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순교성지 → 초남이 성지 → 전주숲정이 성지 → 전주옥터 → 초록바위
18.4Km 24Km 1.1Km 1.6Km
8. 초남이 성지
초남이성지는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가 나고 자란 곳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박해의 위협 속에서 복음을 몸소 실천한 삶의 현장이다.
신학문을 하는 이들과의 접촉으로 진리에 눈을 뜬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다.
숙식을 제공하면서까지 정성껏 교리를 가르쳤으며,
멀리 금구와 고창과 영광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호남 최고의 부자로서 평소에 가속들과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베풀었고
종들을 형제처럼 대하는 덕스러운 삶을 살았기에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가성직제도에서 사제로 활동하였지만
이 제도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남을 가장 빨리 알게 되어
동생 유관검과 함께 이를 알리고 멈추도록 촉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성사생활이 불가능함을 알게 되자,
외국으로부터 성직자를 영입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아
이 운동에 앞장섰고 이를 위해 거금을 제공하였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초남이에 초대하여 성사를 집행하도록 하였고,
장남 유중철 요한이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하는
지향을 발하였을 때 이를 지켜주기로 결심하였으며,
같은 뜻을 지닌 한양의 이순이 루갈다와 혼례를 추진하였다.
동정부부는 바로 이곳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서로를 위하면서
4년 동안 함께 동정을 지켰다.
특히 이순이가 옥중에서 친정 식구들에게 쓴 편지를 통하여,
초남이의 가정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정과 이웃 안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복음적인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은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며,
대역부도죄인으로 여겨진 유항검의 가족은 연좌형에 따라,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전주옥에서,
이순이 루갈다, 유중성 마태오, 신희와 이육희는 숲정이에서 처형되었다.
유항검의 어린 자녀들은 거제도, 흑산도, 신지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특히 유항검의 막내딸 유섬이는 9살의 나이에 거제도로 유배 가,
그곳에서 71세가 될 때까지 거룩한 삶을 살았던 것이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초남이의 궁궐 같은 집은 파가저택형을 받아
집을 부수고 땅을 파 웅덩이로 만드는 바람에 집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늦게까지 남은 일부 웅덩이 자리 위에 지금의 성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여 거행한 시복식에서
유항검과 장남 부부인 동정부부 유중철과 이순이,
차남인 유문석, 조카인 유중성이 복자로 선포되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유항검 생가터인 ‘파가저택’(破家瀦宅, 국사범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 가장 큰 형벌로
누구도 다시는 그 터에서 살지 못하도록 흔적을 없애는 것)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주교구는 유항검과 사돈 간인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의 생가터에서 약 400여m 떨어져 있는 교리당터도 확인했다.
또한 재남리 뒷산으로 추정해 온 가매장터가 초남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600여 미터 거리에 위치한 밭터임도 확인했다.
9. 전주 숲정이 성지
“이곳은 천주교인이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거룩한 땅이다!”
숲정이는 조선시대에 군사훈련 지휘소가 있던 곳으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던 처형장이었다.
당시엔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숲머리" 혹은 "숲정이"라 불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도의 첫 천주교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아내와 제수,
맏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신태보(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정태봉(바오로) 등이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경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재권(요셉),
조화서(베드로), 이명서(베드로) 등이 순교했다.
1867년에는 김사집(필립보) 등 여러 사람이 순교했다.
이곳은 유항검이 처형된 풍남문 밖의 전동성당,
유항검과 그 가족이 묻힌 치명자산과 함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이다.
이명서 베드로를 비롯한 6분의 성인聖人과
이순이 루갈다를 비롯한 12분의 복자福者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한 이곳 숲정이는
조선시대 당시 전주성城의 장대將臺가 있던 곳으로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군영지였다.
그랬던 이 땅을 지금 순교성지殉敎聖地로 거룩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명서 성인의 손자인 이준명 아나돌 덕분이다.
그는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라는 곳에 초라하게 묻혀계신
할아버지의 유해를 그렇게 모셔둘 수 없다는 생각에
근근자자하게 살면서도 돈을 모아 진안 어은동 모시골에 산을 마련하고
1920년 3월 22일 성인의 유해를 그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자기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여기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위대한 신앙의 증거자들의 피가 뿌려진 이 거룩한 땅을
아무런 표식 하나 없이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매입하여 이 땅이 얼마나 거룩한 땅인지,
이 거룩한 땅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리는
치명비碑를 세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이근화 가롤로의 평생 소원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학역도의 후손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던 재산도 몰수당하고
참으로 어렵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이준명에게
그 꿈은 쉽사리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1929년 평생 담배농사를 지으며 모은 돈으로
이 거룩한 땅 두어 마지기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숲정이 성지를 교회의 소유로 마련하여
거룩하게 보존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치명터를 어렵사리 매입하는 첫 번째 꿈을 이룬 이준명은
이제 두 번째 꿈인 치명비를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땅을 매입하는 데 평생 모은 돈을 다 쏟아 부은 그에게는
더 이상의 경제적 능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같은 문중이며 어은동 모시골에서 함께 살았던 이학수 바오로가
이러한 사정을 전해 듣고 1935년 6월, 200원을 들여
화강암에 ‘天主敎人殉敎之地’라는 문구를 새긴 십자가비碑를 세웠다.
그리하여 허허벌판으로 남아 있던 이 땅이
위대한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있는 거룩한 땅임을 만천하에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은 참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럽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그들의 용맹스러운 신앙을 이어받아 지키고 보존하려는
우리 후손들의 노력도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깊이 되새기게 한다.
(이영우 신부)
10. 전주 옥 터
조선 시대 전주는 전라도 중심지여서 신자들이 각지에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혀 심문,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동정 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교살되었고,
이순이 루갈다는 옥중 편지를 작성하였다.
정해박해(1827년)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기해박해(1839년) 때는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 바르바라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 때 생긴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며,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 아나스타시아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박해 시기에 옥은 고통스러운 곳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기도처였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곳이었다.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김대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는
기해박해(1839년)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하였는데,
이들은 정해박해(1827년) 때 잡혀와 만 12년 동안 옥중에서 긴긴 세월을 보냈다.
그들은 옥중에서도 밤마다 등불을 켜 놓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고 한다.
11. 초록바위. 서천교
초록바위는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1817-1866년)의 14세 된 아들 명희(明熙)와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의 아들이 수장된 곳이다.
이 두 가정은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다.
성 남종삼은 한국 교회사 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남인계의 농학자(農學者)이며 충주 부사를 지낸
부친 남상교(南尙敎)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22세 때인 1838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영해 현감(寧海縣監)을 지냈고 철종 때에 승지(承旨)가 되어 국왕을 보필했다.
고종 때에는 그의 학덕으로 말미암아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한 바 있다.
그는 러시아의 남침이 강화됨에 따라 야기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
당시 집권자인 흥선 대원군에게 프랑스 주교의 힘으로
프랑스, 영국 등과 조선이 동맹을 맺어 이를 제어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당시 국내에서 전교 활동을 하던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흥선 대원군의 회동을 주선키로 했으나
때마침 두 주교의 지방 사목 여행으로
공교롭게도 이들에게 연락이 되기까지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그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대원군은 오히려 천주교 박해로 급변하게 되어
1866년 1백 년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억되는 병인박해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서울 인근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연행된 남종삼 성인은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및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함께 문초를 당하고 그 해 3월 7일(음력 1월 21일)
홍봉주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어서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인 남규희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가 공주와 전주에서 각각 순교했고,
처 이소사와 차남 남명희 그리고 두 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이소사 역시 창녕에서 순교하고,
당시 14세의 어린 나이에 붙잡혀 갔던 명희는 전주 감옥에 수감한 뒤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1867년 가을 이곳 초록바위에서
전주천에 밀어 넣어 수장시킨 것이다.
바로 이 때 남종삼과 함께 러시아의 남침을 물리치는 방법은
프랑스, 영국과 조약을 맺는 길뿐임을 흥선 대원군에게 건의했던
홍봉주의 아들도 남명희와 함께 초록바위에서 순교하였다.
홍봉주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홍낙민(洪樂民, 1751-1801년) 루카의 손자이며
부친 홍재영(洪梓榮, 1780-1840년)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한 바 있다.
모친 정조이(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로
기해박해 때 남편과 함께 순교했다.
전주교구에서는 두 소년 순교자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자
2006년 5월 싸전다리 부근 전주천변 도로 옆에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서천교
이곳은 성 조윤호 요셉(趙~, 1848-1866년)이 1866년 12월 23일 치명한 곳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나
돈독한 신앙 생활을 어려서부터 익혔다.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이 루치아와 결혼한 그는 1866년 12월 5일 부친 조화서 베드로(趙~, 1815-1866년),
정원지 베드로(鄭~, 1846-1866년), 이명서 베드로(李~, 1821-1866년) 등과 함께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인 조화서는 일찍이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전교 활동을 도왔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로 부친 조 안드레아(성 조윤호의 조부)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주해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고
이 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최 신부의 전교와 성무 활동을 보필했고
그 후 전주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주했다.
마침내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체포된 이들 부자는
혹독한 고문과 배교의 강요 속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오직 진리만을 말하기로 다짐했다.
옥에서 아버지는 아들 윤호에게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격려했고,
이에 아들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라며
죽음의 두려움보다는 배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서로 독려했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 조화서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체하며
자신을 회유하려는 관장의 유혹에 여러 번 넘어갈 뻔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마침내 조화서는 모든 유혹과 형벌을 이겨내고 12월 13일,
전주 전동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리고 아들 조윤호 역시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던 당시의 관례에 의해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이 지난
12월 23일 인근의 서천교 밑에서 순교했다.
조선 시대에는 처형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원칙이 있었다.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는 하루 전에 쌀밥과 고기반찬을 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하고 참수 후 사흘 간은
누구도 그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다.
또 다른 당시의 관례는 같은 날 부자를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정해져 있어
아무리 대역죄인도 부자의 관계에 있다면 몇 일간에 여유를 두고 처형을 하였다.
성 조윤호 요셉도 그런 경우이다.
조윤호 성인이 받아야 할 처형방법은 참으로 참혹한 것이었다.
다름아닌 서천교 밑에서 빌어먹던 거지들에게
조윤호 성인의 목을 감은 끈을 서로 조르게 한 것이다.
결국 거지들에게 죽임을 당한 조윤호 성인은 후에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시복 시성되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거지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이들의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굳건한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 부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전주교구는 2006년 5월 서천교 인근 순교터에
조윤호 성인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첫댓글 동정부부 ! 남종삼 선생님,...이리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셨는데....아이코 ~난 집이 성당과 너무 멀어 성당엘 안나가니
이 죄인은 천국엘 못가겠구나 !!!
유투브 동영상으로 봤던 동정부부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세잎 클로버님 덕분에
은혜로운 시간 함께합니다..
감사합니다.
초남이
멋진 사진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초대하는 듯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