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사랑나눔회 이사 된 개그우먼 이성미
“예배자 되어 돌아왔어요”
이성미(51세)가 돌아왔다. 어쩐지 요즘 세상이 좀 기분 좋게 시끄럽다 했다. 7년 만이다. 2002년에 세 자녀의 조기유학을 위해 캐나다로 떠났던 개그우먼 이성미. 그녀가 2009년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1년이 또 지났다. 우리는 요즘 공중파에서, 케이블 채널에서, 그리고 라디오에서도 이성미를 자주 만난다.
물 한 모금 입에 문 종달새처럼, 심할(?) 때는 한여름 매미처럼 가을밤 귀뚜라미처럼, 아주 그냥 쉴 새 없이 재잘재잘 조잘조잘, 순발력과 재치로 무장한 ‘속사포 입심 개그’로 80,90년대 방송가를 주름잡던 일명 ‘개그천재’ 이성미.
정곡을 콕 찔러 웃음보를 터뜨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레 태연한 표정이 특기, 정신을 쏙 빼놓는 입담 속에 솔직한 마음까지 담아 대중을 흡인하는 그녀, 아주 작은 몸에서 뿜어나는 이성미의 덩치 큰 개그는 2010년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그 이성미가 갓피플과 만났다. 아니나 다를까, 빛이 난다. 이른바 자체발광(自體發光),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빛의 색이 달랐다. 모든 스타가 빛을 낸다 한들 어떤 스타도 그런 빛은 낼 수 없는 것이다. 그 작은 체구 속에 꾹꾹 눌러 압축한 어떤 불덩이가 없으면 불가능한 빛. 그가 아닌, 그가 죽고 다른 무엇이 살아야 나는 빛이다.
이성미는 캐나다에서 새벽마다 그 빛을 만났고 그 빛의 조명을 따라 치유를 받고 훈련을 받았다. 그 빛의 음성에 순종하여 하나뿐인 아들을 북미 땅에 홀로 두고 돌아왔으며, 그 빛을 이 땅에 증거하려고 후배 연예인을 수십 명씩 불러 모아 매주 예배를 드리느라, 요즘 참 열심이다.
그뿐인가. 이성미는 한국에 돌아와 처음 하는 일이 방송이 아닌 하나님 일이길 바랐다는 기도대로 귀국한 다음날 기아대책기구 홍보활동에 참가했었는데, 아예 지난 달(2010년 10월)부터는 (사)부스러기사랑나눔회( www.busrugy.or.kr )의 정식 이사가 됐다.
부스러기사랑나눔회(이사장 김동옥)는 1986년 빈곤결식아동이 한 명도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가난한 지역 탁아방을 후원하면서 시작한 부스러기선교회가 성장한 것. 《부스러기 사랑》의 저자이자 18대 국회의원인 강명순 목사가 기초를 놓은 단체이다. 이성미의 오랜 벗이자 후배인 개그우먼 박미선과 송은이가 홍보대사로 섬겨온 곳이기도 하다.
이성미가 ‘자체발광’하는 새로운 이유, 행복한 웃음을 통해 전하고 싶은 그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부터 귀기울여보자.
정말 아들을 혼자 두고 오셨습니까?
은기(22세)요? 혼자 있어요. “너 혼자 벌어먹고 살라”고 했죠. 신학 공부(트리니티신학대학교)를 하고 있는데, 십 원 한 푼 안 보내줘요. 횟집에서 초밥 마는 아르바이트도 하는데, 이번 학기는 등록금이 없다고 학교를 못 갔다고 해요. “그러냐?” 하고 말았어요. 아들도 돈 보내라고 한 말 아니고.
재작년인가요? 살고 계시던 밴쿠버 동네에 방송 카메라가 날아가 눈 치우고 교회 행사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눈 치우던 아드님이 엄마 생일이라고, 성탄 전야 늦은 밤에 선물을 사러 다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주 의젓하던데요.
제 생일이 예수님 생일이거든요. 제가 그런 아들 속 많이 썩혔어요. 제가 사람이 안 되니까, 지금 사람이 바뀌어서 그렇지.
그 다큐를 촬영했던 성탄절이 산타만 소문나고 예수님은 소외되는 게 너무 싫어서 그냥 예수님만 찬양하자, 하나님 아버지 마음 노래하자고 예수님 생일파티를 하려던 날이었어요. 눈이 80센티미터나 쌓여 지역의 모든 행사가 다 취소되었지만 1년을 기도하며 준비한 일을 그만 둘 수 없더라고요. “이건 (상황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살고 죽는 문제다!”, “선교사님들은 선교지 가서 죽을 각오하는데 우리라고 못하겠냐?” 그러면서 함께 준비하던 교회 아줌마들과 의기투합, “우리는 그냥 간다!”고 예배를 강행했어요. 제설차 빌리는 돈이 하루 저녁 오백 불(약 60만 원)인데 그걸 교회가 내서 길도 열어놓고요, 그 밤에 예배하면서 막 울었죠. 아! 내 생일이라서가 아니라요, 그 눈 많이 온 날 스태프까지 해서 80명이나 모였거든요. 죽기를 각오하고 무대에 섰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는 이런 예배자들을 찾는다”는 마음을 주셔서요.
예배 다 드리고 아무도 사고 없이 다 집에 돌아갔어요. 하나님은 선하신 분,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분, 나보다 더 많이 신경 쓰시는 분, 그래서 크리스마스 돌아오면 아기 예수님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찬양하는 그런 집회를 서울에서도 해보려고 준비 중이에요.
그 때 너무 재미있던 건 선교사와 홈리스(노숙자)에게 카드를 보낸 일인데요, 미선이(박미선)에게 산타 그림 안 나오는 성탄카드 몇 백 장 사서 보내라 해서 그 카드를 지역 노숙자에게 나눠주었던 거죠. 노숙자들이 그런 카드 처음 받아봤대요. 또 기억나는 일은 그 성탄절 좀 지난 1월에 손기철 장로님 일행이 밴쿠버에 오실 때 개최된 치유집회에 참석한 건데요, 오늘 여기(HTM센터) 와서 다시 뵙네요. 손 장로님 책은 거의 다 읽었거든요.
캐나다에서 우리는 알지 못한 상당한 변화가 있었나 보군요. 그런데도 아드님 속을 상하게 한 엄마였다고 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 옛날에는 아들에게 욕하는 엄마였어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교회 다니면서도…. 제가 율법적이었거든요. 처음 교회 나갈 때부터 계속 새벽기도 다녔으니까, 말씀 보고 지적이고 우아한 엄마니까, 아마 기도 좀 한다고 교만했던 것 같아요. 사랑 없이 율법으로 아이를 키워왔으니…. “그거 그곳에 꼭 놔둬야 하는데 왜 안 지켜! 노란 불인데 왜 지나가?” 같은 잔소리는 기본이고 심하면 욕이 나가는 거죠. 세상 말로 하면 얄짤없는 엄마였죠.
아들이 6학년 사춘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부딪혔는데, 하나님이 자꾸 제 마음을 만지시더라고요. 아들이 17살 때던가, 하루는 아들에게 욕을 하고 돌아서는데 하나님이 제 뒤통수에 대고 그러셨어요.
“네 아들, 네가 말한 대로 만들어줄까?”
그 길로 이층 방에 뛰어올라가 회개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내려와 아들 앞에도 무릎 꿇었죠. “엄마가 잘못했다! 너무 미안하다. 다신 안 그럴게.” 그리고 정말 아이들 앞에서 욕을 끊었어요.
한참 동안 아들이 제 주변을 맴돌며 눈치를 보더라고요. ‘엄마가 어떻게 됐나? 갑자기 그 많던 욕을 안 하고 그래?’ 하는 거였겠죠. 아들이 참다못해 물었어요.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너한테 욕하지 말래.”
“그거 왜 이제 와서 들어? 진작 좀 듣지!”
엄마가 변하니까 아들도 변했겠군요.
아들과 관계 회복이 되면서 저도 아들도 많이 좋아졌어요. 아들한테 욕할 때는 학교 빼먹거나 늦잠을 자서 깨우면 늦게 가도 된다고 거짓말하고 학교에서 전화 오게 만들거나 할 땐데, 그래서 그랬던 건데, 아니 사실은 제 속에 남아 있는 무엇 때문이었겠죠.
어쨌든 그러고 나니까 아들이 엄마 따라 새벽기도도 다녔어요. 원래 골프도 치고 축구도 좋아했는데, 골프를 하고 싶다던 아이가 어느 날 기도하고 나더니 갑자기 이래요.
“엄마, 이제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길 택하라고 했지? 하나님이 나 골프 말고 목회 하라시는 거 같은데, 어쩌지?”
“야!! 너 그건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냐?”
그러더니 얘가 그날부터 학교에 일찍 나가더라고요. 딸 은비(14세) 하고 은별(10세)이가 같이 있었는데, 하루는 은별이가 뭔가에 놀란 눈으로 뛰어오더니 이렇게 일러바쳐요.
“엄마, 엄마! 오빠가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오빠가 공부를 해!”
캐나다로 가신 목적을 제대로 이룬 셈이었네요!
그런데요, 하나님이 남편 놔두고 저를 아이들과 캐나다에 보낸 이유가, 사실은 아이들 때문이 아니었나 봐요. 저를 위해서였어요. 제가 율법적이라고 했죠?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기도하고 말씀 보고 체험도 했지만, 사실은 사랑 없이 철저한 율법주의로 살아왔어요. 성경책에 아무것도 올려놓으면 안 되고 주일에는 옷도 잘 갖춰야 하고, 교통방송을 하기 때문에 교통신호도 정확히 지켜야 하고, 그래야 옆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칭찬하실 거라는 생각에 철저한 규칙 속에 살았거든요. 어느 날 깨진 건 그 규율이었어요. 사랑이 먼저라는 걸 가르쳐주신 거죠. 성경의 모든 것이 사랑이에요.
7년을 그곳에 가 있도록 하신 이유가 하나님이 저를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뜨려서 그 사랑을 깨닫고 저를 훈련시키시려는 것이었어요.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렇게 하셨을까요?
결국 알게 된 건, 제가 죽어야 산다는 것이네요.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데, 내가 살아서 내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니 결국 율법주의가 된 것이네요.
교회 처음 나가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1988년 4월, 죽으려고 약을 60알 먹었어요. 제가 초등 6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떠돌이 생활 하시는 아버지 손에만 커온 외동딸인데…, 온 세상이 제 이야기로 시끄러운 것을 아신 아버지가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요. 그때 저는 사람들에게 치일대로 치여 상처받고 있었고, 그냥 살기 힘들다고 조금 푸념하면 돌고 돌아 ‘성미가 죽는다고 했더라’는 식으로 눈덩이가 되어 돌아오곤 했어요. 죽으면 오해고 뭐고 다 사라지겠지 싶어 그런 건데, 살아났더군요.
아, 더 이상 사람한테 말하면 안 되겠구나. 그럼 누구에게 내 속을 털어놓지? 그래, 나도 교회 가서 하나님께 말해보자. 하지만 낮에 가면 사람들이 알아보니까, 새벽기도라는 걸 해보면 되겠구나. 그래서 여의도에서 가까운 대방동에 있는 교회에 갔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개념도 모를 때였죠. 그냥 모자 푹 눌러 쓰고 뒷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저 왔어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오고, 다음날 또 가서 “하나님 저 또 왔는데요, 너무 억울해요” 하고 울다 오고요.
그런데 열하루짼가, 방언이 터진 거예요. 방언을 하면 주체가 안 되는 거예요. 미쳤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그때는 뭐 할 일도 없고 해서 기도하고 말씀 보고 체험도 많이 했어요.
기억나는 처음 체험이라면?
물질적인 경험이었어요. 상황이 어려워지니 십 원 한 장 없을 때였는데, 내 입에서 “하나님, 감사헌금, 십일조 오십만 원씩 하겠습니다!” 하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소리야? 돈 나올 데가 하나 없는데. 그런데 그 작년에 찍은 광고를 다시 틀면서 처음 출연료 절반이라고 오백만 원을 주지 뭐예요! 저는 신앙생활을 율법적으로 배우며 시작했기 때문에 십일조는 기본이고 감사헌금도 기본으로 따라가는 거라고 배웠거든요. 십일조 오십, 감사헌금 오십 딱 냈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걸 처음 보게 된 거예요. 내 억울한 부분도 다 풀어주시고.
다시 돌아오신 이유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캐나다에 간 지 5년쯤 지나 건강진단을 받으러 잠시 귀국했을 때 친구들 만나러 홍대 앞에 갔어요. 젊은 친구들이 술에 취해 널브러진 모습을 보며 가슴이 많이 아팠어요. 순간이지만 예수님이 그 아이를 끌어안으시는 것 같은 환상을 봤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느낌 있지요? 이 땅의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고, 제 아들 딸 또래의 청소년들이 공부에 힘들어하는 현실이 저를 부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저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나니 1년 반 동안 더 철저하게 기도하고 훈련받게 하시는데, 특히 마치 과외공부를 하는 것처럼 청년과 청소년 사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하셨어요. 지금 서울 돌아와서 주일마다 교회 청년들 멘토하는 사역을 하고 있고요, 오라는 대로 간증을 다니기 시작한 이유도 저처럼 부모가 바뀌어야 자식도 바뀌고,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가 있음을 깨닫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오셔서 한국의 부모들을 보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마음은, 한국의 부모들이 아이 한쪽은 엄마가, 다른 한쪽은 아빠가 잡고 있어서 하나님이 잡을 손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돌아오기 전 아들을 혼자 두고 오기로 하면서 아들이랑 같이 새벽기도를 다녔는데, 처음에는 하나님께 아들 손을 잘 전달해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아들 하고 같이 예배하고 다니니까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아들 손을 하나님께 드리기가 싫어지는 거예요. “하나님, 같이 오면 안 되겠습니까?” 간청했더니 하나님이 이러셔요.
“네가 아들 손을 놓고 가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데, 왜 그 손을 나에게 주지 못하는 거니?”
그래서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믿음과 기도뿐”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 네 손을 맡기고 엄마는 간다”고 하고 왔어요. 아들도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정말 그 말 그대로, 아이를 놓고 와서 돈 한 푼 보내주지 않거든요. 그러면서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내가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구나, 하는 걸 보게 돼요. 그 아이가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해요.
“내가 이성미 아들로 살았을 때는 부자였는데, 이젠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돈이 귀한 줄도 알고요. 그동안 엄마 그늘 밑에서 부자로 살았던 것에 대해 정말 반성 많이 해요. 이젠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을 보고 싶어요.”
그런 걸 보면 부모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막는 게 많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소속사 사장님이 남편이시죠?
남편도 예상 밖이래요. 귀국 준비하며 기도할 때 자꾸 하나님이 그러라는 마음 주시던 차에, 어떤 기도하는 권사님이 “지금 파트너 구하시죠?” 하셨어요. “누가 좋겠어요?” 물었더니 “남편 어떠세요?” 하셔요. ‘아이쿠야! 하나님, 항복이에요’ 했죠 뭐. 모든 걸 공개하고 낮아지는 마음으로 가자고 남편 회사와 같이 하기로 한 거예요.
제가 성경인물 중에 구레네 사람 시몬을 존경하게 됐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연한 자리에서 유일하게 졌던 그 사람처럼, 저도 낮아지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아직 남편 존경까지는 못 갔지만 낮아지는 훈련 받고 있으니 머리가 터지려고 하네요. 제가 두 살 더 많거든요! 옛날엔 솔직히 애들 앞에서도 ‘야’ 소리 했는데 이제는 ‘은기아빠’라고 불러요. 앞으로 우리 남편하고 선교하며 사는 게 꿈이에요. 어떻게 만난 남편이냐고요? 유명한 연예잡지 기자였는데요, 제 집에 인터뷰하러 와서는 좀 놀다 가겠다고 하기에 그러라 했더니 아직도 안 돌아가고 있네요.
선교하고, 연예인 후배 전도하고, 기타 등등 꿈이 많으시던데.
오랜만에 와서 방송해보니 환경이 많이 달라졌어요.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송활동이 기도제목이에요. 연예계 후배들이 사랑에 많이 목말라 있더군요. 그들에게 말씀을 심어주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해주고 싶어요. 살고 죽는 문제 때문에 아등바등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죽으면 살 수 있다는 부활의 복음, 그리고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도록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