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역사
【 팔레스타인 위치】
오늘날 팔레스타인(Palestine)은 지중해 동쪽 해안의 이스라엘·요르단·이집트로 둘러싸인
지역을말하며, 지중해 연안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으로 되어 있다. 면적은 6,320㎢
(요르단강 서안 5957㎢, 가자 363㎢). 인구는 307만 명(2000년 기준). 수도는 라말라
(임시행정수도).
【 팔레스타인의 유래 】
팔레스티나(Palestina) 지역에는 원래 여러 선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BC 15세기경 이집트가 정복한 뒤 가나안 사람이 차지하였으나 그 후 셈계의 해양민
족인 “필리스”(Philiscines = 구약성경의 블레셋 족, 영어로 Philistine)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BC 1406년경 광야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 오랜 싸움 끝에 다른 부족들을
축출하고 BC 1050년에 통일왕국(사울-다윗-솔로몬)을 건설하였다.
이 왕국은 솔로몬 왕(BC 963년-933연)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그의 사후 북부의 이스라엘왕국
과 남부의 유다왕국으로 분열된 후 각각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는데, 이후 유대
인들
의 역사는 부침을 거듭하지만 BC 63년 로마가 다시 이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독립
왕조는 완전히 소멸하였고, 지역명만 마지막 왕조였던 남부 유다왕국의 이름을 따서 줄곧 “유다”로 불렸다.
그 후 유대인들은 로마가 이교 숭배를 강요하자 이에 대항하여 AD 70년과 132-135년간의 두
차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는데, 로마는 철저한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이에 대응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유대인의 다수는 몰살당하였으며,
특히 AD 132년에 발생한 유대인 시므온 바르 코크바의 반란(2차 독립전쟁)을 진압한 로마인들은 더 이상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여 로마 직속지로 다스리며 유대인 출입을 금하였으며,
2. 예루살렘의 지명을 '아이리아 카피톨라나'로 개명하였고,
3. 이 지역의 이름을 유다에서 과거 “필리스틴(블레셋 사람)의 땅”이란 의미로 “팔레스타인”(Palestine)으로 바꿨다.
이에 따라 독립전쟁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잃은 채 세계각
처로 뿔뿔이 흩어져 기나긴 유랑의 생활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와 반대로 아라비아반도에서 주로 유목생활을 하던 아랍인들은 AD 7세기에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전파한 이슬람교의 신앙 아래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여 불과 수십 년만에 중동전역과 스페인에까지 이르는 대제국
(사라센 제국 633년~1258년)을 건설한 후, 638년 제2대 정통 칼리프인 우마르 1세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하고 메카, 메디나에 이어 예루살렘을 이슬람 제3의 성지로 삼았다.
이후부터 이 지역은 아랍인의 영향권에 들어가 예루살렘 신전 유적지에는 7세기경 이슬람
사원인 알-악사 사원과 암석의 돔(황금 돔 사원)이 세워져 이곳이 [하람 앗-샤리프](성역)로
불렸으며, 이슬람 제국들의 영지가 되어 줄곧 아랍인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 】
로마시대부터 세계각처로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들은 어디에서건 자기들만의 독특한 공동
생활과 믿음(유대교)을 유지해 현지인들과 융화되지 못하고 갈등을 겪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유럽의 기독교국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예수의 살해범” 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았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여전하였다.
< 시온이즘(Zionism) - 분쟁의 씨앗 >
그러던 중 유대인들의 민족의식에 불이 붙은 것은 19세기말 유럽의 지식인들을 분노케 했던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시온이즘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프랑스군 장교 드레퓌스는 독일에 군사기밀을 넘겨주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무죄가 명백히 입증됐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란 편견이 작용하여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오스트리아 신문기자로서 이 사건을 취재하던 테오도르 헤르츨이라는 유대인은 유럽인
의 反유대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절감하고 시온이즘 운동을 제창하였는데, 시온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 수도였던 예루살렘 산성을 지칭하며, 시온이즘이란 전 세계의 유대인
들이 시온으로 돌아가 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이념으로서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유대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은 1897년 헝가리 출신 T. 헤르츨에
의해 준비된, 제1회 세계 시오니스트(시온주의자) 회의에서 구체화되었는데, 스위스 바젤에
서 개최된 이 회의에서 시오니스트들은<유대민족을 위해 공법(公法)으로 인정받는 향토
(국가)를 옛 유대 땅에 건설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15세기 이후부터 약 400년 이상 오스만 제국(1299년~1922년,
터키의 전신, 터키혁명으로 1922. 2월 왕정이 폐지되고 1923년 터키공화국으로 출범함)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에 독일 측으로
가담하였다가 패배하자, 1917년부터는 연합군인 영국이 점령, 실질적으로 위임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영국이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이란 옛 로마시대 지명이 재등장하게 되었으며, 시오니스트들은 점령국인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 아랍인에게는 아랍자치국을, 유대인에게는 유대국가 건설을 보장한다”는
“밸푸어선언”을 받아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승전국인 영국은 1920년부터 지금의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대부
분과 이스라엘, 예루살렘, 서안뱅크, 가자지구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총 894만 평방
킬로미터)을 모두 위임 통치하게 되었는데, 1920년 조사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총
인구(75만명)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고, 그 외에, 베드윈(사막의 유목민) 10만여명, 유대인
7~8만여명, 그리고 소수의 시리아, 수단, 체르케스인, 이집트인, 그리스인, 사우디아라비안
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에 유대인들은 1920. 6. 15. 하가나(국회조직)를 조직한 후 하스트루닷 운동
(먼저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한 유대인들이 기금을 모아 새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유대농장을 경영하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것)을 전개하며 조직적으로 이 지역에
이주하였는데, 이 운동의 효과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경제적인 안정을 취하며
보다 쉽게 정착할 수가 있었다.
1922년에 팔레스타인 자치령이 국제연맹을 통과하자, 시오니스트들은 여기에서도 역시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받았으며, 당시 많은 문서의 조항들이 유대인의 이주와 국가건설을
도울 것을 언급하였으나, 막상 수 만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에게 돈을 지불
하고 농장과 땅 등을 구입한 후 입주하기 시작하자 현지 아랍인(무슬림)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삶의 터전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여 유대인의 이주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면서 폭력과
테러를 사용, 강력히 차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분쟁이 야기되었다.
특히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대학살(홀로코스트)하기
시작하자 시오니스트들은 불법 이민단체 알랴 벳을 조직, 폐선 직전의 배들을 탈취한 후
수 만명의 유대인을 태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킴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1918년 5만 여명에 불과하던 것이 1948년에는 76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 제2차 세계대전(1939년~1945년)과 그 후 >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임시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묵인
하였으나 점차 현지 아랍인들과의 분쟁이 과열되는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아랍에서 나는 기름 확보를 위해 아랍의 협력을 더 중시하고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막았는데, 그 결과 2차 대전 후에는 25만명의 유대인이 유럽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세계 여론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 대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 금지 법안을
폐지하지 않고 있다가, 1946년 이르 군단(유대인 군사조직)이 영국군 사령부가 있는 예루살렘
의 다윗호텔을 폭파(92명 사망)하는 등 유대인들로부터도 여러 차례 공격을 받게 되자 위임
통치에 따른 재정 부담과 골머리를 느끼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 포기 및 국제연합에
의 위탁을 국제연합(UN)에 상정하였다.
유엔은 이를 받아들여 1947년 4월 국제연합 팔레스타인 특별총회를 소집하였는데, 유엔의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SCOP)에서는 현지조사를 행하여, 8월 말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유대간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의 국제연합 신탁통치화(다수안) 및 아랍·유대연방 설립
(소수안)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며, 그해 가을 총회에 다수안이 제출되어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은 찬성 33(미·소 포함), 반대 13(아랍 여러 나라 등), 기권 10(영국
포함)으로 채택되었다.
< 네 차례의 중동전쟁 >
유엔 결의 후 1948. 5. 15 영국이 위임통치를 종료하고 물러가자 하가나(이스라엘 국회)는
이튿날 즉각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였으며, 유엔의 분할안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57%가 인구 1/3에 불과한 유대인 차지가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아랍인들이 들고 일어나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지만 이 전쟁에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6개국 연합의 아랍
군대가 패배하여 약 80만 명의 아랍난민이 발생한 반면, 이스라엘은 유엔의 분할안보다 더
넓은 지역을 점령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를 기본영토로 삼고 있다.
이후에도 1956년, 1967년, 1973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아랍인들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특히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어 6일 만에 아랍의 대패로 끝난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다시 요르단강 서안지대와 가자지구,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등 본토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아랍인들이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연패를 한 이유는 군사적 요인 이외에도 각국 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협조 부족 등 정치적 요인이 개재되어 있었는데, 과거 대제국을 건설했던
아랍민족은 현재 22개의 군소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모두 팔레스타인 문제에 나름대로의
이해타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주위의 형제국가들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지자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결성하고
자체적인 영토회복에 나서고 있다.
< 평화에의 길 >
2천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종식하려는 유대인들의 노력은 엉뚱하게도 다른 한 민족의 운명을
바꿔 놓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유랑민족 집단을 낳았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난민은
현재 400-5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는데, 이들은 인근의 아랍 국가들과 세계 각처에 흩어져 고토회복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PLO는 이스라엘과 산발적인 무력충돌을 벌이는 한편 국제사회에 대한 외교와 테러행위 등
으로 관심을 모아 왔다. PLO의 본래 목표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의 팔레스타인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었으나 현실적인 힘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점차 축소되어 1988년
東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대 및 가자지구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국을 선포
한 바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3년에 체결된 평화협정은 이것보다 더 후퇴하여 요르단강 서안지대와 가자지구
에서 독립이 아닌 자치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PLO의 이러한 입장 전환은 아랍국가들의 분열로 지원세력이 약해진데다 동서냉전구도의
와해 이후 소련이라는 후원자마저 잃어버린데 따른 자구책이라 할 수 있다.
아랍권에서는 이미 1979년에 이집트가 단독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반
이스라엘 연합전선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1991년의 걸프전쟁 때에는 같은 아랍
국가끼리 전쟁을 벌여 분열상이 극도로 노출되었다. PLO의 선택은 이러한 배경에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고향을 뺏긴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이 선택을 어쩔 수 없는
차선책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일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어 아직도 중동지역은
지구상의 화약고로 남아있다.
지도 :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이 정착하기까지의 영토 변화 과정
출처 :하늘소리 색소폰 원문보기▶ 글쓴이 : 호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