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위문 내 선조에 대한 기록은 대표적인 기묘보초보를 포함한 7번에 걸쳐 편찬한 족보(族譜)의 면주(面註)와 지장록(誌狀錄)•충의록(忠義錄), 묘갈명(墓碣銘) 등이 있다. 또한 근래 원산(정철) 종원께서 ⌜장흥위씨요람•천년세고집을 편찬하여 여러 선조에 대한 행장(行狀)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보성군수공(諱 赫萬)에 대한 족보 면주•지장록, 행원 파보(派譜) 내용이 매우 빈약하다. 장흥위씨요람 등에서 언급되지 않아 종원(宗員)들에게 잊혀 있던 선조 중에 한분이다. 특히 행원 괴봉공파종중에서 조명 부족과 직계 후손들이 300년 이상 제주도에서 거주해오면서 본향(本鄕)과 교류가 미미하여 제대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이 중요 원인이라고 사료된다. 최근 公에 대한 교지 등 고증 자료가 확인되어 재조명을 통해 公의 업적을 종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1.기묘대동보 면주, 지장록, 승정원일기 비교 고증
1)기묘보 4卷 p 18 면주 내용
諱 赫萬 25세, ~ ? 자(字)는 화경(華卿) 생졸년(生卒年) 기록은 없다. 일찍이 등무과(登武科)하고 歷府院諸職하며 出守旌義하야 歲値歉荒에 읍민(邑民)을 구활(救活)하니 치적(治績)이 임금에게 알려져 친필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상(賞)으로 말 한필을 하사(下賜)하셨으며, 낙안군수와 보성군수에 임명되었다고 수록 되어 있다. 배(配)는 숙부인 연안李氏이다. 묘소(墓所)는 장평 馬峙艮座로 합조(合兆)이다.
2)기묘보 지장록 내용
지장록 p 1024~ 1025⌜通訓大夫行寶城郡守公事實⌟에 의하면 公의 諱는 赫萬이요 字는 華卿 이니 魁峯先生 諱 大用의 玄孫이요 縣監 諱 天相의 막내 아들이다. 公이 나면서부터 체격이 壯大하였고 말수가 적으며 經書나 史記를 모두 통달하였고 筆法이 또한 정미로워 굳세며 算術이 귀신같았다. 팔도(八道) 감영(監營)의 水使·兵使을 수행하는 관원으로 있다가 武科에 급제하여 訓練院 主簿, 摠經都事, 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外職으로 정의현감(旌義縣監)을 나갔는데 흉년을 만나 현민(縣民)을 구활(救活)하니 치적(治績)이 임금에게 알려져 親筆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상(賞)으로 말 한필을 하사(下賜)하셨으며, 그 후 낙안과 보성군수로 임명되었고, 뒤에 해남·진도·대정·광양 등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부임(赴任)한 곳마다 모두 비(碑)가 세워져 있다. 아들이 없어 伯氏(泰萬)의 둘째아들 원징(原徵)으로 후사(後嗣)를 삼아 가업을 이어받아 武科에 올라 가리포첨사를 지냈으며 一子인 原載를 두었으니 정의현감 때 소생하였으므로 자손들이 그대로 살고 있다고 수록되어 있다.
3)승정원일기 내용
①1696년(숙종 22) 6월 22일 아산만호, ②1705년(숙종 31) 2월 28일 임치첨사, ③1707년(숙종 33) 5월 11일 부호군, ④1710년(숙종 36) 12월 3일 겸내승, ⑤1710년(숙종 36) 12월 21일 낙안군수, ⑥1716년(숙종 42) 1월 23일 정의현감, ⑦1721년(경종 1) 7월8일 진해현감, ⑧1722년(경종 2) 1월 22일 경복궁 가위장, ⑨1723년(경종 3) 3월 14일 군산첨사, ⑩1724년(경종 4) 1월 28일 잉임사승전, ⑪1725년(영조 1) 3월 21일 부호군, ⑫1725년(영조 1) 12월 4일 보성군수, ⑬1726년(영조 2) 6월 2일 단부부호군, ⑭1728년(영조 4) 1월 11일 법성첨사 등 1731년까지 35년간 관직에 재임하면서 관직제수(官職除授), 의금부나인(義禁府拿因)사실, 서용(敍用), 전교(轉交), 장계(狀啓) 등 30건의 기록이 확인된다.
4)결론(비교 추정 등)
장흥위문 내 관직을 역임한 선조의 행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동보 면주, 지장록, 충의록 등 각종 기록에서는 관직 제수, 재임지역, 내용 등 여러 기록에서 誤記가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국보 제303호)에서 公의 대한 기록 중,
●정의현감 이전에 낙안군수를 제수(除授)함이 확인되며 지장록 내용의 훈련원주부·총경도사·
사헌부감찰·해남현감·진도군수 ·대정현감·광양현감 제수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조선시대에서는 외관직 제수 시 향피(鄕避)제를 원칙으로 하였고, 해남현감은 公의 선친(先親) 해남현감공(諱 天相 24세, 1635~1683)께서 역임을 하여 당대 시대 상황에 의하면 부자(父子)를 동일 관직에 제수할 수 없었다고 사료되며, 진해현감 제수 사실을 해남현감으로 誤記하였다고 판단된다. 진도군수 재임 관련된 기록으로는 1711년(숙종 37) 2월 19일 진도군에서 군기(軍器)를 점열(點閱)할 때 화약이 터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전라도순무사 권상유의 장계에 대한 전교 내용 중, “巡營軍官前郡守 魏赫萬”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진도군수 재임 사실이 아니고 1710년 12월 21일 낙안군수 제수한 사실에 의거 낙안군수 역임을 前郡守로 기록함이 확인된다.
☞ 巡營軍官 : 감사(監司)를 수행하는 무관을 칭함.
● 선정비(善政碑)는 정의현감, 임치첨사 역임 지역에 세워져 있다.
이번 기회에 보성군수공도 처음 대합니다. 교지연구를 통해 우리 문중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되어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역사가 날로 발전합니다.
보성군수공에 대한 내용이 논문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백강아재에게 존경과 찬사를...^^...2,3탄도 기대만땅...
보성군수공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자세한 설명과 해석이 되어 있는글이네요.
휼륭하신 문중 조상님들에 대한 새로운걸 알고 조선시대 역사공부도 하고 갑니다.
재치(財痴) 위현동 님
해남현감공
보성군수공
적양쳠사공
3대로 이어지는 무과급제도 보기드문 가문으로 기록되어져야 하겠네요.
백강아재의 노력으로 선조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제주도에 살고 계시는 괴봉공 후손들을 찾은 크나큰 성과에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고구마 줄기를 잡고 끌어 올리는 것 같습니다.
湖山 위신복 님
비유가 적절합니다
마케팅으로 표현하자면 '맥' '목'을 잡은 격입니다. 백강위원께 괴봉공파에서 표창을 해야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