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복수(復讐)는 「용서」이고 가장 센 응징(膺懲)은 「사랑」이라고 한다.
용서와 사랑이 용해(溶解)되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는 무용지물이 되고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관계」 또한 와해(瓦解)되고 만다.
나는 여기서 「용서의 함정 (陷穽)」-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As we forgive the wrongs that others have done to us - 을 벗어난 몇편의 일화(逸話)를 이야기 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 얼마나 많이 저 함정 - 「나에게 잘못한 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은 체」- 내 죄를 용서받을랴 하면서 작은 복수, 작은 응징에 나를 가두어 놓았던가 ?
㉮ 오천석 지음「노란 손수건」
집 어귀의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걸려있으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갈 것이고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리겠다”며 귀향 길 버스에 몸을 실은 한 출옥자(出獄者).
고향에 다가갈수록 아내를 비롯한 가족의 ‘선택’ 결과에 마음 졸이던 승객들 모두의 눈앞에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반기듯 휘날리는 참나무가 다가선다. 그것은 모두의 환희(幻戱)였고 감동(感動)였고 부활(復活)였다.
㉯ 김래성의 「청춘극장 (靑春劇場)」
「복수라고요 ?」 운옥의 인생관으로서는 복수(復讐)라는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는 어렸을 때 만주에서 예배당엘 다녔습니다. 그때 어떤 미국인 선교사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갑이 을에게 복수를 하고 을이 갑에게 복수를 하고 또 갑이 을에게 복수를 하고 을이 또 갑에게 복수를 하는 동안 복수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스노우 볼 [snow ball]- 눈으로 만든 공처럼 이리 굴고 저리 굴고 하는 동안에 공은 자꾸만 커질 뿐이지 작아질 때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어느 편 한 사람이 공 굴리기를 정지해야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숙희는 공 굴리기를 처음부터 정지한 사람이겠지요.」
㉰ 황산벌 무장(武將)의 금도(襟度)
「제국(帝國)의 흥망(興亡)이 이 일전(一戰)에 달렸다 !」- 이런 구호(口號)는 차라리 사치(奢侈)에 가까우리라. 백제는 이미 도괴(倒壞)되어 단말마(斷末魔)의 몸부림을 이 「황산벌」에서 치고있을 뿐였다.
적장 김유신(金庾信)이 고육지계(苦肉之計)로 관창(官昌)이란 홍안 소년을 「미끼」로 쓰고 있음을 어찌 모르랴 ! 생포(生捕)하여 돌려보냄은 죽은 자식들을 돌아봄이겠고 재차 생포된 그를 참(斬)하여 수급(首級)을 안장에 실려 돌려보낸 것은 무장으로서의 사랑과 혜량(惠諒)인 것이다.
난장(亂場)에서 「개죽음」시킬 수도 있었겠고 생포하여 모욕(侮辱)의 제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역사의 제단 앞에 「충용(忠勇)의 화신(化身)」으로 꽃다운 이름(英名)을 만세(萬世)에 넘겨주려는 그 큰 흉금(胸襟)이야말로 충용을 갖춘 자의 사랑이요 베품이 아니겠는가?
다만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승자(勝者)는 오직 관창(官昌) 쪽에만 갈채를 보냈는데 이는 그 본말(本末)을 모름의 소치이리라.
㉱ 엔도 슈사꾸 (遠藤周作) 「예수의 생애(生涯)」
「안식일 다음 날 - 예수님이 처형되고 이틀 째 -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 ≪요한 20, 19≫
「그러나 성령(聖靈)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 8≫
순교자(殉敎者)들의 그 기적(奇蹟)은 성령의 역사(役事)로 보는 종교의 면을 떠나서 순수한 인간적인 면에 포커스를 맞춘 소설 「예수의 생애(生涯)」를 보면.
「시체(屍體)」 나자로를 살리신 그 위대한 스승이 참으로 무력하고 허무하게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리자 「겁쟁이요 멍청한」 제자들은 배신감(背信感)과 절망감(絶望感)과 후회속에서 모두 뿔뿔이 도주(逃走)-피신(避身)하였다.
언제 로마 병정이나 중의회에서 이단(異端)을 체포하러 올 것인가 - 십자가의 고통 중에 스승이 배신한 자기들에게 노여움이나 혹은 「조직의 리스트」를 털어놓지 않을까 전전긍긍(戰戰兢兢)하였던 제자들.
그러나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고 애절히 절규(絶叫)하시는 외로운 스승을 보았을 때 멍청한 제자들였지만 자기들의 비열한 배신에 끝까지 사랑으로 대응해 주시는 스승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인생 유전(流轉)에, 유태의 역사 속에서 저토록 순후(淳厚)하고 지대한 사랑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그 깊은 감동과 사모(思慕)는 오히려 죽음 뒤에 그들의 마음속에 용광로(鎔鑛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것이 아녔을까?
㉲ 삼국지(三國志)의 일화(逸話)
남만(南蠻)의 맹획(猛獲)을 승복(承服)시킴은 그 유명한 「칠종칠금(七縱七擒)」 - 일곱 번 방면(放免)하고 일곱 번 사로잡음 - 에 있는 바 이 책략(策略)을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진언한 전말(顚末)을 본다면
「어리석은 소견이오나, 승상(丞相)은 살피소서. 남만이 멀리 떨어져 있고 산천 도한 험악함을 믿고 복종치 않음이 오래로소이다. 비록 오늘날 격파(擊破)할지라도 내일이면 또 배반할 것이 뻔한 사실이외다. 승상의 대군이 가면, 반드시 평복(平服)될 것은 의심 없사오나, 반사(班師)하는 그 날로 즉시 북으로 조비(曺丕)를 쳐야 할 터인즉, 만병(蠻兵)들은 촉중(蜀中)이 내허(內虛)함을 알기만 하면, 반드시 배반하고 일어날 것이로소이다. 대저 용병(用兵)하는 법에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이 으뜸이며, 성(城)을 쳐서 항복 받는 것이 가장 졸(拙)한 일이며,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으뜸이며, 병사로 공격하는 것이 졸(拙)되나니, 원컨대 승상은 다만 그 마음을 항복 받아 심복(心腹)케 하소서.」
사족 : 역사의 아이로니컬은 어찌할 것인가? -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장본인이 바로 유상(幼常)이었으니 !
㉳ 쿠오바디스 소설에서
자기를 배반하고, 자기의 처자(妻子)를 빼앗고, 자객을 보내어 자기를 암살하려했던 사악한 희랍인 킬로를 글라우크스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베풀었다.
그러나 배은망덕한 킬로는 종내 그라우크스를 폭군 네로에게 밀고하여 십자가 화형(火刑)을 받게 한다.
불타는 기둥에 매달린 그라우크스와 그 밑을 지나치다가 오금이 저려서 움직이지 못하는 킬로 !
글라우크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를 용서하여주오 !
깊은 침묵이 감돌더니 십자가 위에서
나는 당신으로 용서합니다. 신음하듯 들려왔다.
여기서부터 킬로의 네로에 대한 대반격이 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