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에게
안녕!
오늘은 다소 추웠던 지난 삼월 어느 날, 너랑 함께 걸었던 서울식물원을 산책했어. 초록의 싱그러움에 꽃잔치까지 혼자 보기 아깝더라.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장미, 빨간 장미를 보면서 숙희 너를 생각했어. “안녕! 나는 숙희야. 우리 친하게 지내자.” “명란아, 나는 우리 학교 친구들과 점심 먹을게. 너도 맛있게 먹어.” 기억나니? ㅇㅇ은행 입행 연수 첫날에 어색하기만 한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었지. 사실 “안녕!”하며 인사를 건넨 그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몹시 갈등하고 있었거든. 우리 학교 친구들과 점심을 먹어야 하나? 새 친구 짝과 밥을 먹어야 하나? 그런데 너는 내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어. 살짝 당황하기도 했지만 착한 미소로 의사표시 확실하게 하는 네가 내 마음에 쏙 들었어.
연수를 마친 후 우린 같은 부서에 발령을 받았고 진짜 단짝 친구가 되었었지. 까무잡잡한 피부에 하얀 이 드러내며 웃는 모습은 정말 예뻤어. 마음씨도 착하고 요즘 말로 딱 내 스타일이었지. 점심도 같이 먹고 다방에 가서 커피도 마셨지. 맞아. 지금 같은 카페문화는 아니지만, 그때는 다방에서 음악 들으며 쓰디쓴 커피에 설탕 듬뿍 넣어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점심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나갔었지.
역시 착하고 상냥한 숙희 너는 남자 직원한테도 인기가 많았어. 데이트 신청을 받으면 나와 함께 나가서 상대방 기대를 꾹 눌러주었지. 가잔다고 매번 따라 나가는 나도 지금 생각하니 참 눈치가 없었지? 사실 지금도 난 눈치가 별로 없단다. 아무튼, 빵집에서 빵도 얻어먹고, 경양식 집에서 돈가스도 얻어먹고. 북창동 경양식집, 신세계백화점 옆 뽀뽀 다방, 회사 앞 스잔나 다방. 시청 대로변 만둣집. 스무 살의 어린 우리는 직장생활이 뭔지도 모르고 학교생활의 연장선 같았고 하루하루가 즐거웠었지. 월급날에는 신권이 들어있는 두툼한 봉투를 혹여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가방 깊숙하게 넣고 퇴근해서 곧장 집으로 갔었지. 우리는 자랑스럽게 엄마한테 월급봉투를 갖다 드렸지. 지금 생각하면 좀 슬퍼진다. 금쪽같은 어린 딸이 대학 진학도 못 하고 돈 봉투를 내밀었을 때 엄마 마음은 얼마나 짠하고 속상하셨을까? 우리는 정말 즐겁게 일했는데.
처음 너의 집에 갔던 날이 생각난다. 오빠가 9명이나 있고 언니가 있고 너는 11번째 막내라고 했어. 바로 위 작은 오빠는 육사를 다닌다고 했었어. 집은 지붕이 아주 낮고 부엌도 방도 크지 않은 내가 사는 우리 집과 똑같았어. 사실 나는 세상에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었어. 그런데 너의 막내 오빠가 육사에 다닌다는 그것이 아주 부러웠어. 왜냐하면,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육사를 가고 싶어 했었는데 가지 못했거든. 연좌제인지 뭔지 때문에 입학을 못 했다고 들었어. 시험도 보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었거든. 더욱이 육사 아닌 일반 대학을 다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그마저도 중간에 그만두고 어머니를 도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고 너한테 말했었는데. 기억날지 모르겠구나.
너는 아주 일찍 퇴직했고, 나는 오래오래 정년까지 다녔지. 바쁘게 살다가도 숙희, 네 생각을 문득문득 했었어. 결혼한다고 사진작가인 남편을 소개했고 멋진 스튜디오를 구경시켜 주었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 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친구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속상함도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서로 바쁘다 보니 거의 만나지 못하고 수십 년이 흐른 뒤 이제야 너를 다시 만났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이 신기하기만 하다. 이십 대 청춘 그 시절과 똑같은 마음이고 여전히 나는 네가 좋다. 아, 그런데 너의 아들 결혼식을 새까맣게 잊고 못 갔다니. 오지 않을 애가 아닌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걱정이 되어 나한테 전화를 했었지. 나는 전화를 받는 순간 번뜩 스쳐 갔단다. 결혼식! 여기저기 메모까지 해 두었으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잊고 있었던지. “명란아, 우리 막내 오빠도 너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결혼식장에 안 왔단다.” 육사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군인으로 사는 그 막내 오빠도 참석을 안 했다고 해서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곧 보자. 너를 닮은 빨간 장미가 시들어버리기 전에. 언제 만나도 스무 살 그때랑 똑같은 나의 친구 숙희야. 너랑은 참 인연도 깊지. 너의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지금 나의 선생님이 되실 줄이야. ‘오늘이 꿈꾸던 그날인가’ 너의 아니 우리의 선생님의 책이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시간을 내어 선생님도 한 번 뵈러 가자.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렴.
2023년 5월에.
명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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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 이야기는 전에도 한 번 했었지요.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출근해서 새로 만난 친구 숙희. 들국화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우리나라에서 여자실업고등학교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여학생들이 다니던 상업고등학교) 졸업생이고 숙희는 서울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우리나라 서울의 공립여자고등학교 중 유일했던 실업고등학교)의 졸업생이었습니다. 둘이는 한국은행에 취업 되어서 처음 만났습니다. 만나는 날 둘이는 서로 마음에 들어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나는 서울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에서 5년 동안 재직하였는데 한 학급에서 오직 한 명씩만 한국은행에 추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급의 2등의 전체 석차가 다른 반 1등보다 높아서 내가 싸우다시피 우겨서 2명을 추천하여 합격하였습니다. 강진숙이와 김옥희지요.
숙희와 최근에도 만났었지요. 문장은 어떻게 쓰느냐, 순서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표현되는 진실의 농도도 사뭇 달라집니다. 입사 시절 친했던 숙희를 수십 년이 지난 다음 다시 만났다면 다시 만난 그날의 정황을 이 글의 서두로 적는 것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리고 오빠가 육사에 가고 싶어 했는데 연좌제 때문에 못 갔다는 말은 여기서 처음 듣는데, 그것은 매우 무거운 내용이고 거기 대해서 할 말도 많을 것입니다. 가볍게 지나가듯이 하였지만, 마음속에 쌓이고 맺힌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걸 풀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다른 말들이 제대로 풀리지가 않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닥쳤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수난과 희생이 있었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가까운 형제가 아니면 사촌이라도, 육촌이라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사촌오빠도 없고 가장 가까운 것이 육촌 오빠입니다. 그가 한 번이라도 우리 집에 오는 날이면 동네 친구들이 모두 우리 육촌 오빠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이런 오빠가 있다, 이렇게 멋지게 생긴 오빠가 있다고 떠들어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오빠는 대한민국 육군 중위였습니다. 그때 군의관이었던 것으로 봐서 의과대학을 다녔나 봅니다. 오빠의 가방 안에는 그때 다아아찡과 페니실린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그 오빠가 우리 집에 두 번인가 온 다음에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후에 들은 말로는 오빠의 아버지인 오촌 당숙(우리 아버지의 사촌 형님)께서 육이오 당시 인민 위원장을 하셔서 그것이 빌미가 되어, 수복된 후 어려운 일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숙은 성균관(성균관대학의 모체가 된 우리나라의 첫 번째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방의 명륜학당의 창립자가 되신 인텔리셨습니다. 종조부께서 동경으로 가려는 아들을 주저앉혀 명륜학당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나는 당숙과는 너무 사이가 떠서 말씀을 나눈 적은 없었습니다. 흰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에 멋으로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던 것만 생각납니다. 육촌 오빠의 소식이 오래도록 궁금했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육이오 때 잠깐이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하셨으니 넘기 어려운 장벽이 가로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물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는 그 이론이 좋아서 당시의 지식인들이 많이 현혹하여 넘어갔습니다. 한 집안(8촌 이내에)에 똑똑한 사람 한 명쯤은 공산주의 이론을 믿고 기울었을 것입니다. 훌륭한 문학인들이 강제 납북되기도 했지만 자진 월북하기도 했습니다.
숙희와는 스무 살에 시작된 깊은 우정이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오빠가 육군사관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부러웠지만, 들국화는 숙희에게 오빠의 얘기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로막힌 연좌제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할지 난감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숙희에게 하는 편지는 서울식물원 산책한 얘기, 커피 마신 얘기나 결혼식에 가지 못한 얘기도 하고 싶었겠지만, 연좌제 때문에 우리 오빠가 육사에 갈 수 없었던 얘기를 털어놓았더라면 속이 더 시원했을 것입니다.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도 할 수 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비밀로 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 얘기를 제대로 설명하다가는 숨이 막혀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누군가의 수명이 잦아지기도 하고 운명이 달라지기도 했던 이야기. 골병이 들고 속병이 들고 활동할 길이 막혔다가 돌아간 얘기...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고 우리의 잘못도 아닙니다. 큰물의 소용돌이처럼 휩쓸고 간 혼돈의 시대에 살아 있었다는 잘못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밑줄 친 부분은 좀 더 알기 쉽게 고치기 바랍니다.
첫댓글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인 김숙희, 강진숙, 김옥희, 오인숙 아주 친하게 지낸 친구들입니다. 숙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퇴직하고 다시 만닜는데 서로의 마음이 그때와 똑같았습니다. 숙희 아들 결혼식에 못가게 되었는데 걱정을 많이 했었답니다. 통화하다가 별일없으니 좋다면서 곧바로 만났었습니다. 선생님 좋은 논평 언제나 감사합니다. 다시 읽고 숙지하겠습니다. 선생님, 감시합니다. 항상 건강 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