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章 우화, 네가 적인가.
2
화문은 찌는 듯한 더위를 참지 못하고 웃통을 벗어젖혔다.
그러나 시원한 것도 잠시 화문은 다시 옷을 걸쳐 입었다. 작렬
하는 태양이 맨살을 익혀버릴 듯 기승을 부려 살갗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제길! 덥다 덥다 해도 이렇게 지랄같이 더운 곳은 처음이네.
무슨 놈의 날씨가 금방 흐렸다 쨍쨍 내리쬐다……"
화문은 야자나무를 올려다봤다.
야실(椰實)이 먹음직스러웠다.
침이 샘솟는다. 갈증은 더욱 거세게 치민다.
화문은 주위를 돌아다보아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 작은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사람 그림자는커녕 개미 새기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쉬익!
화문의 손에서 돌멩이가 떠났다.
정확히 야실 꼬투리.
화문은 툭 떨어지는 야실을 받아들고 도둑괭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길! 우선 목부터 축이고."
소도를 꺼내 야실을 반으로 가르자 뽀얀 물기가 잔뜩 묻어
났다.
화문은 달짝지근한 과육(果肉)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리
고 시야에 들어오는 마을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돌멩이를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황유귀 술보다도 뛰어난 것 같아."
"무공을 익혔어."
"그래. 무인이야."
"흑월?"
"아니. 흑월치고는 무식해 보여."
땅거죽을 뒤집고 일어선 두 사람은 낮게 수군거렸다.
그들이 일어선 자리에는 두 사람이 몸을 숨길만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흙과 색깔이 똑 같은 가죽 포대가 헐렁하게 펼쳐
져 있었다.
"일단 보고부터 해야지?"
"응."
사내 한 명이 품안에서 적색으로 물들인 나뭇조각을 꺼냈다.
다른 사내는 밀림 속으로 들어가 초롱을 들고 나왔다.
잠시 후, 발목에 전통(傳統)을 단 비둘기가 여모봉 쪽을 향
해 활기차게 날아올랐다.
화문은 간신히 하늘만 가려놓은 듯한 초막 사이를 휘적휘적
걸었다.
여족은 희한한 습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붕과 벽만 있으면 집인 줄 안다. 집안에는 흔하디
흔한 마루판자 하나 없고 흙바닥뿐이다. 집안 한 귀퉁이에 돌
멩이 몇 개를 모아놓고, 받침나무 두 개 박고, 솥을 걸면 부엌
이다.
온 가족이 한 집에서 자고 먹는다.
중원인이 보기에는 미개하기 짝이 없었다.
화문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팔자 좋게 늘어져 낮잠 자고 있
는 여족청년을 발길로 툭 건드렸다.
"이봐. 말 좀 묻자."
여족 청년은 귀찮은 듯 눈을 부스스 떴다.
"뭐요?"
"우화인지, 우화대인지. 그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데, 알고
있어?"
여족 청년은 황급히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황급히 자
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듯이 사라져 버렸다.
"제길! 우화가 뭐 귀신이라도 되나? 왜 이 지랄들이야?"
벌써 여섯 명 째.
여족인들은 우화란 말을 듣기가 무섭게 몸을 사렸다.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반응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지 않
은가.
"제길! 할 수 없군. 다른 마을로 가봐야지. 빌어먹을 놈의
것! 더워서 죽겠는데 언제까지 이 지랄을 해야 하는 거야!"
화문은 연신 투덜거리며 다른 마을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
다.
등 뒤로 여족인들의 무수한 눈길이 쏟아지는 것을 의식하면
서.
* * *
일도일사 화문이 여족인들의 마을을 벌집 쑤시듯 헤집고 다
니는 동안 무자음사 한백은 황담색마에 몸을 싣고 여모봉으로
향했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목욕한 듯 후줄근했다.
풀풀 날리는 먼지는 눈앞을 가리고,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은
시야를 가렸다.
그래도 한백은 말채찍을 늦추지 않았다.
"끼럇! 끼럇!"
황함사귀 찬이 뇌주반도에서 들여온 황담색마는 다급한 심정
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한 시진을 달리고 물 서너 모금 마실 정도밖에 안 되는 휴
식.
그렇게 이틀을 달려온 강행군이었다.
피로도 누적되었다.
엉덩이와 허벅지는 종기라도 생긴 듯 아프다 못해 쓰라렸다.
"이제 다 왔다. 조금만 가자. 조금만……"
황담색마의 진가(眞價)는 여모봉으로 접어들면서 발휘되었
다.
관도를 달릴 적에는 그저 '빠르구나'하는 생각뿐이었는데,
여모봉으로 접어들자 숨이 턱에 차 오를 만큼 가파른 언덕도
나는 듯이 뛰어넘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마라 해도 역시 살아있는 동물.
한백은 황담색마의 체력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조금만 더 강행군을 지속한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
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가겠지. 어쩌면 급살이라도 맞은 듯
폭삭 무너져 버릴 지도 모른다.
한백의 눈은 허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전서구(傳書鳩).
아홉 마리 째 전서구가 하늘을 날고 있다.
회색 전서구는 황담색마를 비웃기라고 하듯이 수림(樹林)을
스치듯 날기도 하고 하늘 높이 솟구치기도 했다.
말이 갈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다.
전서구는 아무 제약이 없는 허공을 난다.
한백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전서구는 잠시 나무 위에 앉아 쉬더니 말이 따라올 수 없는
계곡 건너편으로 날아 까마득한 점이 되어버렸다.
"조금만 쉬자. 조금이야."
한백은 말 등에서 내렸다.
황담색마는 휴식을 아낌없이 즐기려는 듯 크게 투래질을 하
더니 풀을 뜯기 시작했다.
한백은 쉴 수 없었다.
다음 전서구가 나타나기 전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길을 찾
아야 한다. 그리고 먼저 전서구가 날아간 방향으로 한 치라도
더 이동해 있어야 한다.
그는 계곡을 세밀히 훑어 황담색마가 지나갈 만한 소로(小
路)를 발견해 냈다. 소로라고 해봐야 짐승들이 지나 다니는 길
에 불과했지만.
열 번째 전서구.
마지막 전서구다.
화문은 해남파의 눈과 여족인들의 눈을 의식해서 더 이상은
우화를 찾으며 돌아다닐 수 없으리라. 그는 비가보로 돌아갈
것이고, 우화를 찾아가는 전서구는 날지 않는다.
"마지막이다. 힘내. 끼럇!"
두두두두……!
황담색마는 힘차게 말발굽을 울렸다.
여모봉은 넓고 깊다.
해남도 전역에 있는 산들이 모두 뿌리를 오지산과 여모봉에
두고 있으니 그 넓음이야.
한백은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연신
말채찍을 휘둘러댔다.
이번 전서구를 놓친다면?
전서구가 날아간 방향을 나아가면서 사방을 이 잡듯이 뒤져
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우화를 찾지 못한다.
해남파는 본문을 오지산에 두고 있으면서도 발 밑에 틀어박
힌 가시 하나를 뽑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두두두두……!
힘찬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일깨웠다. 그러나 한백의
눈가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지지 시작했다.
전서구는 곧장 날아가는데 산길을 우측으로 틀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수림을 헤치고 나갈 수도 없다. 산길이 험한 것을 둘
째로 치고 거미줄처럼 뒤엉킨 나무 줄기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
을 주지 않는다.
한백은 잠깐 동안 눈을 돌려 말이 나가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순간,
"엇!"
깜짝 놀란 한백이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황담색마는
커다란 울음을 내지르며 앞발을 번쩍 들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한백은 난감했다.
신체가 건장한 장정이 산행(山行)을 할 경우, 세 시진[여섯
시간]이 소요되어야 정상에 오른다는 여모봉.
육백 삼십여 장(丈)의 높이에 비하면 험난한 산이다.
아침에 시원하고, 낮에는 더우며, 저녁에는 따뜻하고, 밤에
는 추워서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음미할 수 있다는 성산(聖
山).
여모봉의 험난한 지형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이 쉽
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쉽지 않았다.
여기까지 따라오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놓칠 뻔했는지.
한백은 암울한 눈으로 절벽 밑을 바라보았다.
굽이굽이 이어진 계곡이 장관으로 다가왔다. 산 너머로 광활
한 들판이 보이고, 여모봉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구릉이
보였다. 백사구이리라.
"쉽지 않겠다 했더니만……"
마음이 조급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길이 막힌 이상 무엇을 더 어찌할까.
우화를 만나야 하는데. 무엇보다 시급한 일인데…… 그러나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는 법인가. 암울하게 젖은 눈으로 전서
구를 바라본 한백은 돌연 안광이 빛나기 시작했다.
전서구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 맹금(猛禽)의 공격을 받은 것
은 아니다. 부드러웠다. 우아한 날갯짓으로 어느 한 곳을 향해
부드럽게 날아 내리고 있다.
목적지였다.
'찾았어!'
한백은 전서구가 날아 내리는 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황급히 말을 뒤로 물려 좀더 정확히 보려고 했지만 수림이
워낙 무성하여 시야를 가로막았다.
정상부근……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 정도만 알아도 우화를
찾기는 한결 수월하리라.
절벽을 끼고 돌았다.
황담색마의 발걸음도 약간 주춤했다.
이제 곧 등넝쿨을 잡지 않고는 오를 수 없다는 급경사가 나
타날 게다. 그리고 고목수림(古木樹林)을 지나면 여모봉을 빠
져 나왔다고 생각해도 좋다.
절벽을 끼고 돈 한백은 급하게 말고삐를 움켜잡았다.
무인!
상대는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낯선 무인이 앉아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일 장안에 있는
공기가 차디차게 동결됐다. 새도, 나무도, 풀도 숨을 죽였다.
무인이 깔고 앉아있는 바위도 말이 없다.
무인은 적엽명처럼 성난 들개 같은 형상을 띄고 있는 것도
아닌데 까닭 모를 불길한 예감이 마음 깊숙이 적셔왔다.
무인은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길을 가다보
면 길가에 앉아있는 무인들을 종종 보게 된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풍경이다.
가자. 가자. 가자……
한백은 몇 번이나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가도 이내 풀어버리
고 말았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무인의 앞을 지나갈 수 없었
다. 그의 앞을 지나가는 순간 무인의 등 뒤에 매어진 검이 발출
되며 말의 다리를 잘라올 것 같았다.
"누구지?"
무인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의 웃음은 환하고 부드러웠다. 악의(惡意)도 없어 보였다.
한백은 무인의 머리에 둘려진 영웅건(英雄巾)을 주목했다.
금빛 연꽃 문양.
해남파 내관영 소속의 무인이다.
"비가보 식솔이오."
한백은 불안한 마음을 다독거리며 태연히 대꾸했다.
"알고 있다. 이름은 한백. 외호는 무자음사. 두 번째 질문을
하지. 여모봉에는 어쩐 일인가?"
한백의 눈에 짧은 기광(奇光)이 스쳐지나갔다.
무자음사라는 외호는 적엽명만이 부르는 외호다. 강호인들은
무자음사라는 외호 자체를 모른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
야 화문과 사귀가 고작. 그런데 무자음사?
이 무인은 누구란 말인가.
"하하! 해남도에 왔는데 여모봉을 유람하지 못한다면……"
"알고 있다. 전서구를 쫓아왔지. 세 번째 질문을 하지. 저
전서구는 우화에게 가는 전서구다. 우화를 만나러 왔나?"
무인은 한백에게 둘러댈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한백은 비로소 상대의 정체를 알았다.
- '알고 있다'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을 맺는 사람은 무음
검 석불. 그를 만나면 당분간은 무조건 피하는 것이 좋습죠.
헤헤! 지금 상황에서는 비가보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를 부드득
갈겁니다요. 석불의 형제는 다섯 명입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형제간에는 우애(友愛)가 매우 돈독해
서…… 다섯 형제들이…… 아닙죠. 석가주 석중까지 하나같이
소리장도(笑裏藏刀)의 표본입죠.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 비
수를 갈고 있는. 헤헤……!
'무음검 석불!'
한백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무음검 석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무음검 석불은 달리 무음검향(無音劍香)이라고 불리기도 한
다.
그는 비무를 하든 실전을 벌이든 검을 들기 전에는 항시 향
(香)을 꺼내 불을 붙인다. 그리고 향이 다 타기 전에 승부를
끝낸다.
"대답을 하지 않는군. 알고 있지. 우화를 만나러 가는 길이
겠지. 허나, 방법이 너무 치졸했어."
'치졸이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어떤 때는 치졸한 방
법이 가장 효과적일 때도 있지. 지금이 그래.'
한백은 동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석불이 왜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나 하는 이유이다.
"말을 한 것 같소. 여모봉은 명산이라 유람을……"
"알고 있다잖아.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고. 네 번째 질문을
하지. 적엽명과는 어떤 관계야?"
한백은 온화한 미소를 풀지 않았지만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나왔다.
"강호(江湖)에는 때때로 피치 못할 사정도 있는 법이오."
"지겹군. 그것도 알고 있었어.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것은 당
연하지. 그럼 다섯 번째 질문을 하지. 적엽명을 만난 지는 얼
마나 됐지?"
"육 년이오."
석불이 웃었다. 희미한 웃음에서 활짝 웃는 웃음으로 바꿨
다. 하지만 한백은 눈을 부릅떴다.
석불이 품속에서 향을 꺼내 불을 붙이고 있다.
청량하고 맑은 냄새.
두통을 심하게 앓는 사람이라도 냄새만 맡으면 머리가 개운
해진다는 청심향(淸心香)이다. 또한 죽음의 냄새이기도 하다.
한백은 손에서 땀이 베어 나왔다.
그는 아직도 석불이 자신 앞에 나타난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
다. 그런데 죽이려고까지 하는가. 석불이 향을 피우는 뜻은 분
명하다. 살검을 들기로 작정한 게다.
왜? 한백은 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가? 형에 대한 복수인가?
그렇다면 간단하다. 여차하면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 하
지만 누군가의 명(命)을 받고 죽이러 왔다면 말이 달라진다.
그 문제는 심각하다.
"마지막 질문을 하지. 몇 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싸우기 싫소."
"싸워? 하하! 나와? 하하하!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런 말
은 처음 듣는 군. 나는 싸움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수련을
했을 뿐이지."
"나는 소협과 아무런 은원도 없는데……"
"차기 내관영 통령이 나지. 내관영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
는 우화와 연관된 일이고. 우화를 찾은 것이 실수였어. 은원은
이미 생겼지. 세상일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수렁으로 발을 집어넣곤 하지."
한백의 미소는 정말 부드러웠다.
그에게는 마음속에 있는 숨겨둔 비밀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해
도 될 것 같았다. 작은 키에 후덕한 몸집도 한 몫을 했다. 어
린아이의 눈동자처럼 티 없이 맑은 눈동자도 그를 믿게 만들었
다.
하지만 그는 다름 아닌 무음검 석불이다.
먹이를 잡으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석불.
"우화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서로 잘 알고 있는 말은 그만 하자니까. 이제 말해봐. 얼마
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한백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석불이 무슨 의미에서 검을 들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검을
뽑기로 작정한 것은 분명했다.
개인적인 원한인가? 해남파의 명인가? 그것을 알아야 하는
데……
"글쎄…… 하루정도는? 끼럇!"
한백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힘차게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황담색마는 주인의 의중을 정확히 알았다.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만한, 두 사람이 걷기에는 턱없이 부
족한 좁은 소로에서 황담색마는 커다란 덩치를 순식간에 돌려
세웠다. 그리고 힘차게 말발굽을 울렸다.
두두두두……!
황담색마는 오던 길을 거슬러 질주했다.
"하루라고? 잘못 알고 있군. 네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향
한 자루가 타 들어가는 시간뿐이야."
길은 한백보다도 황담색마가 더 잘 알았다.
황풍(黃風)이란 이름을 가진 황담색마는 정확히 오던 길을
거슬러 치달렸다.
한백은 뒤를 흘낏 돌아보았다.
석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게다. 아무리 신법이 뛰어난 고수라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소로에서는 마음놓고 신법을 전개할 수 없으리라.
- 헤헤! 재수 없게 석불을 만나면 향 한 자루 탈 시간만 버
텨요. 저번에 비무대회를 하면서 공언한 게 있습죠. 누구든 일
향경(一香頃)만 버티면 진 것으로 간주하고 물러서겠다고.
황담색마는 빠르게 질주했다.
조금이라도 곧바른 길이 나타나면 바람이 귓전을 스쳐갈 만
큼 달렸고, 바위길이 나타나면 훌쩍 뛰어넘었다.
말고삐를 움켜잡고 연신 앞으로 치달리면서도 한백은 향이
타 들어가는 시간을 머릿속에 그렸다.
절반은 타 들어갔으리라.
속에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이제는 남해삼십육검 중 일인이라는 석불이 앞을 가로막아도
버틸 자신이 있다. 하물며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데야.
한백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해남파 무인들은 오지산에서 나서 오지산에서 죽는다. 그들
은 오지산이 무공의 수련장(修練場)이며 삶의 근원이다. 여모
봉도 마찬가지다. 오지산의 형제라도 되는 냥 바짝 붙어있는
여모봉은 해남파 무인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산이다. 비록 우화
가 있다 하더라도 피하는 사람은 우화대이지 해남파 무인들이
아닌 것이다.
황풍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여모봉 지형을 손바닥 보듯이 알
고 있는 해남파 무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한백은 다급히 말고삐를 잡아채며 길을 가로막은 석불을 무
섭게 바라보았다.
"말을 끝까지 듣고 가야지. 네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향 한
자루가 타 들어가는 시간뿐이야. 그런데 하루를 버틸 수 있다
니. 궁금해지는군. 어떻게 버티는지."
석불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가 앉았던 자
리에는 아직 다 타지 않은 향 한 자루가 꽂혀있었다.
한백은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피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정면 승부.
"향이 거의 다 타가는군."
"알고 있지. 저 정도면 충분해."
한백은 안장에 비스듬히 꼽혀 있던 장창(長槍)을 뽑아들었
다.
"창인가?"
석불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아직도 검을 뽑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한백은 조금
도 방심하지 못했다. 보지 않았는가. 적엽명과 싸우던 석두의
놀라운 쾌검을. 석불도 석두 못지 않은 검공을 지니고 있으리
라.
무음검은 소리가 나지 않는 검이라 했다. 그만큼 빠른 검공
이다. 정말 그렇다. 석두는 검과 검이 부딪칠 기회를 전혀 주
지 않았다. 그토록 빠른 쾌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무슨
수련을 했기에 빛이 번뜩이는 것보다 더욱 빠른 검공을 구사하
는가.
한백은 전신궁보중평창(轉身弓步中平槍)의 자세를 취했다.
언제든지 삽보(揷步)로 전환하면서 수평으로 내 찌를 수 있
는 자세.
부보( 步)의 자세를 잡아 낮은 위치로 전환할 수도 있다.
무릎을 들어올리고 창을 머리 위로 받치는 제슬가창(提膝架槍)
을 펼칠 수도 있고…… 어느 방위에서 공격해 오던지 십여 개
의 초식 중 그 어느 것으로도 마음껏 변환할 수 있다.
'길어야 삼초다. 삼초만 버티면 된다. 삼초만.'
청심향은 마지막 생명력을 소진하는 중이었다.
석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석두와 똑 같다. 그도 전혀 방비를 하지 않고 다가왔다. 그
리고 단숨에 날아올라……
파앗!
석불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는 허공으로 몸을 날려 한 마리 새처럼 날아들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거무칙칙한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태양을 마주보고 선 형국이라 석불의
신형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석불의 몸 전체가 거무스름한 덩
어리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았다.
한백은 허보(虛步)를 취함과 동시에 상찰창(上 槍)을 전개
했다. 아니, 상찰창으로 허공을 냅다 내질렀다 싶은 순간, 창
끝을 빙그르 돌려 다섯 곳의 방위를 점했다.
쉬익! 쉬익……!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듯한, 미끌미끌한 미꾸라지를 손으로
움켜쥔 듯한, 기름으로 범벅이 된 바닥에 알몸을 뉘는 듯한 느
낌.
쉬이익……!
"헉!"
헛바람을 내지른 한백은 황급히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눈앞으로 바짝 다가선 검은 그림자!
반짝이는 검이 미끄러지듯 창대를 훑으며 목을 노려왔다.
검과 창이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석불은 마치 그렇게 하면
검의 위력이 반감된다는 듯 철저하게 검을 아꼈다.
한백은 적엽명과 석두가 비무를 할 때 무음검을 유심히 관찰
했다. 말로만 듣던 해남무공의 진수를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렇지 않았다. 옆에서 볼 때는 단지 빠르다는 느낌만 받았
다. 지금처럼 물러설 곳이 없어 보이지도 않았고, 검으로는 상
대가 안될 지 몰라도 창이라면 한 번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절박했다. 석불은 모든 희망을 깨끗하게 단절시켰다.
그 때였다.
한백은 문득 밝은 서광(瑞光)을 봤다. 그것은 죽음 속에서
피어난 희망이었다. 실낱같은 희망. 석불의 검세에서 살기가
사라졌다고 느낀 것이다.
'죽일 의도가 없어.'
한백은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를 판단이었지만 반사적으로 몸이 따랐다.
"타앗!"
우렁찬 고함과 함께 창을 빙글 돌리며 전면을 봉쇄했다. 순
간,
차앙……!
날카로운 금속성이 터지며 한백은 목덜미에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서있었다.
기다란 창은 단창(短槍)과 단봉(短棒)으로 변해버렸다. 십
수년동안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신변을 보호도 해주던
애병(愛兵)이 반토막으로 잘라졌다.
은형묵창(隱形墨槍)은 결(缺)이 없다.
창 끝과 창대를 하나의 철로 주조했으며, 철은 단단하기로
유명한 곤륜(崑崙)의 묵강철(墨鋼鐵)을 사용했다.
병기의 효용은 이미 입증되었다. 수많은 접전에서 도(刀),
추(鎚) 극(戟) 등 위맹한 병기를 맞아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절반으로 부러졌다. 묵중한 병기도 아닌 검에 의해
서.
석불은 그가 공언한대로 향 한 자루가 타기 전에 한백을 제
압했다.
"내가 이야기했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된다고."
석불의 검은 목 부근에서 춤을 추었다.
옷이 찢겨져 나가고, 수염이 잘렸다. 살은 베지 않았다. 석
불은 빠르면서도 정교한 검을 가지고 있어, 정확히 원하는 부
위만 잘라냈다.
한백은 기다렸다.
석불이 일 검에 참(斬)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터……
"나는 네가 뇌주반도에서 배를 타는 순간부터 예의 주시했
지. 부지런히 우화를 찾고 있더군."
해남도에 들어서기 전부터 해남파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
이었다. 해남파에는 고수들이 우글거리고, 치밀한 정보력을 가
지고 있다.
한백이 경계한 것은 정보력이었다.
정보력은 문파를 움직이는 눈.
처음부터 노출됐었다. 해남파의 눈은 날카롭고 예리해서 주
의한다고 주의했는데도 모든 행동이 샅샅이 노출되었다.
"우화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한백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라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석불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쉬익! 쉬익! 쉬익!
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며 무엇인가가 석불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쉬리릭! 퍼억……!
석불은 당황하지 않았다. 검은 빠르고 정확했다. 초식 또한
우아하고 섬세했다. 무조건 쳐내는 검공과는 격이 달랐다. 보
자기로 감싸서 던져버리듯이 날아오는 물체를 휘어 감아 속도
를 줄인 다음 다시 튕겨내는 검공.
칠 장 정도 떨어진 숲 속에서 날아온 물체는 돌멩이였다.
쉬익! 쉬이익……!
돌멩이는 쉬지 않고 날아왔다.
암습을 가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은 조금도 이득을 얻지 못
했다. 반면에 석불은 여유가 있었다. 그는 돌멩이를 쳐내면서
돌멩이가 날아오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그 때,
따가닥! 따각닥……!
느닷없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석불을 고개를 쳐들었다.
"섯!"
그가 고함을 내질렀을 때, 한백은 이미 황담색마에 몸을 싣
고 오 장 밖을 치달리는 중이었다.
쉬이익……!
한백이 떠난 자리에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한 인형
이 내려섰다.
석불과 비슷한 몸집에 비슷한 인상을 가진 초로의 노인이었
다. 다른 점이라면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라는 점.
석가주 석중이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더군요."
"봤다."
석중과 석불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들은 한백을 놓치고, 숲 속에 숨어 돌멩이를 날린 사람조
차 잡지 못했는데도 태연했다.
"대단한 놈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다니. 전력을 다했다면 쉽게 승기를 잡지 못했을 겁
니다."
"검을 읽었기 때문이다. 살심(殺心)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검은 똑같아야 한다."
"망검존인(忘劍存人)은 아직 멀었나 봅니다."
망검존인(忘劍存人)!
지검귀가보다 한 단계 위로 검리(劍理)를 깨우친 사람을 지
검귀가라 부른다면, 망검존인은 깨우쳤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경지다.
"멀지 않았다. 생사(生死)를 갈라야 할 상황이었다면 망검존
인의 검을 펼쳤겠지. 너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니까 걱정하지 않
는다."
석중은 멀어져 가는 한백에게 눈길을 주었다.
"놈의 창법은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으음! 중원은 넓은 곳이니까."
석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역시 처음 보는 창법이었다.
일가의 가주라는 위치가 되고 보면 내륙에 드나들 일도 많
고, 중원인과 교분도 폭넓게 쌓을 수 있다. 소림, 무당, 청성,
아미…… 거리가 멀고 가까움에 불구하고 이름난 문파는 거의
방문해 보았다. 그런데도 중년인이 펼친 창법은 알아볼 수 없
었다.
"그럼 역시 적수노인의 하수인……?"
"……"
석중은 난감한 듯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들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검을 익히려면 살인귀라는 평판
을 먼저 얻어야 합니다. 아무리 적수노인의 하수인이라 할지라
도 일 년에 한두 명 죽여서는 전검을 익힐 수 없습니다. 선천
적으로 타고난 무골이라 할지라도……"
석불의 얼굴에도 그늘이 덮였다.
"어쨌든…… 편하게 됐어. 구파일방과 연관만 없다면 놈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
석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말을 십분 이해한다는 투였다.
석가는 남부럽지 않은 재력을 쌓았다. 무공도 강했다. 스스
로는 해남도 제일이라고 자부한다. 그런데도 왜 항상 장문인을
타 가문에 넘겨줘야 한단 말인가.
다행히 석불은 천부의 재질을 타고난 무인이다.
석가는 석불에게 기대를 모았다. 해남오지 중 다른 사 인이
특출 나게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
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이번만은 반드시……
만약의 경우도 대비했다.
클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이삼 년 경과를 지
켜본 후 역대이래 최강의 수굴일지라는 건곤검 한혁을 능가하
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들면 미련 없이 해남도를 뜨기로 의견을
모았다. 중원에 들어가 일파(一派)를 창립할 망정 더 이상 용
꼬리는 되지 말자고.
가업은 두고 갈 수밖에 없다.
바다를 통째로 들고 살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비가의 황담색마는 입에서 군침이 돌만큼 맛
좋은 유혹이었다.
내륙의 무림문파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중원으로 진출할 경우, 텃세쯤이야 신경도 쓰지 않지만 홀로
자존(自存) 할 수 없는 것이 무림이다 보면 도움을 받을 일도
많을 게다.
석중과 석불은 적엽명이 익힌 무공의 종류를 직접 눈으로 확
인하고 싶었다. 구파일방과 연관이 있다면 무슨 연관인지 알아
보고 적절히 대응할 방침으로. 하지만 무공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했으니.
"놈은 유소청이 맡았다만, 눈길을 떼지 마라. 해남파가 송두
리째 바뀔 수 있는 변수야."
"우화를 만난다면……?"
"내버려 둬. 어쩔 수 없겠지. 우화를 왜 만나려는지 알 수
없지만, 막지 마라. 지켜보기만 하자. 무인의 검이란 단 한 번
만 뽑는 거야. 결정적일 때."
"형님의 복수는 요원한 겁니까?"
"네 형은 미련했다."
냉정한 대답이지만 의사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석중의 노안(老顔)은 하루 사이에 십
년을 지새운 듯 피곤해 보였다.
"복수는 해야겠지. 지하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그 전에…… 적엽명이 지난 팔 년 간 무엇을 했는지 파악해야
돼. 복수는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
"아비에게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 해남오지가 되었을 때가
첫 번째 기회였지. 그 때, 한 가주를 제치고 장문인이 되었어
야 해. 그러지 못했지. 두 번째 기회는 비가보가 몰락했을 때
다. 적선하는 셈치고 은자라도 몇 푼 던져줬으면 황담색마의
종부권을 이양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 두 번째 기회도
놓쳤어. 사람은 평생동안 기회가 세 번 찾아온다더구나. 이번
이 마지막 기회야. 네게는 첫 번째 기회가 될 테고."
"……"
"지켜보자. 기다리는 자에게는 때가 오는 법이야. 상황이 급
하면 급할수록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지혜가 있어야 돼.
한가주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우리가 나서서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어. 무엇을 알아내더라도 일절 함구(緘口)하도
록 해라."
석중은 장문인을 한가주라고 불렀다. 그것은 장문인이 되지
못한 미련 때문이었고, 상처 입은 자존심을 달래는 자위(自慰)
이기도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석가는 전면에 나서되,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은밀히 전하
고."
"황담색마 종부에 전력을 집중하겠습니다."
"그래야지. 휴우!"
석중은 긴 한숨을 불어 쉬었다.
그의 내심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어쩐지 이 싸움은 끼여들어
서는 안 되는 싸움 같았다. 낯선 무공을 보았다고 해서가 아니
라 적엽명이 명부객이고 그가 전검을 익혔다고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직감이었다.
전검에 목숨을 잃는 큰아들의 영상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
다.
한백이 사라진 곳에서 뿌연 먼지가 올라왔다.
그는 이미 여모봉을 벗어나 광야(廣野)를 치달리는 중이었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