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
제목 : 부끄러운 구원(1)
본문 : 고린도전서 3:3-23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실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은 의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런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오직 하늘에서 오신 우리 주님께서 의가 무엇인지를 저희에게 가르쳐주시고 또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완전한 의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신 줄을 압니다. 이제 저희도 그 의의 제사에 참여 된 자로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 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오늘 강론 제목은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말을 바꾸어봅시다. 나는 구원받은 성도가 맞는가? 나는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그럼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 답이 3장 7절에 있어요. 한 구절로 아주 간단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로되’... 이 말씀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에요.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자라게 하시지 않으면 그건 죽은 거예요. 죽은 것에다가 아무리 물을 줘도 열매 맺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 말씀은 모든 인간의 구원 불가능을 단정하는 말씀이에요. 어느 인간도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노력이나 열심으로도 자기 구원에 아무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게 오늘 본문 7절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이 다 죽었어요. 다 죽었는데, 그 죽은 자들 가운데서 주님이 살려내실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어때요? 모두 자기가 살았다고 별의별짓 다하고 살잖아요. 중동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대만에서는 총통 선거에서 누가 이기고 지고에 따라 전쟁이 난다 안난다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서로 잘나고 똑똑하고 옳다면서 치고받고 하는 것들을 다 죽었다고 여기시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착한 바퀴벌레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보는 순간 어떻게 합니까? 때려잡죠? 이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바울이나 아볼로가 어떤 능력이 있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구원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돌보고 섬기는 일은 할 수 있는데, 그중 어느 한 사람의 능력으로도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생명을 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로 이야기하자면 강장로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강장로의 허접한 강론을 듣고서도 살아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말이에요.
여러분, 죄가 뭡니까?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자기 구원에 자기가 개입하는 게 죄예요. 내 구원을 내가 쟁취하겠다는 게 죄란 말이에요. 피조물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생명력으로만 존재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존재하겠다는 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잖아요. 그래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주체성과 독립성을 발휘해서 내 구원은 내가 책임지려고 하는 속성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죄라고 해요.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나간 사람들에게서 첫째로 나타나는 변화가 뭡니까? 남자들의 경우에는 술 담배를 끊고, 즐기던 유흥 오락을 줄이고, 주일에 놀러 가는 대신 교회 가고, 좀 아깝지만 지갑을 열어서 헌금도 좀 하고 예전보다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도 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 구원에 자기 행위를 보태어 협조를 해보겠다고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까? 그게 예수 믿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바꾸면 자기를 믿지 않는 거예요.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게 예수 믿는 거예요. 내가 어떤 열심을 부려도 그게 내 구원에 조그마한 기여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라보게 된 주가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이 등장할 때는 반드시 행위는 아님이 전제됩니다.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행위는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어떤 행위로도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만 믿는 거예요. 예수도 믿고 교회도 믿고 세상도 믿고 나도 믿고 돈도 믿고 그런 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와 함께 믿는 것들을 하나씩 쳐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잘라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거든 감사하시면 돼요.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공로, 그 은혜만 꼭 붙드는 자들이 새 피조물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게 사람의 결심으로 가능하겠느냐고요. 안 되거든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는 거예요. 강제 개입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가 시작부터 성령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도 믿고 나의 착함, 나의 행위의 가능성도 믿는 건 믿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진짜 믿음이 주어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나의 믿음 없음부터 들통납니다. 나는 자꾸 믿음 대신에 다른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했구나.. 종교적인 열심과 윤리 도덕입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가 잘못 가고 있는 것 중의 하나예요. 교회가 자꾸 그렇게 가르치니까 예수 믿는다는 건 착하게 살기입니다.. 술 담배 안 하는 겁니다..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겁니다...신앙이 아니라 종교에요 종교
이런 것들이 믿음을 대신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생 교회를 다니고서도 믿음이 무엇인지를 한 번도 체험한 적이 없는 거예요. 예수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단 말입니다. 지난번 대전 모임 오해 시리즈 중에 믿음에 관해서 강론한 게 있으니 꼭 한 번 보세요.
믿음은 우리 인간들의 결심과 결단, 의지가 아니에요. 오히려 진짜 믿음이 오게 되면 나의 결심과 결단과 의지로 열심히 봉사하고 섬겼던 것들이 전부 가짜임을 알게 됩니다. 무너짐, 그게 믿음의 시작이에요. 그게 예수 믿음의 시작이란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을 가리려고 은혜 더하기 착하게 살기, 은혜 더하기 종교적 열심이 있어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고 천국 상급까지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단 사상을 가르쳐놓으니까.. 이게 알미니안, 페라기우스 이런 것이거든요. 요즈음은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그것들을 아예 보편적으로 정통이라 하는 대부분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말로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영광이라고 하면서 그 믿음과 은혜와 영광을 가리기 위해서 인간의 더러운 손때를 묻히도록 가르칩니다. 교회가 복음의 원수가 되어버린 거에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회 안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생깁니다. 기도 배틀이 생기고, 헌금 배틀 생기고.. 여러분들도 다 해봤을 거예요. 새벽기도 가서 목사보다 더 늦게까지 남아 있기..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좀 더 당당하게 구원을 확보할 수 있을까를 가르치고 있어요. 기독교 서점에 가보세요. 모두 그런 책들이에요. 구원에 이르는 방법, 기도 응답 방법, 성화 되는 방법,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상급 받는 방법.. 이 따위 것들만 가르치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내가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모두가 믿음을 오해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가 믿음으로, 복음으로 진리로 자유케 되리라고 하셨는데, 예수 믿고 자유가 더 없어요. 더 힘들어요.
얼마나 잘못 가고 있는지 교회를 오래 다니다 보면 자신이 당연히 구원받을 줄로 알아요.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거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복음 전하기가 더 힘들어요. 복음 전하기 가장 어려운 직업이 뭔지 아세요? 그렇죠. 목사한테는 진짜 복음 전하기가 힘들어요. 왜?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니까요. 머릿속에 쓸데없는 게 가득 들어있어서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어느 정도까지 잘못 가고 있는가 하면 구원은 당연한 거고 천국에 가면 옆 사람과 차별적 상급까지 챙기겠다는 거예요. 이게 차등상급론이거든요. 실제로 총신에서 그런 논문을 쓴 사람이 있어요. 지금 대구 만촌동에서 큰 교회하고 있는 목사예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상급에 차등이 있다고 하니까 교인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머리 터지죠. 안 그래도 욕심이 많은데 천국 가서도 너는 삼십 평짜리, 나는 오십 평짜리.. 실제로 그런 간증 많이 하잖아요. 천국 가보니 누구는 오두막집에 살고 누구는 개털 모자 쓰고 누구는 면류관 쓰고 백 평짜리 맨션에 화장실 변기까지 금으로 번쩍하더라.. 종교사기꾼들이죠. 그런데 그런 사기를 치지 않으면 교회가 안 되니까요. 대형교회일수록 그런 사기꾼들 불러서 펌프질을 해야 교회가 잘 돌아가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되어버려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겁니다.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 거꾸로 알아듣고 있어요. 거꾸로 가르쳤으니까. 믿음 대신에 교회에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는가, 얼마나 종교 행위에 열심을 내는가 등에 오늘 본문을 이용해 먹는 거예요. 12절을 보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이 나오잖아요. 이렇게 공적에도 차이가 있는데, 잘못하면 다 불타 없어진다면서 공갈을 치는 거예요. 대부분 설교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뜻은 어떤 열심도 공적도 남아나는 게 없다는 거예요. 다 불타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제가 강론 시작부터 왜 이렇게 힘 빠지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워낙 세상 교회들이 교인들에게 자기 구원에 도움이 되는 방법론들을 개발해서 가르치다보니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하는가 하면 자기는 당연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고 또 구원에 기여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심지어는 성령 받는 방법론에 관한 책도 있어요. 이렇게 되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자체가 모두 헛소리가 되어 버리지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시작부터 성령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밤에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그러셨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그가 성령이 뭐냐고 여쭙자 성령은 너희 인간들이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런 것이다. 바람은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이잖아요.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것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거예요.
(고전 2장)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쉽게 말해서 믿음과 구원은 말로 가르쳐서 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내 경험칙과 구원에 이르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게 아니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 증언하는 거란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생기고 게바파가 생기느냐는 말입니다. 결국 너희가 사람을 좇아간 거잖아.. 사람에게 한 수 배우려고.. 그런데 나 바울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 말입니다. 고린도전서가 이렇게 처음부터 대못을 박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나타났다고 우르르 몰려가고, 또 어느 목사 괜찮다고 하면 우르르 몰려가고 그러죠. 서울의 어떤 교회는 아직도 돌아가신 분 동영상을 틀어놓고 예배드리고 있어요. 우리는 김성수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 그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나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까? 그분 가신지가 벌써 십년인데 아직도 그짓 하고 있어요
지금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아니면 구원 없다는 겁니다. 니들이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반대편, 그러니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 반대편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람의 지혜, 설득력 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지혜있는 똑똑한 사람도 심지어 온갖 능력이 나타난 사도 바울까지도 고린도교회 교인 한 사람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안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몹시 두렵고 떨렸다.. 왜? 너희들이 나에게서 배울까 봐, 나를 학습할까 봐 두렵고 떨렸다..내가 성령의 일하심에 방해가 될까봐.
제가 지난번 여름 캠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편지 서두에서부터 매우 주도면밀하고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영을 받은 자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 3장 1절의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로 아예 넘나들 수 없는 선을 그어버립니다. 이 모든 말에는 인간의 자기 구원에 대한 선택 불가능.. 어느 인간도 자기 구원을 선택할 자격도 능력도 없다.. 그렇게 죄인들의 무지, 무능부터 인정하자는 거예요.
전에도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그냥 육체예요. 영이 없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아담을 저주하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영의 세계, 생명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무지합니다. 그냥 죄로 오염된 죽은 흙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생명 없는 것들, 죄로 오염된 육체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어요 부정하니까...그래서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시는 이유가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였습니다. 이유가 아주 간단해요. 영이 없는 육체는 부정하다는 거예요. 그 육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하나님을 배신한 아담에게는 뭐가 자리하고 있습니까? 선악과의 죄성이 자리하고 있단 말입니다. 어떤 죄성이에요? 한 마디로 ‘하나님처럼’입니다. 이게 뱀의 말이었거든요. 너도 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선악판단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뱀의 말에 연합되어 버린 거예요. 같이 묶여버렸어요. 이 말은 아담의 몸에는 뱀의 말, 뱀의 영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보면 세상의 영이 나오죠?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 그 세상의 영이 그의 몸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인 거예요.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에덴의 동쪽으로 쫓아내신 그 세상은 세상 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본의 아니게 그 세상에서 태어나서 그 세상만 알고 살아온 거예요. 맞죠? 태어나보니 세상이잖아요. 세상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이렇게 세상과 딱 붙어서 살고 있단 말이에요. 성경은 그들을 죽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세상, 어둠의 세상이에요.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 1장에 뭐가 나옵니까? 빛이 나오죠. 빛이 세상에 왔는데 어둠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하잖아요. 어둠의 세상, 생명이 없는 죽은 세상이 우리란 말이에요.
그런 죽은 세상, 생명이 싹틀 수 없는 불모지(어떤 것을 심어도 싹이 날 수 없는 땅)에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이 말씀을 심었다고 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하잖아요. 그런 불모지에 바울이 말씀을 심은 거예요. 그래서 본인도 누가 성도인지 누가 성도가 아닌지를 모르는 상태로 그냥 주께서 시키시니까 유럽까지 건너가서 말씀을 심은 거예요. 이 말은 자신의 행위는 어떤 구원의 능력이나 창조력,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고린도교회가 그런 자신을 좇고 학습할까 두려워했다는 겁니다. 나는 말씀만 전했을 뿐이지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겁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거기에서 만약 어떤 열매가 결실한다면 누가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거라는 말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능력 있는 주의 종이 교회와서 부흥회한다고 광고하고 야단나잖아요.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영과 세상의 영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영은 세상의 영과 무엇이 다릅니까?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수시로 느끼는데, 우리 몸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 귀신이 들락거려요. 귀신이라니까 공포영화에 나오는 그런 귀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잖아요. 자기를 사랑하고, 내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선택하면서 사는데, 이게 귀신 들린 거예요. 그거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요? 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라 함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세상 영에 갇힌 자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새가 농사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누가 먹이신다? 하나님께서 먹이신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길쌈도 안 하는데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나님이 다 입히시는 거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런 거예요. 주가 계시단 말에요. 그런데 왜 그렇게 가만히 있지 못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는 거예요. 오늘 뭐 입고 나갈까, 오늘 뭐 먹으면 내가 행복할까, 돼지 갈비찜을 시킬까 삼겹살로 할까...이게 말이에요. 이 세상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 영이 있어요. 세상 신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을 하신 거예요. 세상 임금, 하늘에서 쫓겨난 그 사단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요. 거기에 우리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처럼이라는 뱀의 말과 연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뭘해도 죄가 나와요 채워지지 않는 정욕, 그러니까 우리 안에 뭔가 빈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을 채울 수 없는 거예요. 세상의 어떤 영광과 즐거움과 쾌락과 학문 철학 종교 등으로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빈 공간이에요. 그걸 채워보려고 인간들이 만든게 종교입니다. 종교는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겁니다.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사랑하고 스스로 자기를 증명하려고 평생을 허비하고 사는 인생들.. 이게 세상 영을 받은 자들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정욕이라고 하고 탐심이라고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일곱 귀신 들린 마리아가 나옵니다. 창녀 마리아라고도 해요. 일곱은 완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래서 일곱 귀신 들렸다는 건 귀신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귀신에게 완전히 장악된 인간들의 대표로 불려 나온 게 일곱 귀신 들린 마리아란 말이에요. 그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에 향유와 함께 부어진 걸 구원이라고 복음서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죽음에 연합되는 것 외에는 어떤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얘기했는데, 예수님 십자가 옆에 강도 둘이 달렸잖아요. 그럼, 왜 하필 강도예요? 그건 그 강도가 모든 죄인을 대표해서 달린 거예요. 너희 중에 이 강도들보다 나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 도둑들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을 도둑질한 도둑, 그런데 그 둘 중의 하나가 갑자기 옆에 있는 옆에 있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안 거예요. 처음엔 둘이 똑같이 욕하다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당신이 오늘 낙원에 있을 때 나를 기억해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 십자가 옆에 하나님이 있으면 무엇을 부탁하는 게 자연스럽겠습니까? 제가 지금 죽겠으니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해주세요..나좀 살려주세요 그거 아닐까요? 그런데 그는 당신이 오늘 낙원에 있을 때 나를 기억해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이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은혜의 필연성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당신의 자비, 긍휼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거 아는 거에요.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전부 어떻습니까? 모두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 당장 급한 것, 지금 어려운 것을 빌고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교회오고 그것 얻어내려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그러잖아요 그건 믿음이 아니고 거래하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주신 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있는 게 없는 강도 오직 함게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불쌍히 여김만 구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우리 구원의 현실이란 말입니다.
오늘날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각자체가 없어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 가능한데, 은혜가 무엇인지를 몰라요. 입으로는 매일 말하죠. 솔라 그라시아, 솔라 피데.. 그런데 정작 은혜로 살라고 하면 다들 싫다고 하죠. 죄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은혜로 사는 거예요. 자존심 상하니까.. 성경에 보면 은혜로 살다가 천국 간 사람이 있죠? 천국 간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실명으로 말씀하신 유일한 사람이에요. 부잣집 문 앞에서 던져주는 음식으로 생계를 해결한 사람. 나사로는 부자가 주면 먹고 안 주면 굶고 그렇게 살았어요 개가 와서 헌데를 핥아도 쫒을 힘도 없이... 그런데 그 사람이 유일하게 천국 간 사람으로 실명이 기록되어 있어요 거지 나사로. 여러분,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의 일을 한 게 있습니까? 자기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한 게 있습니까? 전도를 했어요? 교회 를개척했어요? 성경을 백독했어요? 그는 그냥 은혜로 산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사로라는 이름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이에요. 이게 구원이란 말이에요. 나사로는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불려 나온 사람인 거에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이에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명력으로만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게 구원이란 말이에요. 그 처음 자리, 그 자리가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아담의 처음 자리예요.
그런데 그 자리를 이탈한 것을 하마르티아(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로 향해야 할 방향성이 자기에게로 바뀐 거예요. 이 상태가 죄란 말이에요. 뱀이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한 그것입니다. 왜 네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해?.. 너도 선악을 판단하고 하나님처럼 살 수 있잖아?..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지금 선악과 먹으면 너도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어.. 그 결과가 뭐예요?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에게 뭐가 찾아왔다? 죽음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음 안에서 태어납니다. 맞죠? 죽음 안에서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죽음이 두려워서 죄의 종노릇을 하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살아보겠다고, 내가 나를 살리겠다고 어려서부터 학교 가서 공부도하고, 직장생활하고, 장사해서 돈 벌고, 시집가고 장가 가고 자식 낳고 하면서 온갖 발버둥을 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유일한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현실은 하나밖에 없지요. 바뀌지 않는 현실, 죽음입니다. 그 유일한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주저앉게 되는 거예요. 그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저주받은 자를 ‘인생뿐인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가두어진 세상에 하늘로부터 어떤 분이 오셨어요. 그분을 인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아들, 인자, 하나님의 사람은 어던 사람인지를 보여주시러 오신 인자에요 그분이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예요. 태초로부터 계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나타나셨는데, 그분이 오신 목적이 바로 창세 전부터 있은 하나님의 약속을 죽음으로 실행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 죽음 언약의 죽음 안에 있는 구원입니다.
흔히들 예수님이 왜 오셨다고 가르칩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 하죠? 그게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구원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이 에덴에 선악과를 심어놓으시면 안 되는 거예요. 맞잖아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아셨죠. 모르면 하나님이 아니지요. 그걸 아셨으면 뱀을 왜 풀어놓으셨을까요? 에덴에 뱀이 아예 못 나타나도록 막아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유혹하지 못하게 말입니다. 아니, 유혹했다고 칩시다. 그럼 선악과를 따먹을 때 말리셔야지요. 짠! 하고 나타나서 안 돼! Stop! 하셔야지요. 그리하셨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필요도 없잖아요. 이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해서 제게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선악과냐는 거지요 왜 병주고 약주고 그러냔 말입니다.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건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하려고 오셨어요. 우리가 있기도 전, 어떤 행위가 있기도 전의 그 약속입니다 (엡1:3-7) 성경 66권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하잖아요. 이게 모두 옛 약속 새 약속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있기도 전인 창세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하려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세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그 약속의 실행에 죄인으로 참여된 거예요. 그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지음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순서가 잘못되면 안 돼요. 선악과 따먹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처럼 신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나 있음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다 보니 나 있음에서부터 예수가 시작되는데, 그렇게 나로부터 신을 찾는 게 종교지요. 반대로 창세 전 약속이 먼저요 그 약속으로 시작이 되는 게 복음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선택이 없는 거예요. 이게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싫은 겁니다 하나님의 선택만 있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싫단 말입니다. 내 구원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그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게 우리 모두가 꽁꽁 숨겨놓은 아담의 자존심, 곧 선악과 죄성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야기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그럼 뭘 해도 죄네 ..아무것도 할 게 없네.. 가 되죠. 복음을 전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반응이 이런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면 되겠네.. 하는 거죠.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게 바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다. 죄인들은 그게 안 돼요.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말하길 잠잠히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고 했어요. 인간은 잠잠히 있지를 못한단 말에요. 왜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하면 불안하니까 믿을 건 나밖에 없으니까 주가 계심을 믿지 못하는 거에요 오늘 본문이 그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창세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씨 심는 죽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있기도 전, 창세 전에 성자 예수와 같은 아들들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로 작정하신 거예요.
그렇게 창세 전에 그 약속이 먼저 있었고, 그 약속을 위해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셨단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에게는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시간도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작정 그 자체가 완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묵시에는 이미 우리가 그 아들들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죽어도 바로 그 나라에서 깨어나는 거에요 시간의 흐름이 필요없는 겁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 살다 보니 우리 이성으로는 이런 말씀들이 잘 이해되지 않아요. 우리가 사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묵시, 성도들과 연결된 시간은 질이 다른 시간이에요. 질이 다른 시간이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달력을 바꾸어주신 그 시간입니다. 출애굽한 날로부터 그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셨잖아요. 달력을 바꾸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들 광야 40년에는 그 안에서 질이 다른 시간이 흘렀어요. 이 말은 이미 완료된 묵시로부터, 그 영원한 미래로부터 오는 시간이란 뜻이에요.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완료된 그곳으로부터 오는 시간인데, 이것을 수직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성도는 그 시간 안에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면서 삽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현재,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 천국 가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계획하시고 완성하셨는데, 그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만 완성될 수 있는 나라이며 영원한 나라예요. 거기가 천국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들의 죽음 안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 말은 아들의 죽음이 나누어지고, 아들의 죽음이 나누어진 자들에게 아들의 생명도 나누어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된 예수님의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랬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하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합니다. 그럼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게 언제예요? 그렇습니다 영원 전이죠.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세상 시간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에요. 세상 시간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이미 그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 그 영원한 현재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이 나누어지고 아들의 생명도 나누어진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불려나온 에클레시아 예수님의 신부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이에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인 거에요 이게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고전 1장)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미련할 수밖에 없죠. 이천 년 전 중동 땅에서 삼십대의 젊은 남자가 발가벗겨져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그게 어떻게 내 구원과 연관이 되느냐고요. 이성적으론 그게 맞지요? 당연히 미련한 거예요. 우리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건 다 미련한 거니까. 우리 작은 머리통에 하나님의 지혜 능력을 담아보려니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이미 묵시의 세계로 옮겨진 우리에게는 그 죽음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되는 것입니다.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짓인지를 사도도 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미련한 짓을 통해서, 그냥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자들을 보내시는 거예요. 그 사람을 보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중에서 복음을 듣고 살아나는 자들이 있게 되는 거예요. 교회에 직분자를 두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서울 서머나처럼 팀장 그런 거 말고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성령의 은사로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로 직분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기 싫어도 부득불 하게 되는 직분이에요. 복음의 전쟁터로 떠밀리게 된 자들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군사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영적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이 세상 교회입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섬김과 희생으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하나님의 계획에 반기를 든 존재가 있죠? 그게 누굽니까? 사단과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난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한 ‘하나님처럼’의 선악과 범죄.. 왜 당신만 하나님이야? 왜 우리가 하나님 당신 말만 들어야 해?.우리도 있음이잖아.... 아까 그랬잖아요. 왜 네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해야 하는 거야?.. 네 인생의 주인은 너잖아.. 네가 이 열매만 먹으면 하나님과 같은 주체적 존재가 될 수 있어..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아까 제가 천국 간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했잖아요. 우리 욕 중에 그런 욕이 있죠? 이 거지 같은 놈아.. 평생 빌어먹을 놈..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비참한 상태가 거지잖아요. 왜 비참합니까? 자기 손으로, 내 능력으로, 내가 주체적으로, 독립적으로 내가 내 능력을 발휘해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수 없는 게 거지라는 말입니다. 전적 무능력이죠 그런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자존감 있는 인간에게는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뭐가 없을까요? 주가 안 계십니다.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가 하나님이에요.그래서 모든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하는 거에요 그게 모든 인간에게 찾아오는 죽음입니다. 물론 성도는 진리의 죽음이라는 다른 죽음을 죽게 되지만
이처럼 이 사단의 유혹, 뱀의 말에 연합된 아담은 그때부터 자기 형상대로 자손들을 생산해냅니다.(창 4장) 하나님의 형상이 깨져버려서 아담의 형상대로 자식들을 낳는 겁니다. 그들은 자기라는 주체성을 가지고 사단처럼 하나님의 일에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우리 종교적 인간의 세상이에요. 인간의 죄성이 낳은 괴물입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생명 나무에 손을 뻗치는 탐심.. 하나님이 두루 도는 화염검과 천사들로 다 막아놓으셨는데 생명 나무에 손을 뻗치려는 그것.. 이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불교로 말하면 성불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나 불교가 다른 게 없어요. 교회에 천 명이 모이면 천 개의 신주단지가 있고, 만 명이 모이면 만 개의 신주단지가 있어요. 각자 섬기는 신이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교회에서도 합장해서 인사하면 됩니다. 성불하세요~ 모두 각자 자기 하나님을 자기가 모시고 자기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서 생명 나무 열매를 따 먹으려고 합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인간들이 모인 종교집단의 공통된 본질입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 할 것 없이 탐심은 다 똑같아요. 이게 한 단어로 인간교입니다. 아담이 자기 형상대로 생산해놓은 자식들이 만들어낸 인간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주권, 그 구원의 주권에 대한 사도의 증언이에요. 한마디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손댈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더러운 손 떼라는 거예요. 그래서 7절을 보면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아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씨 심는 죽음에 참여된 성도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nothing입니다.. 당신의 죽음이 아니면, 그 십자가가 아니면, 그 피가 아니면 영원한 심판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의 괴수가 맞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혀가 갈라진 뱀새끼입니다 거짓된 말만 하는 ..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그렇게도 경건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 뱀하고 연합되었으니까 독사의 자식 맞지요.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주께서 어떻게 죄인을 오래 참으시고, 또 그 불쌍히 여기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어떤 것인가,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나에게 구원받을 조건이 있다면 오직 하나밖에 없다. 뭐냐? 하나님의 약속과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약속대로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밖에는 다른 어떤 것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교회는 이미 완성되어 있어요 하늘에
그러므로 구원은 내가 소유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구원은 없단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하는 거예요. 아예 주도권 자체를 부정해버리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 구원에 내가 땀 한 방울이라도 흘려야 그게 내 것이 될 수 있는데, 그게 전혀 아니라고 하니까요. 그러나 그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에요. 일정 부분이라도 내 구원에 내가 기여한 게 있어야 구원이 완성된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인간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신앙생활은 그거 인정하기 위해 하는 거에요
세상 교회 다니면 그런 말을 많이 듣잖아요.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인은 구원을 요구할 자격도, 또 그것을 유지할 능력도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가 부부싸움 한 번 하면 왕창 깨져버려요. 구원의 확신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새벽기도 가서 은혜 충만하고 성령 충만해서 펄쩍펄쩍 뛰다가 자식놈이 애먹이고 사업 망하고 그러면 그거 한번에 다 날아가 버리고 없어요. 하나님 원망만 하고 있지...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있기도 전, 창세 전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약속에 개입할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있기 전에 그 약속이 먼저 있었는데 그 약속에 우리가 어떻게 개입합니까? 그 약속을 우리가 바꿀 수 있습니까? 십사만 사천에서 한 명도 더하고 뺄 수 없어요.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그 약속은 변개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그 약속을 믿는 것이 우리의 자유이며 평안인 거에요 히브리서에서 그러지요 한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이런 복음을 이야기들으면 힘 빠지는 거예요. 재미가 없어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복음을 진짜 기쁜 소식으로 듣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데 이게 성령의 일하심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그 약속을 알게 될 때, 그 약속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게 자유요 평안이란 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의 그 자유입니다.
그럼 왜 세상 교회는 자꾸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 하고 구원을 확보하는 방법론을 가르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없기 때문이죠. 믿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자꾸 두려운 거예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와 관계를 가지지 못하니까 자꾸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거예요. 그들에게 주가 계시지 않으니까 그분의 믿음 안에 있지 않으면 자꾸 불안하고 두려우니까 내 구원을 내가 챙기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1서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있지 못하니까 두려운 거예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 내버려 두셨다..그게 벌거벗음이에요 그리스도로 옷입지 못한 자들의 두려움 그런데 참 안타깝지만 이렇게 내버려 두신 사람들로 가득한 게 세상이에요. 거의 대부분의 세상 교회란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정한 죄인은 천국에 가면 안 됩니다. 우리의 거룩은 예수님의 피, 그 피뿌림이잖아요 그 피를 믿는 게 우리의 경건이며 옳은 행실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아들을 합심해서 살해한 죄인들이 천국에 가겠다고 교회 나오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선교도 하는데, 이런 것을 탐심이라고 해요. 로마서에서는 이 탐심을 죄라고 합니다. 육신대로 사는 죄,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정욕입니다. 한번도 예수이름 앞에 무릎꿇은 적이 없는 목이 곧은 자들 그들은 천국 갈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떤 주의 종이 세상 교회에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을 때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서울에 있는 대형교회들은 등록 교인 수가 몇천 명, 몇만 명씩 되잖아요. 거기에서 몇 명 남을까요? 어떤 사람이 남을까요? 아마도 진짜 그 은혜를 아는 사람, 불쌍히 여기심이 나의 구원임을 아는 사람, 죄인 중의 괴수.. 복음서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 알죠? 예수님이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안 준다고 하시자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주워 먹는다고 하던 여인, 그리고 매일 돌아다니면서 바람피우고 하다가 노예 시장에 팔려간 고멜, 남편 호세아가 은 삼십을 가져와서 자기를 다시 데려갈 때 면목 없어 고개도 들지 못하고 따라가던 고멜같은 사람들만 교회에 남게 됩니다. 아니면 그들이 합심해서 복음 전한 종을 쫒아내겠지요 다신 우리 교회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말라고...그게 현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많은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그들이 왜 떠났을까요? 그 복음이 듣기 싫으니까.참다 참다 떠난 거에요 속으로 저 인간 다신 안본다면서 사랑이 없다..지만 옳다 살리는 복음이 아니라 죽이는 복음이 어쩌고 그러면서 한마디로 예수 십자가만 전하는 사람이 싫은 거에요....
그래서 세상 교회들이 인간의 구원욕 탐심에 펌프질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비전을 거져라 어떤 정치인이 그것을 캐치프레이즈로 들고 나와서 “ooo은 합니다.”라고 한 게 인기를 끌어서 대권 후보에까지 가고 했는데, 이게 우리 보편적 인간들이 가진 본성이에요. 복음성가에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그런 게 있는데, 철야할 때 이런 노래 부르면서 박수 치고 하죠? 요즘 교회마다 유행인 게 비전센터 만들기예요. 그렇게 걸어서 하늘까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늘까지 더 튼튼한 사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하는데 하나님은 그거 차버리십니다. 창세가 시날땅에 바벨이 이젠 전세계로 다 흩어진 거에요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원수냐? 예수님의 다 이루심 그 십자가를 모욕하기 때문이에요. 그 십자가 은혜만 아니고 그 은혜 더하기 인간들의 열심 헌신 이 보태져야 구원이 완성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고 하는 그것이 다 이루심의 모욕인 것입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는 파묻어버리고 십자가복음은 아예 들리지 않게 단속을 하는 교회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심은 사람이 누구라고 하죠? 사도바울이라고 해요. 그런데 2장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합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는 건 2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만 전했다는 거에요 이 말은 너희가 내가 말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그게 나 바울의 지혜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라는 뜻이에요. 나 바울에게서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의 비밀임을 알 텐데, 어떻게 교회에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생길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십자가를 못 알아들었다는 그런 말이에요.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까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알아들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모든 사도의 서신서들은 누구에게 보낸 겁니까? 당시에는 에베소교회, 골로새교회, 갈라디아교회 등 교회가 많았겠지만, 결국 이 성경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보낸 편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편지 서두부터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고, 십자가지신 당신이 ‘주’시라고 고백하면서 무릎을 꿇을 수 없으니까 예수에 대한 지식, 십자가에 대한 지식을 머리에 쌓을 수는 있는데, 주가 되신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는 만들 수 없는 거예요. 각자가 자기 지식수준에 맞게 예수와 십자가를 머릿속에 정리해서 (그걸 신학이라고 하잖아요.) 내 것으로 챙겨 가지고 있는데 (모든 인간은 신학교를 가지 않아도 날때부터 자기 신학을 다 가지고 있어요.), 뭐가 없는가 하면 믿음이 없습니다. 사랑을 몰라요 사랑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이 말은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받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했던 종교 행위가 육에서 나온 악한 행실임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 십자가마저 나를 증명하는데 써먹고 있었음을, 내 가치 챙기기에 써먹고 있었음을 아는 자기 성찰이 생깁니다. 내 밖에서 나를 보게 된다는 말이에요. 지금까지는 그게 안 보였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나를 보는 눈이 생겨요. 성령의 책망이 들린단 말이에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까지 아는 가치 있는 인간이야.. 다른 사람보다 지혜롭고 구원받을 자격 있는 인간이야.. 이런 착각과 오해 속에 종교인으로 살았단 말이에요. 이런 구원의 확신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자기기만 가운데 가지고 있었어요. 이게 종교라고 하는 아편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육신대로 살아왔던 나 자신의 믿음 없음이 들통나는 거예요.
(롬 8장)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건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옛사람이 날마다 예수의 죽음에 넘기운다는 겁니다. 옛사람의 무너짐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안에서 새 사람이 살아 올라옵니다. 이것을 새 피조물이라고 해요.
그래서 성령이 아니면 우리 속에 있는 귀신이 안 보입니다. 다른 영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2장 11절에 나오는 세상 영..
(고전 2장)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영이 없는 육체라고 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죽은 흙이란 말이에요. 그것을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그 그릇은 모태로부터 죄로 오염된 그릇입니다. 바울이 말하길 자신은 모태 죄인이라고 했어요.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게 바로 우리의 실존입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을 해요.
그런데 성도는 은혜가 왕 노릇을 합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죄로 보시지 않는 게 은혜의 왕 노릇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행위 자체를 아예 카운트하시지 않는단 말이에요. 뭐만 보십니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만 보시는 거예요. 피만 보신단 말이에요. 이게 은혜의 왕 노릇이에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죄까지도)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영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신 거예요. 세상과 결합해서 붙어있는 우리를 찢어내셨단 말이에요. 무엇으로? 예수의 피 뿌림으로... 그러니까 아파요. 많이 아파요. 그 찢어짐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우리는 세상밖에 모르고 세상만 사랑했는데, 그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내시는 그 작업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외부에서 주어지는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내 안에 있는 다른 영이 발각되고 나의 옛사람이 죽어 나간다는 게 11절 말씀이에요. 12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게 되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은혜로 주신 것이란 바로 아들을 내어주신 것이에요. 요한1서에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은 모두 동일한 의미예요. 은혜, 믿음, 사랑, 용서, 구원, 긍휼 등이 발음은 다르고 우리말 사전에도 그 뜻이 다 다르지만, 성경의 이 단어들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뭐다?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요일 4장)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이것 하나예요. 다른 사랑은 없어요. 그 사랑이 먼저 부어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우리 눈이 열립니다. 우리 눈이 두이레 강아지만큼 열려요. 강아지가 태어나서 두이레가 지나면 눈이 열린대요. 그래서 두이레 강아지라고 해요. 우리 눈과 귀가 차츰 열리고 주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주의 음성을 듣게 된다니까 오해하면 안 됩니다. 기도 중에 사랑하는 딸아~ 하신다는 게 아니라 성경이 예수로 읽히고 예수로 들린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살아났다는 거예요.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산 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 산 자들만 주님과의 사귐이 있게 되고 주님이 심으신 씨 심는 죽음이 작동해서 새 생명이 잉태되고, 그 생명 현상으로 자라남이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게 하시는 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또 그 일에 대한 증언이 우리 교회의 본분이에요. 교회로 모였을 때 다른거 할게 없습니다. 우리 주님과의 사귐, 그 피와 살이 나누어지는 일, 성령께서 그것에 대한 증언.. 그래서 구원은 교회가 주는 게 아니라 주님의 피와 살이 나누어진 사람들의 삶이 구원이에요. 오늘 본문 6절과 7절이 모두 그 이야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이 이천 년 전 고린도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오늘날도 고린도교인들처럼 예수와 십자가를 자기 증명이나 자기 사랑, 자기 숭배를 위해서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우리를 향해서 사도가 편지를 쓴 거예요.
지금도 대부분 세상 종교인들은 자기가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진짜 성령을 받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믿은 예수가 성경의 예수가 아니었다는 것부터 알게 됩니다. 나는 나를 위한 예수밖에는 몰랐구나.. 나는 육에 속해서 사람들과 비교하고 경쟁해서 내가 예수 잘 믿고 내가 구원받고 상급받는 것만 고집했는데, 주가 계신 것을 몰랐구나..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몰랐구나.. 나 같은 죄인을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결국은 나로 하여금 나로부터 주님께로 눈이 들리게 하셨구나.. 이게 구원의 시작입니다.
(고전 3장)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성령 받은 바울에게는 고린도교인들의 그런 육의 행실들이 보인 거예요.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의 씨 심는 죽음이 나누어진 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실 때까지 나는 너희들을 말씀으로 섬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너희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사람을 좇아 사람의 지식을 가진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소유된 것으로 자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의 공적이나 열심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그 은혜, 그 십자가의 공로만 남게 될 것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야,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일, 그 이름만 남기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고린도전서 3장이 끝나는 거예요. 1강에선 고린도 전서 3장의 큰 줄기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좀 더 자세한 것은 2강에서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생명 나무의 열매를 향한 손 뻗침까지 허락하셔서 마침내 그 헛되고 헛됨을 알게 하시고, 오직 주께서 우리를 찾으심으로 해서 우리가 그동안 쌓았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고 불태워져도 감사할 수 있는 그 믿음을 주신 것, 그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모일 때에도 주님께 속한 사랑과 그 은혜와 그 긍휼과 자비하심과 그 모든 것들을 자랑하고 나누고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녹취에 수고하시는 권 집사님께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