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용인의 심곡서원.... 조선 사림의 영수였던 조광조를 기리는 이곳에 내려와 떠억~보아하니....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겠더라구요. 에~ 솔직히 간과하고 싶었어요..... 아시다시피 복잡하잖아요. ...그래요. 그거.....서로 헐뜯고 너죽고 나만 살자하는 거.... 당파싸움... 오늘의 중요포인트는 사화예요. 이 사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쟁에 대해 알아야하지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도망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직면하자. 당파! 타도하자 당파! 도레미파 격파! 좌파, 우파, 양파!,...앗싸^^...우리의 선조들은 우리들에게 당파싸움이 무엇인지, 당쟁의 진수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듯 합니다. 별로 관심도 없고 시간도 없고 대충 넘어가려고 했는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당쟁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반면교사라는 단어가 떠오르더라구요. 제대로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됬습니다. 하루빨리 민주적이고 모범적인 선진사회를 이루기위해서는 우리가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끼고 손발로서 행동해야합니다. 왜? 칭얼대지않고 잘 노는 애한테 젖을 물리는 법은 절~대 없거든요. 즉 불만을 얘기하지 않으면 만족스러워하는 줄 알고 신경안쓴다는 거죠. 지금쯤이면 등이 가렵겠네 그러면서 먼저 등긁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당사자는 나름 바쁘고 무언가에 신경쓰고 있어서 돌아 볼 겨를이 없지요. 때문에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의사를 표현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야 합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준다. 사람의 심리가 너무나 잘 스며있는 말이지요. 각설하고.
당쟁의 원조. 그 원조의 원조, 그 원조의 진짜 원조 ...장충동 족발집 이름들 같군요.^^ 훈구와 사림.... 바로 당쟁의 원조, 바로 그 원조의 진짜 원조 쯤이 아닐까 싶네요. 오늘은 훈구와 사림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보자구요. 그래야 나중에 서인 동인 거기에 북인 남인 또 거기에 노론 소론 등을 알 수 있게 되지요. 자 그럼 출발~~~
일단 사림이 누구인지 알아볼게요. 이들은 고려말 지배계층인 왕실, 권문세족, 사찰의 부정에 맞선 중소지주들이 성리학의 통치이념을 받아들이고 세력을 형성한 사대부입니다. 처음에는 이성계와 함께 역성혁명에 동참했는데요. 혁명에 성공한 사대부는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로 나뉘고 나중에 온건개혁파가 밀리면서 지방으로 쫒겨납니다.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요? 역성혁명!! 역성혁명파 이방원과 온건개혁파 정몽주의 드라마를 설마 잊으셨다면 아니아니 아니되오!!!^^; 조용히 지방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업에 정진하다가 사림으로 등장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훈구는 중앙에 남아있는 세력들이 되겠지요.
훈구는 태,정,태,세, 문,단,세,예,성,,,,의 성종초기까지...아따 오래도 해묵었네. 대충 80년 정도 되네요... 중앙권력을 장악하고 고위관직뿐 아니라 방대한 토지와 노비도 슬금슬금 야금야금 했습니다. 중앙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방의 자치기구였던 유향소까지 장악해서 재산을 축적했는데 쉽게 말해 돈되는 것이면 다 찝적거리며 재산을 늘려갔지요. 어? 요즘 우리 재벌들도 그러는데?!?!....재벌들이 제과점도 하고 편의점도 하고 도시락도 팔고 막걸리도 팔고 학원도 하고 .....
이러한 훈구파를 견제하기위하여 성종은 영남의 사림들을 등용시키는군요. 차츰 중앙정계로 진출하지만 과연 훈구가 사림을 내버려둘까요?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뺄까봐 여러 대 후려깝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기묘사화, 을사사화까지 네 번 호되게 당하지요.사화란 말 그대로 선비가 화를 당하는 것인데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했던 교수가 얼떨결에 산전수전 다 겪은 4선5선 의원에게 당하는 것같은 형국이죠. 이에 이악물고 나중에는 반전을 이루어내긴 하지만요. 사화에 대한 내용은 책을 보면 자세히 나와있으니 살펴보세요. 무모하게 갑자기 기묘하게도 을씨년스러운 사화라고 저는 외우고 있습니다. 방송대 학우들 중 암기가 잘 안되는 분들이 있음을 감안하여 알려드리는 건데 어떤 분 지금 유치하다고 콧방귀끼는 분 계시네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연산군 대에 일어나지요.중앙관직에 있던 사림마저 사라지자 국정운영은 문란해지고 사치가 심해져 반대세력이 힘을 모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줍니다. 때문에 때는 이 때다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이 때 중종은 사림의 영수격인 조광조를 등용시킵니다. 매우 신임했던 것 같더군요. 하지만 임금으로부터 배신의 쓴맛을 보게 되는 정암 조광조. 아효~ 이 조광조를 소개하기 위해 이렇게 말이 많았네요. 조광조도 이렇게 말이 많아서 중종한테 뒤통수맞은 것 같기도 하던뒈.... 말단속을 안해서 중종의 미움을 샀다는 해석도 있네요.
심곡서원 외삼문입니다. 문이 셋으로 나뉘고 가운데가 솟아있는 이런 형태의 문을 솟을 대문이라고 합니다. 향교나 서원은 주로 이렇게 만든다는군요. 서원은 어떤 곳이냐하면 지방 지식인들의 교육기구로 있었던 서재를 발전시킨 곳입니다. 순수한 교육기관이여서 훈구세력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지요. 서원은 향약과 같은 사회조직체는 아니었지만 사림이 지방사회에서 기반을 마련하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사림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세력을 모으고 확대할 수 있는 이런 서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서원때문에 폐단이 발생하나니 과유불급이로소이다~~~후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지만 그래도 무사히 살아남아 47 서원중의 하나를 이룹니다.
안내도를 보시면 가장 잘 알 수 있죠. 저희가 취재를 했던 곳은 일조당과 장서각 그리고 사당이구요. 근처에 자리한 조광조선생의 묘지에 직접 가보았습니다.
이 곳 일조당은 유림들이 공부했던 강당입니다. 제사를 준비하는 곳으로도 쓰이기도 했다는군요. 일조당은 조광조의 절명시에서 따온 것이구요. 일소당, 일조당 그 이름이 다르게 적힌 곳이 많습니다. 이 한자는 밝을 소도 되고 비출 조도 되는데 시의 흐름상 비출 조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되네요. 시의 전문과 내용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내삼문에서 바라본 사당의 모습입니다. 보통 서원이나 향교는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공부하는 강당 두 군데로 나뉘고 대체로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하여 앞에 강당 뒤에 사당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하네요.
심곡서원은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효종 원년(1650)에 설립하였고 동시에「심곡(深谷)」이라는 사액 즉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았습니다. 저는 건방지게도 이 현판글씨가 별로 마음에 안들더군요. 왠지 성의없이 대충 쓴 것처럼 느껴져요. 감히 왕이 쓴 글씨를 마음에 안들어하는 이 여인을 누가 좀 말려줘요.
조광조. 그는 어떤 인물일까요. 브리태니커에서 퍼왔습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도학정치라고 했다. 그는 지치(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며,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뜻을 세움이 크고 높아 시류(時流)에 구애되지 않아야 함을 논하고, '조종(祖宗)의 옛 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지만 만일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역시 변통(變通)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변법주의(變法主義)를 주장했다. 한편 지난날의 사림의 참화를 거울 삼아, 임금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을 이룸으로써 마음을 밝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해야 이상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반포·간행하여 8도에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의 복리증진을 꾀했다. 1518년 부제학이 된 후 미신타파를 내세워 당시 폐해가 많아 지식층 사이에 비난이 많았던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해 이를 혁파했다. 그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하고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했다. 이때에 당시의 과거가 사장(詞章)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내외의 요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재(才)·행(行)이 있는 선비들을 천거하여 왕이 선택하게 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이듬해에 이를 실시했다. 현량과의 실시로 김식(金湜)·기준(奇遵)·한충(韓忠)·김구(金絿)·김정(金淨) 등 소장학자들이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색인 : 사림파). 이후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인 소장학자들은 조정의 내외요직에 포진하여 당시를 이상정치 실현의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제도의 실시와 전래 제도의 개혁, 교화의 보급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한편, 1519년 반정공신 중 지나치게 공을 인정받은 사람의 훈작을 삭탈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신진사류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요청은 이미 기성 귀족이 되어 있는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왕도 급격한 개혁주장을 꺼리고 있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요청이 강력했기 때문에 마침내 전(全) 공신의 3/4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을 삭제하게 되었으며, 이는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훈구파 중에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예조판서 남곤(南袞)과 도총관 심정(沈貞)은 홍경주(洪景舟)와 모의하여,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것을 왕에게 바쳐서 의심을 조장시켰다. 또한 홍경주를 시켜 조광조 등이 붕당을 짓고, 사리(私利)를 취하며,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이 든 사람을 능멸하고, 낮은 이가 귀한 이를 업신여겨 국세를 기울게 하여, 조정을 날로 그르친다고 탄핵하게 했다.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1519년 조광조·김식·김구·김정 등을 투옥하고 이어 사사(賜死)의 명을 내렸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어 능주(綾州)에 유배되었다. 그후 훈구파의 김전(金詮)·남곤·이유청(李惟淸)이 3정승에 임명되자 현량과가 폐지되었고, 조광조는 그해 12월에 사사되었다(→ 기묘사화 ).
장서각이군요. 책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이 안되어 후손들이 관리를 하는 듯 하였는데 굳게 닫혀있었고 저희 때문에 공개했는데 아무래도 관리가 쉽지않은 듯 하였습니다.
정암집 원본이라며 보여주시네요. 목판본으로 1892년 간행된 것입니다.
이 날 설명을 도와주신 김 돈교수님이세요. 조광조의 시를 읊으시며 그 뜻을 풀어주셨는데 조광조의 비감어린 심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셨지요.
심곡서원에서 나와 10분정도 떨어진 산 입구에 조광조의 무덤이 있습니다.
조광조의 시를 해석한 비석이 조광조의 무덤아래에 있습니다.
그가 사약을 받았을 때 이 시를 읊고 사약을 마셨다고 합니다.
정말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충성을 다했던 이에게 사약을 받았을 때의 그 느낌은 어떠할까요.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걱정하기를 집안걱정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세상에 임하나니 거짓없는 이내 충정 환하게 비추는다.
37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조광조선생의 묘를 뒤로하고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하나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사회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던 그의 공의....무엇때문에 정을 맞았나....자신의 개혁을 뒷바침해줄 중종에게 보다 신중하고 겸손하게 나갔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강하면 부러진다.... 적절한 시기에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며 사물을 다루어야 함을 생각해봅니다. 융통성.... 젊은 혈기에 이렇게 자신을 운영하기란 쉽지 않지요.
날이 많이 풀렸습니다. 행복 한 점 가슴에 쟁여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