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강>
본문 : 고린도전서 5:1-13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오늘 본문은 성경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 이유는 인본에 뿌리를 둔 구원론적인 시각으로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5절과 같은 말씀 때문에 그런 오해가 많아서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가 올바른 해석을 내어놓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서 증거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주께서 열어 보여 주셔야 성경의 진의를 알게 됩니다. 신학 공부를 해서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에요.
그럼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말씀이 과연 그렇게 난해한 말씀인지를 한 절씩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음행, 사탄, 사탄에게 내어줌, 누룩, 유월절 어린양 등인데, 이런 단어들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가 위치한 고린도라는 도시에 대한 사전 지식도 필요하지요. 그래야 전체 내용의 큰 그림이 그려집니다.
우리가 5장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를 바로 알게 되면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날 텐데, 그 핵심적인 주제가 뭐냐하면 ‘너희의 거룩’입니다.
5장을 보시면 그리 긴 장이 아님에도 여기에 ‘너희’라는 단어가 아홉 번이 나옵니다. 이 말은 바울이 편지를 쓴 대상이 ‘너희’라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그들입니다.
(고전 1장)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들이 너희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책이 아니라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만 열려 있는 책입니다. 또 여기서 거룩의 의미는 착하게 살기, 깨끗하고 경건한 교인 되기 그런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1절을 보면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9절부터를 보면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면서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해요. (여기서 함께 먹는 것은 ‘성찬’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함께 어울려서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면서 받아주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교회의 거룩,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를 더럽히는 어떤 말과 행위도 교회가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단순히 나쁜 짓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교회의 거룩, 교회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 말씀, 이 사도의 꾸짖음이 단순히 음란한 자를 교회에서 내쫓으라는 말씀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과 경고는 모든 종교에 다 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런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를 판단하고 처벌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보면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한다고 하지요.
(고전 2장)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교회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신령한 자와 육적인 사람이 갈라집니다. 신령한 자의 판단이 있고, 육적인 사람의 판단이 있단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전서 서두부터 선을 긋고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들은 내가 쓴 이 편지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신령한 자들에 의해서만 해석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의 가르치심이 있는 자, 성령 받은 자들만 본문과 같은 사도의 말씀을 분별하고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도가 말하는 교회의 거룩이 무엇인지, 또 그게 왜 중요한지는 영적인 사람만 알게 되는 성령의 가르침이고 조명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편지는 고린도전서 1장의 기록과 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보낸 편지임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이 난해하다고 하는 이유가 이런 육적인 이해와 해석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 이 편지를 대하게 되면 본문인 5장 안에서도 서로 모순과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보세요. 음행하는 자가 벌을 받고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나면 문제가 안 되는데, 음행하는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교회가 이천 년 동안 주석한 것을 보면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을 두고 사탄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이 주된 해석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는다고 해요. 사탄에게 넘겨주었는데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는다는 건 또 무슨 말이에요? 연결이 안 되잖아요. 우리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로 연결이 안 되니까 난해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음행하고도 천국 가고 음행 안 했으나 지옥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세상이 알고 있는 선악 개념, 구원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론을 시작하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몇 가지 중요한 단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의 단어들은 일반 사전적 의미와 다른 게 많아요. 그래서 대전 모임에서 1년 가까이 성경의 단어들에 관한 개념 공부를 했었죠. 오늘 우리가 보고있는 ‘교회의 거룩’ 역시 세상이 보는 교회의 거룩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룩은 어떤 것입니까? 나쁜 짓 안 하고, 말이나 행동이 인자하고, 경건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죠. 그런 겉모습이 거룩이에요.
그런데, 사도가 교회의 거룩을 이야기하면서 실례로 든 게 아비의 아내를 취한 자인데, 이것을 통해서 음행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단순히 음란한 행위를 했다는 것에 방점이 있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음행(음란)이 무엇인지를 고린도교회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에요.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음행(음란)을 올바로 알아야 고린도전서 5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성경에서 음란(포르네이아)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마 12장)
38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님은 지금 음란한 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누구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요나의 표적,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의 표적을 모르는 자들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자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바로 악하고 음란한 놈들이야.. 왜? 요나의 표적이 가리키는 나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음란은 이런 거예요.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면서 모든 율법 행위를 함으로 자신을 경건한 자로 행세하는데, 그게 바로 일곱 귀신을 불러들이는 짓이라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허걱’입니다. 듣는 그들이 어떻겠어요? 기가 막힐 거 아닙니까? 이 인간이 지금 우리 더러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거야?..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예요. 그렇게 자신들의 율법 행위로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는 자들의 대표로 불려나온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인데, 그들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율법 행위에 충실하고 경건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음란하다고 하면 이 세상에 음란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음란이란 세상적인 판단 기준과는 전혀 다릅니다.
(살전 4장)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이라고 합니다. 이게 레위기 11장 말씀이에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거룩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 거룩이 이루어지도록 음란을 버리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아내 대할 줄을 알아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음란, 포르네이아)을 따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룩과 음란을 말씀하시는데, 아내가 등장합니다. 왜 아내 이야기가 나올까요? 단순히 불륜을 저지르지 말라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 신랑과 신부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분류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남자, 즉 씨 가진 남자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는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죠.
따라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대하라는 말은 단순히 아내 말은 잘 듣고 아내에게 잘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물론 아내에게 잘하는 건 기본이지만요.
그런데, 음란하지 않고 색욕을 따르지 않는 게 거룩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럼 바람 한 번 안 피우고 아내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겁니까? 세상 종교인들이 이런 문제를 오해해서 시집 장가를 안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머리 밀고 산에 들어가거나 수도원에서 금욕 생활을 하면 거룩이 이루어집니까?
인간은 모태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해서 더러워지는 게 아니라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부정한 죄입니다. 이런 죄인에게서 나오는 건 다 부정하고 음란합니다.
레위기를 보면 여자가 출산하거든 속죄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왜? 세상에 죄인 하나 추가했다고 일주일간 속죄제를 드려야 했어요. 그것도 여아를 출산하면 두 주 동안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범죄 했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속죄제를 드려야 정결케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본질이 죄인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죄 가운데 잉태했다고 한 다윗의 말과 같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즉 우리의 원조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정수처리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 몸 안에는 이미 범죄의 DNA가 있단 말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것을 누룩이라고 합니다. 언제든 발효될 수 있는 누룩이에요.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예요. 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세상 종교인들은 나쁜짓 안하면 깨끗한 줄 아는데, 그게 아니에요. 만약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생각한 것처럼 율법을 범하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헛것이잖아요. 예수님이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죠. 하나님이 성령부터 보내어 율법을 잘 지키도록 해서 천국 보내주면 되잖아요. 오늘날 개혁주의가 그 얘기를 한다니까요. 세상 교회들이 말하길 우리가 옛날에는 범죄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제 성령을 받았으니까 성화되어 죄 안 짓고 천국 간다고 가르쳐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 없는 것이죠. 일회용이란 말입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이 세상 교회들이 말하는 부활절인데, 부활의 의미도 모르면서 모여서 축제를 벌이고 있어요. 그런데, 부활을 알려면 십자가부터 알아야 해요. 왜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지부터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부활이 뭔지도 모르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까 우리도 부활하는 것으로 알아요. 부활은 창세 전부터 약속된 언약의 죽음이 실행된 결과물로서 부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모르면 부활도 몰라요. 사도의 말대로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삶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의 부활은 종교적 망상일 뿐입니다.
부활은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부활을 몰랐어요. 마리아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었죠. 웃기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면 기뻐해야지 왜 웁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아니라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겁니다. 나를 믿어주면 너희도 부활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생명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부활의 의미예요.
(요 14장)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1장)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죽어서)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절을 절기로 정해서 지킬 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예수님도 모르면서 부활 욕심, 천국 욕심을 내어 종교 생활을 한다면 그건 예수님의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그냥 망상이에요.
그래서 부활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전 15장)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의 언약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이 날마다 작동하는 자에게만 부활은 현실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꿈꾸는 자들이 아니라 나의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에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주님이 지금도 다스리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만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지식이 아니며 종교 행위도 아니에요. 부활의 세계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 생명의 나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에 의해 모든 것이 베풀어지는 곳이고, 성도는 그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란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그들이 이미 부활에 참여된 자들이고, 생명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사망 권세를 이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살고 있어요.
그렇게 부활은 능력이며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사는 자들은 사도처럼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라고 하는 십자가의 현실을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증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의 부활이에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현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 밖에서 자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자들이에요. 바울이 말한 대로 사망의 몸에서 건져져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자에게만 보이는 새로운 현실입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우리의 이 몸은 아무리 닦고 깨끗이 하고 꾸미고 다듬어도 그 본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면 안 돼요, 그런 우리의 옛사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으신 것을 아는 게 바로 구원입니다. 내가 변해서 구원이 아니라 이런 내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의 죽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분과 함께 이미 창세 전에 못 박힌 것을 아는 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아서 천국 가는 건 우리 이 몸이 깨끗해지고 성화되어서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갑니까? 주님의 피로 빤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혀 주셔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으므로 해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고, 깨끗하다 하시고, 거룩하고 흠 없는 아들들이라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피를 보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여호와의 밤에 죽음의 사자가 피를 보고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믿음으로 구원, 은혜로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내어놓아 나를 깨끗이 하고 종교 행위를 해서 의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부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행위도 카운트하시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우리 행위 하나하나에 대해서 갈구시면 천국 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개혁주의가 가르치기를 차변과 대변을 비교하여 착한 일이 나쁜 일보다 더 많으면 천국 가고 나쁜 일이 더 많으면 지옥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짓 선생들이 교회 하기를 위해서 펌프질하는 겁니다. 말로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의미를 모릅니다. 예수님에게 심한 욕을 들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613개로 세분화해서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던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음란하고 악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너희가 어떤 행위를 내어놓아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피 없이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할 수 있다고,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겠다고, 하나님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한 자들이 그들입니다.
율법은 모든 율법을 온전케 하실 예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게 아니라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예수가 지금 눈앞에서 말씀하고 계심에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놈들이 독사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은혜를 모독하는 자들입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열심히 특심했던 사람이 사도가 되기 전의 사울입니다. 그렇게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자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인간론이에요.
(롬 3장)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세상 사람들이 로마서 3장의 내용을 들으면 동의를 하겠습니까? 동의할 수 없겠죠. 그래도 우리에게는 선한 구석이 있어서 착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 세상에는 의인들도 많잖아..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성령 받은 성도예요. 성령을 받으면 나에게 어떤 선한 구석도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내놓을 어떤 의로움도 없음을 아는 사람들이 성도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곡 붙드는 거에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서 어떤 선한 행위도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하길 하나님은 예수만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럼 성도는 뭡니까?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지신 예수와 분리될 수 있는 성도는 없습니다.
(롬 4장)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3장까지 인간의 구원 불가능을 이야기한 후에 4장에서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를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인데, 이게 율법 외의 한 의입니다. 율법 행위를 하는 자들은 구원이 은혜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라 여깁니다. 종교 행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건 없습니다.
바울은 4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믿음이란 무엇인가? 왜 믿음인가? 왜 은혜로 구원인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무시하고,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모르고, 십자가 은혜에 자기 율법 행위와 종교 행위를 보태려고 하는 것을 로마서 1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실패라고 합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그 짓을 합니다. 십자가 은혜가 맞기는한데, 우리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는 주일 지키기, 십일조 하기, 교회 잘 섬기기 등의 종교 행위를 해야 한다는 거죠. 요즈음은 교인들의 의식이 생기면서 목사를 잘 섬기라는 말은 잘 안 해요.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우리들의 종교적인 행위인 착하게 살기, 교회가 시키는 대로 충성하기 등이 보태어져야 구원이 확보되는 것이다.. 구원이 중도에 취소될 수 있으니까 교회가 시키는 대로 잘 해야 한다.. 그럼 너희의 상급까지 달라진다.. 고 해요. 요즈음은 막 갑니다. 차등 상급론이 그래서 나온 거예요. 천국 가니까 누구는 백 평짜리 맨션에 살고 누구는 오두막에 살더라.. 누구는 개털 모자 쓰고 누구는 금 면류관 쓰더라.. 이것보다 교인들을 펌프질하기 좋은 게 없잖아요. 이게 종교인들의 악행이고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런 것이었어요.
(롬 10장)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내어놓을 율법 행위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율법을 범하더라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을 도말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말은 찢어 없앴다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이것을 모르고 아직도 자기 율법 행위로 구원을 확보하는 것을 믿음 없음이라고 합니다. 교회를 평생 다녀도 예수 믿은 적이 없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지식 없는 열심을 두고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성자 예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를 예정하시고 묵시 안에서 다 이루셨는데, 또 그의 신부 된 교회를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런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대적하는 타락한 천사가 에덴의 아담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떠나 뱀의 말과 결합하도록 유혹한 거예요. 이게 범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뱀의 말이 더 옳게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뱀이 말하길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도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알게 되고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거든요.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의 아담은 하나님과 자기를 다른 존재라고 여겨보지 않았어요. 하나였단 말입니다. 마치 아기들이 어머니 자궁 안에 있을 때 한 몸이었던 것처럼 아담과 하나님은 하나였어요. 그런데 그것을 따먹자 자기 자신이 보인 겁니다. 하나님과 별개인 나라는 주체가 보이자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어요. 성경이 말하는 음란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분리된 그 자체가 이미 음란이에요. 다시 말하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모든 게 음란이고 부정입니다. 물론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들을 위해서 허락한 것이지만요.
선악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있을 수 없습니다. 동산 중앙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그 선악과를 따먹을 것임을 하나님이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아시죠. 여기에서부터 딜레마가 시작되었어요. 선악과를 따먹도록 방치하시고서는 지옥엘 보내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거죠. 이게 이천 년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선악과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든 모두 자기 성도, 즉 하나님의 사람들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에요. 이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자라나게 하려고 지금도 하늘 땅 우주가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죄를 통해서 생명 나무이신 예수께로 가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반드시 선악과를 먹고 죽어야 하는 아담, 생명 나무이신 예수께로 가서 완성되는 아담이에요. 성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에게로 가서 예수 안에서 완성되는 아담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죄가 거룩한 죄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중심의 선악 구조, 인본에 뿌리를 둔 바벨론의 가르침 (이 세상의 모든 가르침이 바벨론의 가르침이에요. 학교에서나 집에서 가르치는 게 모두 인본주의잖아요. 심지어 교회까지도.) 과 음녀의 섞은 술에 취해서 오랜 시간을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 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내어주셨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 음행한 자를 사단에 내어주었다고 했는데, 음행한 자들만 사탄에게 내어준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선악과 먹은 아담을 에덴 밖으로 쫓아내셨잖아요. 세상 신이 다스리는 세상에 내어줬어요. 너를 위한 네 인생을 살아봐.. 그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하나님을 떠나서 너 스스로 하나님처럼 행세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한번 살아보라는 거예요. 그게 사탄에게 내어준 겁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생명 나무이신 예수께로 가서 그 피의 용서로 예수를 아는 것으로 예수와 연합되어 주 예수의 날에 살아나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난해하다.. 사탄에게 내어주는 게 뭐야.. 주 예수의 날에 영이 산다는 게 무슨 말이야.. 라는 거죠. 이천 년간 주석이 다 그래요. 제가 이것을 여러 군데 찾아봤는데, 옳게 풀어놓은 주석이 없어요. 모두 자기중심적인 구원론의 시각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주신 책이 아닙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음행한 자만 사탄에게 내어준 게 아니고 이 세상 자체, 모든 인간이 죄의 권세 아래에서 태어나고 악한 영들의 역사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구원을 설명하시면서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고 강한 자의 세간으로 꼼짝없이 잡혀 있던 자들을 빼앗아 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셨습니다. 세간으로 갇혀 있던 우리가 주님의 그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빼앗길 때 협조할 게 있습니까? 없잖아요.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더 강한 자가 와서 빼앗아 가니까 가게 된 것뿐이에요. 이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분에 의해서 빼앗김을 당한 성도들이에요. 그러니까 그분의 손길, 그분께 빼앗김을 당한 흔적이 있는 자들만 진짜 현실을 볼 수 있어요. 깨어난 겁니다.
이렇게 피로 사신 교회는 세상과 다른 현실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현실, 복음의 현실을 모르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음란 좀 하면 어때.. 고린도라는 도시가 다 그런데...
고린도라는 도시는 음란의 대명사예요. ‘고린도스럽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럽에서도 가장 음란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들의 문화입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큰 신전에는 그 신을 섬기는 여사제들만 천 명입니다. 그 여사제들이 밤이면 도시로 내려와서 창녀가 됩니다. 본문에 기록된 아버지의 아내는 첩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계모와 동침을 했다는 것인데,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바울이 그것을 굳이 예로 들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교회야, 너희들은 세상과는 달리 음란과 경계선을 가지 교회란다.. 세상 문화와 세상 종교와 세상 음란을 똑같이 좇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그럴 수도 있지.. 좋은 게 좋은 거지.. 좀 그러면 어때.. 그러면서 자기들이 성령 받고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는 걸 자랑했습니다. 나는 바울파야.. 나는 베드로파야.. 나는 아볼로파야.. 이런 걸 자랑하더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바울이 보기에 기가 막힌 겁니다. 너희가 예수를 아는 거 맞아?.. 십자가를 아는 거 맞아?..
그러니까 성도는 아니라고 할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아니요’! 그런데 그 아니오를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구원 가능성, 자신들의 교회라는 다름, 자기중심의 판단으로 파당이나 짓고 있더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거룩, 그의 피가 뿌려진 교회의 거룩을 알지 못하더는 겁니다. 마치 교회가 너희들의 존재 가치를 높여주고 증명해주는 곳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럽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너희의 능력이냐 듣고 믿음에서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아무리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고 온갖 기적이 일어나도 믿음 안에 있지 않으면 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주가 되신 분과의 관계입니다. 성경의 모든 단어는 관계성을 표현하는 단어에요. 죄, 의, 은혜, 용서, 사랑, 믿음 등 모든 단어가 주가 되신 분과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없이도 이적과 신기한 현상들, 세상이 좋아하는 선 (세상이 좋아하는 선은 무조건 크고 많은 게 선이에요. 그런데 교회까지 크고 많은 게 선이 되어버렸어요.) 세상적인 가치를 좇아가는 게 세상 교회예요. 이천억짜리 빌딩을 짓고, 많은 교인 수를 자랑합니다. 노회에서 목사들 자랑거리가 이런 거랍니다. 너 아직도 소나타 타냐? 너희 교회 교인 몇 명인데? 성전 건축 했냐?.. 무슨 노회장 선거, 교단 총회장 선거에 수십억의 돈이 왜 뿌려집니까? 그거 해서 뭐하겠다고 말입니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의 참담한 현실입니다. 신학생들의 로망이 뭐라고 합디까? 김성수목사가 한국에 와서 신학생들을 모아놓고 이런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욕을 했다는 게 그거잖아요. 학비 대주고 책 사라고 돈 주고 했더니만 하는 소리가 나도 목회해서 곽선희 같이 벤틀리 타고 싶습니다.. 이게 무당 잡교지 무슨 기독교입니까?
그래서 바울이 돌직구를 던졌어요. 너희들이 듣고 믿음으로냐, 아니면 너희들이 똑똑해서 너희들의 지혜로 예수를 아는 것이냐...
예수는 학습의 대상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거래할 상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어요. 방언이 있고 방언을 통역하는 자도 있었어요. 이런 게 오늘날 정경이 되었어요. 그런데 이런 성령의 은사가 가리키는 십자가의 사랑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했잖아요.) 은 모르면서 다들 그것으로 자기 의로 삼고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 옳음을 자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음행이고 누룩이 퍼져가는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자기 뜻대로 공적을 쌓는 자들.. 앞장에서 했잖아요.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과 같으리라.. 다시 말하면 나는 너희 개인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들의 악하고 음란한 행사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의 날에 너희들의 영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알기를 원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복음에서 벗어나서 너희들 스스로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그 어떤 것으로 세운 것들도 나중에는 다 불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 된 교회를 반드시 불로 태우듯이 정결케 하실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 일어나는 모든 부정하고 음란한 사건들이 있을 때 너희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거에요. 저 나쁜 놈..이라고 하 게 아니라 저 일이 바로 내 안에 꼭꼭 감추어져 있는 나의 음란이고 나의 더러움임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사전에 예방하고 찾아내어 좋은 교회를 하자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가 모두 고린도전서 5장을 설교하면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절대 이런 일을 하지 맙시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를 많이 하고 우리 스스로 자신을 절제하고 조심합시다.. 그런데 아까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일이 없으면 거룩합니까?
모든 세상 교회에는 이런 사탄의 역사가 있고 이렇게 사탄에게 내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의 거룩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임을 알아서 예수님 십자가 보혈의 은혜와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것만을 꼭 붙들라는 성령의 책망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거예요. 성경은 모두 그 이야기입니다.
(고전 3장)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마음을 지키시는 분이 누구라는 겁니까? 하나님이 우리 마음이 거룩하도록 지켜주세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 마음이 거룩하도록 지키신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주님 저는 안 됩니다.. 바울처럼 죄인의 괴수(마귀 새끼)가 맞습니다.. 저는 도저히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고 깨끗이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주님의 피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피의 용서가 아니면 지금 당장 심판받아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것을 고백하고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납작 엎드리는 상태가 거룩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한 것입니다. 다른 깨끗함, 다른 경건, 다른 거룩은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떤 행위로도 우리를 깨끗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의 신분을 잊고 살 때가 너무 많잖아요.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좇아서 성령이 계시는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가 계시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내어버려 두시지 않고 세상을 향한 우리의 눈을 주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로 향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두고 성령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성령의 책망,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일곱 귀신이 들락거리는 우리의 육신을 보면 마치 사탄에게 내어준 것처럼 보일 수가 있는 거예요. 내가 진짜 예수 믿는 거 맞아? 어떻게 나에게 믿음이 이리도 없는 거야?.. 라는 생각이 많이 들죠? 그런데 그게 정상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성령의 은사로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가장 먼저 나의 믿음 없음이 보입니다. 참 역설이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믿음을 구하게 됩니다. 저는 믿음 없는 자가 맞습니다.. 라고 탄식하고 절망하고 애통하게 하시는 그 모든 돌보심..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말하길 우리는 매 순간 구원받습니다.. 라고 했어요. 방금 사탄에게 내어준 것 같은 육이 보이다가도 한 순간 그렇지.. 이래서 은혜구나.. 이래서 피구나.. 이렇게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구원받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시는 그 돌보심, 우리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심, 납작 엎드림을 경건이라고 해요. 원래 경건(유세베이야)은 왕의 행차 때 왕 앞에 부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술 담배 안 하고, 오락 안 즐기고, 매일 성경책 끼고 다니는 게 경건이 아니라, 나에게는 어떤 선도 의도 깨끗함도 없음을 알고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상태가 경건이고 거룩입니다.
그 은혜와 용서만 꼭 붙들게 하시는, 정말로 침 삼킬 틈도 없는 돌보심이고 지키심인 것을 일평생 체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이에요. 그렇게 날마다 주의 손길에 의해서 해체되어가는 우리의 옛사람 안에, 날마다 우리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우리 안에 주께서 물과 성령으로,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는 새 사람, 속사람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끔 한 번씩 어떻게 내 안에 다른 내가 있는지 놀라잖아요. 99.9%는 나를 사랑하지만, 0.1% 정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그 속사람이 우리 안에 자라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선이고 유익이에요. 나로부터 주님에게로 눈이 들리게 하시는 성령의 돌보심, 책망, 위로하심이 바로 우리의 현재적인 구원이에요. 구원의 확신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면 안 돼요.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런 자란 나 같이 음란한 자입니다. 또 육신을 멸한다는 건 우리 육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못 박힌 그 죽음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내어줌이 바로 우리의 거룩을 위한 것임을 여러분이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성도의 신분, 아들의 신분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의 기록입니다.
(요일 5장)
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악한 자가 여러분을 만지지도 못한다고 해요.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범죄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들, 즉 창세 전에 이미 아들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은 죄와 상관이 없는 존재론적 의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묵시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들로 완성되어 있어요.
그럼 우리는 왜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그 완성이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하나님의 섬김인지를, 어떤 사랑이고 은혜인지를 인생 동안 죄인으로서 배우고 돌아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신분은 죄와 상관없는 의인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열심, 이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그런 남은 날들이 되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이에요. 너무 기뻐서 옹이가 되어버린 사랑이에요. 그 노래 모르죠? 아주 좋은 노래 있어요. ‘언제쯤이면 이 사랑 놓을 수 있을까 어디쯤 가면 이 사랑 놓을 수 있을까 너무나 깊어서 옹이가 되어 버린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운다’.. 가사 좋죠? 이게 우리 성도들의 인생이에요. 이 아픈 사랑이 있기 때문에 힘들고 아프지만 감사할 수 있는 건 이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랑이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이미 거룩하고 이미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이기 때문에 그 거룩과 그 아름다움을 지켜주시기 위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열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에 대해서 끝으로 에베소서 5장 말씀을 보고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엡 5장)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안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우리를 자기 몸 같이 사랑하시는 우리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 그 사랑을 잘 배우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거룩을 위해 언약의 피를 흘려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도 어떤 됨됨이도 보지 않으시고 오직 피의 용서로만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이 되게 하신 우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송합니다. 우리의 남은 날들이 이 은혜의 영광만 찬송하게 하시고 또 영원한 그 나라에서 우리가 영원한 찬송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