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와 한국 현대시의 선적 경향
1. 선시와 시의 위의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위 글은 선(禪)의 시조 달마대사의 교리, 사구게(四句偈)인바, 이 내용은 언어와 논리의 그물(言筌)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란 '법'이라든가 '도'는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만 전할 뿐 경전을 통해 전해질 수 없음을 가리키고, 불립문자(不立文字) 역시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말로 일러주면 언전(言筌) 즉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고 이치로 설명하면 이로(理路)에서 길을 잃고 헤맬 것이니 언어로 설명하기를 포기하겠다는 것이 불립문자이고, 알아들을 만한 사람만 알아들으래서 교외별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노자(老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와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언어란 원래 부질없는 도구이며 말로써 무언가를 설명하고 남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란 옛 시인의 노래 역시 말의 부질없음을 노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언어가 원래 지극히 자의적이며 불완전한 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랴.
언불진의(言不盡意), 말로써 뜻을 다 전할 수 없음에 시인은 날마다 언어의 절벽 앞에서 절망하고 또 그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이언절려(離言絶慮),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자리에서 여여(如如)한 본성의 세계를 보고 깨달음의 순간, 그 기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하는 말(말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닌)이 선시(禪詩)라 할 수 있다.
시는 만법의 진리를 표현하는 최상의 언어 수단이며, 종교적 깨달음 역시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표현이나 전달이 불가능하다.
선은 일반 종교와는 달리 시적 표현과의 관계성이 높다. 선적 깨달음의 표현에 요구되는 제반 특성, 즉 절연·간결·단아·명쾌·명징·무한·초월·본질성 등이 일반 시에서 추구하는 최고 표현성과 특성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송나라 때 엄우(嚴羽)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바 있다.
"선도(禪道)는 오직 묘오(妙悟)에 달려 있고, 시도(詩道) 또한 묘오에 달려 있다.(禪道惟在妙悟 詩道亦在妙悟 선도유재묘오 시도역재묘오)"고 하여, 시와 선을 나란히 보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시와 선의 공통점을 '묘오(妙悟)'로 들었다. 묘오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이다.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다. 책을 얼마만큼 읽었는지는 상관이 없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다. 이치로 따져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다.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시라는 것은 성정을 노래하는 것이다. 성당(盛唐)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興趣)에 주안을 두어, 영양이 뿔을 거는 것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뭐라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마치 허공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속에 비친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때문에 좋은 시는 사변적 지식이나 논리적 이치만 따져 되는 것이 아니다. 상승의 시인들은 시에서 흥취를 추구한다. 흥취는 영양괘각(羚羊掛角)과 같다고 했다. 뿔이 둥글게 굽은 영양은 잠 잘 때 외적의 해를 피하려고 점프를 해서 뿔을 나무에 걸고 매달려 잔다. 영양의 발자국만 보고 쫓아온 사냥꾼은 영양의 발자국이 끝난 곳에서 영양을 놓친다. 영양은 어디에 있는가? 발자국이 끝난 지점에 있다. 허공에 걸려 있다. 한편의 시가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도 이와 같다. 시인의 말이 끝난 지점에 의미는 걸려 있다.
선시나 선문답도 이와 다를 게 없다. 큰 깨달음은 자취가 없다. 허공의 소리는 내 귀에 또렷히 들리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물 위에 뜬 달은 분명히 있지만 실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달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분명히 있으면서 없고, 보이지 않으면서 보인다. 이것이 엄우가 말하는 흥취요 묘오다.
이후 중국 비평론에서 시와 선을 나란히 놓고 설명하는 논의가 쏟아져 나왔다. 원호문(元好問)(1190∼1257)은 〈증숭산준시자학시(贈崇山雋侍者學詩)〉에서 이렇게 말했다.
詩爲禪客添錦花(시위선객첨금화-시는 선객(禪客)에게 비단 위 꽃이 되고)
禪是詩家切玉刀(선시시가절옥도-선(禪)은 시가(詩家)의 옥 자르는 칼이라네.)
말로 할 수 있다면 선이 아니다. 말을 떠난 것이 선임에도 선은 말을 방편으로 사용한다. 뗏목은 강을 건너 언덕에 이른 다음에 뗏목을 버려야 하지만 강을 건너 언덕에 이르려면 뗏목을 이용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선사도 말을 하고 공안을 붙들고 선정을 한다. 또한 선사가 선정을 통해 깨달은 미묘한 소식을 시의 형식을 빌려 쓴다. 시를 만들고 읽는 마음이 바로 선이요, 선을 행하는 마음이 바로 시심이다. 시인은 선의 사고방식을 배워 자신의 생각을 이미지로 전달한다. 절옥도(切玉刀)가 따로 없다.
선과 시는 애초에 길이 다르다. 선이 시가 아니고, 시도 선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 닮은 점이 있다. 표현하는 세계나 도달하는 궁극은 달라도, 방법은 흡사하다. 선이면서 선이 없어야 시라는 말은, 선의 방법을 빌려오되 선에 함몰되지 말라는 말이다. 시이되 시를 벗어나야 선이란 말은, 어쩔 수 없이 시를 빌려 선을 말하지만, 시가 곧 선일 수는 없음을 명백히 깨달으라는 주문이다. 우리의 고착화 된 고정관념을 산산히 깨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 때 시가 되고, 집착을 깨고 깨달음을 얻을 때 선이 된다.
2. 空思想에 대한 이해
선이 敎外別傳 不立文字(교외별전 불립문자) 즉 언어의 초월을 추구하는 논리적 사상적 기반은 불교의 연기설(緣起說) 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 《잡아함경》 중 〈인연경〉
此有故彼有(이것이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此生故彼生(이것이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此無故彼無(차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此滅故彼滅(이것이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위에서 기술하고 있는 연기설의 기본원리는 상호의존하는 상의성(相依性)의 표현이다. 연기란 '말미암아 일어난다'이니 조건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곧 일체의 존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 생겼고, 그것을 다시 바꾸어 생각하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조건이 없어질 때 저절로 없어진다는 것이며, 따라서 독립자존의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이다. 《아함경》에서 석가모니는 이를 상의성(相依性)이라 했고, 우리가 보통 인과라 표현하여 온 상호관계성(相互關係性)이다.
*① 예를 들면 이 책은 종이와 활자, 잉크, 제본하는 기계, 꿰매는 재료 등으로 되어 있다. 더 나아가선 이 책을 만드는 인쇄소, 그 안에서 땀 흘린 많은 기술자, 또 이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외에 더 깊이 생각해보면 책을 읽고 책에서 퍼져 나오는 독서향(讀書香) 등 중중무진법계(重重無盡法界)가 펼쳐짐을 상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시한 이 몇 가지 관계 지어진 것 가운데 한 가지만 빠져도 이 책은 정상적인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 명백하다.
이렇게 모든 사물은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수많은 요인들과 조건 지어진 복합적인 상호의존관계가 빚어낸 결과라고 보는 것이 연기설의 핵심이다. 이 경우 책을 책으로 만든 사물의 상호의존 관계는 물론 가변성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다른 원인과 다른 조건이 관계되어지면 관계 자체와 또 그 관계의 결과가 아울러 변화될 가능성이 언제나 수반하고 있다. 가령 이 책이 독자에 따라 많은 다른 결과가 빚어지게 되며, 또 이 책장 몇 갈피는 인화성 물질에 의해 대화재를 낼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책은 결코 책으로만 고정되어 있는 사물이라 할 수 없다. 이렇게 관계 지어진 일체 사물은 언제 무엇으로 변할지 모르는 가변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모든 사물의 존재 양태이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불교에는 일체 존재물의 무자성(無自性), 곧 그 고유한 본체를 부정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책이 되기도 하고 불쏘시개, 재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도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일체 삶은 모든 것이 각각 고유한 자성을 가졌다는 인식 위에 영위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상들은 사물의 고유한 본질은 아니다. 일체의 존재물,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는' 상호의존적 존재들이라면, 어떠한 것도 고유한 자성을 가질 리가 없다.
고유한 자성이 명백히 없다는 것이 성립될 때 우리는 일체의 존재물을 차별하여 인식할 필요가 없다. 가령 앞에 예를 든 책이 반드시 책으로 인식될 필요가 없으며, 된장 속에서 나온 구더기가 더럽게 인식될 까닭이 없다. 이럴 때 우리는, 'A는 A다'라는, 우리의 고정된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모순된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관습화되고 합리화된 감각적 지각과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이러한 사태 앞에서 캄캄해짐을 느끼게 된다.
불교의 공도리(空道理)는 이러한 난제를 명쾌하게 박살내 버린다. 앞장에서 살펴 본 《잡아함경》의 〈인연경〉에서와 같이 모든 존재물은 고유한 자성이 없다는 연기설의 상호의존설을 전제로 할 때, 일체의 존재물은 '존재물이 아닌 존재물일 뿐'이다. 곧 '책은 책 아닌 책'으로 거짓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선에서는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진짜로는 공이지만 절묘하게 현상으로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공도리는 이 기묘한 책을 '공으로서의 책'이라 말한다.
《반야심경》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色卽是空)'은 이러함을 명약관화하게 설파하고 있다. 현상적으로 뭐라 불리든 일체의 존재물은 자성이 없는 공으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A도 공, B도 공, C도, D도,…… 그러나 모든 것이 공일 때, 불교에서는 또한 공이 절대의 무기인 양하는 전지전능을 경계하고 공과 다른 것에 관해 분별심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공역부공(空亦復空)'이라고도 말한다.
또 《반야심경》은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표현으로 공이 곧 현상, 본질이 바로 현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체의 현상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허망한 망상이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할 원리가 공이라고 하여 너무 공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를 선문에서는 여러 가지 화두(話頭)로 경책하고 있다.
이는, 곧 A는A가 아니기 때문에 A다(모순어법矛盾語法, 반상합도反常合道)라고 표현되는 세계이다. 공도리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의 종지(宗旨)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공의 설파야말로 불교의 최고 진리를 헤아릴 수 있는 첩경이다.
이는 곧 '다름'이 '같음'이 되고 '같음'이 '다름'이어서, '같음'과 '다름'이 융합하여 같아질 수 있다는 대모순의 통합론적인 세계이다. <자료참조 : 以上*①송진성(선시의 표현방법에 관한 연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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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假-中사상)》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는 것은 없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空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 역위시가명 역시중도의) 왜냐하면, 중연(衆緣)이 갖추어지고 화합하면 물건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물건은 중인연(衆因緣)에 속하므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공도 또한 (공으로서의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하다(공역부공 空亦復空).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가명(假名)을 가지고 설할 뿐이다. 여기서 있다든가 없다든가는 통하지 않고, 유(有)와 무(無) 양변(兩邊)을 모두 떠나 있으므로 중도(中道)라고 부를 수가 있다.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으므로 있다(有)고 할 수 없다. 또한 반면에 공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니 없다(無)라고도 할 수 없다 .만일 존재의 자성 모양이 있다면, 중연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그것은 처음부터 있다(有)일 것이다. 그러나 중연 없이는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고 말하게 된다. ((나가르주나 (연기하여 생한 일체의 모든 법은)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八不) -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 그의 공사상의 근저에는 어디까지나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곧 연기하여 생겨나는 일체의 법은 고유한 본성 즉 자성이 없으며, 고정적인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고 설한 것이다.
열반경에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佛性은 非有非無며 亦有亦無니 有無合故로 名爲中道)니라. 란 말씀도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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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시의 종류와 선의 세계
[1] 선시의 종류
김형중은 ‘선시 문학의 세계(1)’에서 선시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선시는 크게 인시우선(引詩寓禪)의 시와 원선입시(援禪入詩)의 시로 대별될 수 있다.
月圓不逾望(월원불유망) 달은 둥글어도 보름을 넘지 못하고
日中爲之傾(일중위지경) 해는 정오가 되면 기울기 시작하네.
庭前柏樹子(정전백수자) 뜰 앞에 잣나무는
獨也四時靑(독야사시청) 홀로 사시상청 푸르네.
- <청허당집 초당영백〉-
庭前柏樹儼成行(정전백수엄성행) 뜰앞의 잣나무는 의젓이 늘어서서
朝暮蕭森影轉廊(조모숙삼영전랑) 하루 종일 우뚝한 그림자가 회랑을 도네.
欲問西來祖師意(욕문서래조사의) 서쪽에서 조사가 온 뜻을 물으려 하니
北山靈風送凄凉(북산영풍송처량) 북숭산(北崇山) 신령한 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보내오네.
-〈소화시평 신광사〉-
두 시 모두 달마대사가 불교의 정수인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선불교를 전하러 오는 '조사서래의'의 화두를 멋지게 시화한 작품이다.
〈초당영백〉은 전형적인 화두시로 선사가 시의 형식을 빌어서 선지(禪旨)의 내용을 담아낸 인시우선(引詩寓禪)이고, 〈신광사〉는 시인의 편에서 선적 사유의 깊이를 시로 유인한 원선입시(援禪入詩)의 명품이다.
서산대사는 '뜰 앞의 잣나무는 홀로 사시상청 푸르네.' 하고 결구하였는데, 남곤은 '뜰 앞의 잣나무가 의젓이 늘어서서 하루 종일 우뚝한 그림자가 회랑을 도네.'라고 읊어 정백(庭柏)의 무궁하고 영원한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남곤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신령한 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보내오네.'라고 하여 조사가 온 뜻이 중생의 열뇌(熱惱)를 식혀주는 신령한 바람(靈風) 즉, 선풍(禪風)임을 상징하고 있다. 참으로 종교적인 목적을 떠나 시 자체로서도 성공한 시로 선적인 함축성을 내포한 자연스러운 선기시(禪機詩) 중의 일품이다.
위 예시에서 본 바와 같이 인시우선(引詩寓禪)의 선시는 선사가 시의 형식을 빌어서 선지(禪旨)의 내용을 담아낸 시를 말하고 원선입시(援禪入詩)의 시는 시인의 편에서 선적 사유의 깊이를 시로 유인하는 시를 말한다.
이를 다시 세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인시우선(引詩寓禪)
① 오도시(悟道詩) ~ 선사가 열심히 수행을 해 오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경지를 표현한 시(開悟詩라고도 함)
② 시법시(示法詩) ~ 선사가 중생제도를 위해서 선의 세계나 진리의 세계를 시의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는 시
③ 화두시(話頭詩) ~ 선사가 화두를 시로 표현한 시. 이를 송고시(頌古詩)라고도 한다.
④ 선기시(禪機詩) ~ 선사들의 시가 종교적 포교목적을 떠나 순수한 시 자체로 존재하면서도 선적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는 시를 말하며 고도의 문학성을 띄고 있는 시를 말한다.
(2) 원선입시(援禪入詩)
① 선리시(禪理詩) ~ 시인의 입장에서 선가의 이치나 교리를 시로 읊은 시
② 선사시(禪事詩) ~ 선에 대한 책이나 선적인 고사, 선적 사실에 대하여 읊은 시
③ 선취시(禪趣詩) ~ 시에서 선을 원용하는 대표적인 경우로 선적 흥취를 나타낸 시를 말하며 선적 특징이랄 수 있는 고요함이 시어 속에 함축된 시로써 가장 문학성과 심미성이 있을 뿐 아니라, 선시가 일반시를 능가하여 명작으로 나타낸 시가 보통 여기에 포함된다 (以上 김형중의 ‘선시 문학의 세계(1)’에서 참고 및 인용)
이외에도 산생활의 서정을 노래한 산거시(山居詩또는 山情詩), 산사의 정경을 읊은 선적시(禪迹詩), 열반송(涅槃頌), 출가시(出家詩), 선문답을 시로 읊은 공안시(公案詩), 스승이 제자에게 선법을 전하는 전법게(傳法偈)등이 있다.
[2] 선의 세계
선시의 세계는 선의 세계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선의 세계를 의리선(義理禪),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선의 종류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기 쉽게 구별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의리선(義理禪)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이다. 곧 모양(現像)이 공(本質)이고 공(本質)이 모양(現像)인 세계이다.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의 세계이다.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단계로서 모양(現像)과 공(本質)함의 본질에 대한 지식적인 이론의 세계라고 하여 의리선이라고 한다. 여래선(如來禪)은 무색(無色) 무공(無空)의 세계로서 모양도 없고 공도 없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만물은 서로 본질적으로 똑같고 이름도 모양도 없다.
산도 없고 물도 없는 세계이다. 조사선(祖師禪)은 색즉시색(色卽是色)이요 공즉시공(空卽是空)의 세계이다. 우주 만물은 서로 똑같고 구성하는 요소는 공하며,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이 모든 것은 눈앞에 모양으로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의 특정한 기능을 발휘하며 존재하고 있다. 눈앞에 존재한 이 세계를 저버리고 그 본성의 세계를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는 공하지만, 현존하는 만물을 떠나 만물의 존재를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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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의리선(義理禪) -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 산은 물, 물은 산의 세계
② 여래선(如來禪) - 무색(無色) 무공(無空)의 세계로서 모양도 없고 공도 없는 세계
③ 조사선(祖師禪) - 색즉시색(色卽是色)이요 공즉시공(空卽是空)의 세계(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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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선사의 사료간(四料簡)도 선의 세계를 단계적으로 잘 드러내고 주고 있어 선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사료간이란 모두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는 사람을 빼앗되 대상은 빼앗지 않으며(탈인불탈경 奪人不奪境), 둘째는 대상은 빼앗되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탈경불탈인 奪境不奪人), 셋째는 사람과 대상을 모두 빼앗으며(인경구탈 人境俱奪), 넷째는 사람과 대상을 그대로 놓아둔다(인경구불탈 人境俱不奪)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와 둘째는 의리선의 경지를, 셋째는 여래선의 경지를, 넷째는 조사선의 경지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有時엔 奪人不奪境이오 有時엔 奪境不奪人이오 有時엔 人境俱奪이오 有時엔 人境俱不奪이니라<臨濟錄> )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人)은 주관으로, 경계(境)는 객관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주관을 버리고 객관은 버리지 않고, 어떤 때는 객관은 버리고 주관은 버리지 않는다. 어찌하기 위해서 그러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기 위해서이며,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면 또 어찌 되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완전히 성립된다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는다는 것은 쌍차이며,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쌍조이니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융합, 자재한 것을 말한다(쌍차쌍조 雙遮雙照). 이것이 유명한 임제스님의 사료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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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 - 사람을 빼앗되 대상은 빼앗지 않는다.- ①
ⓑ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 - 대상은 빼앗되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 ①
ⓒ 인경구탈(人境俱奪) - 사람과 대상을 모두 빼앗는다. - ②
ⓓ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 - 사람과 대상을 그대로 놓아둔다 -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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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시를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공한 숭산(崇山) 스님은 선원(禪圓, The Zen Cycle)이라는 원(圓)의 모양을 제시하면서, 첫째는 소아(小我:俗塵, 작은 나, Small I, 0도), 둘째는 업아(業我:존재와 비존재, 업을 가진 나, Karma I, 90도), 셋째는 무아(無我, 眞空, 나 없는 나, Nothing I, 180도), 넷째는 묘아(妙我:妙有, 절대적 존재, 자유로운 나, Freedom I, 270도), 다섯째는 대아(大我:如如, 있는 그대로의 나, 큰 나, Big I, 360도)로 나누고 있다. 이 선원의 특징은 0도, 90도 180도, 270도 360도(원에서는 0도와 같은 위치)라는 원의 형태로 그 단계를 제시함으로써,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깨달음의 세계를 이미지화하였다.(《선의 나침반》 2,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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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아(小我:俗塵, 작은 나, Small I, 0도) - ①
ⓑ 업아(業我:존재와 비존재, 업을 가진 나, Karma I, 90도) - ①
ⓒ 무아(無我, 眞空, 나 없는 나, Nothing I, 180도) ②
ⓓ 묘아(妙我:妙有, 절대적 존재, 자유로운 나, Freedom I, 270도) - ②
ⓔ 대아(大我:如如, 있는 그대로의 나, 큰 나, Big I, 360도) -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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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선(義理禪), 임제의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 숭산의 소아(小我) 업아(業我)의 세계는 일반 시들이나 불교의 게송(偈頌) 수준에서 많이 다루어지므로 전형적인 선시에서는 중심적 테마로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선시라면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의 세계, 임제의 인경구탈(人境俱奪)과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의 세계, 그리고 숭산의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와 여여(如如)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숭산의 진공과 묘유의 세계는 여래선의 세계에 해당한다고 보면, 위의 분류는 서로 같은 세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여래선과 인경구탈과 진공 묘유의 세 세계는 서로 통하고, 조사선과 인경구불탈과 여여의 세 세계는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특히 묘유의 세계는 진공의 세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묘하게 존재하는 세계를 가리키는데, 선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며, 선시 해석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자료참조 : 박찬두, 선시 불교문학의 혁명)
月中玉兎夜懷胎 (월중옥토야회태-달 속의 옥토끼 밤에 새끼를 갖고)
日裏金烏朝抱卵 (일이금오조포란-해 속에서 금까마귀 아침에 알을 품는다.)
黑漆崑崙踏雪行 (흑칠곤륜답설행-시커먼 곤륜산이 눈을 밟으며 가니)
轉身打破琉璃椀 (전신타파유리완-몸 움직일 때마다 유리그릇 깨지는구나.)
- <단하자순(丹霞子淳)> -
위 선시는 묘유(妙有)의 세계를 보여주는 시다. 그 어떤 모양도 행동도 자유롭게 존재가 가능한 세계이다. 고로 옥토끼가 새끼를 갖고, 금까마귀가 알을 품을 수 있으며 곤륜산이 눈을 밟으며 갈 수가 있다.
도저히 합리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선다. 아니 상상력의 단절마저 느낀다.
그러나 옥토끼, 금까마귀, 곤륜산 등 초월적 상징들은 모두가 그 본성이 하나이다. 완전하게 공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떠한 행위를 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탈의 세계, 자유로움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차별이 없으며, 공하다는 측면에서 모든 행동도 결국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와 상징들은 무색무공(無色無空)의 여래선의 세계, 인경구탈의 세계, 진공묘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특히 공의 세계에서 묘하게 존재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이 세계는 현실과 단절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자유롭고 신비로운 상상력이 펼쳐지게 되기 때문에, 보통 이러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선시가 난해하고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진공묘유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라는 연기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시 바꾸어 말한다면 상호 의존적 관계에 의해 존재함을 설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의존성의 원리, 상의성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존재 양태는 무한한 가변성을 갖고 있으며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인연으로 생겨난 것을 우리는 공하다)이란 중론송(나가르주나)의 가르침에서와 같이 일체 존재물은 본래 무자성, 즉 고유한 본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깨달은 현인과 성인은 상대의 세계를 훌륭한 무위의 절대법으로 차별을 두지 않는다. 공은 자기부정인 동시에 자기 초월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선시의 표현방법
석가모니가 영산(靈山)에 있을 때 범왕(梵王)이 금색의 바라화(波羅花)를 바치면서 설법을 청하였다. 그 때 석가모니가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모든 사람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망연하였는데, 대가섭(大迦葉)만이 미소를 지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대가섭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하였다. 그 뒤 이 내용은 중국의 여러 선서(禪書)에 인용되면서 선종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내용으로 채택되었다.
이것이 바로 염화미소(拈花微笑)란 고사로써 설법 대신 연꽃을 든 것은 공안(公案), 즉 화두(話頭)를 든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연꽃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를 언어로 표현 할 수 없다는 언어부정의 사상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석가모니와 가섭 사이에 오고 간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진흙탕 속에서도 열반을 이루는 연꽃의 이미지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가섭의 미소일 것이며 이미 그 연꽃은 언어 밖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참고①)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道可道는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이름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 명가명 비상명)."라고 하는 《노자》의 명구도 실제로는 언어가 갖는 한계를 자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도(진리)란 언어로 명명되고 포착되는 순간 금세 언어 밖으로 퉁겨나갈 수밖에 없음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미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염화미소(拈花微笑)의 고사에서 제시되는 연꽃은 이렇듯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진리세계를 나타태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공안(公案), 즉 화두(話頭)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사들에 의해서 제시되는 화두는 추상적인 언어이며 이러한 상징적 이미지는 복수의 무한한 내포적 의미를 지닌 인다라망(因陀羅網)적 세계란 점이다.
따라서 화두, 그리고 선시의 보편적인 특징은 일상의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점이며 이의 표현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항대립적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모순어법, 역설어법으로 표현된다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뒤엉켜 있는 어법과 함께 하는 것이 반상합도(反常合道)의 정신, 즉 전복적 상상력이거니와, 이러한 상상력이 갖은 또 다른 특징은 즉발성(卽發性)이다. 물론 이 때의 즉발성은 선적 직관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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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①도덕경 제1장,2장)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요.(고상무, 욕이관기묘. 상유, 욕이관기요)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玄之又玄, 衆妙之門.(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변의 도가 아니다. 그 명칭을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명칭이 아니다. 무는 천지창조의 시원을 가리키고, 유는 만물의 모태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언제나 무에 처하면서 그 오묘함을 관조하고, 언제나 유에 처하면서 그 무한함을 관조하고자 한다. 이 두가지는 나온 곳은 같지만, 이름만을 달리한다. 그것을 함께 일컬어 현이라고 하며 하고 더욱 현한 것이 온갖 오묘함의 문이다.
2.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故有無相生, 難易相成,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위이불시, 공성이불거). 夫唯弗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세상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추한 것이다.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있음과 없음을 상대적으로 생겨나고, 어려움과 쉬움은 상대적으로 이루어지며, 길고 짧음은 상대적으로 나타나며, 높고 낮음은 상대적으로 대비되며, 소리와 메아리는 상대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는 상대적으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을 만들고도 관여치 않으며, 성장시키고도 소유하지 않으며, 기르고도 제 능력을 믿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바로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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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모든 지은 법은)
如夢幻泡影 (여몽환포영-꿈·환영·거품·그림자 같고)
如露亦如電 (여로역여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應作如是觀 (응작여시관-마땅히 이와 같이 볼 것이다.)
-《금강경》-
ⓑ
覺悟一切法 (각오일체법-모든 법 깨닫기를)
皆是如幻化 (계시여환화-다 환영으로 된 것과 같음을)
示現種種身 (시현종종신-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 보이고)
出生無量音 (출생무량음-한량 없는 소리를 내어
入衆生想網 (입중생상망-중생의 생각 그물 속에 들어가도)
其心無染著 (기심무염저-그 마음 물들어 집착함이 없네)
-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 -
(* 참조-선시의 표현방법에 관한 연구, 송진성)
선불교에서 대표적인 소의경전으로 꼽고 있는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인 ⓐ를 보면, 직유를 사용하여 '일체법이 꿈과 환영과 거품과 그림자와 이슬과 번개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최고의 경전으로 꼽고 있는 《화엄경》 중의 한 게송(偈頌)인 ⓑ를 보면 '일체법이 환영으로 된 것과 같다' 라는 직유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종종신"과 '무량음'이라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게송의 직유와 상징을 보면 선시의 초월적 상징과 역설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게송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며 교훈을 전달하고 있어, 선시처럼 절망감이나 아득함을 느낄 수 없다.
불교의 대표적인 시인 게송(偈頌)의 교훈적, 이성적, 직설적인 특성과 비교하더라도 선시의 특성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선시는 기존의 게송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방법의 시이며, 언어를 다루는 방법적 측면에서도 고도의 문학적 수법을 초월한 혁명적 방법의 시인 것이다.(*참조끝)
焰裡寒霜凝結滯 (염리한상응결체-뙤약볕 속 서리 구슬을 맺고)
花開鐵樹映輝明 (화개철수영위명-쇠나무에 핀 꽃 밝음을 자랑한다)
泥牛哮吼海中走 (니우효후해중주-진흙소 큰 울음으로 바다 속 들고)
木馬嘶風滿道聲 (목마시풍만도성-바람에 우는 나무말 길을 메운 그 소리)
- <虛白 明照(1593∼1661)> -
위의 시는 1행부터 . 위 시의 1행 "뙤약볕 속 서리"와 2행 "쇠나무에 핀 꽃" 3행에 나오는 "진흙소 큰 울음" "진흙소가 바다에 든다"나 마지막 행의, "바람에 우는 나무말"의 등가물인 "길을 메운 그 소리" 들은 정상이 아닌 기이한 사물과 상호 충돌적인 이미지를 등장시켜 우리를 황당하게 한다. 이러한 상호 모순어법들은 우리가 현실적인 기본 질서나 정상으로 인정하는 기본 바탕을 고의적으로 깨어 버리는 데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위 시에서 무생물로 만들어진 진흙소나 나무말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울 수 없다는 이러한 표현들은 현실적인 이항대립적(二項對立的)이거나 고정관념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의 정상적인 분별상(分別象)으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
박찬두는 이들 이미지를 해석해내는 것이, 즉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도 주장하기도 한다. 예의 상징적 이미지가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조롱이라도 하듯 무애자재한 초월적 상상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 시의 "경지는 비유나 상징의 세계를 넘어 언어의 마성(魔性)을 열어제치고 발견한 절대계의 생생한 실상"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송진성은 ‘선시의 표현방법에 관한 연구’에서 위와 같은 선시를 A=A라는 정상적인 논리로는 그 의미를 해독할 수 없으며 반상합도(反常合道)의 삼단계 표현법에 의하여 “A는 A가 아니기 때문에 A다” 즉 "A=A??"라는 공식으로 접근해야 됨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선의 기반이 되는 공도리(空道理)는 일체가 회감하며 차별적 인식을 거부한다. '이것'과 '저것'이 없는 공이므로, '이것'과 '저것'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시는 우리에게 정상이라는 기준치가 정말로 정상인가 되묻게 해준다. 공의 세계는 정상이 비정상이고 비정상이 정상인 세계, 정상과 비정상이 융합하여 서로 회통되는 세계다.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일중일체다즉일, 일즉일체다즉일-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여럿의 물질적 현상(色)이 하나로 모이고 그 본질(空)이 여럿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세계이다.
이것은 A와 A?(A가 아닌)가 차별상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A가 곧 A일 뿐만 아니라 A가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등식으로 표현하면 A=A??(A는A일뿐만 아니라 A가 아닐 수도 있다. 즉 A는A가 아니므로 A다)등식이 된다. 모든 사물들은 이러한 양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공이며 그래서 불이세계(不二世界)라 한다. 불경 전반에 이런 반상합도(反常合道)의 삼단계 표현법이 깔려 있다. 이 말씀들은 중도를 현현하기 위한 표현들이다. (중도설명 : 위 4쪽 《中論頌.-나가르주나-》)
<자료참조 : 송준영, ‘선시의 향기’>
조주(趙州) 스님에게 제자가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대답하였다.
"없다(無)."
*②위의 화두(話頭: 公案이라고도 함)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물에는 불성이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화두는 한 마디로 대답 없는 수수께끼와 같다고도 말한다. 생각을 끊고, 우리의 판단을 중지시키려는 선사들의 의지에 의해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위의 화두에 나오는 '개'와 '불성'이라는 단어를 살펴본다면, 과연 개라는 동물은 존재하는 것인가. 개는 개라고 할 만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가. 개를 이루는 본성은 인연화합에 의해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순간순간 변해가는 무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공하다.
그러나 내가 '개'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개를 이미 존재하는 실체로 인식한다. 그래서 개의 본성을 정확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다. 개라는 이름은 인간이 붙여준 허상에 불과하다. 개를 이루고 있는 고정불변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는 전적으로 공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성'이라는 것도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만법 스스로 자신을 불성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없다. 불성이란 인간이 임의로 붙여준 허상 즉 가명(假名)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불성은 불성이라고 하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불성도 전적으로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질문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본성이 없는 '개'에게 있지 않은 '불성'이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보통 불자들은 만법에는 불성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모든 생명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답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없다'라고 답하였다. 조주 스님은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커다란 의심을 불러일으켜 생각과 분별심을 끊게 하려고 그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제자들이 물을 때마다 상식적인 답변을 거부한다. 그 대신에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방(棒,몽둥이로 후려치는 것)이나 할(喝,고함지르는 것)을 하기도 한다. 말과 언어로는 진정한 공의 세계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가끔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사들은 開口則錯(개구즉착-입을 열면 어그러지니)하니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말이 없으면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마음도 없고 물건도 없는 세계, 그것이 이 세상의 진정한 본래 모습이며, 진정한 공의 세계인 것이다. 진정한 공의 세계에 이르면 모든 형상과 이름이 사라진다. 그곳에는 부처도 팔만대장경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선의 세계에서는 언어도 쉬고 생각도 끊어진 침묵의 세계를 지향하고, 금과옥조처럼 불립문자(不立文字)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니 하는 말들을 들먹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거부하는 선이 어떻게 시라는 언어구조물로 형상화될 수 있는가. 선사들은 선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기존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以上*② (박찬두, 선시 불교문학의 혁명에서)>
그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 즉 우리가 정상이라 규정하는 일상을 돌이키고 뒤틀어서 정상과 비정상이 융통하고 회감하여 수승된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반상합도(反常合道), 초월은유(超越隱喩), 무한상징(無限象徵)을 사용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드러내는 길을 찾게 된다. 언어를 버린 선사들이 다시 언어를 통해 그 세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은 언어라는 의사소통 수단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그 결과 뜻하지 않게도 그들은 선시를 탁월한 미학적 구조물로 형상화하는 데도 성공한다. 결국 선의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어도단(言語道斷)' '이언절려(離言絶慮)' 등으로 표현되는 언어에 대한 부정정신과 초월정신은 선시라는 독특하고 경이로운 문학을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2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