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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를 돌아보면서 이상돈 (2009년 4월 2일) 나는 1970-74년 동안 서울 법대를 다녔고, 1974-76년 간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대학원에서 헌법과 행정법, 그 중에서도 미국 헌법을 공부했고, 미국 대법원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땄다. 1970년대 초의 서울 법대는 ‘반(反)정부 시위의 본산’이었다. ‘자유의 종(鐘)’이란 언더그라운드 페이퍼를 발행했던 학생운동의 리더 이신범 선배(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냈다), 유신체제를 예언하고 대학을 뜬 유기천 교수님은 학생들의 영웅이었다. 대학 2학년이던 1971년에 미국에선 뉴욕타임스가 국방부 기밀문서를 보도한 펜타건 페이퍼 사건이 있었고, 국내에서 대선과 총선이 있었고, 또 사법파동이 있었다. 1971년 총선에서 공화당은 영등포구를 제외하고 서울에서 전패(全敗)했는데, 그것이 결국 유신으로 가는 계기를 조성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긴급조치와 유신이 있었으니 학생들의 분위기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한 나는 미국 헌법에 관한 책과 논문을 많이 읽었다. 물론 모두 영어로 쓰인 문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국내 현실에 대한 도피로서(그래도 나는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번역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손톱만한 광고를 냈다.) 미국 헌법을 심취해서 공부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서울법대 도서관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미국 대학의 법률학술지가 제법 많이 비치되어 있어서 나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었다. 대학원에는 군대를 갔다 온 후 복학한 안경환 인권위원장이 공부를 하고 있어서 자주 관심사를 나누기도 했다. 나의 석사학위 논문은 굉장히 리버랄한 관점에서 쓴 것이었다. 당시 나의 영웅은 미국 대법원장으로 흑인 차별철폐 판결, 형사피의자 권리 보호(미란다 법칙) 판결 등 일련의 진보적 판결로 미국 사회를 바꾼 얼 워렌(Earl Warren)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워터게이트 특종과 이로 인한 닉슨에 대한 탄핵 발의에 따라 결국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사설이 없던 타임지(誌)가 닉슨의 사임을 요구하며 실은 사설(‘The President Should Resign’)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명문장이다. 대학원을 마치고 해군에 입대해서 복무하던 중인 197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지미 카터가 승리해서 대통령이 됐다. 당시 나는 미국 공화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카터 행정부의 꼬락서니를 보고 “미국 민주당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카터 행정부 시절에 미국은 경제 외교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완전히 헤맸다. 워터게이트에 실망한 미국 유권자들이 눈감고 민주당을 찍었다가 혼이 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국민의 기본권 보장 문제가 아니면 리버랄은 안되겠다고 느끼게 된 것이 바로 그 때였다. 제대 후 미국 유학을 떠난 나는 대부분의 유학생이 그러하듯이 국내사정에 대한 관심을 끄고 공부에 몰두했다. 10-26 사태와 12-12 사태가 일어났지만 솔직히 말해서 먼 산 보듯 하는 수밖에 없었다. 1980년 11월, 마이애미 대학에서 국제법과 해양법을 공부하던 나는 로널드 레이건이 현직 대통령 카터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된 후 안도하는 미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미국 사람들이 대통령을 제대로 뽑은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부통령, 진 커크패트릭 주(駐) 유엔 대사, 제임스 베이커 비서실장 등은 일단 보기에도 좋았다. 복장도 단정하고 이력도 훌륭해서 미국을 대표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레이건의 연설은 정말 듣기가 좋았다. 1983년에 서울에 돌아와서 대학에 자리 잡은 후 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됐다. 학생들이 북한이 우리 보다 더 잘 살고 더 훌륭한 나라이고,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라고 우기는 기막힌 현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이란 것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카터와 레이건을 비교해서 리버랄의 한계를 절실하게 알게 된 후, 한국 대학가의 그런 현상을 보았으니 내가 ‘보수 우파’가 되는 것은 어느 면 당연했다. 물론 나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모두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쉬운 예로는 인권위원장을 하고 있는 안경환 교수를 보면 된다.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총론에서는 나와 의견을 같이 하겠지만, 사법부의 역할(role of the judiciary)이라든가 사회적 다양성(social diversity), 학교 선택권(school choice) 등 많은 부분에 대해선 의견 차이가 날 것이다. 나는 레이건을 존경하지만 안경환 위원장은 아마도 루스벨트를 존경할 것이다. 나는 토머스 소웰을 좋아하지만 안 위원장은 아마도 폴 크루거만을 좋아할 것이다. 사적(私的)인 이야기이지만, 요즘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어색한 ‘지적(知的) 오디세이’를 간단하게 써 보았다. (c) 이상돈 이상돈 “보수의 MB 묻지마 지지가 오히려 이해 안가”이 교수는 이날 ' < 한겨레 21 > 의 이른바 합리적 보수론'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언제부터인지 나를 소개할 때 '합리적 보수'라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은 달갑지 않다. 그것은 '보수는 비합리적이다'는 일반론을 아래에 깔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스스로를 '비판적 보수주의자'라고 소개했다. 이어 이 교수는 "나는 대선 전부터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공약과 불분명한 정치 이념을 비판했고, 또 뉴라이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글은 2007년 여름에 나온 나의 책 <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 (경덕출판사)에 수록되어 있다"면서 "대운하 공약을 처음으로 비판한 사람은 바로 나였고, 그것이 MB 캠프를 괴롭혔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나는 이명박 정권이 '합리적 보수'를 지향할 것으로 기대하다가 그렇지 않아서 비판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명박 정권이 햇볕정책은 햇볕정책 대로 계승하고, 대운하 같은 터무니없는 토목공사로 경제와 환경을 망칠 것이며, 법치주의와 도덕성 기준에서 하자가 있는 탓으로 신뢰성에 문제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면서 "나의 책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에 그런 내용을 담은 글이 수록되어 있고, 그 책의 절반은 노무현 정부와 진보좌파를 비판한 것이고, 절반은 당시 이명박 후보와 뉴라이트를 비판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나는 이명박 정부에 실망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비판적이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문제를 제기했던 부분, 즉 햇볕정책 지속과 안보의식 부족, 도덕성 결여로 인한 신뢰상실, 이해할 수 없는 토목공사 집착은 지금 그대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면서 "나는 오히려 이명박 정부를 '묻지마 지지'하는 보수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해 내가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변화무쌍한 민심"이라면서 "현 정권이 집권 초에 서투른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지지를 잃을 줄은 정말 몰랐다. 대선 때 투표율이 저조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2007년에 '보수'가 다른 대안을 가질 수 있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 같아 아쉽다"고 말을 맺었다. 한편 이 교수는 지난 2일 올린 글 '1970~80년대를 돌아보면서'란 글에서 자신의 지적편력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이력과 정신적 편력과정을 밝히면서 스스로 보수주의자가 돼 가는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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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난 이상돈 교수가 이해가 안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