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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의 팀부FC에서 활약하던 2015년
이토 단(41, 일본)이라는 인물을 ‘축구선수’ 한 단어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게 많다. 16년 동안 25차례의 이적을 통해 19개국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선수라는 표현보다 아시아를 누비는 ‘축구 탐험가’라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린다.
이토의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았다. 아시아 안에 뛸만한 리그가 19개나 있다는 것에 가장 먼저 놀랐으며, 41세라는 나이를 알았을 때 두 번 놀랐다. 그가 선수생활을 한 국가명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아시아가 참 넓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축구선수는 프로가 되어야 하며, 프로에서는 몸값이 가장 중요한 요소다’라는 생각도 이토의 이야기 앞에서는 잠시 설득력을 잃었다.
궁금했다. 이토라는 선수가 왜 아시아 각국을 돌아다니며 축구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16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어떻게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는지. 현재 스리랑카에 머물고 있는 이토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한국에 소개된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16년간 이어진 그의 축구 여행기를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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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는 왜 아시아를 탐험했나
이토는 1998년 베갈타센다이의 전신인 브루멜센다이에 입단해 3부 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모든 선수가 그렇듯, 그 역시도 1부 리그 선수와 일본 국가대표라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1999년 팀이 2부 리그로 승격된 이후 방출을 당했다. 4~5부 격인 지역 리그에서 잠시 활동했으나 더이상 일본 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건 쉽지 않았다.
이때 싱가포르 우드랜드웰링턴이라는 팀에서 선수 오디션이 있다는 공지를 봤다. 그리고 곧장 미련 없이 짐을 싸서 일본을 떠났다. 이토는 “베갈타센다이에서 방출된 게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는 한국, 중국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 리그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일단 무작정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시아의 다양한 리그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나의 축구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다“고 했다.
이토는 2001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호주, 베트남,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몰디브, 마카오, 인도, 미얀마, 네팔, 캄보디아, 필리핀, 몽골, 라오스, 부탄에서 축구생활을 이어갔다. 올해에는 부탄의 팀부FC에서 스리랑카의 콜롬보FC로 이동했다. 스리랑카는 이토가 뛰게 된 19번째 나라다.
아직 기네스북에 등재되진 않았으나 이미 이 분야 신기록을 세웠다. 기존 기록은 2011년에 은퇴한 독일 골키퍼 루츠 파넨슈틸(Lutz Pfannenstiel)이 가지고 있었다. 6개 대륙, 총 15개 나라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국경 없는 골키퍼’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이토는 이미 판넨슈틸의 기록을 4개국이나 넘어섰다. 그는 판넨슈틸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골키퍼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빠르게 현역으로 복귀할 수 있다. 난 그게 가장 걱정된다”라며 웃었다. 이토가 처음부터 세계 신기록을 노렸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10개국을 목표로 잡았다. 이후 파넨슈틸의 기록을 알고 나서 목표를 16개국으로 늘렸다. 그 다음 목표는 센다이 시절 등번호와 똑같은 19개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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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다이에서 활약하던 20대 초반 모습
이적에 있어서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한 리그에서 두 시즌 이상을 연속해서 뛰지 않았다. 비시즌엔 잠시 동안 만이라도 다른 리그에서 '임시선수'로 뛰다 돌아왔다. 2004년 홍콩 키치에서 맹활약하며 시즌을 마친 이후에는 구단 측이 재계약을 제시했으나 잠시 미뤄뒀다. 자신이 만든 규칙을 지키기 위해 비시즌 동안 잠깐 태국 오솟스파에서 뛴 이후 다시 키치로 돌아와 계약을 했다. 브루나이 QAF FA에서도 구단주가 3시즌 동안 거액의 연봉과 집 그리고 포르쉐 자동차까지 주며 대우를 해줬으나, 두 차례 비시즌 때 각각 몰디브(클럽발렌시아)와 말레이시아(DPMM FC)로 잠시 떠났다. 재계약을 제시한 구단 측은 늘 황당하게 생각했으나, 이토의 설명을 듣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는 “내 꿈은 축구 에이전트와 해설가를 하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의 다양한 리그에서 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한 팀에서 두 시즌을 연속해서 뛰지 않는다는 나만의 목표를 만든 것도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스리랑카프리미어리그 디펜딩챔피언 콜롬보FC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이토는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 등 두 명의 외국인 친구와 함께 팀에서 즐겁게 뛰고 있다. 이곳은 세계적인 유산과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나라다. 한국인들이 방문하면 굉장히 좋아할 장소다”라고 근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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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스리랑카 콜롬보FC 입단
이토가 꿈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
이토는 공식적인 국가대표 경력이 없다. 냉정히 말해 실력이 부족했다. 일찌감치 일본을 떠나 해외에서 활약했기에 일본 내에서 주목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그렇다고 대표 선수라는 꿈을 포기한 적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뤄냈다. 다만 꿈을 이루는 방식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이토는 2003/2004시즌 베트남 사이공포트에서 홍콩 키치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홍콩으로 이적한 가장 큰 이유는 대표팀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홍콩은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대표팀이 아닌 리그 올스타를 국제 대회에 출전시켰다. 그는 홍콩에서 매해 1월 열리는 ‘칼스버그컵(구정컵)’을 노렸다.
이토는 “나는 일본 대표로 뛰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홍콩에서 리그 올스타로 뽑히면 대표 선수가 될 수 있다고 들었다. 어느 한 팀의 대표로서 다른 국가대표팀을 상대하는 경험을 꼭 하고 싶었다. 2004년 대회에는 일본 대표팀도 참가할 것이라고 소문이 돌아 기대가 컸다. 결국 일본 대표팀은 오지 않았으나, 홍콩 리그 올스타로 국제대회를 뛴 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토는 당시만하더라도 홍콩 리그에 온지 오랜 기간이 지나지 않아 리그 올스타로 선발될지는 미지수였다. 이때 홍콩에 거주하는 한 일본인 팬이 조언을 했다. “홍콩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이토는 이때부터 자신이 홍콩 리그 올스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 표현하기 시작했다. 골을 넣을 때마다 ‘홍콩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문구를 속옷에 적어 팬들 앞에 보여줬다. 그러자 홍콩 내에서는 ‘홍콩을 사랑하는 일본 선수’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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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문구를 속옷에 적은 이토
결국 2004년 칼스버그컵에 홍콩 리그 올스타로 선발됐다. 무려 등번호 10번을 받았다. 홍콩에서 뛴지 1년도 되지 않은 선수가 리그 올스타에 뽑힌 건 이토가 유일했다. 적극적인 그의 성격이 홍콩 축구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셈이다. 홍콩 리그 올스타는 당시 대회에서 노르웨이, 스웨덴, 온두라스 대표팀에 밀려 꼴찌를 기록했으나, 이토에게는 소중한 경험이 됐다.
이토는 매사에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가 소극적인 성향이었더라면 19개국에서 선수생활을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보고 싶은 나라에서 선수를 구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주저 없이 떠났다. 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의 환경과 문화를 가장 우선으로 고려했다. 나라가 마음에 든 이후 축구팀을 찾은 적도 있었다. 베트남의 경우 음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고백했다. 물론 나이 때문에 퇴짜도 맞았다. 하지만 도전은 계속됐다. 될 때까지 문을 두드렸고, 결국 이뤄냈다.
이토는 “일본에서는 자신을 과도하게 어필하는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해외에서 겸손하면 도태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강하게 어필해야 한다. 해외 생활을 하며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이토는 새로운 팀의 감독이 어떤 선수를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해 이에 맞게 뛰어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라오스에서 테스트 선수로 뛸 때 미드필더가 아닌 최전방 공격수로 뛰어주기를 원하자 곧바로 포지션을 바꿔 뛰겠다고 하여 계약이 성사됐다. 이토가 어떻게 정글과 같은 아시아 축구 무대에서 살아남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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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오솟스파에서 활약했던 2004년 모습
이토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1975년생. 한국 나이로 41세다. 감독을 해도 괜찮을 나이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다음 목표는 중앙아시아다. 이토는 “비교적 잘 알려진 우즈베키스탄보다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뛰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며 “당장 선수 경력을 끝낼 생각은 없다. 몸이 조금씩 아파오지만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지도자 자격증을 따며 선수생활을 할 것이다”고 했다.
이토가 오로지 나라 수를 늘리는 데에만 집중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국제 구호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토가 2004년 12월 홍콩 키치에서 말레이시아의 페낭 FA로 이적한 직후 수마트라섬에서는 대형 쓰나미가 몰려와 수십만 명이 사망했다. 이토는 그동안 자신이 뛴 나라에 지원을 호소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일본, 싱가포르, 호주, 베트남, 홍콩, 태국이었다. 2014년에는 동일본대지진 지원 사업 일환으로 열린 베갈타센다이 20주년 기념 경기에 대표 선수로 초청받아 친선경기 출전했다. 센다이 출신의 스타 선수는 아니었으나, 그가 걸어온 길이 이미 지역 내에서도 알려져 있었기에 선발될 수 있었다.
지난 2월에는 일본 J리그 측과 함께 네팔 지진 피해 어린이들을 돕는 행사에 참여했다. 네팔 리그에서는 2011년과 2012년 활약하며 인연을 맺었다. 아시아 어느 나라를 가든 이토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국가적 가교 역할을 하는 ‘축구 외교관’으로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태국 방콕에 일본 선수들이 참여할 수 있는 훈련 캠프를 차렸다. 아시아 각국 리그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일본 선수들을 매해 12월부터 1개월간 모아두고 훈련을 하는 행사다. 이토는 19개국에서 활약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선수들을 뛸 수 있는 리그로 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지난 1월 20일에는 ‘자신을 여는 기술’이라는 자서전이 출간됐다. 다양한 리그에서 살아남는 법 등 경험에 따른 생존 기술이 쓰여 있다. 이토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도 제작중이다. 이와 관련된 예고편이 지난해 11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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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의 플레이 모습
이토는 독특한 사람이다. 생각을 최대한 빠르게 실천에 옮기며 목표를 달성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만든 규칙 속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킨다. 지난해 이토와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 태국 기자 크리티콘씨는 “상대방 말을 잘 들어주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산신령 같은 느낌이 들었다. 행동에서는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축구선수마다 인생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이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단위인 돈이 가장 우선시 된다. 또 다른 이는 가족의 행복이 1순위다. 어느 것이 낫다고 평가할 수 없다. 이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명예나 돈이 아닌 다양한 경험이었다. 이토는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했고, 그 길을 묵묵히 따라가고 있다.
아시아 각국에는 이토와 같은 선수들이 많다. 큰 꿈을 안고 자국 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가 방출당해 방황하고 있는 청년들이 이토의 17년 전 모습이다. 이토가 꿈과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선수, 넓게는 청년들에게 의미 있는 조언 하나를 남겼다.
“당신의 꿈을 이루고 싶다면 지체하지 말고 지금 당장 행동하라. 행동 없이는 바뀌는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토는 꿈을 위해 행동했고, 꿈을 이루고 있다. 비록 그것이 화려하고 멋진, 즉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성공한 축구 선수의 모습을 아닐지라도.
글=김환 기자
사진=이토 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