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書는 예수 사후, 성서학자들이 수백년 동안 집필한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모든 종교에는 경전이 있다.
불교의 경전도 석가모니가 전부 써 놓은건 아니다.
어떤 종교도 성자가 직접 완성해 놓은 경전은 없는 것이다.
성서가 중요한게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 말씀하려는 그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매 성서를 잘 이해하는데는 얼마간의 정통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종교란 모두 한가지 길로 통해 있는데 그 사상이 바로
자기 희생을 통한 이웃사랑과 덕의 겸비다.
나는 가톨릭을 알기 전에 불교와 개신교를 다니며 공부했다.
가톨릭을 신앙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떠오르는 참 진리의 탐구를 위해
가톨릭 이외의 다른 종교나 종파에 대해서도 줄곧 교환을 가졌으며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고 자부한다.
그럼 나는 왜 가톨릭을 선택했는가?에 대해 잠시 피력할까 한다.
우선 첫째가 폭넓은 수용을 하는 보편타당성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다른 종파에선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대단히 큰 마음이다.
그 어느 종파에서 예배시에 타 종교 성직자를 모셔다가 말씀을 듣는 교회를
볼 수 있을 것인가.
가톨릭 만이 행하고 가톨릭 만이 현재로선 가능한 일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스님도 목사님도 초청되어 강론을 하실 수 있다.
내 어머니 喪事時에는 동생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우리 성당 내 장례식장에
들어오셔서 개신교 양식의 예배를 드렸다.
바로 옆에서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많은 성당 교우들이 있는 가운데서 이다.
그들은 고인과는 일면식 없는 분들이었지만 멀리서 동생과의 인연으로 찾아 오셨기에
맏상주인 나는 그들 식의 예배를 얼마든지 하시라고 권할 수 있었다.
그것이 가톨릭이다.
만일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초상집에 가서 가톨릭 미사나 연도를 드리고
가톨릭 성가를 부를 수 있었을까?
개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절대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주와의 마찰이 우려된다.
그러나 가톨릭은 넓은 아량으로 그들도 받아 들인다.
영령을 위한 정성과 추모의 마음이 먼저지 형식이 중요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주로 미사참례를 하는 새남터 성지 성당은
순 우리식 건물의 기와집 성당이다.
성당 내부, 제대 뒤 벽화에는 우리 선조들의 모습으로 예수와 성모를 그리고 있다.
예수는 도포입고 갓 쓴 이고 성모는 쪽진 머리에 비녀를 꼽고 한복을 입은 이다.
예수가 검둥이면 어떻고 여자면 어떻다 말인가?
그런 사실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메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 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나는 예수에게 아내가 있었다 해도 좋고 애인이 수없이 많았다 했더라도
믿음에는 전혀 미치는 바가 없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것마저도 수용하고 있으며 계속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변화의 물결에 맞춰 나가는 세상 유일한 교회다.
내 유년시절과 현재 교회상을 보면 기실 엄청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교회는 오직 가톨릭 교회 뿐이라고 본다.
둘째로 가톨릭은 세계 각 교회가 하나로 통합된 유기체적인 조직을 갖고 있다는게
나로 하여금 선택하게 된 이유다.
이를 꼬집어 비판하는 종파의 얘기로는 교황 중심으로 수직적인 형태를 비난하는걸
들은 적이 있는데 그건 그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교황은 각 나라 각 지방의 교회를 주교에게 맡기고 있다.
그 나라 풍습을 최대한 존중해 주며 형식 보다 이웃 사랑을 강조한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 수녀는 힌두교와 수많은 종교들이 다원적으로 존재하는
인디아에서 종교를 전파한게 아니라 인간애를 실천하다 돌아 가셨으며 회교식의
용어나 힌두교식의 풍습대로 그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제사 풍습을 이해하지 못해 허용치 않다가 1933년 부터
교황청에서 민족의 고유한 풍습은 풍습대로 인정해야 함을 깨달아 인정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성당엔 갖가지 형상의 예수상과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그것은 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미지화한 형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성물
자체가 신비하고 영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하는 다른 종교나 종파는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은 그렇듯 운동역학 수치 1000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세번째, 가톨릭은 이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갖 시행착오와 변화를 겪어내며
굳건하게 현재를 지키고 있는 역사적 검증을 거친 종파다.
내가 한 종교를 만들 수도 있었다.
15살인 중 3때 그런 생각을 해보고 시도해 보려 했었다.
하지만 가톨릭의 이천년 세월을 알고나서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종파를 창시하면 한 일이백년이야 갈 수도 있겠지만 이천년을 넘기도록
흥할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가톨릭은 이천년이 넘도록 세계 최고 권위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저 보통 일은 아니다.
종교라는 것보다 인간과 신의 이치를 깨닫고 그 안에서 신의 음성을 들어 나에게
옮겨 오는 것이 내가 가진 신념이다.
내게 들어온 참된 멧세지는 나에게서 소화되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므로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이 나의 신앙관이다.
네째, 가톨릭은 내 교회 네 교회가 없다.
가톨릭 선교는 "우리 성당에 나오시오." 가 아니다.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그 어느 곳도 좋다." 그러면서 세례를 받아 지은 죄를
깨끗이 씻고 새롭게 태어나 세상에 봉사하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한번 거듭나서는 되지 않는다.
매일 매순간 거듭 태어날 수 있는 자세와 아량을 가져야 진실을 만날 수 있다.
종교는 무수히 존재하지만 하느님이란 절대적 신은 단 하나다.
나도 신이지만 하느님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신이다.
그걸 알려면 수련을 좀 해야 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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