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린도전서 6:1-11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3절에 보면 우리가 천사를 판단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천사를 판단해 보신 분 있습니까?
이게 무슨 말일까요? 5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음란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6장에서는 갑자기 송사, 즉 재판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모두 사도가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꺼내는 말입니다. 천사를 판단한다.. 세상을 판단한다....마찬가지에요
오늘 설교 제목이 ‘누구의 몸인가’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성도는 누구의 몸인가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세상 교회에서는 이런 본문으로 교인들끼리 송사하지 말라고 가르치지요. 그런데 본문은 그런 이야기 정도가 아닙니다. 또 송사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막상 교회 지들은 재판 많이 하잖아요. 걸핏하면 교회 재산 문제 목사 문제로 재판하죠.
오늘 본문 내용이 세상 법정에서 재판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그런 뜻일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은 윤리도덕이나 세상 질서, 준법정신, 모범적인 교회 되기 그런 거 가르치는 교훈집이 아닙니다. 그럼 사도는 왜 교인들의 송사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지 사도의 그 진의를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 재판을 구하는 사건이 몇 군데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과 요한복음 7장에 그 기록이 있는데, 이런 예수님의 판결을 구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 재판과 예수님의 판결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면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왜 송사 문제를 거론했는지 그 진의를 알 수 있게 되겠지요.
먼저 누가복음 12장에 기록된 유산 분배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판결을 보겠습니다.
(눅 12장)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자 이런 유산 문제가 만일 교회 안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나라 민법에 보면 고인의 유산 절반은 배우자에게 갑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들딸 구별 없이 1/N로 나누게 되는데, 며칠 전에 헌법재판소에서 유류분에 대해서 새로운 판결을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부모를 모시건 안 모시건, 찾아뵙든 아니하든 간에 유류분이라고 해서 형제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주게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위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효도하는 자식과 불효하는 자식에 따라서 분배가 달라집니다. 법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그럼, 교회도 그렇게 법대로 판결하면 될까요? 그런 것을 위해서 사도 바울이 이것을 썼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잖아요. 세상 법정에 가지 말라는 것은 교회가 대신해서 판결하라는 것인데,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교회란 무엇인가?’, 즉 ‘성도는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 종말을 외치는 자들이고 종말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교회가 나타났다는 것, 성도가 나타났다는 말은 이 세상은 이제 끝이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약속을 다 이룬 후에 아버지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셨잖아요. 그 성령이 오셔야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은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해서 증거 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교회,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달라야 합니다. 뭐가 달라야 할까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해요. 세상은 이제 끝났다는 시각입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세상이 드디어 종말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성령 받은 사도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성도예요. 그렇게 성도가 보는 세상은 일반 세상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달라야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재산 문제를 세상 법정에 가져가서 송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바울이 6장에서 갑자기 재판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런 재판 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재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너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펴보라는 거예요. 너희의 몸이 누구의 몸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재판 이야기를 하다가 9절에서 갑자기 ‘하나님 나라’가 나옵니다. 과연 너희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맞는지를 먼저 살펴보라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만 갈 수 있어요.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지체들, 즉 집단적 구원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가 어떻게 재산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재판할 수 있느냐는 건데, 그러니까 너희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냐는 거예요. 예수님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판단하는 게 성령 받은 사도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성령을 받은 성도 여러분도 바울과 같은 눈과 사고로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산 분배 문제로 찾아온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 재산이나 나누어주는 재판장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한데, 너에게 그 생명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유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 재산이 너에게 생명을 줄 수 없어.. 너는 진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야.. 지금과 같은 눈 그대로 보고 그대로 살면 지옥 가게 돼..
성경은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사람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아닌 사람들은 몰라야 정상이에요.
(마 6장)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재물은 맘몬입니다.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신이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지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정작 너희들이 섬기는 게 뭐냐는 것이고, 너희들이 보는 게 뭐냐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사도 바울과 같은 눈이냐, 아니면 재산에만 꽂힌 눈이냐는 겁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어리석은 자여 지금 네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유산을 공평하게 나눠주었더라면 그 억울한 마음은 풀렸을 거예요. 소위 말하는 세상 정의가 실현된 것이죠. 그런데, 만약 그리하셨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어떤 예수로 알고 평생을 살겠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참 정의로운 재판관’으로 오해하겠죠. 당시 유대인의 유산 상속 관습대로 동생이 차지할 몫을 차지하도록 해주는 게 정의로운 재판관이니까 그 사람도 그런 결과를 기대하고 훌륭한 랍비이신 예수님을 찾아왔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유산 문제로 찾아온 사람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 생명에 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에는 없는 생명이죠.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단다...
그러니까 지금 유산 문제로 찾아온 사람과 예수님의 말씀 사이에는 접점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층이 달라요. 예수님은 지금 다른 현실을 이야기하시는 것이고, 이 사람은 세상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형이 다 받은 유산을 나누어 받을 것인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유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으로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경계가 있습니다. 공유할 부분이 없어요.
(요 8장)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면 화들짝 놀랐을 겁니다. 놀란 정도가 아니라 분노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기준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었어요. 제사 잘 지내고 안식일 잘 지키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 여겼어요. 그런데 나이 서른 정도의 젊은 청년이 나타나서 너희가 나를 모르고 나를 믿지 않으면 모두 심판이라고 하니 믿어지겠습니까?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길 내가 하늘에서 왔고 나를 섬기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구원이 없다고 하면 이단 교주 하나 났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이 말하길 ‘참람하다’고 했어요. 예수 네가 감히 하나님을 참칭하다니..라고 했단 말입니다.
유산 문제로 찾아온 이 사람도 당시 랍비들이 유대 율법이나 조상의 관습대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른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사회정의가 아닌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여러분, 목숨과 생명의 차이를 압니까? 목숨은 우리가 숨 쉬고 생활하는 이 몸, 부모에게서 물려받고 아담에게서 태어난 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명은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적인 존재로 영원토록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목숨과 생명은 전혀 다른 것이죠.
예수님은 지금 유산 문제로 찾아온 사람 안에 들어있는 것을 그대로 폭로시키시는데, 그게 바로 탐심입니다. 네 속에 있는 건 생명이 아니라 탐심이라는 겁니다. 로마서에서 탐심은 죄, 우상 숭배라고 하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돈이고 유산이고 세상 힘인데, 성경은 자기를 위해 이런 것을 확보하려는 것을 두고 우상 숭배라고 하고 탐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사람 안에 있는 탐심을 보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유산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본문에서 똑같은 말을 합니다. 세상 힘을 확보하려고, 나의 옳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세상 법정에 설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는 생명이 뭔지 아니?.. 너희 몸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란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한 몸 된 지체야.. 너희에게는 세상에 없는 생명,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생명이 있단다.. 그런데 왜 그것을 모르고 재판이나 하고 그러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교회 형제들끼리는 재판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 몸이 누구의 몸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해요.
사도의 모든 서신서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 주신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생명에 대해서 너무 자주 잊고 무시하면서 삽니다. 어쩌면 이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 생명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공짜로 누리고 있습니다. 당장 없으면 안되는 공기와 물 그리고 영원한 생명 진짜 소중한 것들은 하나님이 공짜로 주십니다. 만유인력이 없으면 우리가 땅에 서 있지 못하죠.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법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자기 사람들, 자기 성도들을 위해서죠.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요. 그래서 고린조전서에는 성령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같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의 피를 흘리시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신 생명이 있어요. 사도 바울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생명의 가치를 모르고 쓸데없이 세상 법정에서 재판이나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쉽게 말하면 생존의 문제가 아닌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생존은 우리 목숨을 유지하는 것을 말하죠. 그런데 생명은 하늘적인 존재로 영원을 함께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9절에 하나님 나라가 등장해요. 재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 나라가 나오잖아요. 이제 그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아시겠죠? 이런 것들을 세상 교회가 제대로 보지 못하니까 이 본문을 두고 기껏해야 교인들은 서로 재판하면 안 된다는 말 밖에 못하는 거예요. 자기들은 그러면서 말입니다. 신문에 자주 나오잖아요. 부동산 문제로 재판 가고, 교회가 나뉘면 재산 문제로 가고, 목사 세습 문제로 법정에 가곤 하죠. 만약 이런 문제를 예수님 앞에 가지고 간다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너희들이 하는 그게 탐심이야.. 생명 없는 죽은 자들아, 생명과 상관없는 자들이 겉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고 교회라고 하면서 실제는 맘몬을 섬기고 있구나..
그래서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부자의 비유입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참 허망한 이야기예요. 그렇게 머리 터져라 돈 벌고 재산 모으고 하는 게 참 웃기는 이야기거든요. 내가 아는 사람은 돈이 엄청 많았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백화점 한 번 안 가고 서문시장 가서 싼 옷한벌 사 입고 왔다더라고요. 그러니까 돈 자체가 신이에요. 그 권세 아래서 우리는 스스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크 엘룰이 그랬나요 돈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돈을 그냥 버리는 것이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 보는 눈이 세상과 달라야 해요. 세상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생명을 주지 못함을 알아야 한단 말이에요. 세상 우물은 아무리 퍼마셔도 계속 목이 말라요. 만족이 없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거예요. 유산 분배 문제로 찾아온 사람과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지금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지금 너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야.. 그 생명은 돈으로, 재물로,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생명은 내가 주는 거야.. 내가 그 생명을 주기 위해서 왔단다.. 그런데 너희들은 나에게서 생명에 관한 관심은 없고, 기껏 재산 분배나 해달라고 하는 구나..
사도 바울도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겁니다. 이 한심한 사람들아, 너희가 교회라고 하면서 같은 교인들끼리 세상 법정에 가서 재판이나 하고 있느냐.. 너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한다 그말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아주 이질적인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보시는 눈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의탁하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을 다 아시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면 세상이나 세상 사람을 대하고 판단하는 눈이 달라야 할 것 아닙니까? 세상에는 기대할 게 없는 거예요. 세상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세상은 어둠이고 생명이 없는 죽은 세상이었습니다. 그 죽은 세상에 유일하게 생명 있는 분이 오셨고, 세상은 생명 있는 그분을 살해해서 세상 밖으로 추방해버릴 만큼 악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원 전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이제 이 세상은 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그때부터가 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좀 전에 제가 말했듯이 교회가 세상에 생겨난 것,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에게만 이 세상의 실체가 보인다니까요. 저는 아침에 신문을 읽으면서 기사 밑에 숨은 것들을 찾아 읽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속살,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해요. 성도는 세상 끝을 아는 사람이고, 세상 끝을 사는 사람이에요. 그들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교회예요.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가 그 교회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요. ‘예수교’ 앞에 ‘대한’이 왜 붙습니까? 대한예수교? 그런 예수교는 없어요.
그렇게 죽은 세상에서 산 성도들이 여러분이에요. 한 마디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생명을 아는 것 맞아?.. 너희에게 생명이 있어?..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야?.. 그런데 어떻게 세상 문제로 너희들끼리 재판을 하지?..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불의를 행하는 거야.. 그리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해..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도는 지금 예수님과 똑같은 판단과 말씀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아, 교회야, 너희들은 세상과 다른 현실을 살아야 하고, 세상과 다른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해.. 너희의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란다.. 너희에게는 주가 계시다..
우린 인생에 주가 계신단 말이에요. 우리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인생을 살게 하시는 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요.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천국 간 사람의 실명을 언급하신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죠. 평생을 거지로 산 그이지만, 그에게는 그 삶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부잣집에서 던져주는 것을 먹고 살게 하셨어요. 그에게는 주가 계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사람들끼리 서로 비교하지 않아야 해요. 비교할 필요가 없어요. 주가 계시고, 주님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말하길 너희에게는 주가 계시고 너희의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야..
(고전 6장)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알 때 우리에게는 세상에 없는 평강이 있습니다. 그분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평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의 끝이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로 끝이 나는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는 고린도전서 1장 2절의 말씀처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낸 말씀이에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보낸 편지란 말이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보낸 편지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자기들끼리 세상 법정에서 재판하고,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어서 패싸움을 하고, 아비의 첩을 취하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고린도 교회 한 단어로 표현하면 ‘개판’입니다. 개판 맞잖아요. 당시 초대교회는 개인 집에 모였어요. 그래서 많이 모여봤자 이삼십 명입니다. 고대 문헌을 보면 고린도 교회가 그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 소수의 사람 사이에서 온갖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이게 세상 교회예요. 세상 속 교회가 이렇다는 것을 미리 표본적으로 보여준 거예요. 이런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로 사도 바울의 편지가 시작됩니다.
이런 사도의 편지를 오해해서 교회들이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친 대로 잘 따라 해서 건강한 교회, 세상에 모범이 되는 교회를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세상 교회가 설교를 그런 식으로 해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끼리 송사하면 안 돼.. 교회에서는 파당 만들면 안 돼.. 똑바로 살아야 돼.. 니들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 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정도의 가르침은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더 깨끗하고 더 열심이고 더 잘합니다.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거룩하고 이미 예수 안에서 하늘로 옮겨진 자들에게 너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게 사도의 서신서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서신서를 보면 놀랍게도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런 명령어들이 많아요. 구약의 시대가 지나고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건만, 왜 또다시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은 것인지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성도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말입니다. 너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는 이런 곳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그런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들로 만들고 말 거라는 하나님의 선언이에요.
이것을 오해해서 말씀대로 열심히 지키라고 하죠. 대부분 그래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청교도쪽 사람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오해하기 딱 좋을 만큼 전했어요. 그게 ‘하라’와 ‘하지 말라’입니다. 진짜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면서 다른 종교와 똑같이 ‘하라’와 ‘하지 말라’에 갇혀버린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에요.
교회가 무슨 법이 그렇게 많습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했는데, 예수 믿고 나서 자유가 오히려 더 없습니다. 제가 젊을 때는 주일에 버스도 안 타고 짜장면도 사 먹지 않았어요. 재건파 에서는 전기를 안 켰대요.. 전기를 켜게 되면 한전 사람들이 그날 일해야 한다고... 보수 정도가 아니라 정말 교조적이었어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고생스럽습니다. 고생을 스스로 사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죠. 주일 성수 해라, 십일조 해라, 착하게 살아라 이건 되고 이건 안 된다 등 엄청나게 많아요. 이스라엘이 그랬지요. 모세가 받은 율법을 613개로 세분화했어요. 이게 바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종교인이에요. 그래서 무신론자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에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인이에요. 몸 안에 아담의 DNA가 있어요. ‘하나님처럼’의 DNA에요. 선악과 먹고 생명 나무에 손을 뻗치는 탐심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지금 ‘너희 자신이 누구냐’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가 누구냐’를 다시 확인시켜주고자 편지를 쓰고 있어요. 그리고 이 편지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 즉 오늘 여러분에게 쓴 편지입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그런 탐심, 오래된 누룩이 감추어져 있으니까 그런 것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과 함께 멸망 당할 자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게 모두 완료형이거든요. 이런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 세상 법정에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설명을 알아듣기 쉽도록 부연해서 다시 설명해주고 있는 게 12절부터입니다. 이걸 한마디로 정의하면 ‘너희 몸은 누구의 것이냐?’예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된 너희가 어떻게 너희 몸이 자기의 것인 양 세상적인 것으로 다툼이냐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어떻게 네 인생을, 네 몸을 네가 책임지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너희에게는 주가 계시지 않느냐!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만물이 다 너희 것이고, 너희는 다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진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재판이나 하고 있느냐.. 너희는 이미 세상을 별세하고 하늘로 옮겨진 자들이야.. 세상 밖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너희란다..
천사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너희가.. 마귀도 천사입니다. 악한 천사예요. 그 악한 천사도 성도에게 판단 받는단 말이에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있고 말씀이 있기 때문이에요. 말씀에 판단을 받는 자들이 천사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들보다 훨씬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셨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들의 피가 있어요. 그래서 히브리서를 보면 천사들도 성도들을 살펴보기를 원한다고 하죠. 천사들에게는 그 피가 없고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죽음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천사들은 몰라요. 그런데 우리는 알잖아요. 그런 너희가 어떻게 그런 사소한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재판하느냐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재판을 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사도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너희 속에 있는 그 피, 그 생명, 그 사랑을 제발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진리의 세계, 성령의 세계는 세상과 다른 세계예요. 여러분은 그 다른 세계를 지금 살고 있어요. 성도는 묵시(그리스도 안, 성령 안)와 역사를 겹쳐서 살아요. 그래서 힘듭니다. 우울증 공황장애도 있는 게 정상이에요. 미치지 않는 게 다행인 겁니다. 분명히 다른 현실이 있는데, 내가 이 몸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는 현실이 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는 특별한 고난이 없어도 살아 숨쉬는 것 자체가 고난이에요.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각별한 돌보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취하지 않도록, 음녀의 섞은 술에 취하지 않고 깨어있을 수 있도록 주께서는 우리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별세의 사건들을 준비해두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세상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이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도 나눌 수도 없잖아요. 복음은 교회에서만 통용되는 하늘의 언어예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얘기해도 알아듣지 못해요.
(히 10장)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라고요?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엄청난 거예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잖아요. 그래서 거룩하지 아니한 자들을 돌격해서 진멸해버리세요. 조그마한 흠이나 더러움이나 죄만 있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해요. 구약을 보면 대속죄일에 제사장이 지성소에 짐승의 피를 들고 갔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하지 않으면 바로 죽었어요. 그래서 대제사장은 성소에 방울을 달고 들어갔어요. 그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은 거예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겁니까? 우리도 똑같이 피를 들고 가는 거예요. 예수의 피입니다. 그 몸(휘장)을 찢어서 피를 흘리신 그 예수의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더러움이나 죄가 있어도 예수의 피를 보고, 예수 피로 깨끗이 빤 흰 세마포 옷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된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모일 때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한 성도 그리스도의 지체됨을 서로 확인하면서 은혜의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말씀을 나눈다는 건 그런 거예요. ‘그렇지. 나는 우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그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이 있지.’..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이름은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다 작은 예수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니까요. 계시록에 나오잖아요. 여러분들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거예요. 그런 사실, 그런 진짜 현실을 서로 확인하고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모임이 바로 교회예요.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지막이 가까워 오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집에서 컴퓨터로 혼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을 거니까 가나안 신자들...그런데 성도는 반드시 모이게 되어 있어요. 핏줄이 서로 끌어당긴다니까요. 그거 없이 혼자서 컴퓨터 틀어놓고 설교 듣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항상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에요. 누구에게도 죄인 됨을 폭로 당할 일이 없잖아요.
성도는 세상과의 경계, 주의 피로 경계 지어진 다른 세계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 경계를 넘어서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사람이야.. 아무리 세상을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할 수가 없어.. 세상이 너희들을 밀어낼거야 피 때문에.. 그 피가 거룩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나의 옳음과 나의 유익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 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세상 법에 의해서 손해를 보고 속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세상 것으로 손해 좀 보면 어떻고 내 자존심이 상하고 내 이름과 명예가 좀 깎이고 더러워지면 어떠냐는 말이에요. 우리에게는 세상에 없는 게 있으니까. 세상을 다 주고도 살 수 없는 생명이 있으니까, 예수 이름이 있으니까, 영원한 나라를 유산으로 받은 자들이니까. 우리 질그릇 속에 담아주신 보화가 있잖아요. 그렇게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후 4장)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보배를 잘 간직하고 지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우리 속에 담아주신 그것, 그 생명, 예수라는 이름, 그 보배, 그 진리만 오롯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이 질그릇은 얼마든지 깨어져도 괜찮습니다.
(고전 6장)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여러분은 소속이 달라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에 세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세상과 분리된 자로, 섞일 수 없는 자로 물과 기름처럼 살다가 갈 수밖에 없어요. 세상은 멸망 당할 세상이기 때문에 함께 멸망 당하지 않게 세상과 섞이지 않는 자로 살다가 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왕따 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게 되는 운명이고 팔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사랑받을 기대는 아예 하지 마세요. 세상에 내 이름을 남길 생각 하지 마세요.
(요 15장)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유니언 크라이스트라고 말은 잘하는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그 삶과의 연합은 살기 싫잖아요. 그런 왕따 당하는 인생 살기 싫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아요. 너희가 내게 속했으면 너희의 인생도 내가 산 인생과 같이 세상에게 버려질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미워하는 세상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까지도 포함한 세상이에요. 오죽하면 예수님이 그러셨겠어요. 너희 원수가 너희 가족이리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너희의 진짜 가족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 가족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가족이 설사 너희를 미워하고 너희와 같은 것을 나누지 못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게 성도의 팔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게 아니잖아요. 창세 전에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세상살이가 힘든 겁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용도로 있는 거에요
이렇게 예수님의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세상과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경계선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 있어요.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요. 같은 시간대를 살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말을 하지만 달라요. 성도는 묵시와 역사를 겹친 시간대를 살아요. 몸은 이 세상에 있는데 사는 시간은 확정된 미래로부터 오는 수직적인 시간이기 때문에 성도의 인생은 고난이에요.
성경은 그런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너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이미 앉히셨다고 합니다. 완료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출근하고 장사하고 돈 벌고 자식 키우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 일상적인 삶보다 더 진짜 현실이 있다는 거에요, 세상은 알지 못하는 다른 현실을 살게되는 사람이 성도란 말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세상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이라는 그 씨가 여러분 속에 심겨져 있기에 그게 발아하고 자라나서 하나님 나라처럼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날 여러분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에요. 아니 지금도 여러분은 세상에 있어도 없는 사람이에요. 세상에 감추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목숨과 상관없이 죽어도 안 죽는 사람들이에요. 이 세상에 감추어져 있다가 어느 날 보이지 않게 되는 사람들.. 그것을 성도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에녹이 그랬잖아요.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 안으로 사라졌는데, 그것을 두고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겼다고 해요. 여러분도 똑같아요. 여러분도 에녹이에요. 안 죽어요. 그냥 이 육신을 벗고 가는 거예요. 안 죽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로 완성되는 사람들, 여러분이 그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 여러분을 세상은 알 수도 없고, 더구나 세상은 여러분을 판단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세상이 몰라주고 세상에 좀 손해를 보더라도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당연한 것이니까요. 어차피 이 세상 것들은 다 좀먹고 녹슬고 도적에게 빼앗기는 것들이에요. 세상이 그렇잖아요. 서로 빼앗고 서로 도적질하는 게 세상이에요. 누구는 정글이라고 하더라고요. 문만 나서면 정글이라고. 약육강식의 세상이죠. 그러니까 그 세상에 얽매이지 말라는 겁니다. 갇히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이 합의해놓은 힘과 가치 그런 거 좀 무시하면서 사세요.
그런 세상 법칙 안에는 늘 자기 증명, 나의 옳음, 나의 행복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건 내 목숨이 끝나는 날 함께 끝나는 것들이에요. 우리가 그 나라에 갈 때는 이 세상 것 중에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알아요. 어떤 재벌 회장이 유언하길 내가 죽거든 내 빈손을 관 밖으로 내어놓으라고... 수천억, 수조 가지고 있으면 뭣합니까? 하나도 못 가져간다니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2)
성도는 그 소속이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시작도 끝도 세상과 달라요. 여러분의 존재는 우발적으로 생긴 게 아니에요. 부모님이 결혼해서 낳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음이 된 게 아니에요. 성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약속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영원 전 약속이 바로 여러분 존재의 근거예요.
그리고 그 약속이 실행된 확실한 근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아들의 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분은 절대 바뀔 수가 없어요. 아들의 피가 있기 때문에 취소될 수가 없어요. 이 모든 일은 이미 창세 전에 완료된 일이란 말에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대로 여러분은 마음을 세상 것에 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 생명의 근원 자체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약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도 그분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그렇다고 우리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속세를 떠나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닌 겁니다. 이 모두가 존재론적이며 창조론적인 이야기란 말입니다. 여러분의 시작도 끝도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로 예수로 완성되는 자들이 바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정된 아들들입니다. 그들에게만 생명이 있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예수 믿어서 영생을 얻는 게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가 저와 여러분의 주가 되심이 믿어진단 말이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한순간도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지 않은 적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구원의 확신은 역망적인 거예요. 역망이란 뒤돌아봄이에요. 세상에 태어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주님께서 침 삼킬 틈도 없이 우리를 보살피고 다스리시고 함께하셨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우리의 남은 날들도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 전의 약속, 그 완료된 묵시의 현실에 우리의 눈이 열리고, 또 그것만이 진짜 현실임을 이 세상 속에서 확인하기 위해서 오늘을 살고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이에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없는 소망이 주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망이 뭔지를 몰라요. 그들에게는 내일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을 분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희망이 아닌 소망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한 소망이에요.
(롬 8장)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 소망이 우리 안에서 날로 커져서 우리를 충만하게 채우는 날에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을 별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바울의 말이 그런 뜻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여러분을 별세시켜주기 위한 세상이에요.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도와주고 있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통해서 오늘 여러분에게 그것을 묻고 있어요. 이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너희가 어떻게 세상 재판관들에게 가서 정의를 구하고 있느냐? 불타 없어질 세상에 무엇을 기대하냐는 거지요
김성수 목사님의 ‘집으로 가자’라는 노래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아직도 세상을 그렇게 기대하나.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어둔 죄로 아파하지 않는 곳...’. 우리의 이 육신 대신 하나님이 새로 만들어주신 하늘에 속한 형상의 그 몸, 새 몸을 입고 영원을 살게 되는 그곳으로 가자는 거예요.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주가 계시고 하늘 아버지가 계시고 영원히 살 하늘 집이 있어요.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속지 마세요.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여러분은 이 땅에서부터 영원을 사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그날, 우리는 우리 주님과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올 거예요. 여러분이 새 예루살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남은 날들이 금방 지나가는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소망으로 그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