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품, 지리산을 걷다 - 3

[시안]

간밤에 바닥에서 담요 하나로 깔고 덮고 자는데 추웠다.
하도 추워 자다 일어나 긴 옷 껴입었다. 천왕일출 보러 가는지 새벽 1시 30분 되니 벌써 부스럭 거리면서 일어나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계속 꾸물거리다가 5시 30쯤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희연 전날 일정이 힘들었을 거 같아 밥 해놓고 깨우려 담요 덮어 주고 나갔는데 부시시 바로 따라 일어나 나온다. 맨땅에 매트 깔고 침낭 하나 달랑 덮고 비박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간밤에 추웠던지 침낭위에 머리 꼭대기까지 비닐 덮어 시체처럼 꼼짝 않고 자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세석평전은 지리산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이다.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등산로 주위 구릉에 잎사귀를 문지르면 오이냄새가 난다는 산오이풀이 새벽 이슬을 머금고 지천으로 피어 있다. 세석평전의 산오이풀은 세석의 표상인 철쭉만큼이나 실로 장관이다. 짙은 자색의 산오이풀 군락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무이한 곳이고 산오이풀 군락은 천왕봉까지 주욱 이어진다. 설악 대청 부근엔 산오이풀과 좀 닮은 호범꼬리가 많은데 여기 지리산엔 호범꼬리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씩씩하게 생긴 호범꼬리 보다는 부들부들한 산오이풀이 더욱 정겹다.

밥해먹고 느긋하게 출발한 시간이 7시.
오르락내리락 자잘한 암릉을 거쳐 촛대봉을 지나 연하봉으로 향한다. 어제 종일 걸었던 길은 그래도 대부분 숲길이라 햇볕을 피하기도 했는데 오늘 걷는 길은 고스란히 땡볕에 노출되는지라 덥기보다는 아예 잘 달군 솥처럼 뜨겁다. 고글을 꺼내 써 본다. 파란 하늘은 더욱 더 파랗고 꼬리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점점이 수놓는 길을 걸어간다.

고사목 지대에 다다르자 짙은 녹음 사이로 유난히 하얗게 피어있는 순백의 키 작은 구절초가 희다 못해 푸른빛을 입고 단아한 자세로 곳곳에 피어 있다. 이들 키 작은 구절초는 소백산 정상에도 많이 피어있다. 이들은 키가 낮아 그런가..하늘 향해 엎드린 자세가 겸허해보이기까지 한다. 유채색을 입고 한들거리고 피어 있는 다른 어느 다른 야생화들과는 다른 고혹적인 매력이 있다. 정갈하게 나눠진 꽃잎의 흰 빛 때문일까?수절하는 조선시대 과부가 문득 떠오른다...암튼, 지리산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우리꽃들은 그 빛깔이 천박하지 않고 소박하니 참 예쁘다.

제석봉을 지키고 있는 고사목지대를 지난다.
이들 고사목들은 사실 원래 수명이 다 되어 늙어 죽은 고사목이 아니고 비명횡사한 나무들의 잔해라고 한다. 6.25후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잣나무, 구상나무들이 울창하였던 제석봉은 자유당 말기 당시 농림부 장관의 삼촌 되는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서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내면서부터 수난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도벌사건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나자 증거를 없애려고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횡사시켜 버렸다고 한다. 개인의 이득을 위해 산꼭대기까지 찾아든 인간의 오만한 자국에 씁쓸해진다. 그 여파로 인해 요즘도 갈수기엔 장터목 샘에까지 물이 귀하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 제석봉에 어린 구상나무들을 심는 운동이 벌어졌었고 그 나무들이 일부 자라고 있으니 불행 중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장터목산장 도착
새파란 하늘에 대비되는 빨간 우체통이 인상 깊다. 샘터에서 물 채우고 나무벤치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쉬었다. 무거운 배낭을 산장에 두고 천왕봉을 오를 것인지 아예 메고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내려갈 것인지 따져보다 그냥 메고 가기로 했다. 후자의 선택이 시간은 조금 더 소요될 것이다. 레끼스틱 한 쌍이 나타나는 바람에 평온했던 마음이 잠시 흔들리기도 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장터목산장 부근도 예전엔 왕파리 떼들도 극성을 부리곤 했는데 요즘은 파리 한 마리도 없고 참으로 깨끗해졌다. 야영은 물론이거니와 쓰레기통을 아예 없애버리고 세재와 치약도 못 쓰게 한 강압?정책 때문에 이런 좋은 결과가 나타난 거 아닌가 싶다.

하늘에 맞닿은 길로 가는 길이라 그런가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아주 예전처럼 울퉁불퉁 몹시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힘든 구간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래도 한 발 한 발 천천히 오른다. 때론 천천히 걷는 것이 빨리 멀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에 올랐다. 고추잠자리가 어찌나 많은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다. 웬 잠자리 떼들이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


오르고 올라
바로 최상봉에 이르러

잔세를 돌아보니
한 조각 만하구나

연하 속에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를 얻었으니

풍류는 진나라 양공에게
부끄러울 것 없네. - 김돈중의 한시


세석에서 남은 밥 남은 반찬에 두들겨 먹고 천왕봉 정상에서 양말 벗고 땡볕아래 한참을 노닥거리고 쉬었다. 중산리에서 헉헉 대며 사람들 올라온다.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게 난이도 높은 급경사다. 중산리코스는 여러 번 걸어본지라 이미 각오를 한 바 있지만 내려가려고 생각하니 그동안 아무리 널널하게 걸었다 할지라도 지친 다리가 제대로 무릎이나 굽혀질지 걱정도 된다. 대원사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였다.

"안녕하세요?"
지친 사람들에게 활기차게 인사 하는 중 1짜리 소년과 소년의 젊은 아버지를 만났다. 눈빛이 똘똘하고 야무져 보이는 아이다. “구례부터 걸어온 중 내가 본 아이 중에 네가 가장 멋진 아이다. 멋지다~! 기운 내~!” 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나중에 뭐가 되도 될 아이다. 서당 선생이 올망졸망한 아이들 댓 명 데리고 백무동에서 올라왔다는 팀도 만났다. 친절하게 뿌리는 물파스도 빌려줘서 우리는 각자 시원찮은 무릎에 뿌렸다. 데려온 아이 중에 한 열 살이나 되었을까 강원도 감자 같이 생긴 귀여운 꼬마가 있어 다시 한 번 봤음 했었는데 우리가 꼼지락 거리면서 내려오는 바람에 다시 보진 못했다. 남의 아이지만 귀엽다.

중산리 하산 길은 아마도 지리산에서 가장 경사가 급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법계사로 해서 로터리산장까지 걷고 망바위와 칼바위를 거쳐 주욱 내려가면 된다. 어느 누가 지리산을 肉山이라 칭했던가? 내가 보기엔 흙보다 돌이 훨씬 더 많은 산 같은데...그래도 비가 오지 않아 미끄럽지나 않았지 비에 젖은 너덜 길은 정말 힘들다. 이 험한 산중에서 혹시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나머지 사람은 자기 배낭도 무거운데 다친 사람 배낭 짊어져야지 또 한 사람은 다친 사람 부축해야지...그걸 걸 각자 잘 알기 때문에 내리막 길 다치지 않게 등산화 끈 꽉 잡아매라고 조심 당부 잔소리를 해가면서 걸었다.

걷고 걸어 속계와 법계를 이어주는 법계사를 지나고 망바위를 지나고 쾌활한 소년 지쳐 보이길래 남은 쪼코바 건네주고 기운 내라고 격려 해주고 칼바위가 나타나야 얼추 끝나는 산행에 아무리 가도 이 칼바위가 도무지 나타날 생각을 안 한다. 칼바위 이사갔나봐...를 수 없이 외친 끝에 드디어 칼바위도 나타나고.. 지쳐 있을 때 목표지점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기 마련이다. 머리속이 하얗게 될 무렵 그리운 것들은 그제서야 나타난다. 늘 그렇다. 법계사에서 칼바위까지는 거짓말 조금 보태 지구상에서 제일 먼 거리 같았다. 칼바위 앞에 진주가족 일행들 15분만 걸으면 된다고 하길래 열심히 걸었는데 도무지 매표소는 보이지 않고 역시나 곱하기 2를 해서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널널한 산행이었지만 마지막 날에 우린 모두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계곡에서 좀 씻고 갈 기운도 없이 중산리 매표소 도착
동동주와 파전 등을 주문해 종주기념으로 두 잔씩 마셨다. 비빔밥 주문해서 밥까지 두들겨 먹고 버스정류장까지 또 한참을 걸어 내려와 '장터목산장'이라고 나무 팻말 소박한 민박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민박집의 주인은 52년생으로 예전의 클라이머였었는데 허리를 다쳐 지리산 기슭으로 내려왔다고 그 집 딸이 전한다. 드디어 2004년 땡 여름의 지리종주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리산 그동안 여러 번 찾았었는데 이번처럼 느긋하게 천천히 걸었던 적은 없었고, 이번처럼 땀 많이 흘렸던 적도 없었고, 천천히 걸었던 만큼 더 많이 볼 수 있었고,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지리산 그 넓은 품은 예년보다 더 푸근하고, 더 힘센 팔로, 내 머리카락 내 옷자락 하나 새나가지 않도록 날 그렇게 꼬옥 안아주었다.



두류산 둘레에 저녁 구름 잠겼는데
일만 골짝 일천 바위는 회계산을 닮았도다
지팡이 짚고 정학동을 찾으려 하니
건너편 숲속에선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리네
누대는 보일 듯 말 듯 삼산밖에 아득하고
아까 깐 네 글자만 희미하구나
묻노니 정학동이 어디메뇨
꽃잎만 어지럽게 흘러 더욱 낙망하여라 - 이인로의 한시

[산토]

한권의 책이 완성되었네요.. 더운날 수고 하셨어요.. 그런데 추웠다고요??

[파도]

추운 지리산에서 나도 자보고 싶네요...후기 쓰시느라 고생하셨어요..

[happy]

시안님 추카추카합니다. 남들더워죽겠다는 이더위에 바람의딸로 지리산종주 무사히마치고 많이 부럽고 궁금했는데 학실히 설명하고 또 느끼게 해주어서 감동!!! 또 감동먹었어요...화이팅!!!

[야한돼지]

시안님 축하해요...저두19일부터 1박할예정인데...

[(찬비)]

대단하세요... 여름에 춥다는건 어떤걸까요??? 이 여름 하고싶은 일 하셨으니 참 좋겠다 .부러워요. 완성된 책 사인회는 어느서점에서 하실건지요?? 인세.. 판권..뭐 등등 해결해야할 일 이 많겠어요..

[엔젤]

언니 축하드려요. 산행기 읽다보니 내가 산을 오르고 있는 느낌입니다. 나도 지리산 갈 수 있을려나 ?

[솔토]

아름다운 지리산..다시 가고싶은 지리산...지리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대산]

더운 날씨에 종주 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생생한 지리산 종주후기 잘읽고 갑니다. 항상 즐거운 산행 하시길!!

[시안]

야꿀님 19일 어디서 일박하시나요? 우리 퍼런산네 세명인가 19일에 종주길 나선다는 거 같던데... 우리 산토식구들 가을이든지 겨울이든지 지리종주 한 번 같이 가요. 며칠씩 날 잡기가 어렵겠지만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겨울에는 안나푸르나 트래킹도 같이 가요~~~

[翠松]

종주하시느라 애쓰셨고,일박에 무박2틀로 지리산 종주했던 기억으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산행후기 잘읽었구요,9월2일부터2박 3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 예정입니다.

[happy]

뭣이라..! 안나푸르나트래킹! 지리산종주!! 난 지금부터 밥이안넘어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