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쓸 시 / 김이듬
내 안에는 굉장한 자질이 있어요. 엄마,
나는 내 생애 최고의 시를 쓰고 있어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자살한 시인의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최고의 작품을 남기고 죽었을까요
그녀의 일기장은 칠백 페이지 넘게 두꺼워요
저는 요즘 일기를 쓰지 않아요
당신이 남긴 편지에 답장도 못 했죠
쩔쩔매며 시에 매달리지만 시를 못 쓴 채 행사는 해요
어제 두 시인과의 낭독회가 끝날 무렵
객석에서 독자가 제게 질문했어요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서 대표작은 뭔가요?”
조금 머뭇거리다가 저는 답변했답니다
“제 대표작은 아직 못 썼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쓸 예정이에요.”
대개 작가들이 하는 농담이죠
정밀하게 시간이 흘러도 내일은 지연되죠
누가 뭘 가지고 도착하든
지구가 태양과 멀어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여전히 저는 아무하고도 같이 살 수 없지만
어머니, 저는 시가 제 생애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김선형 옮김, 문예출판사, 2004, 654쪽.
후배에게 / 김이듬
음악을 좋아해?
걷는 걸 좋아해?
맛있는 걸 좋아해?
네가 사는 것도 좋아하면 좋겠다
너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다
아이들 점수, 아이들 담임, 아이들 친구, 아이들 운동장, 아이들 급식......
학부모 회의를 마치고 온 두 사람은 세 시간 넘게 아이들
이야기에 몰입한다 한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멜빵바지를 입었어
둘 다 4학년 2반이며 한 아이는 수학을 잘하는 여자아이,
한 아이는 강아지를 좋아하는 키가 작은 남자아이인 걸
나도 알게 되었어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많이 말하는 거라면
나는 너를 다섯 번 생각했다
이리하여 쓴다
사는 게 뭘까?
연말 퇴근길에 너는 말했지
다른 부서 과장의 부친상에 조의금을 부쳤고
야근을 했고 배고파 죽겠다고
회사 가는 게 괴롭다고 했어
사는 게 뭔지 달아나고 싶다고
안경 벗으면 딴사람 같은
너는 김연아의 에드 레드메인과 인천 사는 친구를 좋아하지
얇은 티셔츠에 청바지 입길 좋아하고 초코우유와 망원
한강공원을 좋아하지 빨래하고 누워서 웹툰 보길 좋아하지
일과중에 나는 너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제일 좋아
널 만날 약속 없었더라면 온종일 끔찍했겠지
나도 너처럼 습관적으로 한숨 쉬지만
네가 얼굴 뾰루지랑 새치를 걱정하면서도
솟아오르는 웃음을 터뜨리면 좋겠어
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의미 없어도 생생하지
사는 걸 꽤 좋아하면 좋겠어
첫댓글 김이듬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 시 중에서 다 애착이 가지만 그 중에서도 어떤 시인지 여쭈었다. 시인은 위의 두 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