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린도전서 5:6-13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이번 시간에는 본문에 나오는 묵은 누룩과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묵은 누룩에 대하여 알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의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와 고린도라는 도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는 고대 그리스의 상업 도시이자 항구도시예요. 그래서 여러 인종이 모여 살면서 향락과 퇴폐의 상징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가 있고, 이탈리아를 향하는 레기온 항구를 품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에게해로 나갈 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었습니다. (겐그레아 하면 생각나는 게 있죠?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나실인 서원을 하고 머리를 깎았다고 해요.) 그렇게 번창한 항구도시이다 보니 빈부 격차가 심했고, 퇴폐한 문화가 일상적인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섬겼고, 따라서 이를 위한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천 명이 넘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전만 지키는 게 아니라 밤이 되면 도시로 내려와서 창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들 종교는 성을 숭배하는 종교였습니다. 또 이 도시에는 아폴론 신전이 있었어요. 아폴론은 음악과 노래, 시의 신인데, 아폴론을 숭배하는 남자들이 그 신전에서 남창들과 동성애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오죽하면 음란한 사람들을 고린도스럽다는 의미의 고린티안이라고 할 정도로 이곳은 향락과 퇴폐의 도시였습니다.
당시 헬라 문화, 로마 문화는 이같이 성에 대해서 관대하고 윤리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문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오래된 영화 중에 ‘칼리귤라’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칼리굴라라는 로마 황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 로마 황실 안에 집단 성교를 위한 장소를 만들어놓을 정도로 당시 성문화는 아주 문란했습니다.
이런 고대 도시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울에 의해서 고린도에 전파된 거예요. 말 그대로 세상 속에 그 세상과는 다른 매우 이질적인 게 들어온 겁니다. 세상 문화나 종교와 전혀 함께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린도에 교회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잘살고 있던 고린도라는 도시에 세상에 없었던 어떤 새로운 영역, 새로운 공간이 생긴 겁니다. 말하자면, 고린도 안에 고린도와는 경계선을 가진 어떤 무리가 모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그 경계선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그런 경계를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모였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고와 생활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 둘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모이게 되었단 말이죠.
그런데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고전 1:2)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보는 고린도 교회가 이렇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당시의 문화와 종교에 빠져있던 사람들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이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이 내린 정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이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보시는 시각입니다.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 보낸 사도의 편지, 즉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은 전부 고린도와 같은 세상이에요. 고린도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아요. 말 그대로 세상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큰 성 바벨론이지요. 그런 음녀의 섞은 술에 취한 세상 속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 세상과 경계 지어진,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교회, 곧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세상 끝날까지 있게 될 것이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본문을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전 시간에 했던 음란, 사탄에게 넘겨줌, 누룩과 함께 뒤이어 등장하는 이 내용들을 다른 시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음란과 누룩의 관계부터 보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그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이 말은 교회를 사람이 세울 수 없다는 겁니다. 또 사람들 마음대로 깰 수도 더럽힐 수도 없습니다. 그 몸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묶여있는 몸이에요.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묶여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교회가 무엇인지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말을 준비하고 있어야 해요.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묶여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과 분리된 상태, 즉 단절된 상태를 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존재가 가능한 게 성경이 말하는 몸으로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고 작동하기 때문에 성도가 음행을 해도, 어떤 나쁜 일을 해도 천국 가는 일이 생기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음란한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셔야 합니다. 법을 어기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카운트하시지 않는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 7절처럼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본론이에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 뿌림이 있는 그 교회를 향해서 이 편지를 보낸 거예요. 그들더러 “이런 나쁜 짓 하지 마. 음행하지 마. 교인들끼리 송사하지 마. 우상 숭배하지 마. 좋은 교회 해야 해.”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신분이 무엇이고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편지입니다. 너희들은 세상과 함께 섞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란다... 이 얘길 하는 거에요, 너희들의 몸이 누구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다 보니 이 본문을 가지고 세상에 모범이 되는 건강한 교회를 하자, 싸우지 말고 파당 만들지 말고 하나가 되자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바울의 편지는 그런 가시적인 교회를 향해서 쓴 편지가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들을 향해서 쓴 편지입니다.
이게 세상과 다른 교회의 특수성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어떤 음행을 하고 어떤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있겠지만, 심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는 그렇게 은혜 아래 있는 자이지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애초에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태초에 이미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몸, 즉 교회에 하나님의 그 약속이 작동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절대 피 뿌림이 있는 성도들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은 사탄에게 내어주더라도 여러분 안에 있는 약속은 취소되거나 변개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약속으로 잉태된 새 몸, 새 사람이 마지막 날,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의 음행한 자들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전체,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 바울이 지금 묻고 있는 거예요. 너희 안에 예수와 십자가, 그 언약의 피라는 약속이 있는 거냐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이 이거예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들 안에 예수가 있는지, 그들이 십자가 복음을 알고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이 있는 몸이라면 반드시 묵은 누룩은 제거될 수밖에 없다.. 너희는 본래 누룩 없는 자다...
하나님이 원래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과 하나였어요. 죄와 상관이 없었고 자기라는 자인식이 없었어요. 그런 그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자인식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저기 계시고 나는 여기 있는 분리가 발생한 거예요. 그때부터 아담 몸 안에는 누룩이 발효되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 벌거벗음을 알고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하나님이 찾아오시자 나무 뒤로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숨었느냐고 물으시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말하길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인간에게는 자기의 생존이 가장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지?’.. 나의 생존을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요. 하나님과 단절된 순간부터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어요. 땅에도 저주가 임해서 땀을 흘려야 하고 여자는 자식을 낳아야 했습니다. 이런 건 모두 생존과 상관이 있어요. 원래 인간은 자기 생존을 고민하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었어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겁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과 단절되자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 두려움이었던 거에요.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은 병이 무엇인지 아세요? 정신병이에요. 우울증, 공황장애, 조현병... 그러니까 자기는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도 사실 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정상적인 인간은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말 자체가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두려움, 우리가 절대 벗을 수 없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 어떤 소설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냈지요. 이 모든 게 우리를 지으신 분과의 분리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세상에 약속대로 하나님이 오신 거예요.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부활을 믿지 않던 제자들이 다음 차례가 자기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잠긴 문을 뚫고 나타나셨어요. 그때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이제 내가 부활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했으니 이제 너희는 하나님과 다시 화목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본문 7절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었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약속대로 피를 흘리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평강입니다.
이게 창세 전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여기에서부터 풀어집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어서 천국 갈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럼 뭡니까?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요.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믿는 믿음 자체가 없어요. 예수님이 약속대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비로소 믿음의 세계에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알고 믿게 된 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다른 말로 하면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불화했던, 원수 되었던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다 사라진 거예요. 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의 장막이 찢어지고, 제사장들이 가지고 들어갔던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들고 지성소 안, 하나님 앞으로 기쁨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모든 서신서에서 이것을 말합니다. 서신서의 모든 명령어들은 예수 잘 믿고, 나쁜 짓 안 하고, 교회 열심히 섬기라는 게 아니라 네가 십자가 피를 아는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를 아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것을 선포하는 말씀들인 거에요. 고린도전서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누룩 이야기가 나옵니다. 묵은 누룩을 버려라.. 묵은 누룩이 뭐예요?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생존하려고 했던 모든 속성과 시도들이 묵은 누룩이에요.
너희는 본래 누룩 없는 자였다..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은 원래 누룩이 없는 자야.. 이제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되셨으므로 이제는 묵은 누룩을 내버려야 한다.. 너희들은 묵은 누룩과 상관없는 자들이야 이게 고린도전서 5장의 결론입니다. 이렇게 누룩은 반드시 반드시 유월절 어린양으로 연결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과 연결될 때만 이 누룩은 제거됩니다. 없는 누룩이 되는 거에요
그럼, 구약에서 말하는 누룩 없는 떡과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구약을 살펴본 후에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출 12장)
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잡고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출애굽하는 밤, 야훼의 밤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1주일간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유월절은 먼저 세상 죄를 상징하는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이 얼마가 급박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신을 신고, 허리띠 띠고, 지팡이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합니다. 빨리 별세하라는 이야기예요. 유대인들의 주식인 누룩 든 유교병 대신 무교병을 먹는 건 누룩 넣은 떡이 부푸는 시간도 없이 아주 급하게 애굽을 떠나야 함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누룩 없는 떡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들, 피발린 이스라엘이 먹어야 하는 떡입니다. 애굽을 다시 추억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이 바로 무교병이에요. 쓴 나물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은 고난과 수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매년 돌아오는 유월절에 무교병과 양과 함께 먹으면서 애굽 종살이에서 건져주신, 바꾸어 말하면 죄의 권세 아래에서 종노릇 했던 우리를 값없이 구원해주신 어린양의 피에 대한 감사를 다시 되새김하는 게 유월절 정신입니다. 무교병과 쓴 나물과 어린양 고기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런 유월절의 의미를 잊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죄 없이 희생당하신 유월절 어린양을 기념하면서 그 예수를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 게 바로 성도들의 유월절이고, 그런 유월절과 무교절로 점철되는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이 모든 것을 실제 상황으로 기록해놓으신 것은 앞으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 모든 성도의 삶이 이러할 것이라는 걸 앞당겨 보여 주신 거예요. 누룩 없는 무교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성도에게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양 예수의 희생, 그 은혜의 필연성이 반복해서 되새겨지는 사건들로 그들의 인생이 채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의 유월절 정신이에요. 오늘 본문 7절과 8절이 그 말씀입니다.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 말은 우리 몸에는 여전히 죄의 잔재인 묵은 누룩이 남아있다는 뜻이에요.)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이 당시는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했거든요. 떡을 뗐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떡을 뗄 때마다 나 대신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되었음을 기억하라는 것이지요. 성찬은 그런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누룩 없는 자, 죄 없고 순결한 자로 지어지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매년 유월절을 지키듯이 우리도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나누는 성찬식을 하는 거예요. 성찬식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만 아닙니다. 그런 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그리스도의 말씀, 십자가 복음을 모일 때마다 나누는 것이 곧 예수를 나누는 것인데, 이게 진짜 성찬이에요.
이미 온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붙들려 있다니까요. 그 피가 아니면 이 온 우주는 이미 불태워지고 없는 거예요. 이것을 다른 말로 우주적인 성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만물, 온 우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두신 것이라고 시편 기자가 증언하고 있어요. 우주가 우연히 생겨서 우연히 우주의 법칙대로 운행되는 게 아니에요.
(시 19장)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하나님의 법대로 온 우주가 펼쳐져 있고 운행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말씀에 의해 그리고 예수의 주되심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성도를 이 땅에서 이 우주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성장시켜 주기 위해서, 다른 말로 배양하기 위해서 온 우주가 하나님의 법칙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일 때마다 말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누고, 그 나눔 안에서 우리도 그분이 가신 그 길 그 천성을 향해서 함께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함께 별세하는 그 길입니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이 신을 신고 허리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고 일어선 채 급히 유월절 떡과 고기를 먹고 떠나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먹고 말씀의 지팡이를 잡고 말씀의 띠를 띠고 급히 떠나야 할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죄악 된 세상을 뒤로 하고 천성을 향해서,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그곳을 향해서 먼 여정을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그들의 육이 죽고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새 몸을 입은 자들, 다시 말하면 2세대가 예수(여호수아)를 앞세우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단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를 앞세우고,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예수 이름으로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계시하신 유월절과 무교절, 오순절, 초막절과 같은 모든 절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추수하실 성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절기를 조금만 더 살펴보고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과 연결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레 23장)
15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16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17 너희의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18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를 드리되 이것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 제물과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로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19 또 숫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 년 된 어린 숫양 두 마리를 화목제물로 드릴 것이요
20 제사장은 그 첫 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마리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서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이니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21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유월절 다음날부터 칠일간이 무교절이에요. 그리고 무교절 중간에 첫 이삭을 드리는 날이 있는데, 그게 유월절 이후 첫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신약에 나오는 안식 후 첫날이죠. 감이 잡히는 분들이 있을 텐데, 이스라엘은 그날에 첫 이삭을 요제(흔들어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묻혀 죽고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백성의 첫 열매가 되신 그 언약의 죽음과 부활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거예요.
그 첫 이삭 드리는 날부터 일곱 주가 지나고 일곱 번째 안식일 이튿날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오순절로 지키라고 하시죠. 오순절은 보리가 추수되는 때여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유월절이 어린양의 피로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출애굽의 시작이라면 오순절은 무엇을 기념하는 날입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오순절을 맞이하는데, 그 오순절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시내산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고, 산 밑에서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축제를 벌였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받은 그 날 산 밑에서는 그것으로 인해 하루에 삼천 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모세가 레위인들을 시켜서 축제를 벌인 자들을 칼로 도륙하게 했죠. 하나님이 친히 쓰신 돌판이 이 땅에 내려와서 깨어지게 되고 심판이 실행되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폭로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도저히 불가능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이미 세워놓으셨어요. 언제? 창세 전에. 어떻게?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렘 31:33)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이, 즉 계명이 자기 밖에 있으면 그게 심판이에요. 그런데 그 법이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와서 우리 마음에 새겨지면 그게 구원인 것입니다.
이렇게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해서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뚫고 들어와서 새겨지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열매로 그들이 추수되기 시작한 거예요. 그날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했어요. 똑같이 삼천 명입니다. 그날이 오순절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 세상과 구별된 어떤 무리, 제3의 인류가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그들에게는 하늘의 언어로 소통되는, 다시 말해서 바벨 사건으로 혼잡해졌던 그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통일되는 성령의 역사가 오순절 날 펼쳐진 거예요. 이것이 신약의 오순절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없던 것이 발생되었단 말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거룩해진 아들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들에 의해서 은혜의 복음이 선포됨으로 해서 실제로 오순절 날 삼천 명이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결실되는 추수가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구약에서 오순절 날에 처음 익은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 주신 겁니다. 제가 처음에 말하길 구약의 모든 절기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했는데, 이게 이제 연결되고 이해되실 거예요. 구약에 이런 것들을 기록해두신 이유 말입니다.
(행 2장)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베드로가 요엘서에 예언된 성령 강림의 사건이 오늘 여기에서 성취되었다고 하자 그날 바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의 광야에서 오순절에 하나님의 법이 땅에 내려오자 삼천 명이 하루아침에 도륙당한 사건이 벌어진 것과 대조적으로 이제는 지킬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온전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임하자 죄인들이 하나님께 추수되는 맥추절의 그 추수가 영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은 이런 구약의 계시와 또 그 계시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을 바탕으로 사도가 증거 하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는 사도 바울이 왜 예수인지, 왜 십자가인지를 구약의 사건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에 전하는 복음입니다. 6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복음이에요. 이 몇 구절의 말씀 안에 구약의 절기와 사건들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7절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제 이 말씀이 이해되실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묵은 누룩이 무엇인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또 본문 마지막 구절인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는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지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처음에 어떻게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옆에서 가자고 하니까 따라온 거예요? 모든 사람들은 자기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세상 교회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을 제공해주고, 또 많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들을 교육 시킵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건 그렇게 자기 목적과 교회의 목적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천,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고, 세상사람들은 교인이 그렇게 많은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다익선.. 세상은 많은 것이 선이고 큰 것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커진 것은 신의 축복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면을 들추어보면 사람들의 목적과 교회의 목적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시장 경제의 원리입니다.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는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그런 세상의 원리와 법칙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인간들의 목적에 맞추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와 십자가라는 복음, 그 약속에 의해 생겨나는 자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는 사람의 필요가 아니라 오직 약속에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렇게 수천, 수만이 모인 그곳으로부터 자기 사람들을 분리해내시는 것,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종교집단에서 자기 사람들을 분리해내실 때, 구별해내실 때, 그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주가 계심을 알게 되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참 신기하죠? 그것을 다른 말로 말씀의 사건으로의 교회가 발생된다고 합니다. 그냥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살다가 영원한 심판에 들어가도 아무 할 말 없는 죄인인데, 그들과 다름이 있고, 분리해냄과 구별해냄의 사건들이 있는 사람들을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합니다. 그들만 교회예요. 그러니까 나의 목적 때문에 교회를 찾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그렇게 분리되고 부르심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세상 교회들은 그런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아예 모든 장치들을 해놓고 가두어버립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예 예수와 십자가라는 복음이 교회 안에 전파되지 않도록 다른 복음, 다른 예수로 가두어놓고 있습니다. 진짜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 교회가 갈라지는 일이 생길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교회들은 복음을 악세서리나 양념 정도로 생각하고 모인 사람들이 원하고 찾는 것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 위해서 모든 조직과 프로그램을 가동시킵니다. 마치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은 모세가 늦게 내려오자 사람들이 산 밑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신을 만들어서 축제를 벌였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음행이라고 합니다. 이런 음행, 우상 숭배가 이천 년 내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누룩을 세상 교회들이 발효시켜 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 수천 수만개의 신주단지를 모셔놓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와 세상과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라져버렸어요. 한 마디로 교회가 곧 세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세상이 좋아하고 가치라고 여기는 것을 교회도 똑같이 좇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든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해줄 수 있는 더 힘 있는 신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들이 소위 말하는 기복주의 신비주의 다원주의 그런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인본주의에요
그러니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것을 보고 부흥이라고 하면 안 돼요. 진짜 부흥은 그런 세상적인 정욕과 탐심, 나는 예수를 믿어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꼭 이루고 말 거라는 생각,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예수 믿어서 반드시 천국 가야겠다는 영생불멸의 탐심, 그들 속에 들어있는 그 묵은 누룩을 잘라버리고, 제거해버리고, 쫓아내어 버리고, 심판해버리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한사람이 남는 일이 있어도 그렇게 자기 목적을 가지고 교회 온 사람들에게 아니요를 할 수 있어야 말씀이 있는 교회란 말입니다. 하박국서에 나오는 부흥이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 모셔놓은 수천, 수만 개의 신주단지들 다 깨부수고, 그렇게 자기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찾는 수만의 사람들을 내어쫓는 것을 부흥이라고 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의에 찬 누룩이 바로 그런 거예요. 에덴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악과의 DNA, 나 중심의 선악 체계, 내가 잘되고 내가 커지고 내가 행복한 게 선이라고 하는 그것, 내가 구원받는 게 선이라는 그런 누룩을 내버리고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만 찬송하고 높이는 사람들만 남게 되는 교회가 바로 부흥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교회에 관심 없으십니다. 수천, 수만이 모여도 어린양의 피가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끼리 부흥을 하든, 건강한 교회를 하든, 개혁을 하든, 세상을 변화시키든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들의 피 뿌림이 있는 아들들만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들을 위해서 온 우주, 하늘과 땅과 별들이 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 중 마지막 한 사람의 목이 베어져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되는 날에 드디어 이 모든 우주는 불살라질 거예요. 하늘이 큰 소리를 내면서 떠나가고 모든 땅이 다 풀어진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거룩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에만 관심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속성, 그런 아름다움, 하늘에서 영원히 살만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위해서 지금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새창조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오늘 본문 고린도 전후서와 같은 장문의 편지를 쓴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세상 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가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를 하라고 주신 말씀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고린도 전후서 뿐 아니라 모든 성경을 보는 관점을 바꿔야 해요. 그리고 이 눈을 바꿔주시는 분이 성령이에요. 성령의 조명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한글 성경을 읽어도 겉으로 드러난 문자가 아니라, 문자 층 밑에 감추어져 있는 진리의 층을 읽게 해주는 눈이 바뀐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디를 읽어도 예수와 십자가로 읽을 수 있게 눈이 바뀌어야 해요. 예수님도 그러셨잖아요 니들 그 눈 빼고 지옥 안 가는 게 낫다고..이 말은 너희들의 어떤 노력도 어떤 성경 연구도 진리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진리의 영이 임한 자에게만 성경은 진리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음행하는 일, 파당 짓는 일, 서로 송사하는 일, 빈부 격차의 문제, 결혼문제 등을 가르치기 위해 바울이 편지를 쓴 게 아닌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과 같을 게 아닙니까? 그게 아까 말한 대로 교회의 거룩입니다. 세상과의 구별됨입니다. 너희는 원래 누룩 없는 자니까 그런 것에 속지 마.. 내가 너희 안에 새 사람을 지을 거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도록 내가 지금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할 거야..
그렇게 여러분 안에 있는 묵은 누룩이 발효해서 퍼지지 않도록, 교회 안에 그 누룩이 퍼지지 않도록 그 누룩의 정체를 수시로 폭로당하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성도는 자신으로부터 희생 당하신 어린 양에게로 눈이 들리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사도가 묻고 있는 거에요.
이 고린도 교회의 일들이 특별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함께하시는,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반드시 이런 음행과 모든 부정하고 더러운 일들 별의별 사건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냥 감추어두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폭로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의 괴수됨,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동일한 고백이 나오도록 주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게 성령이 다스리시는 교회예요. 그러나 스스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 잘 믿고 교회 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종교인들, 자기는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남은 것은 구원의 확신과 하늘의 상급뿐이라는 자들이 오늘날 대한 예수교 교인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지막 로마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자기 자신에게는 어떤 구원의 근거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곧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자랑한다고 했어요 (딤전1:15-16) 그렇게 갈라지는 거예요. 이게 종교인과 성도의 차이입니다.
세상 종교인들처럼 자기 선택으로 교회 나와서 입교하고 세례받고 직분 받고 평생 동안 점차 거룩해져서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평생 읽어도 사도 바울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 한 줄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속고, 교회에 속고, 목사에게 속아서 평생 종교 생활을 하다가 지옥 가게 됩니다. 이게 마귀의 권세이며 주께서 내어버려 두심이에요. 마귀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가리는 일을 본업으로 합니다. 스스로 예수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지옥 데려가는 것입니다. 교회 밖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그나마 예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하는 데서만 복음의 광채를 가리면 되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의 광채 앞에 발가벗겨져서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을 알게 된 자들, 살맛 나지 않을 정도로 체휼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받고있는 성도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편지를 쓴 거예요. 왜 유월절 어린양의 피인지, 왜 십자가 은혜인지 그들만 알아듣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는데, 그게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묵은 누룩이 발효해서 퍼지지 않도록 그 누룩의 정체를 수시로 폭로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폭로를 당하는 자마다 주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은혜만을 꼭 붙들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안 되겠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깨끗하게 할 힘과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주님의 피로 저를 날마다 씻어주세요.’.. 성경은 이런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이 있고 이런 무릎 꿇음이 있는 상태가 거룩이며 하나님게 영광이라고 하는 거에요. 고린도라는 음란한 도시의 문화와 종교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동일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또 우리 안에도 그 누룩이 동일한 죄성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발효될 수 있는 그것이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언제나 말씀의 사건들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구별해놓으셨습니다. 피뿌림이 있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구분해놓으시고, 너희는 처음부터 죄와 상관없는 자들로 이 세상으로 차례 차례 보내셨어요. 우리의 거룩이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섬김인지를 배우고 오라고, 그 피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인지를 알고 오라고 이미 죄와 상관없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어떤 죄도 보지 않으십니다. 어떤 악한 행위도 아들의 신분을 취소하는 근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와 뱀까지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우리로 알게 하시려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롬 14장)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나는 내 것이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면 존재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망 권세를 다 이기고 부활하신 주가 계십니다. 그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강이다.. 내가 다 이루었다.. 너희들의 죄 문제, 죽음의 문제까지도 내가 해결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샬롬. 이제 너희와 하나님 사이에 그 어떤 벽도 어떤 장막도 어떤 장애물도 없는 거야.. 나와 함께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이게 아가서잖아요.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서신서에 등장하는 교회들은 모두 우리를 위해서 불려 나온 시범 조교들입니다. 세상은 고린도 교회의 사건들을 보면서 나쁜 놈들, 음란한 놈들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그들의 음행과 탐심 누룩이 우리 안에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런 사건들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 종교인들의 차이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의 사건 앞에서 세상 종교인들은 법을 내세우거나 여러 가지 종교 행위를 발휘해서 자신을 온갖 더러운 것들로부터 스스로 깨끗이 하려고 노력하죠. 거기에 동원되는 게 교회가 생산한 각종 종교 기술들, 신학들, 회개, 금욕, 고행, 헌금, 철야 기도, 성경 공부, 성경 필사, 길거리 전도, 밥 퍼주기, 구제 등 이천 년간 교회가 생산해낸 온갖 종교 기법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셀프 거룩을 이루어내겠다, 천국 가기에 합당한 나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인간들이 어떤 종교 기술을 다 동원한다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거룩을 만들수 없습니다. 거룩은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말씀 맡은 자들이 욕을 먹습니다.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받습니다.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이 바로 이거예요. 인간은 자기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면 참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도 못 참습니다. 그런데 안 보이는 하나님을 죽일 수 없으니까 동생 아벨을 죽인 거예요. 예수님이 왜 살해당하셨습니까? 경건하다고 하는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제사장들이 왜 합심해서 예수를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너희들은 이스라엘이 아니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전 제사 날마다 지내고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하고 온갖 율법 행위를 다 내어놓아도 그것으로 영생 없어.. 영생은 나에게 있는 거야.. 하늘로부터 온 나를 모르면 너희 죄 가운데 죽는다.. 한마디로 니들이 제사지내고 십일조 하고 안식일 지키는 거 그게 죄라는 겁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가 그걸 모르는 거에요 그래서 평생 교회 다니고 지옥갑니다.
심판의 기준은 다른 데 있지 않아요. 착하지 않아서 심판받는 게 아니고, 죄 많이 지어서 심판받는 게 아니고, 예수를 몰라서 심판받습니다.
(고전 16장)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게 저주의 기준이에요. 그럼 주를 사랑하면 되겠네 하는 분 있을지 모르겠는데..교회에서도 그런 찬송 하지요 두손 높이 들고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어쩌고... 그게 주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건 다 자기사랑의 다른 면일 뿐입니다 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이 먼저 부어지면 자신의 죽은 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마중물처럼 부어진 그 사랑으로 인해 비로소 주님에 대해 눈이 열리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귐이 있게 되는 거에요. 그 사귐이 있는자만 자기를 부인하고 주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종교인들은 그분이 누구신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구원과 내 행복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어내려고 합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탐심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세상 종교인들과 다른 점은 이땅을 다녀가신 그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과 그분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일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요 당신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그 죄의 근원에 대해 알고 다시는 그 선악과에 손대지 않는 자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들,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종교인들과 다른 게 바로 그거예요. 나의 불가능, 나의 전적 죄인 됨, 나의 전적 부패,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거짓과 악함, 나에게는 조그마한 선도 의도 찾아볼 수 없음을 아는 성령의 비추심과 성령의 책망을 들을 수 있는 것에서 성도는 세상과 다른 현실을 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 안에 있는 새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만 모든 세상과 역사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이 그 말씀이에요.
그래서 고난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살맛 없는 인생이죠. 인생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계획했던 것들이 내 능력에 의해서 착착 다 이루어져서 그 결과물을 내 손에 넣었을 때입니다. 소위 세상이 말하는 성공한 인생이죠.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막으십니다. 있는 능력까지 빼앗으십니다. 우리의 눈과 관심을 나와 세상으로부터 위로 들리게 하시기 위해서, 주 예수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 되게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성도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성공이에요
이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 아들의 죽음, 그 십자가라는 흔적을 지우고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덮어버렸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분이 이 땅에서 흘리신 그 피만 생명이고 그 피가 진리임을 평생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 흔적을 답습하면서 살게 됩니다. 왜 피가 아니면 안되는지를 처절하게 고백하는 삶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거예요. 바울이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어서 그랬겠습니까 바울 자신에게선 죄만 나오는 그 몸, 그 사망의 몸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거에요 그래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까 라는 탄식과 함께 내게는 그 피의 용서가 주어졌다는 그 현실을 알게 되면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영적현실에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의 은혜의 필연성을 항상 체험하고 고백하면서 모일 때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교회로 이 세상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세상은 몰라요. 아니 몰라야 되요 그렇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세상에 없어도 되는, 마치 쓰레기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로사신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들만 산자에요, 죽은 세상에 산 성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예수 믿어서 챙기게 되는 대가도 보람도 없이 평생을 마치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십자가 사랑의 크기와 높이와 깊이를 더 알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늘적 존재로서 세상에 감추어진 여러분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여러분들의 세상살이는 아프고 힘들 거예요. 맨 먼저 여러분 안에 있는 누룩,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옛사람과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삶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아도 내 안에 있는 옛사람과의 치열한 싸움에 날마다 죽어 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날마다 죽어 나가는 인생이 고난입니다. 바울이 부활장이라 하는 고전15장에서 그랬잖아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게 부활의 생명 안에 있는 성도의 고백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잔재, 13절의 죄로 오염된 악한 자를 쫓아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건들이 우리 인생에 늘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러분 인생에 준비되어 있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을 때 감사하시면 되는 거에요. 그렇게 털리고 비워지는 만큼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채워지니까. 그렇게 온전히 채워졌을 때 여러분은 에녹처럼 세상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에녹이 하나님 안으로 사라진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지는 그 날이 곧 올 겁니다.
그렇게 주께서 흔들고 털어내시는 사건들이 있을 때 우리는 나로부터 십자가 위에 계신 분에게 눈이 들리고 그분 이름 앞에 온전히 무릎 꿇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어지는 하늘 소망으로 우리는 마침내 찬송할 수 있습니다. 찬송은 원래 세상에 없는 거에요. 주를 기다리는 자들, 주를 바라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찬송이에요.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찬송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떠나지 않는 주님의 손길과 다스림 속에서 저와 여러분은 모든 악한 것들이 쫓겨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 새 피조물로서 새로운 날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끔 한 번씩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을 거예요. 내 안에 지으신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자라고 있구나..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새피조물로서 여러분이에요. 새로 지음을 받은 진짜 나입니다. 오직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묵은 누룩이 없는 새 덩어리로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러분, 이미 하늘에 완성된 거룩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이미 완성된 교회이기 때문에 이 악한 세상까지 섬길 수 있는 교회이고, 세상 죄로 인해서 함께 고통받는 교회이며, 그 세상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는 먼저 여러분 안에 있는 악을 쫓아내는 사건들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런 일로 인해서 여러분이 깨끗해지는 게 아니라, 이미 깨끗한 아들들이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의 손길에 다스려지고 하늘과 연결되어있는 놀라운 존재들입니다. 엄청난 존재란 말이에요. 성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이 그런 거에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이 다녀가신 이 세상의 빈자리를 여러분들이 대신해서 그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그의 몸 된 교회이면서 또한 이 어둠의 세상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잠시 세상에 남겨진 교회입니다. 천사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여러분에게는 주의 영이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에 취하지 않도록 여러분이 가는 모든 길에 동행하시면서 지켜주실 거예요. 그 길은 생명 길이요 하늘 가는 밝은 길이기에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찬송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도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져 있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잠시 사는 우리 인생 동안 왜 십자가인지, 왜 그 피에만 생명이 있고 그 피로만 우리가 존재일 수 있는지, 그 놀라운 은혜를 가르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은혜 앞에 면목 없이 입을 가리고 두 손 높이 들어 그 이름을 경배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남은 날도 주께서 인도하시고 말씀으로 먹이시며 또 세상을 향해 정직하고 담대하게 주의 이름을 증거 하는 참되고 복된 교회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악한 영과의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는 복음의 군사들로 자라나게 하여 주옵소서.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이 그 사랑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