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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리얼리즘적 양상과 그 특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1. 서 론
가. 연구의 목적
우리는, 서양에서 중세 이후를 지칭하는 모던을 근대와 현대로 혼용하여 사용해왔다. 그런데 한국문학사에 근대/현대를 적용하면, 이 두 시간대는 단순한 계기적 관계로 정립되지 않는다. 도식적 위협을 무릅쓰고 단순화한다면, 우리에게 두 개의 <현대>가 있었으니, 좌파의 <현대>는 러시아 혁명(1917) 이후를, 우파의 <현대>는 자본주의의 수정 또는 변모가 가속화했던 대공항(1929)을 지칭했던 것이다. 두 개의 <현대>론에 입각하여 두 개의 <현대> 문학론이 구성되었으니, 좌파에게 <현대> 문학이 근대 부르조아 문학의 리얼리즘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뜻한다면, 우파에게 <현대>문학은 근대 부르조아 문학의 리얼리즘을 해체한 모더니즘의 등장이 그 주요한 지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근대시 혹은 현대시를 통시적으로 조망해 볼 때, 대체로 두 가지 주된 줄기가 윤곽을 드러내는데, 하나는 ‘모더니즘시’고, 다른 하나는 ‘리얼리즘시’다. 정지용이나 이상에 의해 틀이 잡힌 모더니즘시는 산업사회의 변모와 결부되어 현대성의 추구에 역점을 두면서 김수영을 거쳐 뻗어내리고 있으며, 임화와 이용악으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리얼리즘시는 사회의 진보와 관련하여 현실에 대한 빈핍한 탐구에 역점을 두면서 신경림이나 김지하 등의 시적 성취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사항은 이 두 가지 문학사적 조류가 서로 역동적인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흐름은 서로 배타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개별 시인의 시세계에서 얼마든지 합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리얼리즘>은 현대문학사조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근대시 초기부터 리얼리즘은 계몽문학, 자연주의, 신경향파, 프롤레타리아문학 등과 같은 문학운동을 관류하며 한국근대문학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결정하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리얼리즘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못박는 마르크시스트 관점과는 달리 시의 리얼리즘은 계급적으로 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한국문학사에서의 근대성의 추구의 한 축선에 리얼리즘이 있었다는 것은 리얼리즘의 중요성을 대변한다고 하겠다. 20세기의 한국 문학은 두 개의 현대론 등장 이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및 이 두 담론에 기원한 변형 담론들 사이의 단속적인 전쟁상태로 돌입하여, 리얼리즘은 이제 문학적 토론의 한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말은 그 개념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리고 예술사적 발전 과정의 단계에 따라 복합적 어휘로 재생산되어 쓰이기도 한다. 리얼리즘이 범세계적 문학 논쟁의 중심적 위치에 놓이게 된 까닭 중의 하나는 이처럼 이 말의 개념이 정착되어 있지 못하고, 따라서 그 사용법이 극히 다양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한국근대문학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용법에 따르면 리얼리즘은 계몽문학, 자연주의, 신경향파, 프롤레타리아문학 등과 같은 문학운동을 관류하며 한국문학의 근대성 추구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대담한 일반화는 대략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근대문학의 상식이 되다시피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리얼리즘이 일정한 정체를 가지고 있는 고정된 물체가 아이라는 점이다. 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사회적 입장과 문학적 관점이 다른 데에 따라 얼마간씩 다른 의미를 지니고 각각 다른 의도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즉 초기 리얼리즘이 한국에 상륙해 현대시와 접맥되는 과정에서 각가지 경험이 생겨나고, 뒤바뀌는 가운데 그 개념에 대한 기술이 여러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리얼리즘시에 관한 논의는 학술적이라기보다는 주로 비평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왔다. 당대의 민족현실에 대한 실천적 관심을 강조한 것이 1970년대 이래의 민족문학론이라면 그러한 민족문학론이 미학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리얼리즘에 대해 검토하면서 시에 관한 리얼리즘 논의가 자연스럽게 대두된 것이다. 하지만 종래의 리얼리즘론이 주로 소설과 결부되었던만큼 시와 리얼리즘을 연계하는 데는 조심스러운 모색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리얼리즘시의 요건, “당대 현실의 사실적 묘사 그 자체보다도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정당한 실천적 관심이라는 애매한 기준”이 마련되었는데, 문제는 ‘실천적 관심과 결부된 정당한 현실인식’에 작용하는 시정신의 성격과 그러한 현실인식이 시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모색으로 이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당한 현실인식이 시 장르의 속성에 호응하면서 과연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시에 나타나는 리얼리즘적 요소를 유형화해서 살펴봄으로써, 리얼리즘시의 특성과 그 양상을 보다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이런 판단에는 리얼리즘이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 그리고 인생과 사물을 표현하는 예술적 방법에서 여러 종류의 관념주의와 분명히 구별되는 그 자신의 통일된 법칙성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리얼리즘의 총체적 내포의 핵심인 리얼리티를 실현하는 문학적 장치를 방법적 원리와 기본적 요소 측면에서 크게 나누어 한국시의 리얼리즘적 양상과 특성을 고찰해 보는 것이다.
나. 연구 방법과 대상
리얼리즘시 논의의 관건적인 문제의 하나는 시 장르의 특수성에 입각한 리얼리즘 미학의 보편성 추구에 있다. 종래의 리얼리즘시 논의가 어떤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골이 깊은 견해차를 노정하는 데 그친 것은 '시의 특수성'과 '리얼리즘 미학의 보편성‘ 자체에 대한 심한 견해차 때문일 것이다. 시에서 리얼리즘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시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기도 한데 그러한 탐색조차 시의 양식적 속성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좋은 내포를 지니고 있는 용어는 다양한 범주와 의미를 지닌다. <리얼리즘>이란 용어도 마찬가지다. 이 용어는 우리 시사와 문학사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그 개념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사용하는 사람이나 그 용어들이 지칭하는 작품 경향에 따라 각기 다른 내포 범주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먼저 리얼리즘의 개념과 내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리얼리즘은 작가가 현실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자, 창작방법이며, 더 넓게는 문예사조적인 개념을 포함하는 용어다. 우선 리얼리즘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 이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틀이 되는 사상이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리얼리즘은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 작용하는 창작 방법으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작품에서 전형이나 현실 반영을 통하여 세계를 객관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방법적 모색이다. 그리고 이렇게 창작된 문학 작품의 일반적 경향인 문예사조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사실주의, 현실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문예상의 경향을 지칭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이 중 어느 한 개념 범주에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다. 여러 다양한 범주와 내포들이 서로 교섭하는 가운데 규정되는 개념 범주가 같이 사용된다. 한 마디로 창작과 수용의 전과정에 작용하고 있는 현실이나 작품을 보는 관점과, 각 단계나 과정에 작용하는 내포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시의 리얼리즘을 실현시키는 장치를 유형화하고, 리얼리즘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고착된 리얼리즘의 정신을 현실 반영에 있다고 보고, 그 기본적 요소를 사분화해서 시에 접맥하고자 한다. 시는 하나의 장치만으로 리얼리즘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시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데에는 여러 시적 요소나 작가의 정신이 같이 작용한다.
우리 문학에 나타난 리얼리즘의 양상을 서양의 리얼리즘 사조의 도입으로 보는 것은 속좁은 단견일 것이다. 문학이 인생과 갖는 관계에 비추어 볼 때, 리얼리즘은 사회와 문화의 일정한 상태에 상응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보는 것이 온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도 어느 정도 현실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연암 소설에 이르면 리얼리즘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의 본격적인 리얼리즘은 1919년 이후 <창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생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보려고 했다>는 말은 창조파 작가들이 이광수의 계몽문학을 거부하는 최초의 리얼리즘의 선언처럼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리얼리즘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어느 정도 정확한 것과 미숙한 것이 공존하고 있었다. 미숙한 경우는 리얼리즘을 자연주의와 구별하지 못하거나, 리얼리즘 및 자연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모든 시론이 그렇듯이 리얼리즘 시론 또한 시에 대한 곡진한 이해에 기여하는 한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좋은 시는 개별 작품마다 천차만별의 독자적 형상으로 창조되는 것이기에 어떤 일률적인 기준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리얼리즘시를 측정하는 편리하고도 특별한 ‘황금의 자’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기성의 시론을 특정한 시작품에 시험해 볼 때라도 작품으로부터 오는 반작용에 민감해야 창의적인 시론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얼리즘시를 쓴 시인으로는 임화를 비롯한 백철, 1930년대 후반의 이용악, 백석, 안용만, 50년대의 박봉우, 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 70년대의 김지하, 신경림 , 80년대의 고은. 박노해, 김남주, 이시영, 최두석, 90년대의 곽재구 등이 있다. 이들 중 리얼리즘시의 방법적 원리에 부합하는 시인의 시를 인용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들 시를 선정한 이유는 그들의 시가 사회 현실의 핍진한 형상화라는 면에서 돋보인다는 점이다.
2. 방법적 원리와 시적 양상
이 장에서 다룰 과제는 ‘시에서 리얼리즘의 성취에 기여하는 방법적 원리에 따른 시적 양상’이다. 리얼리즘시에는 리얼리티를 성취에 작용하는 미학적 원리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그러한 원리를 리얼리즘과 관련하여 탐색하는 것이 본 장의 내용이 될 것이다. 리얼리즘 성취에 기여하는 어떤 방법적 원리가 있다면 그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창의성이 발휘되고 예술적 성취 또한 이룩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 장은 리얼리즘시로 명명된 시작품 속에 구현된 창작 방법을 살핌으로써 리얼리즘의 시의 시적 특성을 살피게 될 것이다.
리얼리즘 시를 논의할 때, 시에 나타난 <리얼리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느냐 아니면 리얼리티를 획득하려는 시적 장치에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리얼리즘 논쟁의 향방은 크게 양분될 것이나, 이 장에서는 리얼리티의 문제와 시적 장치를 동시에 고려하고자 한다. 리얼리티 측면은 내용면과 작가의 정신면에서 고찰하고,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시적 장치는 기법적인 면과 서술면에서 고찰할 것이다.
가. 기법면과 서술면
리얼리즘이 사회 현상의 문학적 반영이라고 할 때, 문학의 모습은 몇 가지 기법적 양태를 띠게 된다.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고 한다면, 상황은 서민들에게 억압적이고 비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얼리즘 시인의 시 창작 태도는 강한 저항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고, 이 경우 리얼리즘시의 형태는 기법적으로 현장성을 리얼리티로 적용할 수 있다. 노동 현장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저당당한 채 생산의 수단으로만 취급당하며 기계처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성 회복에 기여하는 이런 시는 무엇보다도 체험에서 온 지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끄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넣는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 박노해, <하늘> 부분 -
인용시는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적 풍자가 잘 드러나 있다. 노동 현장의 비인간적 모습을 고발하고 동시에 노동은 오히려 신성한 것이고 건전한 삶의 원천이라는 논리로 확대 인식시키기 위해서 리얼리즘 시를 창작할 때는 현장 체험적 기법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억압적 현실 상황의 인식적 반영에서 요구되는 또 다른 기법은 고도의 풍자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해체시가 그 한 예다. 사실 세상이 완전히 타락한 것이라면 비극적 인간 그 자신에게나마 어떠한 진실이 가능하겠는가. 자신의 진실이 통하는 길로 시인은 풍자의 기법을 취하게 된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안에 온통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니 배꼽에 연결된 비닐끈들
저 굴뚝과 나는 간통한게 분명해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의 텅들을 하루 종일 뽑아 댄다.
- 최승호, <공장지대> 부분 -
인용시는 도시시의 한 현상인 산업 사회의 문명비판적 요소를 강하게 띠면서 비인간화를 고발하고 있다. 진창영은 이 생태주의적 도시시 현상은 해체시 이후 우리 시단의 한 대체물로 자리할 수 있으리라 보고 있다.이는 세태 반영과 풍자적 기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리얼리즘의 한 특성이지만, 해체의 방법적 정신은 곧 기존 질서의 부정 또는 자유 추구 정신이라는 모더니즘이기도 한다.
리얼리즘이란 용어가 단순히 기법상의 의미로 쓰인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즉 예술에 있어서 어떤 관찰된 디테일을 특히 정확하고 생생하게 그린 것을 지적하는 단어였다. 애초에는 이것이 어떤 특정한 수법을 다른 수법들과 구별하기에 충분할 만큼 정확한 용어로 간주되었다. 즉 이상화에 반대되는 테크닉으로서의 사실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시의 리얼리즘을 실현하는 데에는 여러 시적 요소들이 같이 작용한다. 즉 시적 화자, 시의 언어, 시적 상징이나 비유, 시의 운율 등이 시의 리얼리즘을 위해 동원된다. 이런 다양한 시적 기법이나 요건 중에서 서술 구조도 시의 리얼리즘을 실현하는 중요한 장치다. 일단 시를 작가의 소망을 충족하는 이야기, 그 중에서도 사회적 상징 행위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시인의 소망이나 욕망의 충족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 즉 현실 원칙의 검열을 받고 상징화된 이야기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회적 상징 행위로서의 이야기에서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이야기의 현실반영, 곧 현실 표상이라는 리얼리티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에 가장 유용한 이야기로서 기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경험적 사건을 작품화할 때, 사용하는 기본적인 틀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그런 작품의 기본 이야기를 비롯하여 그 밖의 중요한 서사들에서 작자 및 등장 인물의 욕망과 무의식 내지 작품의 메시지들을 찾아내고, 거기서 또 사회 구성의 성격을 조명해 낼 때, 작품의 의미를 한층 풍요하게 포괄적으로 해설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관점은 현실 재현 표상적 기능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리얼리즘적 관점에도 부합하게 된다.
특히 이야기나 사건을 전달하는 서술 구조는 리얼리즘 실현에 가장 널리 쓰이는 방식이다. 한 편의 이야기는 인물이나 상황의 전형을 창조하고, 이를 통하여 현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시의 내용은 수용 과정에서 나름의 정서적 반응도 일으키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독자에게 읽히지 않으면 작가의 그 고상한 뜻은 전달될 수 없다. 시를 비롯한 모든 문학 작품은 독자를 만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서술 구조는 리얼리티 확보에 크게 기여한다 고 할 수 있다. 물론 심훈의 <그날이 오면>과 같은 서정시에서처럼, 직접적이고 강렬한 정서를 표현하여 현실에 대한 시인의 현실인식을 전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육사의 절정에서처럼 상징적 형상을 창조하여 일제 강점기의 암흑과 같은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줄 수도 있다. 이런 시 역시 주관적이고 직접적인 기술이지만, 나름의 시적 성취를 이룩하고 있다. 그리고 당대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리얼리즘적인 시적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야기나 사건을 전달하는 서술시는 리얼리즘 실현에 가장 널리 쓰인 방식 중의 하나다. 한 편의 이야기는 인물이나 상황의 전형을 창조하고, 이를 통하여 현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시의 내용은 수용과정에서 나름대로 정서적 반응도 일으킨다. 즉 전형과 현실반영이 이루어진 문학 작품은 주로 독자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내포적 총체성 실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술시의 미학적 장점은 산문소설에 등가되는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여탁은 서술시를 통하여 리얼리즘이 성취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서술적인 구조를 통하여 형상화되고 있는 시의 서술구조를 이루는 이야기나 사건이라는 시적 소재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여 리얼리즘적 성취를 이루는지 살펴보자.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싯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
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
아버지에게 야단 맞은 날은
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
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워 주며
멀뚱멀뚱 착한 눈을 들어
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
못줄을 잘 못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사밥에 단자를 갔다고
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시적 아침에도
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
꼴망태 이에 가득 이슬 젖은 게들을 걷어와
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만벌매기가 끝나면
동네 일꾼들이 올린 새들이를 타고 앉아
상머슴 뒤에서 함박 웃던 큰 입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 장터로 서커스를 한판 보러 가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
사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갔다고 하며
그믐날 확독에서 떡을 치는 어깨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꾸려준 옷보리를 들고
주춤주춤 뒤돌아보며 보름을 쇠고
꼭 오겠다고 집을 떠난 후꾸도는
정이월이 가고 삼짇날이 가도 오지 않았다.
장사가 잘 되는지 몰라
- 이시영, <후꾸도> 전문 -
이 시는 이시영의 첫 시집인 <만월>(창작과 비평사, 1976)에 실린 서술시의 하나다. 비교적 긴 시인데, 앞뒤에 현재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중간 부분에 과거의 추억이 삽입되고 있다. 한편의 이야기가 서술되기보다는 사건이 제시되고 있다. 이 시에는 시적 화자가 골목길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좌판 사과 장사의 얼굴에서 어릴 적 친구의 모습을 되새기고 있다. 웬만큼 살았을 집안의 아이였던 화자의 눈에 비친 우리 근대사의 질곡이 잘 드러나 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집에서 화자의 집으로 와서 꼴머슴으로 살았던 친구의 삶이 어린 아이의 시점에서 진솔하게 묘사되고 있어, 시적 리얼리즘을 성취하면서 독자에게 쉽게 읽힌다.
비록 이 시가 후꾸도라는 인물을 통하여 농촌을 떠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그치고 있지만 이 시는 나름의 진솔함을 전달하는 여러 장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수미상관의 반복, 아련한 추억 속에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여러 기억들을 반복함으로써 한 인물의 형상과 그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울러 장년이 된 화자의 판단 유보적인 어법도 기법적 측면에서 리얼리즘의 성취를 위한 중요한 장치가 되고 있다. 이런 시적 어법이 이 시의 내용을 더욱 사실적으로 느끼게 하면서 근대화의 도정에서 우리 민중들의 삶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에 ‘언뜻 다가서려’는 우리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리얼리즘이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서술시는 이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런 결과로 독자에게 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어렵게 표현하기 경쟁을 하는 난해시가 독자들을 혼란시키는 것과는 다른 효과를 지닌다. 너무 쉽게 써서 읽을 가치가 없다는 일부의 우려는 리얼리즘시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대중성>이란 물론 정신적 자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주로 기법상의 문제다. 즉 <형식주의>의 난해성을 배격하고 대중적인 소박함과 전통적인 명료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어렵기만 한 '문학주의'의 난해시를 멀리하고 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시를 찾고 있다. 대중성의 요소로서 현대 독자를 어필하려는 노력은 리얼리즘을 성취하는 시적 모색의 한 방식인 것이다. 대중성이란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기 적당한 요소로서 난해한 요소보다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건이나 이야기를 통하여 독자들의 시적 이해를 돕는 것이다. 대중성에 의한 시 창작은 기초적인 문학 지식으로도 시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그대로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최대의 장점이다.
1928년에 전개된 시의 대중화 논의에서 김기진은 프로시가의 대중화 방법으로서 소재를 사건적, 소설적인 데서 취할 것, 시어는 세련된 것을 피하고 소박하고 생경한 <된 그대로의 말>을 사용할 것, 노동자들의 낭독에 편한 리듬을 창조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또 이같은 시를 단편서사시로 명명하고 임화의 <우리 옵바와 화로>를 전형적인 작품으로 들었다.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의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냄새가 나지 않니-하시든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날마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곡을 미워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우리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장 알았어요.
- 임화, <우리 옵바의 화로> 부분 -
시어의 장황한 구사에서 보듯 인용시는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차원에서는 미흡한 점이 있지만 리얼리즘의 성취면에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제사공장에 다니다 쫓겨난 여공이고, 시적 주체는 그러한 배역을 소화해 내는 자이다. 시적 주체를 노동자 배역을 맡아 소화하는 자로 설정한 것은 노동자 아닌 카프 시인으로서 임화가 고심한 발로로 해석할 수 있다. 지식인이 직접 노동자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배역을 매개로 하는 것이 진실성의 확보에 더욱 유리하다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임화의 시는 긴 형식을 주로 하면서 서사구조를 적절히 가미하고 있다. 또한 노동현실이나 계급적 분노, 미래에의 기약 등을 주로 직절적인 어조로 설명한다. 그리고 심한 반복에 의한 리듬의 형성과 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이야기를 적절한 극화없이 털어놓는다.
김형원은 1920년대의 주된 흐름이었던 낭만시에서 비켜서서, 생활과 당대 현실의 수용을 주장하였다. 이는 문학이 언어유희를 벗어나 광범위한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평이한 일상 구어체로서의 서술시는 사실 대중적 성격을 띠게 마련이며, 대중시로서 매우 적합한 유형일 수 있다. 덜 세련된 듯한 단순성, 소박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린애다운 유아성을 서술시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동요나 최근 부각된 랩 음악을 비롯한 대중가요의 노랫말이 서술체임은 서술시가 대중들의 취향에 어필한다는 증거라 하겠다.
나. 정신면과 내용면
리얼리즘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정신, 즉 주제의식이다. 아무리 서정시일지라도 그 시적 관심의 대상 즉 주제의식이 사회적 현실을 향하고 있으면 그것은 리얼리즘시인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시정신과 연관되어 있고 이것이 작품의 지향성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판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본질적으로 서사물이 아니기 때문이고 아무리 구체성의 시일지라도 언어적 형상화의 비중이 큰 장르이기 때문에 그 판별 기준을 서사성이나 구체성에 둘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 곧 시정신과 이것이 드러난 시적 지향성에다 두어야 될 것으로 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나선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원, 즉 카프 회원들은 적극적인 저항과 사회 참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런 흐름은 기존의 낭만시에 대한 한계 인식에서 비롯된다. 박종화의 <앞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술은 힘의 예술이다. 가장 강하고 뜨거웁고 매운 힘 있는 예술이라야 할 것이다. 미온적인 사실문학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고뇌를 건질 수 없으면 시대적 불안을 위로할 수 없다.는 박종화의 이같은 언명은 기존의 낭만시로서는 시대적인 모순과 고뇌를 드러낼 수 없다는 철저한 반성을 그 바탕에 깐 것이었다. 자기 시의 반성적 태도 위에서 현실인식을 추구한 대표적인 예로 주요한, 양주동, 이상화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이상화는 <백조>동인으로 참가하여 현실에서의 절망과 탈출을 추구해 왔지만 곧 이어 <파스큘라>에 가담하면서 이 같은 태도를 버리고 있다. 작품 <선구자의 노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은 이상화의 이같은 변모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상화는 밀실이나 동굴 등을 통하여 보인 현실에 대한 불신이나 소극적인 저항 내지 수용을 변모시켰던 것이다.
식민지적 궁핍상이나 무산대중에 대한 뚜렷하고 분명한 관심은 ‘사회 저항과 현실 참여’라는 내용의 문학을 추구했다. 이같은 관심은 1922년 <무산 계급해방을 위하여 문화를 가지고 싸운다>는 슬로건 아래 염군사의 조직을 불러오고 이듬해는 인생을 위한 예술의 건설을 목표로 한 파스큘라를 조직케 한다. 이 파스큘라는 일제 식민지 시대 프로문학의 제1기를 담당하여 교도적 계몽으로 프로문학을 소개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염군사와 파스큘라는 사회적 관심과 문화적 교양 사이의 상대적 우열 때문에 미묘한 불화 관계를 지속하다가 1925년 카프로 해체 통합하기에 이른다. 1920년대에 두드러진 활동을 한 시인은 임화, 김기진 등에 국한해야 할 것이다. 카프 이론가들은 부르조아 문예가 기교의 아름다움이나 인종을 강요하는 데 비하여 프로 문예는 적극적인 현실 변혁과 사회정의를 주장한다고 하였다.
사상적 저술보다도 문학 작품이 존중될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수준작일 경우 이념이나 사상의 차원보다 본질적인 정신의 차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시인들이 무슨 특별한 존재라기보다 문학적 형상 자체가 창조과정의 정신 작용을 생생하게 육화시켜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시의 경우 다른 장르에 비해 시적 주체를 매개로 창작자의 정신 작용을 더욱 직접적으로 핍진하게 드러내는 양식적 속성이 있고 그렇기에 애매하게 보이기 쉬운 시정신 논의가 구체성과 생산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시가 인간 정신 작용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술의 한 양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육체만의 인간을 상정할 수 없기에 정신이란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그러한 정신의 작용이 예술의 한 형태로 정착된 것이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작품 속에는 창작 주체의 정신이 응축되어 드러나 있고 독자들은 그 시를 통해 시인의 정신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정신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시적 자아 혹은 시적 주체와, 시적 대상 혹은 세계현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시 속에 투영되는 것이다. 특히 리얼리즘 시정신은 시적 주체와 세계현실의 긴밀하고도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구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수준에 오른 작품일 경우 시정신은 시인의 감각과 체험이 육화된 상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논리나 사상의 차원을 넘어선다.
작가는 도덕이나 정치의 문제에 관하여 뚜렷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성격에 대해, 정열에 대해, 인간사에 대해 또한 사회의 모든 사상에 대해 절개수술을 가해야 한다.그리하여 작가의 충실한 리얼리즘은 낡은 상황을 부수면서 새로운 현실을 형성해나가는 독자적 기능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최두석은 <시와 리얼리즘>이란 자신의 논문에서 리얼리즘시 정신, 즉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려는 마음’이 진보주의, 비관주의, 현실주의와의 관관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고 보고 있다. 이 말은 연구 대상 시인들에게 그러한 경향이 농후하다는 것이지 이 세 가지가 리얼리즘시 정신의 전부란 의미는 아니다.
첫째, 진보주의적 경향이다. 근대정신 혹은 현대정신의 특징으로 진보에 대한 신념을 내세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진보란 인간 생활이 전반적으로 한층 좋은 상태로 이행해가는 것을 의미하고, 진보에 대한 신념이란 미래에는 사태가 좀더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절실할 수밖에 없는 일제 강점기에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진보주의에 경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초기 카프 시는 정신의 작용을 생생하게 형상화로 보여 주지 못했다. ‘뼉다귀’시라는 호칭이 생겨날 정도로 정신이 형상으로 구현되지 못하고 이념을 구호의 형태로 생경하게 노출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진보에 대한 절박감 혹은 조급함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진보주의적 사유가 시의 속성에 대한 천착과 변증법적 상관관계를 맺지 못함으로써 선전 선동성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로 치달았던 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에게 있어 정신의 단련은 시적 성취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정도다. 카프 시 가운데 진보주의적 사상이 단련되면서 폭과 깊이를 획득해가는 모습은 임화에게서 가장 대표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임화의 진보주의가 시의 속성과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단련되는 것은 다다이즘 실험시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진영 시의 새 지평을 타개한 것들”로 평가되고 있는<네거리의 순이> 등의 단편서사시를 창작하면서부터이다.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나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나이가
젊은 날을 싸움에 보내든 그 손으로
지금은 젊은 피로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드리고 이 추운 밤 가느다란 그 다리가 피아노줄같이 떨리겠구나
또 이봐라 어서
이 사나이도 네 크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곤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도락구처럼 길거리를 달아나는구나.
- 임화. <네거리의 순이>, 부분 -
이 시는 어조와 화법이 실감나게 형성되어 있다. 어조나 화법의 형성은 시적 형상을 창조하는 데 기본이 된다. 이 시는 이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지 않고 형상적 자질로서의 서사로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 시의 주된 화제는 오빠의 친구이자 누이의 연인인 ‘근로하는 청년’에 대한 것으로 그는 현재 노동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 감옥에 있다. 시적 서사에 의해 상황과 인물이 구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시인이 젊음을 유달리 강조하고 청년의 용감성을 부각시키는 데서 창작 주체의 정신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청년은 진보를 이룩할 위대한 사명을 지닌 자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추론하자면 ‘임화의 진보주의적 정신은 진보를 이룩하기 위하여 매진하는 청년의 형상 속에 투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비관주의적 경향이다. 일제의 식민지 상태에 있던 이 땅의 시인들이 사회의 발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에 당대 시인들이 진보에 대한 열망이나 신념을 위주로 하는 시를 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적 신념이나 열정은 일제 파시즘의 진군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와 관련된 것이 바로 비관주의적 정신이다.
사회의 진보에 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있겠는데, 1930년 이후의 일제 강점기는 아무래도 비관론이 실감났던 시기이다.당시 일제 파시즘의 폭압 아래서 그들을 물리칠 민족 내부의 힘을 감지하지 못한 시인들에게는, 비록 세계사가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간다해도 그것이 우리 민족사와 연결될 수 없었던 관계로 시인에 따라 혹은 사회적 상황 악화에 따라 절망감에 깊숙이 빠져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러한 경향을 시정신의 비관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호 이리하야 내 청춘은 반 넘어 늙었건만
행락도 사랑도 모르는 채 반 멈어 늙었건만
오 모든 것은 지나간 세월과 함께 자최도 없는 꿈이든가
어이넚다 기가 차다 내 오늘날 한 개의 가라지 신세될 줄이야
참으로 참으로 나는 한 개의 가라지
죽도 밥도 못되는 한 개의 가라지
아아 어느 날 어느 때 꺽어져도 쪼드러져도
누구하나 원통해할 이 없는
- 이찬, <가라지의 설움> 부분 -
가라지 즉 강아지풀에 시적 자아를 비유한 서정시로서, 작가인 이찬은 과거 카프에 속했던 시인들 둥에서 대표적으로 비관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가라지의 설움’이라는 제목에도 나타나듯 비관적 정서가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미래의 비관적 전망에 대해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임화의 태도라면, 절망에 빠져 자신을 적나라게 드러내는 것이 이찬의 태도다. 비관주의적 경향을 보인 중요한 시인으로 오장환과 백석이 있다. 둘은 모두 국가 상실감을 통절하게 앓아낸 시인인데, 그에 대한 시적 대응양상은 다르다. 오장환이 전래적인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였다면, 백석은 급격하게 사라져가는 전래적인 것들을 재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렸다.
셋째, 현실주의적 경향이다. 사회의 진보를 지상의 과제로 두는 진보주의는 물론이고 이상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절망하는 비관주의에도 바람직한 세계에 대한 열망은 내포되어 있다. 사회의 변혁을 꿈꾸며 기획하는 것이 진보주의자의 입장이라면 변혁의 가능성을 믿을 수 없어 절망감에 시달리는 것이 비관주의적 입장인 셈인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암담한 현실일지라도, 그리하여 진보가 아무리 절박할지라도 현실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끌어안는 태도이다. 즉 바람직한 세상은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현실세계의 변화를 통해 이룩되는 것이라는 점을 창작 태도 속에 제대로 육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진보가 아무리 절박하더라도 이상을 당위로 경화시키지 않은 채 현실에 대한 창작적 대응을 유연하고 집요하게 수행하는 자세를 상정할 수 있는데, 그러한 자세를 떠받치는 시정신을 현실주의라 할 수 있다. 현실주의는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려는 마음 가운데 우선 세상을 바로 보는 문제에 역점을 두는 것으로서, 당대의 지배적 세력에 대한 영합이나 순응을 의미하는 현실추수주의와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눈 덮인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구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 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친다.
- 오장환, <북방의 길> 전문 -
인용시에서 기찻간 농부 일가족의 정경이 예사롭지 않다. 파탄 상태에 빠진 당시의 조선 농민이 자신의 생활 근거지로부터 쫓겨가는 장면을 핍진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시적 주체는 화자 차원으로 물러나 있고, 그 점이 당대의 민족 현실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즉 시인의 주관 개입을 가능한 한 억제함으로써 효과를 본 경우인데, 그 점은 시인의 울고 싶은 마음이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우는 어린애의 모습으로 객관화된 데서도 드러난다. 이 시에서 시적 주체는 진보에 대한 열망을 숨긴 채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를 쓰는 시인의 내면에는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려는 간절한 마음’이 깔려 있다고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눈 덮인 철로는 더욱 싸늘하였다.”나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구에게서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와 같은 시구를 산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농군에게서 송아지 냄새를 맡고 철로의 싸늘함을 느끼는 것에서 이 시는 시적 대상과의 긴밀한 상관 관계를 내장하고 있다고 하겠다.
3. 기본적 요소와 시적 특성
본 장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씌어진 리얼리즘시의 시적 특성을 고찰하는 차원에서 집필되는만큼 리얼리즘시에 나타난 기본적 요소와 시적 특성의 고찰을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시의 이해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여기서 리얼리즘시의 기본적 요소를 유형별로 살핀다는 것은 ‘어떻게 한 편의 리얼리즘시가 되나’를 가늠해 보는 것이니 시에 대한 일종의 생성론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성론적 접근이야말로 유기적 형상으로서 시에 대해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 되리라 본다. 리얼리즘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시는 다른 사조적 특성을 가지는 시와 분명 구별되는 특성적 원리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 본 장의 내용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리얼리즘시의 기본적 구성 요소로 진실성, 전형성, 주체성, 산문성,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체를 형성하는 리얼리티로서, 시의 구성적 특성을 이룬다. 필자는 이 네 가지 항목들을 비슷한 것끼리 묶어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이 두 가지 항목들은 유기적 형상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위한 추상의 통로로서, 리얼리즘시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다. 이들 항목 혹은 논의의 축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고, 본 장의 논의 또한 그러한 상관 관계에 유의해서 써나갈 것이다.
가. 전형성과 진실성
엥겔스는 리얼리즘을 정의하여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라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물론 극히 일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마르크스주의 사상 전체를 그 배후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전형성>은 바로 이 정의에서 발전된 것이며 리얼리즘의 문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이론가들에 의하건데 <전형적인 것을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전형적인 것은 <미래 사회발전의 법칙과 전망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형성>의 개념은 관찰된 현실을 직접적으로 재현한다는 <리얼리즘> 종래의 의미를 변모시킨다. 즉 <리얼리즘>은 그 대신 어떤 원칙에 입각한 조직적인 선택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리얼리즘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전형’ 개념이 함축하는 정확하고도 원만하며 포괄적인 현실인식의 중요성을 제대로 살려낼 필요성이 있다. 시적 전형론의 유효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시를 통해서는 현실세계에 대한 적실하고도 유연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현실세계에 대한 정확하고도 원만하며 포괄적인 인식을 시적 형상으로 구현하는 문제가 다름 아닌 시적 전형의 문제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시 속에 구현된 형상이 현실세계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결부되는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형성의 논의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리얼리즘시의 창작 방법의 하나로 전형성의 추구를 논한다는 것은 개별적 형상이 어떻게 현실세계의 보편적 문제를 끌어안을 수 있느냐의 과제를 탐색하는 것이다. 예술적 현실 반영이 “특정하고도 본질적인 한 측면에서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인 이상 시적 전형론의 초점은 시적 형상을 통해 어떻게 현실인식의 순간성과 파편성을 극복하느냐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전형의 개념이 시에 적용될 수 있다면, 그 대상은 서정적 주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정적 주체가 환기하는 정서, 혹은 정서적 체험이 되어야 한다.리얼리즘의 성취 혹은 시적 성취를 염두에 둘 때, 시에서 전형 논의는 최대한으로 유연성을 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전형론에 의해 리얼리즘의 성취가 판가름나는 게 아니라 전형성의 구현 정도가 리얼리즘 성취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시는 서정시임으로 정서에서 전형성을 찾아야 한다’는 식의 연역적 논리를 앞세우기보다는 리얼리즘의 성취와 관련하여 ‘개별적 형상이 얼마나 현실세계의 핵심적 문제를 끌어안고 있느냐’를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넷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연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여승> 전문 -
인용시의 시적 응축은 우선 과감한 생략을 통해 이루어지는 바 가령 지아비의 행적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인도 끝내 알아낼 수 없던 사고로 죽었을 거라는 추정을 하게 하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이 시의 시적 응축은 주체의 깊은 슬픔이 행간에 스며들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해 인용시의 여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에는 시적 주체의 막막하고도 안타까운 마음이 적셔져 있다. 한 여승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불과 열두 행의 시구에 수용되어 있지만 시의 형태에는 조금도 무리가 가지 않고 있다. 산문적 화장과 시적 응축이라는 면에서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경지를 보여준 경우다.
그런데 문제는 <여승> 속에 구현된 여인의 기구한 생애가 당대의 식민지 현실 전체와 연결된다는 데에 있다. 금전찬에서의 옥수수 행상을 하다가 승려가 되고 가지취의 냄새가 나는 여인은 특별한 개인이지만 그녀의 생애는 가족이 붕괴될 지경의 당시 농촌현실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인용시의 여인은 개별적 형상이로되 생존 자체가 의문시 될 정도로 열악해진 일제강점기의 민족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용시의 ‘여승’의 형상에서 전형성의 구현을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각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인의 정신과 삶이 당대의 핵심적 문제와 결부되지 않는다면 정형성의 추구는 성공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러한 핵심적 문제가 시적 주체와의 상관 관계 속의 ‘시적 대상’에 구현된 경우와 시적 대상과의 상관 관계 속의 ‘시적 주체’에 구현된 경우가 있는데, <여승>이 전자에 속한다면, 이용악의 <5월에의 노래>는 후자에 해당한다. 장시가 아닌 보통의 시에서 시적 형상은 시적 대상을 중심으로 통일되거나 시적 주체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하여 <여승>의 경우 시적 대상에서 전형성을 찾고, <오월에의 노래>의 경우, 시적 주체에서 전형성을 찾은 것이다.
시에서, 특히 리얼리즘시에서 실감이 감동의 원천이라면 진실성의 논의는 회피할 수 없는 과제라 하겠다.원론적으로 사실주의적 시는 개연성, 곧 경험적으로 가능한 것, 또는 조회 가능한 시유형이다. 요컨데 리얼리즘적 시에서는 진실성에의 충실성이 기본적 의무조항으로 요청된다. 시에서 실감이란 진실성에서 나온다. 진실성의 구현은 시적 성취에 이르는 데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면서 리얼리즘시의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진실성이란 ‘시 쓰는 동기가 순수하고 올바르다고 해서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 창작 동기의 순구성은 시에서 진실성을 구현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조건인 것이다. 이것은 리얼리즘시의 요건인 ’세상에 대한 진실한 마음‘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시의 진실성은 ’시의 진술과 그 지시 내용이 일치한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주체의 세계에 대한 진정한 마음이 시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그러한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가의 문제로 남을 것이다.
사회 현실에 대한 정당한 관심 혹은 올바른 정치의식은 리얼리즘시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사항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중요한 것은 사회의식 혹은 정치의식을 시 속에서 제대로 소화해 내는 문제다. 시에서 사회의식을 배제해서 작품으로서의 파탄을 막을 수는 있지만, 그런 식의 창작은 리얼리즘의 성취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시적 성취 또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눈보라는 하로 종일 북쪽 철창을 따리고 갔다
우리들이 그날 회사 뒷문에서 ‘피케’를 모든 그 밤같이........
몇 번 몇 번 그것은 왔다 팔 다리 코구녕 손꾸락에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푸고 쓰린 것보다도 그 뒤의 일이 알고 싶어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늙은 어머니와 굶은 안해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풀리게 하지나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모두들 다 사나이 자식들이다
언제나 우리는 말하지 않았니
너만이 늙은 어메나 아베를 가진 게 아니고
나만이 사랑하는 계집을 가진 게 아니라고
어메 아베가 다 무에냐 계집 자식이 다 누에냐
세상에 사나이 자식이 어덯게 xx이 보기좋게 패북하는 것을 눈깔로 보느냐
올해같이 몹시 오는 눈도 없었고 올해같이 치운 겨울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계집애 어린애까지가
다 기계틀을 내던지고 일어나지 않았다
동해 바다를 거쳐오는 모진 바람 회사의 뽐뿌, 징박은 구두발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속에서도 우리는 이십 일이나 꿋꿋이 뻗대오지를 않었니
해고가 다 무에냐 끌려가는 게 다 무에냐 그냥 그대로 황소같이 뻗대이고 나가자
보아라! 이 치운 날 이 부람이 부는 날! 비누궤짝 짚신짝을 싣고
우리들의 이것을 이기기 위하야
구루마를 끌고 나아가는 저 어린 행상대의 소년을.......
그러고 기숙사란 문 잠근 방에서 밥도 안먹고 이불도 못 덮고
이것을 이것을 이기려고 울고 부르짖는 저 귀여운 너희들의 계집애들을......
- 임화, <양말 속의 편지> 전문 -
단편서사시의 대표작 하나다. 시적 수준을 확보하면서 당시의 노동운동에 이만큼 밀착된 작품도 드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의 제재는 파업이고, 시의 위상은 파업투쟁 중인 동료 노동자에게 보내는 ‘양물 속의 편지’로 상정되어 있다. 인용시에서 창작 주체의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은 노동문제로 집중돼 있고 그것은 임화의 카프 시인다운 면모인 셈이다. 파업투쟁을 이끄는 선진적 노동자를 시의 화자로 삼아 그에게 말하게 함으로써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데 수반되기 쉬운 작위성을 상쇄하고 있다.
다. 주체성과 산문성
여기서 말하는 리얼리즘시에 있어서 주체성이란 ‘시 속에 반영된 창작 주체의 형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체성, 즉 시적 주체의 형성은 섣부른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한 시인의 삶의 무게가 실려 있을 때 진실성의 구현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시 속에 반영된 창작 주체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시적 주체는 시 속에 형상화된 시인의 자화상인 셈이다. 물론 시인의 모습이 사진처럼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강조와 생략 등의 예술적 변용을 거쳐 드러나는 것이 시적 주체라 하겠다.
시적 주체가 진실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인 자신의 삶에 솔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시적 주체의 자기동일성 확보와 연결된다. 여기서 자기동일성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주체와 세계 사이의 긴밀한 상관 관계가 리얼리즘시의 요체인 이상 세계 현실 또는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게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 시적 주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형상일 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 내가 무모한 돌격을 시험했을 때
적이여! 너는 아픈 타격으로 전진을 위한 퇴각을 가르치었다.
때로 내가 비겁하게도 진격을 주저했을 때,
적이여! 너는 뜻하지 않은 공격으로 나에게 전진을 가르쳤다.
만일 네가 없으면 참말로 사칙법도 모를 우리에게,
적이여! 너는 전진과 퇴각의 고등수학을 가르쳤다.
패배의 이슬이 찬 우리들의 잔등 위에 너의 참혹한 육박이 없었더라면,
적이여! 어찌 우리들의 가슴 속에 사는 청춘의 정신이 불탔겠는가?
오오! 사랑스럽기 한이 없는 나의 필생의 동무
적이여! 정말 너는 우리들의 용기다.
- 임화, <적> 부분 -
인용시는 카프의 활동 정지 및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임화의 시적 변모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시적 주체가 의식적 배역을 포기하고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즉 <적>은 창작 주체의 형상으로서의 시적 주체가 직접 전면에 등장하는 시다. <우리 오빠의 화로>에서의 ‘저’와 <적>에서의 ‘나’는 위상이 다르다. 시적 주체가 배우처럼 여공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전자라면 시인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측면이 강한 경우는 후자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근대시인 혹은 현대시인의 요건 가운데 하나가 개성적인 시세계의 확보라고 할 때 그것은 많은 경우 개성적인 시적 주체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여기에서 개성적인 시적 주체는 궁극적으로 시인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차원과 결부되고 인용시 <적>은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추라한 지붕 썩어가는 추녀 위엔 박 한 통이 쇠었다. 밤서리 차게 나려 않는 밤 싱싱하던 넝쿨이 사그러붙던 밤 지붕 밑 양주는 밤새워 싸웠다. 박이 딴딴히 굳고 나뭇잎새 우수수 떨어지던 날 양주는 새 바가지 뀌어들고 초라한 지붕 썩어가는 추녀가 덮인 움막을 작별하였다.
- 오장환, <모촌> 전문 -
앞에서 살펴본 <적>의 시적 주체가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면 인용시 <모촌>의 경우 시적 주체는 화자의 차원으로 머물러 있다. <모촌>의 주된 시적 대상은 박이 쇠는 초라한 지붕 밑 ‘양주’인데 그들이 밤새워 싸운 것은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일 것이다. 앞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생활 근거로부터 떠나게 되는 유랑농민의 상황이 박 한 통을 매개로 간명하게 그려져 있는데 응축과 생략이 고도로 구사된 일종의 이야기시라고도 하겠다. 이 시에서 집중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움막을 떠나는 양주’는 당대의 민족현실을 대변해주는 형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에 대한 주체의 반응은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시 속에 반영된 창작자 의 형상인 시적 주체가 화자의 차원으로 물러나 시적 대상에 대한 서사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촌>의 시적 주체는 화자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리얼리즘의 성취에 기여한 경우다.
우리의 시문학사에서 해방 정국은 어느 시기보다 사회현실 문제 혹은 변혁운동에 대해 적극성을 띤 시적 주체가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시기였다. 이와 같은 시적 주체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적 주체의 등장을 해방 정국의 리얼리즘시의 일반적 특성으로 확대해석해도 될 듯하다. 시대적 상황이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할 때 시적 주체가 세계현실에 적극성을 띠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가 응축적 양식이다. 그런데 리얼리즘시에서의 응축이란 산문적 확장과 무관할 수 없다.창작 주체와 세계 현실 사이의 접점 형성이 산문적 확장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산문적 확장이란 시적 주체와의 상관 관계 속에 드러난 세계현실을 의미한다. 세계현실에 대한 탐색으로서 산문적 확장이란 진정한 의미의 시적 응축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산문적 확장과의 팽팽한 긴장 관계에 의해 시적 응축이 생생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적 응축이란 시로서의 형태적 완결성 혹은 예술성을 뜻한다. 하지만 형태적 완결성 혹은 예술성의 표준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한편 시에서의 산문적 확장이란 새롭고도 충실한 내용의 확보를 지향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산문적 확장이란 ‘언어의 서술’에, 시적 응축이란 ‘언어의 작용’에 연결된다. 즉 산문적 확장과 시적 응축의 대립이 배타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상승효과를 거둘 때 참된 시가 산출된다고 하겠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르다
- 이용악, <북쪽> 전문 -
시적 응축이 고도로 구사된 짧은 서정시다. ‘북쪽’과 ‘그 북쪽’ ‘얼어붙을 때’와 ‘풀릴 때’, ‘시름’과 ‘마음’이 서로 짝을 이루면서 호흡의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고 있다. 그러한 운율은 이 시의 비장한 어조와 긴밀히 호응하고 있다. 시의 전체적 짜임새를 보자면 “북쪽은 고향”을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로 변주시킴으로써 고향의 상실을 먼저 제시하고,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를 통해 고향과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드러낸 다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르다”를 통해 고향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완곡하게 표현하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인용시 <북쪽>에서의 시적 응축이 특별히 주목되는 이유는 산문적 확장과의 긴장관계를 팽팽히 유지하고 잇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산문적 확장의 핵심이 되는 시어는 아무래도 “여인이 팔려간 나라”일 것이다. 여인이 팔려간 나라로서의 고향은 단순히 시인 이용악의 고향에 그치지 않고 당대 우리 민족의 현실을 집약시켜 대표하는 곳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르다”와 같은 시구에서는 당대의 민족 현실에 대한 시적 주체의 하염없는 안타까움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시의 양식적 특성의 하나가 내포와 함축이다. <북쪽>에 돋보이는 내포와 함축은 단순히 응축만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산문적 확장과의 고도의 긴장 관계 속에서 시적 응축이 이루어짐으로써 형성될 수 있었다. 이 시는 시적 응축이 산문적 확장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작용해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시리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깐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 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 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붙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릅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든 해
사냥개 꿩을 쫓아 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대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족을 향한 발자국만 눈우에 떨고 있었다.
- 이용악, <낡은 집> 부분 -
일제 강점기의 시 중에서 산문적 확장이라는 면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주로 서사적 골격에 의해 시가 전개되고 있는 바 당대의 대표적인 이야기시라 할 만하다. 이 시에서 다루어진 중심 사건은 털보네의 야반 도주이고 그것은 일제의 통치에 따른 민족 민중의 궁핍화 현상의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낡은 집>은 다루어진 사건의 골격이 웬만한 단편소설을 상회할 만큼 산문적 확장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시다.
시에서 서사는 시적 주체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구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용시 <낡은 집>의 경우 시적 주체는 서사의 서술자, 혹은 이야기 화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화자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호흡과 정서를 시구 속에 은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고 있다. 이것은 시적 서사의 특징이거니와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 것은 시적 응축과 긴장관계 속에서 산문적 확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산문적 확장과 시적 응축은 적당한 비율로 절충되는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산문적 확장과 시적 응축은 서로 최고 최선의 상태를 지향한다. 인용시 <북쪽>은 시적 응축에, <낡은 집>은 산문적 확장에 최대한으로 밀착해서 긴장이 조성된 작품이다.
사회현실 문제에 대한 실천적 관심이 산문적 확장을 불러오게 마련이라는 점은 인용시에서 뿐만 아니라 해방 정국의 진보주의적 경향의 시에서도 확인되었다. 진보주의적 열정에 의해 추진된 광범위한 확장은 리얼리즘시의 주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적 과제의 해결에 조급한 나머지 산문적 확장이 시적 응축과의 긴장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리얼리즘시의 문제로 지적된다고 하겠다. 임화의 <깃발을 내리자>나 이용악의 <하늘만 곱구나> <기관구에서> 등은 시적 응축이 제대로 작용하는 가운데 산문적 확장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어 시적 긴장이 증폭된 시라고 하겠다.
4. 결 론
시 연구 차원에서 리얼리즘을 문제 삼는 이유가 참다운 시에 대한 올바른 해명에 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할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리얼리즘시의 전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문학 외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와 왜곡된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들과 대결하여야 했으며, 문학 내적으로는 샌티멘탈리즘이나 기교주의, 순수서정시나 난해시와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리얼리즘 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얼리즘시가 이런 위상을 확보하기까지 몇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측면과 한계가 있었다. 먼저 서술적인 기법을 통해서 시의 대중화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고, 다음은 시적 주체의 시정신에 있어서 사회변혁과 저항이라는 당대적 이데올로기에 부응했다는 점이다. 전자는 시적 기교나 언어적 수사보다도 이야기 중심의 서술구조를 통해 시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후자는 시적 주체의 리얼리즘 정신의 반영을 통해 시가 개인적인 효용성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거나 , 정치, 사회와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 시는 언어의 중요한 특성인 언어적 함축성의 실현에는 실패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카프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의 신경향파 리얼리즘시는 당대적 현실의 적확한 묘사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적 형상화나 미학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편내용주의에 빠졌다거나 이념만 있는 뼈따귀 시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에 가서 이용악, 백석, 안용만 등의 리얼리즘시나 1980년대 이후의 민중시에서 이런 측면들이 많이 극복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리얼리즘이 시의 한 요소만으로 이룩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리얼리즘시는 아무래도 당대 사회현실의 핍진한 형상화와 무관할 수 없다. 실상 리얼리즘시의 문제는 ‘시가 얼마나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살려는 마음과 결부되는가’의 문제와 ‘정당한 현실인식이 시 장르의 속성에 호응하면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귀착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시의 본질적 속성을 떠나 리얼리즘시로서의 가치에 부응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는 리얼리즘시의 준거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 생각된다. 리얼리즘을 성취하는 방법적 원리의 탐구는 리얼리즘시의 이해를 돕는 지름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원리는 이미 작품 속에 실현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실감을 위한 진실성의 추구, 시적 주체의 형상화, 산문적 확장과 시적 응축, 전형성의 추구 등의 항목을 들 수 있다. 리얼리즘 시인은 현대성의 추구나 미적 가공 기술의 혁신 자체를 일차적 비중으로 두지 않는다. 당대의 생생한 현실을 주체와의 긴밀한 상관 관계 속에 드러내다 보면 내용이나 형태면에서 새로움 또한 자연스럽게 확보된다는 게 리얼리즘적 창작 태도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살펴볼 때, 리얼리즘시의 양상과 특성이 현대시를 통시적으로 고찰하는 데 미흡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당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리얼리즘시를 제대로 인용하지 못했고, 인용된 시가 너무 과거 현대와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 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리얼리즘시의 창작에 있어서 기본적 요소 또는 방법적 원리를 네 가지로 가정해 놓고 논고를 펼치다 보니 다양한 작품의 인용에 오르지 못했다. 섣부러게 리얼리즘시의 표준이나 준거 제시한다는 일에 큰 부담을 느낀다. 본고를 리얼리즘시의 양상과 특성을 사색하는 성격쯤으로 봐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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