보란 듯이 즐기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교회의 또 다른 귀퉁이엔 죄인들과 섞이는 것을 끔찍하게 경멸하는 엄격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국 교회 안에서 파당을 만들어 분란을 일으키다가 이단에 빠지거나 분파주의자가 돼 교회 밖으로 나간 다음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곤 한다.
그러고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를 ‘절름발이 교회’라고 냉정하게 묘사한 것은 지나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그의 시대로부터 160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교회는 의인과 악인이 뒤섞여 있는 혼합체(corpus mixtum)다. 내 식대로 말하면 ‘잡탕’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극히 정상이다. 교회는 종말 앞에서 벌려진 타작마당이기에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 참 신앙인이라면 그 안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신앙인에게 교회는 안식과 평화가 보장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그 평화와 안식은 임시적이고 아직 내면에서만 가능하며 온전한 것은 종말의 때에 완성된다는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이다.
소수의 사람만 좁은 길을 통과할 수 있다. 진지하게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궁핍한 자를 위해 자신의 소유를 나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과 1~2세기 교인들 눈엔 정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대의 눈엔 그저 극단으로 걸어가는 정신 나간 미치광이로 보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신실한 미치광이 신자들과 이들을 비웃고 욕하는 ‘정상인 신자’들이 오늘 한 교회 안에 섞여 있다는 데 있다.
목사이다 보니 매번 목회란 무엇일까 고민한다. 목회란 잘 드는 칼로 양쪽을 멋지게 가르는 기술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그런 건 망나니나 하는 짓이다. 악에 대해 눈 감으란 이야기가 아니다.
목회란 양극단의 신자들을 하나로 포용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위대한 겸손과 더 신실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교회란 의인과 악인의 혼합체라는 분명한 현실 인식과 함께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이런 방식의 교회 인식은 교회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통찰을 가져다준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유대인의 뜰이 있던 예루살렘 성전이다. 거룩한 성전에 이런 것들이 왜 필요했을까. 단순히 구별을 위한 것일까. 거룩한 선민의, 거룩한 성전에 이방인이 웬 말이고 여인이 웬 말일까. 선민 이스라엘조차 현실을 냉정히 인정했다는 반증은 아닐까. 거룩을 이유로 구별하고 차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모두가 들어올 틈과 발판을 성전이 마련했던 것은 아닐까.
교회도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어야 정상이다. 잡탕이라고 무시하지 말자. ‘잡탕’ 비싸고 맛나다.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84125&code=23111413&sid1=m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