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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도 자신이 서질 않았지만 자신과 현진과의 관계가 설령 사랑이라 해도 둘의 관계를 윤민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단정처럼 탐닉을 위한 그리움이고, 쾌락을 위한 불륜임을 강하게 부인할 수도 없었다.
세희는 유부남과 미혼 여성간의 사랑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봉건적이고 부정적 사고를 갖고 있는 윤민이 갑자기 별천지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잠시 생각에 골똘하던 세희에게 윤민이 던진 한 마디가 예리한 활촉처럼 심장을 파고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유부남인가?”
윤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가볍게 핸들을 쥐고 있었다.
정하는 호흡이 가빠왔다.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세희가 아무런 대꾸도 없자 윤민은 긍정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 말이 좀 거칠었군. 내 짧은 상식에서 파생된 주관일 뿐이니까 담아두지 마.”
병 주고 약 주는 듯한 그의 말, 위로인지 비아냥거림인지 구분되지 않는 윤민의 말이 세희에겐 곪은 상처가 건드려진 것처럼 쓰라렸다. 참으로 호된 아픔이 아닐 수 없다.
윤민의 말은 마치 자신의 비밀을 모두 파악하고 서서히 그 비밀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들렸다. 송곳을 비틀어 후벼 파는 것처럼 잔인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 탁한 적색…절제 없는 욕구…
침대에 느긋하게 누운 현진의 벗은 몸을 천천히 마사지하고 부드럽게 애무하다가 땀에 젖은 채 몸을 섞어 불꽃같은 쾌락에 빠지고…흥건하게 묻어난 정액을 닦아내곤 하던 수많은 날들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윤민의 말대로 그건 탁한 적색을 띤 욕구에 다름 아니었다.
초저녁 햇살이 아직도 창창한데 하늘색이 잿빛으로 무겁게 낮아지고 있었다. 낮아진 하늘이 버겁게 세희의 머리를 짓눌렀다.
갑을건설을 나오면서 한껏 고조되었던 기분은 어느새 묵직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세희가 울적한 기분에 시름겨워 하는데 윤민이 오디오를 끄고 세희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었다.
“세희야! 기분 풀어. 좋은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우리 대화의 소재가 너무 우울했던 것 같다.”
정하가 꿈적도 하지 않자 재영이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자신의 생각을 곧이 곧대로 표현하고 만 윤민은 세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진 것이 보였다.
- 제기랄, 굳이 유부남과 교제한다는 것까지 들춰낼 필요는 없었는데, 출장에 동행한 여직원 기분만 잡쳐놓고 말았군. 이걸 어쩐다?
세희가 오른쪽 창가로 고개를 돌리곤 꿈쩍을 하지 않았다.
“세희야, 내가 조심성 없이 입을 놀린 것 같다. 난 조금 가깝다 싶으면 표현에 구애받지 않는 습관이 있거든. 못된 습관이란 걸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있어. 으이그, 요놈의 입.”
윤민이 자신의 입술을 비틀며 불과 한 시간 전쯤 세희가 한 말을 그대로 패러디했다.
그제야 세희가 윤민에게 고개를 돌리며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까워 진 것 같으세요? 저랑?”
“넌 그렇지 않아?”
“저도 그래요. 훗후후!”
“핫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농담처럼 주고받은 말이지만 세희는 상당히 친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비록 공무(公務)로 인한 출장길이지만 사무실 밖에서 보낸 윤민과의 한나절 동안 거리감이 무척 좁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기분일까? 이 사람이 현진의 처남이란 사실만 빼면 조금도 부담이 없을 텐데. 마음 한구석 뭉쳐있는 불안을 해소할 수도 있을 텐데.
세희는 현진과의 관계로 인해 더더욱 윤민이 어렵기도 했지만 자신에 대한 윤민의 느낌이 늘 궁금하기도 했고 또한 두려웠었다.
현진으로 인해 윤민에게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조바심을 윤민은 구소련의 크렘린에 빗대 놀리기도 했었다.
갑자기 세희는 윤민의 팀에 대한 생각이나 소현진 사장과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가가 궁금해졌다.
현진은 지방팀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지녔음에도 윤민을 내려 보냈다. 여차하면 팀을 정리시키고 윤민을 불러올릴 것이다.
윤민은 아무런 주관이 없이 소현진 사장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인지, 그것은 소 사장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 것인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팀원들이 하나같이 부장님을 신뢰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빨리 성장하고 있는 것에 흡족해 하기도 하구요. 그러면서 부장님 고생을 안타까워하는 맘들도 똑같구요.”
“세희 생각도 그런가?”
윤민이 갑작스런 세희의 덕담에 엷은 미소를 짓더니 건성으로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네!”
“사실 부산에 내려올 땐 나도 자신 없었어. 반도 못 미치는 확신을 갖고 내려왔지. 그걸 반 이상으로 채워준 게 팀원들의 의욕이고 믿음이야. 그러니 내가 일을 안 할 수 있겠어? 나와 팀원들 간에 코드가 맞았다고 볼 수 있지. 내 부족함을 팀원들이 채워준 거지.”
“팀원들의 부족함을 부장님이 채워주기도 했구요.”
다정스런 표정으로 세희를 쳐다보던 윤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내려온 건 순수한 내 의지 때문이 아냐. 난 솔직히 지방팀 설립을 처음부터 반대했었지. …하고자 하는 팀원들의 의욕이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쯤 정리 상태에 있었을지도 몰라. 팀원들과 나한테 모두 최악의 상태가 되었을지도…. 나를 능동적이게 해준 건 순전히 우리 팀원들이야, 너를 포함해서 말이야.”
“부장님은 이렇게 고생해서 무얼 얻게 되죠?”
“무얼 얻느냐고? …너처럼 월급 받잖아.”
윤민이 세희의 뜬금없는 질문을 엉거주춤 비켜갔는데 그녀가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전 부장님이 쥐꼬리만한 월급 땜에 여기 계시는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세희의 말에 윤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냉소를 머금었다.
“내가 사장님 처남이라고 특혜라도 받는다고 생각하나보군, 세희는.”
“아녜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절대 아녜요.”
세희가 강한 몸짓으로 부인했다.
현진도 윤민이 단순한 직장생활의 연장으로 부산에 간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이유를 상세히 말한 적이 없었다.
지방팀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본사에서도 오윤민 부장 외엔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나 현진은 지방팀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의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민은 혼신을 다해 팀을 살리려 하고 있다. 오너와 관리자간에 그 생각이나 행동이 상반된 모순 속에는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 두 사람만의 은밀한 거래?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럼 뭐지?
윤민의 속뜻이 알고싶어 졌다.
정지 신호등으로 바뀌자 차를 멈춘 윤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게 있기는 하지. 그걸 위해 부산에 잠시 머문다고 해야 거짓 없는 말이 될 거야.”
“그게 뭐예요?”
“…세희랑 얘기 나눌 성질의 것이 못돼.”
“사장님과의 문제인가요?”
“……”
윤민의 눈빛이 무얼 그리 꼬치꼬치 캐묻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가 너희들과 팀에 형식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건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미 잘 알고 있어요. 만일 그러셨다면 팀원들이 그렇게 의욕적으로 일에 매달리기나 했겠어요.”
회사인지 도서관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위계질서가 없는 팀에 조직력을 갖추고 팀원들 간에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건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책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기희생을 현장에서 직접 보여주는 윤민의 굳은 의지, 언행이 일치한 모습 때문에 자석에 쇳조각이 달라붙듯 팀원들이 그를 중심으로 합심하고 있음을 세희는 잘 알고 있다.
전의를 상실한 군인처럼 거의 자괴적이던 팀원들이 일사천리로 기획을 하고 순발력 있게 실행에 옮기는 윤민의 추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3 개월여 최대한의 시간을 할애해서 실무교육을 받고 났을 때 팀원들은 창의적으로 마케팅 포인트를 찾아내기 시작했고 보다 효율적으로 시장관리를 할 수 있었다.
세희가 윤민의 열정에 충분히 공감했기 때문에 현진의 생각과 그의 생각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더더욱 궁금했던 것인데 역시 그에게서도 의문을 풀 수는 없었다.
윤민이 일개 팀원에게 회사의 오너인 소현진 사장과의 개인 문제를 드러낼 리도 없었다. 그러나 세희는 괜히 윤민에게 근접하고 싶었다. 혹시 그 책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몇 년 전 법인세법 정해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대구지부에 근무할 때였죠.”
정하가 입을 열면서 윤민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너무 서슴없이 말해버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윤민의 안색이 급격히 변하는 바람에 세희가 오히려 안절부절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희는 말을 이었다.
“그 책 출판기념회 때 편집부 직원들한테 들었죠. 그때 처음으로 부장님의 이름을 듣게 되었고 그 책의 원집필자가 부장님이란 얘기도 들었어요.”
윤민은 상상 외의 사실을 들은 사람처럼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는 것처럼 보였다.
윤민과 동행한 출장길에 세희는 본의 아니게 소현진 사장과의 사적인 첫 만남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교차점에 윤민이 썼다는 책이 판도라의 상자처럼 놓여 있었다.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인류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Pandora)를 만든 제우스(Zeus)가 인생의 모든 죄악과 재화(災禍)가 담긴 궤를 판도라에게 주었으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가 이 것을 여는 바람에 모든 불행이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모든 불행이 세상 속으로 빠져나갔으나 그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하지 않은가.
- 객지에서 세월을 보내며, 자신에게 쏟아진 불행을 감내하며 오윤민 부장은 상자 속에 남아 있는 그 희망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걸까. 소현진 사장이 자신의 명분을 위해 오윤민 부장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건넸고, 오 부장은 그 상자 속에 담긴 희망을 꺼내기 위해 어긋난 획을 긋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획의 또 다른 교차점에 그림자처럼 내 자신이 서있는 건 아닐까.
윤민이 입을 열어 ‘법인세법 정해’에 대해 묻지는 않았으나 세희는 알게 된 경위를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의 눈빛이 다그치는 어조보다 더욱 강하게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3년 전 초가을쯤이었나 보다.
‘법인세법 정해’의 출판기념회를 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다고 하여 전국 각 지부와 영업소에 초청장이 보내졌다.
신입 관리직원에 불과한 세희가 출판기념회에 참석할 만큼 비중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출판기념회가 업무에 도움을 줄 것도 아니었지만 세무통람주식회사의 창업 이래 첫 출판기념회인 만큼 전 직원이 참석해야 한다는 공문을 보냈으며 대구지부는 특히 전원 참석하라는 소현진 사장의 특별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세희는 초가을의 주말에 서울을 구경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당시 본사에 세희가 아는 사람이라곤 서적의 입출고 건으로 전화통화만 했던 총무부의 소영옥 뿐이었다. 물론 소현진 사장은 몇 번 대구지부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시청 부근의 프레스센터 대강당에는 ‘법인세법 정해 출판기념회’라는 현수막이 큼직하게 걸려 있었고 ‘저자 조정현 회계사’, ‘세무통람주식회사 발간’이라는 문구가 하단에 인쇄되어 있었다.
조정현 회계사와 소현진 사장은 가슴에 꽃을 꽂고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활짝 웃고 있었다.
곳곳에 축하 화환과 화분이 즐비했다. 재무부와 국세청, 각 대학교, 회계법인, 학원 기타 유명 학자나 기업인인 듯한 개인들이 보낸 것들이 행사장 안팎에 놓여있었다.
세희는 대구지부 직원들을 따라 다닐 뿐이었는데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소현진 사장이 부르더니 편집부 여직원들에게 인사를 시켜주어 그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어머! 대단한 미인이네. 반가워요.”
편집부의 최고참인 강지숙 과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함빡 쏟아내며 정겹게 맞아 주었다.
편집부 여직원들은 하나같이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행사준비를 거들고 있었다. 세희도 그들과 어울려 테이블 위에 놓인 두꺼운 ‘법인세법 정해’를 맞춰온 봉투에 넣어 참석자들에게 배부하였다.
행사장인 강당 입구에서 손님들께 인사를 하며 다소곳한 자세로 서있던 강지숙 과장이 이하연 대리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왜 안 오시지? 초청장을 받았을 텐데…”
“글쎄 말예요.”
두 사람은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플로어의 입구 쪽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이하연 대리가 플로어의 바깥까지 몇 번이고 마중 나갔으나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 차장님은 오셔야 하는 거 아녜요?”
큰 키에 여드름 자국이 선명한 여직원이 전라도 억양으로 강 과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오시겠지. 좀 더 기다려보자.”
강 과장이 여드름 자국 여직원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는데 기대보다는 체념한 듯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누굴 기다리시나 봐요?”
세희가 옆에서 책을 배부하던 주현옥에게 물었다.
“편집부에서 같이 근무하던 분인데 오늘 행사의 실질적 주인공이랄 수도 있는 사람이거든요.”
주현옥이 친절하게 답해 주면서도 입구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 실질적인 주인공? 그게 누굴까! 출판기념회에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책을 쓴 저자와 발행자인 출판사일 텐데 또 누구를 말하는 거지?
세희는 궁금했지만 그것까지 물어보기엔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편집부 직원들도 그 실질적 주인공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안 오실 것 같아요. 아니 못 오실 거예요.”
이 대리가 강 과장에게 다가와 내뱉듯이 말했다.
“어머, 언니! 그게 무슨 말예요. 주인공이 빠진다는 거예요?”
디자인을 담당한다는 원혜진이 빼어난 미모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초청자 발송자 명단에 오 차장님은 없었어. 사장님이나 조 회계사님이 별도로 연락하지 않았다면 오 차장님은 모를 수도 있지 않겠어?”
“……”
편집부 여직원들은 한결같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왜 초청대상에서 빠뜨린 걸까요?”
주현옥이 이하연 대리에게 물었다. 궁금하단 표정이 역력했다.
하연은 대답 대신 얼굴 가득 조소를 담아냈다.
여드름 자국의 김수현이 그런 하연을 쳐다보다가 실망어린 눈빛으로 뇌까렸다.
“재주만 부린 곰처럼 되고 만 거예요. 오 차장님이 안됐어요. 그 올곧은 성격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원고를 쓰고 다듬었는데. 결국…”
김수현이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더니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편집부 직원들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세희도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아침에 서울에 오는 차 내에서 이정호 대구지부장이 동승한 직원들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조 회계사는 여러모로 복 받은 사람이야. 소 사장은 자기 처남한테 책을 쓰게 해서 잔칫상은 조 회계사한테 건네주고 말야.”
“지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인교?”
조수석에 앉은 한진영 과장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조 회계사가 저 나이에 무슨 기력으로 저 두꺼운 책을 쓰겠노?”
이정호가 뚱뚱한 볼을 씰룩이면서 빈정거렸다.
“그럼 조 회계사님이 쓴 게 아니란 말입니꺼?”
“소 사장이 창업 때부터의 인연으로 조 회계사 말이라 카모 껌뻑 죽는다는 건 아는 사람 다 알지만서도…처남을 시켜 2,0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쓰게 하는 수완에는 나도 놀래뿟다 아이가.”
이정호가 혀를 내두르는 흉내를 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처남이라 카모 편집부 맡았던 오윤민 차장이란 사람 아입니꺼?”
“그 젊은 친구가 자격시험엔 떨어졌어도 대단한 실력을 지녔다 카드라. 그 두꺼운 책을 겨우 1년 만에 써냈다 안카나.”
출판기념회에 가는 길에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것을 세희는 무심코 듣고만 있었다. 별로 관심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창 밖만 멀뚱히 내다보고 있었다.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할 때까지도 오윤민 차장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겨 수많은 참석자들이 식사를 했는데, 마치 파티장을 방불케 할 만큼 북적거렸다.
세무통람주식회사의 직원들이 거의 참석하였고 전국의 지부장, 영업소장들을 포함하여 대학교수, 회계사, 세무사 및 세무공무원 등 초청자들이 원탁 테이블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희는 편집부 직원들과 함께 동석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여직원들끼리 맥주 몇 잔을 나눠 마시며 식사를 마칠 즈음 김수현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건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예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랑 하나도 다를 게 없다구요.”
맥주 두 잔을 연거푸 마신 수현이 자기 컵에 다시 맥주를 따르며 화가 가시지 않는 듯 힘을 주어 말을 덧붙였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거예요. 오 차장님은 사람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버리는 단점이 있어요. 바보같이….”
“어머! 얘 좀 봐! 너 벌써 취했니?”
강지숙이 김수현을 쏘아보다가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 기분 못지않게 우리도 기분이 더러워. 하지만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냐. 주 회계사님과 사장님 그리고 임 차장님의 조건이 부합돼서 책이 만들어졌고 그 조건이 이행되었다면 초청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원고를 쓰기 시작해서 햇수로 3년 만에 첫 출간된 책이야. 우리 회사의 얼굴이 될 만큼 중요한 단행본이고…그만한 대가가 지불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 이런데 오는 게 뭐 그리 대수야.”
“과장님! 그렇지 않아요. 사실은 어제 오 차장님한테 전화를 했었어요.”
수현이 들었던 잔을 내려놓고 지숙과 테이블에 동석한 여직원들을 둘러보며 정색을 했다. 일행이 동시에 수현에게 시선을 모았다.
“내일 뵐 수 있겠네요? 하고 전화 드렸는데 오 차장님은 전혀 모르고 계시더라구요. 초청장을 받은 바도 없고 전화도 받은 일이 없었대요. 출판기념회를 한다는 사실을 괜히 얘기한 것 같아서…지금 너무 속상해요.”
수현의 목소리가 금세라도 울먹일 것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 차장님 반응이 어떠신 것 같아?”
하연이 수현 쪽으로 의자를 끌어 당겼다.
“왜 있잖아요. 황당한 지경에 처하면 입 꾹 다문 채 얼굴만 굳어지는 차장님 특유의 모습 말예요. 아무 소리조차 못하고 한참이나 전화기를 들고 계시기만 했어요.”
결국 수현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
아무도 그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숙연한 채 어두운 실망감이 스쳐 지나는 표정들이었다.
“…그리곤 저더러 고생했다면서 전화를 끊었어요.”
편집부 직원들의 대화를 아주 가까이 들으면서 세희는 문득 오윤민 차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옹호할만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함께 근무했던 여직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눈물까지 흘리게 할 만큼의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묵상하듯 세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윤민이 다시 운전석 쪽의 차창을 내렸다.
“김수현이라는 여직원의 슬픔이 너무 강렬해서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어요.”
“그 친구가 교정과 편집을 담당했었지.”
윤민이 아주 먼 추억을 더듬는 것처럼 낮게 읊조렸다.
“일을 담당했다고만 해서 그토록 슬퍼하진 않았을 거예요. 김수현씨는 부장님이 느끼셨을 아픔에 공감하고 있었던 거예요.”
윤민의 얼굴이 노을빛에 더욱 붉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건지 전 잘 알아요.”
세희의 중얼거림에 윤민이 “제법 어른스런 면도 있군.”하면서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그가 대나무처럼 한결 같은 마음으로 팀을 이끌어가는 것을 볼 때 세희는 김수현의 우러난 슬픔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 이 분의 부산 생활은 어쩌면 그 책과 관련된 것일지도 몰라.
포항 출장을 동행하면서 나눈 그와의 대화들, 때론 차분하게 때론 격정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이던 윤민의 모습들을 차분히 더듬는 동안 차는 이미 부산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