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수군은 1592년 5월초부터 진행된 세 차례의 출전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전선을 더 건조하고 무기를 준비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이 사실은 같은 해 8월 1일 전라좌우도 수군이 좌수영에 모였을 때 전선 척수가 7월초 한산대첩 때의 52척보다 40% 이상 늘어난 74척으로 증가한 것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또한 제 4차 출전에 앞서 8월 1일부터 전라좌우도 수군이 미리 합류한 것도 이전에 없었던 일이다. 앞 시기의 제 2차 출전(첫 연합함대 형성시기로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는 세 번째 해전부터 합류했고, 제 3차 출전(한산도 대첩 및 안골포해전) 때에는 출발 2일 전에 합류했었다. 이처럼 20여 일 전에 합류한 것은 연합함대의 훈련을 위해서였는데, 이순신의 [계본]에는 이에 대해 "진을 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다"고 간략히 적고 있다.
이후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는 공문을 보내 "일본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때문에 전라도 연합함대는 출항을 서둘러 8월 24일에 좌수영을 출발, 제 4차 출전을 시작하였다. 첫째 날은 남해 땅 관음포에 닿았다가, 자정 무렵 다시 행선하여 사천의 모자랑포에 정박하였다. 이러 25일에는 약속한 대로 사량바다에서 원균과 합세하였고, 당포 앞바다로 이동하여 정박했다.
다음날인 8월 26일에는 비바람 때문에 항해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무렵 거제도 근처로 이동하여 밤을 보냈다. 이어 27일에는 웅천 따 원포로 이동하였고, 28일에는 새벽부터 일본 군선을 수색하면서 김해와 양산 쪽으로 전진하였다. 이 날은 가덕도 부군에 본대를 두고 방답첨사 이순신 등에게 탐색하도록 했는데 일본 군선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근처 천성보에서 밤을 보냈다. 연합함대는 출전 이후 5일 동안 일본함대를 찾지 못해 채 수색작전을 펼치면서 부산쪽으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8월 29일에는 새벽에 출발하여 아침 무렵 양강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동래 땅 장림포에서 출전 6일 만에 처음으로 일본의 대선 4척과 소선 2척을 만나 이를 모두 분멸하였다. 그렇지만 그 곳의 형세가 매우 좁아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저물 무렵 가덕도 북쪽에 와서 정박하였다.
연합함대는 9월 1일 새벽에 출발하여 아침 8시경 몰운대를 지났는데, 이 때 강한 동풍과 큰 풍랑이 일어 간신히 함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함대는 동쪽으로 전진을 계속하여 화준구미에 이르러 대선 5척, 다대포에서 대선 8척, 서평포에서 대선 9척, 절영도 앞바다에서 대선 2척을 각각 만나 이들 모두를 분멸하였다.
이후, 다시 절영도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연합함대는 작은 배를 보내 부산포를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부산포에 일본 군선 470여 척이 정박 중인 것을 발견하고 곧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날 새벽붜 계속된 항해와 몇 차례의 전투를 수행한 뒤였기 때문에, 부산포 해전은 저물 무렵에야 시작되었다.
연합함대는 초반에 선봉으로 나온 대선 4척을 맞아 모두 격침시키고, 장사진으로 돌진하면서 일본 진영을 공격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모두 산 위에 오랄가 6개 처로 나누어서 연합함대를 향해 철환과 화살을 쏘면서 반격하였다. 그러나 연합함대는 천.지자 총통과 불화살 등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다수의 군선을 격파하고 많은 ㅅ상자를 발생시키는 등 일본 수군 본대에 큰 손실을 주었다.
이 날의 부산포해전은 이순신이 직접 평가한 바와 같이 작은 함대를 이끌고 4-5배가 넘는 대규모 세력에 맞선 해전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수군의 근거지를 공격한 의미 있는 일전이었다. 전투 결과는 연합함대가 일본 군선 100여 척을 격파하는 등대승을 거두었지만, 이순신 핵심 참모인 용장 정운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또한 부산해역은 남해의 바깥 바다와 바로 연결되는 곳이기 때문에 파도가 심해 전선을 운용하기 힘든 곳이었다. 연합함대는 이 곳에서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거두었지만 정운 외에 전사 6명, 부상 25명이라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항해와 전투 과정에서 전선이 파손되어 수리를 요할 뿐 아니라 군량을 다 소모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작전을 계속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연합함대는 9월 2일에 해산하여 각자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산포해전은 이전의 해전들과는 달리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했다는 점과, 첨전 규모와 그 전과가 가장 컸다는 점에서 해전사적인 의미가 적지 않다. 또한 직전 시기부터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회피하고 도주를 일삼았지만, 부산포해전 이후에는 해안에 축성한 뒤 육상에서만 좃너 수군을 상대하려는 해전 회피 진법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수륙병진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지도 2-4>는 부산포 해전의 경과를 정리한 것이다.--->(그림 생략)
이로써 1592년 한 해 동안, 4차 출전과 10회의 해전은 마무리되었다. 조선 수군이 임진년(1592) 해전에서 거둔 전승은 전체 전쟁 국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고, 육전에서의 고전을 해상에서 설욕한 의미도 있다. 또한 조선 수군이 재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이 분쇄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해상 보급로마저 위협받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본 수군은 해전을 포기한 채 해안 고지대에 축성하고 주둔하면서 육군의 지원을 받아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바다를 건너와 전쟁을 지휘할 기회를 빼앗음으로써, 일본군의 전쟁 지도력에 결정적인 타켝을 입혔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임잔왜란 첫 해에 있었던 사실인 '10전 10승'의 해전 결과는 다음<표 2-1>과 같이 일복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표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